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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노동자의 철학 2 (1 MB)
노동자의 철학 2
민해철 지음
출판사 - 거름
초판일 - 1991-09-20
ISBN -
조회수 : 2279

● 목 차

이 책을 읽는 분들에게

제 III 부 사적 유물론

제1장 사회의 유물론적 해석 - 사적 유물론
제1절 사적유물론의 뜻 = 15
제2절 사적 유물론의 출발점 = 19
제3절 사회법칙과 인간의 의식적 활동 = 22
제2장 물질적 생산이 사회생활의 기초이다
제1절 물질적 생산과 사회발전 = 26
제2절 지리적 환경과 사회발전 = 29
제3절 생산양식(생산력과 생산관계) = 33
제3장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변증법
제1절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변증법 = 39
제2절 사회발전의 역사 = 42
원시공산제사회 = 42
노예제사회 = 46
봉건제사회 = 50
자본주의사회 = 55
제4장 사회의 토대와 상부구조
제1절 사회의 토대가 상부구조를 규정한다 = 61
제2절 상부구조의 능동적 역할 = 67
제5장 계급과 계급투쟁 및 국가
제1절 계급의 정의 및 그 역사적 존재형태 = 70
제2절 계급지배의 기관으로서의 국가 = 76
제3절 계급적 이익과 계급투쟁 및 정당 = 80
제6장 사회혁명
제1절 사회혁명은 역사의 합법칙적 필연이다 = 86
제2절 현대의 사회혁명 = 89
제3절 역사에 있어 대중과 개인의 역할 = 91

제IV부 사회적 존재와 사회적 의식

제1장 사회적 의식과 그 계급적 성격
제1절 사회적 의식의 계급적 성격 = 97
제2절 사회적 의식의 몇 가지 특성 = 103
제2장 사회적 의식의 여러 형태 = 108
제1절 정치적·법적 이데올로기 = 110
제2절 종교 = 118
제3절 과학 = 130
제4절 예술 = 140
제3장 노동자계급의 윤리
제1절 지배계급의 도덕 = 149
제2절 노동자계급 윤리의 진보성 = 163
제3절 조직과 투쟁의 윤리 = 172

