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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마더 존스 (5 MB)
마더 존스
엘리엇 고온 지음 , 이건일옮김
출판사 - 녹두
초판일 - 2002-12-27
ISBN - 8995316314
조회수 : 2447

● 목 차

서문
불멸의 이름, 마더 존스=25
제1장 메어리 해리스=31
제2장 메어리 존스=63
제3장 마더 존스=101
제4장 저기 희망의 별들이 오네=148
제5장 어린 노동자들의 행진=195
제6장 당신의 충실한 혁명동지=232
제7장 중세의 웨스트버지니아=271
제8장 콜로라도 석탄전쟁=308
제9장 살아 있는 하나님의 진노=349
제10장 생애 최후 10년=408
마더 존스는 잊혀지지 않았네=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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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저기 희망의 별들이 오네. 미래의 별들, …
그리고 다음 세대를 밝혀주는 별들이 말일세.
보다 찬란한 문명의 기초를 놓고 있는
참다운 광부들의 별이 저기 있네.
다른 모든 별들이 희미해져도 저 별은 더욱 빛날 걸세.
-본문 중에서

** 새로운 시작을 위해
21세기 첫 대통령선거는 분명 국민의 승리이자 진보진영의 희망을 보여주는 하나의 쾌거였다. 이만큼 오는데도 얼마나 많은 희생과 노력과 좌절이 있었던가? 조금 나아진 현실 속에서 스스로 타협하거나, 아니면 추억 속에서만 간직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동학농민전쟁, 일제하 항일투쟁, 반독재 투쟁, 원산총파업, 광주항쟁, 87년 노동자 대투쟁….

전태일, 이석규, 윤상원, 표정두, 홍기일, 김경숙, 최명아….
이러한 우리의 기억상실증에 맞서고 세계 노동운동의 역사와 교훈을 계승하기 위해 도서출판 녹두에서는『Mother Jones,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여성』을 출간하였다. 이 책이 비록 1900년대 미국의 현실이라지만, 따져보면 현재 우리의 운동상황과 너무도 비슷함을 알 수 있다. 진보진영은 보수화되어가고 있고, 민중은 운동에서 멀어져 개별화되어가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 미국에서의 교훈이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되어야 할지 이 책은 하나의 화두가 될 것이다.

** 영원한 노동자의 어머니, 마더 존스!
한 세기 전, 마더 존스는 아주 탁월한 노조 조직책이요, 선동가, 현대 미국 노동운동의 상징, 정신적인 지주였다. 훌륭한 연설과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가두시위를 통해, 마더 존스는 노동, 가난, 그리고 자유의 파괴에 대한 외곡된 사실들을 폭로했다. 석탄과 철강, 철도, 섬유, 주조 등 파업 현장에 마더 존스는 어김없이 나타나 노동자들에게 행동하고, 자본가들의 비도덕적인 모습에 투쟁하도록 격려했다.

엘리엇 고온이 그녀의 생애에 대해 열정적이고 극적으로 서술한 이 책은, 어떻게 해서 가난하고 나이든 아일랜드계 미망인이 그녀의 적들에게는 "불온한 과격분자""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여인"이, 그녀를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노동자의 어머니", "노동자들의 잔다르크", "광부들의 천사"가 되었는지 그리고 유진 뎁스의 말처럼, "미국에서 땀흘려 일하는 자들의 마음 속에 새겨지게 되었고", "그들의 자녀들에게 영원히 기억될 것인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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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