맺음말 = 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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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역사는 어떻게 움직이는가? - 노동자의 철학 2/오연홍
모든 것은 변한다 - 인간의 역사도 그렇다. 노동자의 철학, 즉 유물변증법에 따르면 이 세계는 끊임없이 변한다. 정말이지 이 세계는 부단히 변해왔다. 인간의 역사를 돌이켜보자. 한때 인간은 제대로 옷도 걸치지 못한 채, 돌도끼와 창을 들고 들짐승을 사냥하며 살기도 했다. 사냥과 채집으로 먹고 살던 시대는 농사를 지어 먹고 사는 시대로 바뀌었다. 그리고 신분제가 번성했다. 똑같은 인간으로 태어났는데도, 어떤 사람들은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거드름을 피우며 하인들을 괴롭혔다. 그 다음 또 다시 시대가 바뀌었다. 왕이 지배하는 봉건체제가 무너지고, 민주주의 국가가 들어섰다. 그 과정에서 시민혁명이 일어나기도 했고, 제국주의 나라들의 식민지 지배와 독립운동, 세계대전 등 수많은 사건들이 터지면서 이 세계를 변화시켜 왔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변화가 우연한 돌발적 사건이나 특정인의 주관적 심리 같은 우연적 요인 때문에 일어난다고 설명한다. 가령 유태인을 미워하는 히틀러의 사악한 심보 때문에 2차 세계대전이 터졌다고 보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결국 역사의 변화에 대해 ‘그 원인을 알 수 없다’고 말하거나, 또는‘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히틀러의 사악한 심보 때문에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면, 도대체 히틀러가 태어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연이고, 당시 인류가 지독히도 운이 없었다는 설명 이외에 달리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아니면 그 모든 것이 ‘신의 놀라운 계획에 의한 것’이라고 말하거나.
그러나 우리는 노동자의 철학에서 배운 것이 있다. 모든 것은 변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 변화를 일으키는 원인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변하는 사물 자체에 있다는 것이다. 변하는 사물 자체에 객관적으로 포함되어 있는 대립물의 투쟁, 바로 그것이 변화의 원동력임을 우리는 확인했다. 인간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역사가 마구잡이로 바뀌는 게 아니다. 역사 발전에는 객관적 법칙이 있다. 따라서 역사의 흐름 속에 어떤 객관적 법칙이 있는지, 즉 어떤 대립물의 투쟁이 담겨 있는지 유물론의 관점에서 알아낼 수 있다면, 역사 발전의 원인과 더불어 이 역사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지, 그리고 역사의 변화 속에서 우리의 역할은 무엇이며, 더 나은 미래를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지금부터 이야기할 주제다.
왜 역사는 바뀌는가?
인간의 역사란 곧 노동의 역사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노동을 통해서 협동이 이루어지고, 사회적 관계가 발전하며, 그 사회관계를 표현하기 위한 언어 역시 발전하고, 노동의 결실을 늘리기 위한 기술 발전이 이루어졌다. 인간이 도구를 사용하고 개발, 개선하기 시작한 이래 노동의 능력, 생산력은 끊임없이 성장해 왔다. 돌도끼에서 쇠망치로, 간단한 기계에 의한 생산에서 컴퓨터시스템을 통한 자동화 생산으로, 풍차에서 증기기관으로, 증기기관에서 전기를 이용한 동력기와 더 나아가 원자력발전에 이르기까지. 이처럼 생산력이 발전하는 과정에 따라 생산관계, 즉 노동과정에서 인간들이 서로 맺는 경제적 관계도 변해 왔다.
돌도끼를 휘둘러 짐승을 잡던 시절에는 공동노동, 공동분배를 원칙으로 하는 원시공동체적 생산관계만이 가능했다. 그렇게 해야만 그나마 부족의 생계를 이어갈 수 있을 정도로 생산능력이 취약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농업혁명으로 생산력이 발전해 잉여생산물이 생기자, 이를 관리할 사람들이 필요해졌다. 이들은 농사와 관련된 제사를 관장하는 등 정신노동을 전담하면서 점차 지배계급이 됐다. 이들 지배계급 밑에서 전쟁 포로 등 많은 사람들이 노예가 되면서 고대 노예제가 만들어졌다. 노예제 생산관계는 원시공동체 생산관계에 비해 초기에는 생산력 발전에 기여했다. 하지만 노예들이
자신들에겐 족쇄일 뿐인 노동도구를 망가뜨리거나 노예반란을 일으킴에 따라 노예제 생산관계는 점점 더 생산력 발전에 걸림돌이 되었다. 그 결과 노예보다는 조금 더 자유를 얻게 된 농노들이 등장하면서 노예제 생산관계가 봉건제 생산관계로 바뀐다. 봉건제 생산관계는 토지소유주인 영주와 실제 노동을 담당하는 농노를 중심으로 형성된다. 이 봉건제 생산관계는 한동안 유지될 수 있었는데, 그러는 동안에도 생산력은 계속 발전했다. 그 결과 조금씩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생계를 유지하고도 남는 잉여생산물의 양이 늘어나고, 따라서 교환이 빈빈해졌으며, 시장과 상업이 발전하고 근대적인 도시들이 생겨났다. 상인들은 처음에는 단순한 중개자의 역할에 만족했지만, 그들의 수중에 쌓이는 부의 규모가 점차 증대하자 이제는 방식을 바꿔



있다. 생산력이란 사회의 유지와 발전에 필요한 재화를 만들어내는 능력이며, 노동수단의 발전 및 이와 연관된 노동력의 발전을 핵심으로 한다. 생산관계란 생산 및 교환, 분배에서 인간들이 맺는 물질적, 사회적 관계를 말한다. 생산력이 지속적으로 변화, 발전하는 성격을 주로 갖는다면, 상대적으로 생산관계는 일정한 기간 동안 고정된 형식을 취한다.

▲ 봉건제의 위계질서

▲ 1913년 포드에서 도입된 최초의 자동차 조립라인
직접 사람을 고용해 농작물 생산이나 수공업 생산을 시작했다. ‘자본가의 노동자 착취’가 핵심 특징인 자본주의 생산관계가 싹튼 것이다. 그리고 이 시점은 이제 점차 낡고 볼품없는 것으로 전락해가던 봉건질서와 새롭게 태어나기 시작한 자본주의 질서 사이의 투쟁이 시작된 시점이기도 하다. 도시의 시민들(원래 부르주아란 이 당시 도시의 시민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은 기존의 지배자들인 봉건영주들, 지주귀족들에게 도전장을 내던졌다.
구체제를 타도하라! 자유와 평등을 (즉 봉건체제의 속박으로부터 부르주아들의 자유와 평등을) 쟁취하자! 이런 목표 아래 도시의 신흥 부르주아들은 귀족체제에 맞선 투쟁을 벌였다. 결국 봉건귀족들은 몰락했다. 그런데 이 과정은 봉건귀족과 신흥 부르주아지 사이의 투쟁에서 봉건귀족이 정치적으로 밀렸다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더 근본적으로는, 이제 봉건귀족들과 그들의 경제질서인 봉건적 생산관계가 더 이상 발전하는 생산력을 감당할 수 없는 낙후한 것으로 전락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봉건귀족들이
각 구역을 차지한 채 숱한 통행세를 받고, 온갖 부역을 강요한 봉건사회는 상인들이 전국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장사를 하는데 큰 걸림돌이었다. 그리고 농노들이 봉건사회의 신분제 때문에 토지와 그 주인인 영주들에게 묶여 신흥 자본가에게 노동력을 자유롭게 판매할 수 없었던 것도 경제발전의 커다란 걸림돌이었다.
이처럼 특정한 생산관계는 일정 시점까지는 발전하는 생산력에 조응하고, 또한 특정한 생산관계가 생산력 발전을 촉진하기도 하지만, 일정한 한계점을 지나면 더 이상 생산력 발전에 조응하지 못하고 오히려 걸림돌이 되고 마는 것이다. 생산관계가 생산력에 조응하지 못하고 걸림돌이 되고 나면, 생산력과 생산관계는 서로 충돌을 일으킨다. 이 충돌은 계급들 사이의 투쟁으로 표현된다. 즉‘발전하는 생산력을 대표하는 계급’과,‘낡은 생산방식을 대표하는 계급’사이의 계급투쟁이 전개된다. 그것이 역사의 격변을 일으키는 원동력이다.
지금의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봉건제 말기와 마찬가지의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봉건체제가 무너지기 이전부터 봉건사회의 내부에서 자본주의는 발전해 왔다. 하지만 자본가들이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사회의 지배자로 올라선 이후에는 그 이전과 비할 수 없을 정도로 폭넓고 빠르게 자본주의의 발전이 이루어졌다. 생산력은 자본주의 이전 시대 모두를 합친 것보다도 많이, 몇 배 몇 십 배 이상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봉건사회의 테두리 안에서 모순이 커지다가 격렬한 발작 끝에 마침내 사라졌듯이, 자본주의의 테두리 안에서도 모순이 성숙해가고 있다. 생산은 점점 더 많은 노동자들의 사회적 협동노동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가령 자동차 하나를 만드는 데에도 2만 개의 부품이 필요하다. 자동차 하나를 만들기 위해 수십 만 명, 아니 수백만 명의 노동자들이 공동노동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거대한 사회적 공동노동의 성과물을 점점 더 극소수의 자본가들이 독차지한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 사회의 근본모순인 ‘사회적 생산과 사적 소유 간의 모순’이다. 이 모순은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더욱 깊어지고 있다. 가령 현대차가 기아차를 인수하고, 해외공장을 속속 지을수록 사회적 생산도 증가하지만, 그 결실이 모두 한 줌도 안 되는 현대차 자본가한테 집중된다. 이 모순이 심해질수록 생산은 많이 하지만 소비는 그에 따르지 못해 경제가 얼어붙고, 과잉생산 공황이 생기고, 기업이 연쇄 도산하며, 노동자들이 대량실업당하는 일이 빈번하게 벌어진다. 그리고 한줌 자본가들이 세상을 상대로 도박을 벌여 세상이 경제위기와 전쟁 등으로 뒤흔들리는 일도 자주 벌어진다. 그래서 지금 경제적, 정치적으로 경련과 발작이 일어나고 있다. 공황과 인플레이션, 끝없는 경기침체와 주가폭락, 파산 따위의 경제위기들이 수시로 사회를 덮치며, 실업과 고용불안, 실질임금 하락, 전쟁이 노동자대중을 짓누르고 이에 따라 불가피하게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 사이의 적대적인 투쟁이 격렬해지고 있다. 이 현실이 보여주는 진실은 다음과 같다. “영원불변할 것 같던 자본주의 질서도 이제 자신의 역사적 생명을 다해가고 있다. 자본주의 생산관계 즉 임금노동제도는 이제 더 이상 발전하는 생산력을 감당할 수 없으며, 오히려 발전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아주 간단하다. 노동이 집단적
공동노동으로 발전하고, 생산이 사회적으로 이루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는 생산수단의 소유, 통제, 관리, 운영의 권리 전체가 실제로 노동에 복무하고 있는 노동자 전체에게로 이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럴 때에만 더 이상 생산력과 생산관계가 충돌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며, 순조롭고 합리적인 경제운영이 가능해질 것이다.”
이상의 논의를 정리해보자. 역사의 발전을 추동하는 가장 근본적인 추동력은 ‘발전하는 생산력과 고정된 생산관계의 모순’이며, 그것은 계급투쟁으로 표현된다고 요약할 수 있다. 새로운 생산관계가 성립되면 거꾸로 생산력의 발전이 더 한층 급속해지지만, 일정한 한도를 지나면 기존의 생산관계는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생산력 앞에서 걸림돌이 된다. 이 시점이 되면 역사적 변화가 시작된다. 낡은 생산관계는 필연적으로 무너지고, 성장하는 생산력에 걸맞는 새로운 생산관계가 만들어진다. 이렇게 해서 생산력과 생산관계는 특정한 ‘생산방식’을 이루게 된다. 이것을 ‘토대’로 정치, 법, 문화, 관습, 이데올로기, 가족 제도 등의 ‘상부구조’가 세워진다. 특정한 상부구조가 생산방식이라는 토대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토대가 상부구조를 조건짓는다, 그리고 토대에서의 경제적 변화가 상부구조의 변화를 강제한다, 이것이 역사의 발전을 규명하는 기본법칙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에서 질적인 도약

자연세계에서 일어나는‘양의 질로의 전화’법칙은 인간의 역사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역사의 발전에서도 양적인 변화와 질적인 변화가 뒤섞이고 서로 자리를 바꾼다. 앞에서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을 다루면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일정한 한도 내에서는 기존의 생산관계가 발전하는 생산력을 잘 감당할 수 있다. 그러나 일정한 한도를 지나면 더 이상 기존의 생산관계로는 생산력의 발전을 온전하게 담아낼 수 없게 된다. 즉 일정한 시기 동안은 생산관계의 본질적인 변화가 없어도 생산력의 양적인 성장이 가능하지만, 어느 시점에 도달하면 생산력은 더 이상 낡은 방식으로는 제대로 발전할 수 없다. 오히려 낡은 생산관계 때문에 기존의 생산력이 파괴되는 일까지 일어난다. 결국 생산력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질적으로 새로운 생산관계가 도입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점은 무엇보다 자본주의의 성립과정 자체가 분명하게 보여준 것이다. 봉건사회의 태내에서 발전해온 생산력(공장에서의 협동노동, 분업 등)은 새로운 생산관계를 요구했고, 마침내 봉건질서를 무너뜨렸다. 새로운 자본주의 생산관계 즉 자본가와 노동자를 두 주인공으로 하는 체제가 성립되었다. 그리고 기계제 대공업이 들어서면서 이제 생산력은 엄청난 양적 발전의 과정을 거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제 또 다른 질적 변화가 요구된다는 점이 자본주의 경제의 숱한 위기와 사건들을 통해 나날이 명확해지고 있다. 물론 현재의 자본주의 생산관계 안에서도 어떻게든 생산력과 생활수준이 발전하기는 한다. 그것은 우리의 일상생활을 잠시 되돌아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지금은 아주 흔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텔레비전, 핸드폰, 컴퓨터 등은 예전에는 결코 흔한 것이 아니었다. 심지어 과거에는 부자의 상징이었던 자동차조차도, 이제는 상당수의 노동자들이 가질 수 있는 물건이
되었다. 그러나 현재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력 발전은 전혀 순탄하고 원만한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반대로, 거의 모든 노동대중에게 실업의 고통, 실질임금의 하락, 생활의 불안정성의 증대, 전쟁의 공포 등 온갖 고통을 떠넘기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만약 지금의 생산관계를 다른 방식으로, 즉 자본가들의 이윤을 위한 생산이 아니라 사회전체의 필요를 위한 계획적인 생산으로 바꾼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될까? 그렇게 된다면 생산력은 더 이상 고통스런 방식이 아니라 합리적이고 의식적으로, 그리고 모든 노동대중에게 실질적인 풍요와 안정을 가져다주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새로운 기술과 첨단 기계들을 도입함으로써 노동자가 실업자로 내몰리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노동시간을 단축하고 노동강도를 약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자본가들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쓸데없이 과잉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만큼 생산함으로써 결국 (노동시간 단축을 통해) 노동자들은 더 많은 시간을 자기계발과 다양한 문화생활을 누리는 데 쓸 수 있게 될 것이다.
반면 이런 방식으로 사회질서를 변화시키지 않는 한 자본가들은 생산력 발전의 모든 계기들을 오직 자신의 이윤을 확대시키기 위해 사용할 것이고, 그 결과 노동자들의 생활의 불안정과 고통의
증대, 엄청난 규모의 사회적 낭비와 파괴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경제를 성장시키는 ‘양적 변화’가 아니라 자본주의를 노동해방 사회로 바꾸는 ‘질적 변화’가 사회 전체의 이익, 절대 다수 노동대중의 이익을 위해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다.


자연의 법칙과 역사의 법칙 - 차이가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유물론과 변증법의 기본적인 법칙들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전개되는지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알 수 있었던 것은, 자연세계에서 펼쳐지는 변증법적 논리가 역사에서도 근본적으로 동일하게 펼쳐진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자연의 변증법과 역사의 변증법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도 있다.
자연의 변증법에는 의식적 노력과 계획된 행동이 개입되지 않는다. 모든 것이 무의식적으로, 말 그대로 자연적으로 이루어진다. 빗방울이 얼어 눈이 되는 것, 또는 하나의 보리낟알이 ‘부정의 부정’의 과정을 거쳐 수십 배의 보리낟알로 되돌아오는 것 등은 인간의 의지와 무관하게 벌어지는 일이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빗방울이 얼어 눈이 되게 해달라고 대중 집회를 개최한다든지 더 많은 보리낟알을 수확하기 위해 시위를 벌이지는 않는다.
반면 역사에서는 이야기가 다르다. 여기서는 주체적인 인간들의 능동적이고 의식적인 활동 없이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봉건사회의 신분적 억압을 무너뜨리고 자본주의 시대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혁명이 필요했다. 군사정부의 폭압을 끝장내는 일에는 이루 말 할 수 없는 희생과 고통이 따라야만 했다. 노동조합 건설의 자유는 결코 자동으로 보장되지 않았다. 기독교인들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일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해달라고 기도하듯이 ‘자연에서 이루어진 변증법이 역사에서도 그대로 이루어지게’해달라고, 그것도 자연에서의 변화 발전처럼 인간의 의식적 실천 없이도 역사의 변증법이 실현되게 해달라고 희망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사회와 역사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어떤 방식으로든 인간 집단의 의식적인 실천 활동을 통해서만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의식적인 실천을 통해서만 변증법의 법칙들은 역사라는 영역에서도 관철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주의할 점은, 역사의 전개가 인간의 능동적인 실천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해서 모든 일들이 마음대로 실현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인간의 역사는 발전 과정에서 일련의 단계들을 거친다.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발전하는 것은 의식적 실천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이 과정이 특정한 인간집단의 의지대로 실현되지는 않는다.
이를테면 자본주의가 태어난 초기에 어떤 사람들은 일찌감치 자본주의의 폐해를 간파하고 새로운 사회를 꿈꾸었다. 그들은 곧바로 자본주의를 부정하려 했고,‘뛰어넘으려’했다. 그리고 그들의 자의적 의도대로 새로운 공동체사회를 건설하려 했다. 이런저런 실험을 실제로 해보기도 했다.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영국의 오언, 프랑스의 생시몽과 푸리에, 독일의 바이틀링 등이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시도는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객관적 조건이 갖춰져야 주관적 의지를 실현할 수 있다
모든 발전단계들은 나름대로의 자기‘존재이유’를 갖고 있다. 그리고 하나의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은 그런 변화 발전에 필요한 필수적이고 적절한 조건들이 충족되었을 때에야 이루어진다. 예컨대 봉건사회가 몰락하고 자본주의 사회가 들어선 것도 어떤 사람들의 자의적 구상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결코 아니었다. 전반적으로 자본주의 사회를 꽃피울 수 있을 정도로 인간의 노동능력이 발전했을 때, 그 결과 낡은 봉건적 생산관계로는 더 이상 발전하는 생산력을 감당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새로 등장해 성장하기 시작한 자본가계급과 몰락해가는 봉건귀족 사이의 갈등과 모순이 무르익어갔을 때, 지배계급으로서 봉건귀족의 무능력과 한계가 극에 달하고 자본가들이 권력을 떠맡을 수 있을 만큼 성장했을 때, 그리고 다수의 대중이 더 이상 봉건귀족의 지배를 용인할 수 없다고 느끼며 새로운 사회를 갈망하고 행동에 돌입할 수 있을 정도로 정치적 각성이 이루어졌을 때, 그 때 비로소 자본주의로의 격변이 본격적인 일정에 오른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미래의 노동자 공동체사회로 넘어가는 과정도 마찬가지다. 물론 이미 새로운 공동체사회를 건설하는 데 필요한 만큼의 생산력은 충분히 발전했다.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계급적인 충돌과 대립도 상당한 정도로 격화되고 있다. 자본가들이 이 사회의 지배계급으로서 역할을 다했고 무능력이 극에 달하고 있다는 점은, 객관적으로는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사실이 노동대중에게 충분히 받아들여지고 있지는 못하다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노동자계급의 주체적 준비가 아직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자본주의 초창기에 자본가계급이 봉건귀족의 지배를 무너뜨리고 직접 국가권력을 장악해야겠다고 결의했던 것과 같은 정치적 준비에서 특히 그렇다. 이런 점들 때문에 현재
이미 새로운 사회로 나아갈 것이 절박하게 요구되고 있는데도 이 변화가 현실적인 일정으로 제기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자본주의 초기의 공상가들은 이런 준비조건들을 고려하지 않은 채 즉각 새로운 공동체 사회를 건설하고자 했다. 당시에는 아직 자본가들 자신이 전면적으로 성장하지 못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노동자계급 또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 주체로 나설 수 있을 만큼 성장하지 못했다. 당시에는 대공장, 거대 은행, 대규모 철도, 지하철, 백화점 등이 전혀 없었다. 공장은 작은 마찌꼬바 수준이었고, 가장 흔한 교통수단은 마차였으며, 거래는 조그만 시장에서 이루어질 뿐이었다. 즉 당시에는 거대한 노동자 공동체 사회를 만들 만한 객관적 토대가 전혀 갖추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 공상가들의 눈에 노동자들은 단지 고통 받고 불쌍한 존재로밖에 비쳐지지 않았다. 노동자들에게 세상을 바꿀 무궁무진한 잠재력이 있다는 것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따라서 새롭고 바람직한 사회는 오직 자신들과 같은 공상가의 주관적인 계획, 그리고 가진 자들의 시혜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으로 여겼다. 이런 시도가 실패하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다. 처음에는 가진 자들도 이런 공상가들의 시도에 대해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호의를 보내기도 했지만, 이 시도가 근본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위협하는 것이라는 점이 분명해지자마자 즉각 공격했다. 공상가들은 박해받았고, 쫓겨났으며, 공동체들은 무너졌다.
이런 경험은 우리에게 분명한 교훈을 주고 있다. 아무리 선한 의도를 갖고 역사적 계획을 세워 실천에 착수하더라도, 그 실천이 성공할 수 있는 객관적 기반이 형성되어 있지 않다면 이 시도는 단지 주관적 열망의 표현이자 실패할 수밖에 없는 공상적 시도로 그치고 만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현재의 단계를 넘어 보다 높은 단계로 발전하고자 한다면 그런 발전에 필요한 필수적이고 적절한 조건들을 갖추어야만 한다.

의지가 없다면 객관적 조건이란 무용지물

여기까지가 역사변증법의 한 측면이다. 여기에서는 역사의 변증법적 발전에서 객관적 토대의 중요성을 다루었다. 다른 한 측면이 있다. 아무리 객관적 토대가 준비되고 사회 변화의 조건이 성숙했더라도, 인간의 의식적인 실천이 없다면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유물론에는 두 종류가 있다. 우리가 지지하는 유물론은 ‘변증법적’인 유물론이다. 이와 대비되는 것으로서 ‘기계적’인 유물론이 있다. 기계적 유물론자들은 관념론과의 투쟁에서 나름대로의 성과물(어쨌든 정신세계보다 물질세계가 일차적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을 남겼다. 그러나 그들은 모든 법칙과
운동을 기계적으로 이해한다는 한계를 갖고 있었다. 그들의 관점에서 본다면 역사의 발전 또한 기계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인간의 의지 및 능동적 실천과 무관하게 숙명과도 같은 필연성에 따라 전개되어 갈 것이다.
그래서 이런 관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자본주의 사회도 자본의 논리 자체가 갖고 있는 한계에 의해 필연적으로, 자동으로 붕괴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그런 자동 붕괴는 일어나지 않았다. 앞으로도 기계적인 자동 붕괴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회가 숱한 위기를 겪을 때마다 자본가계급은 그 위기를 극복하고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그들 나름대로 의식적이고 능동적인 실천(가령 1,2차 세계대전이나 유태인 대량학살, 대규모 정리해고 등을 포함해)을 전개했으며, 이런 실천을 통해 자본주의의 위기들은 곧바로 파국으로 치닫는 대신 일시적으로나마 관리되고 통제되었기 때문이다.


물질 의식
규정한다

의식은 세계에 대한 수동적 관조에 불과하다.

■ 기계적 유물론
물질 의식
규정한다
영향을 미친다
■ 변증법적 유물론
인간의 의식은 객관적 세계를 반영할 뿐만 아니라 세계를 창조한다. 세계는 인간을 만족시키지 못하며 인간은 자신의 활동에 의해 그것을 변화시키기로 결정한다.

물질 의식 규정한다
■ 관념론
관념론은 의식의 능동성을 과장함으로써 의식이 세계를 창조한다는 주장으로까지 나아간다. 이 시점에서 노동자들의 의식적 준비와 실천의 힘이 자본가들의 힘을 능가하고 압도하게 된다면 각각의 위기들은 곧 낡은 자본주의 질서를 타파하고 새로운 질서를 건설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즉 실질적인 힘을 바탕으로 한 노동자계급의 의식적인 개입이 이루어져야만 역사에서의 변증법적 법칙들은 관철될 수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고도로 발달한 사회적 생산력은 걸림돌일 뿐인 낡은 자본주의 생산관계를 치워줄 것을 노동자계급한테 객관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노동자계급이 이런 객관적인 임무를 떠맡겠다고 나서면 자본주의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위대한 노동해방 사회가 들어설 것이다. 하지만 노동자계급이 이 임무를 떠맡으려 하지 않거나 떠맡는 데 실패한다면, 자본주의는 노동자계급을 더 큰 고통 속으로 떠밀 것이다.
미래는 노동자계급의 것이다! 단, 자각하고 투쟁하는 노동자계급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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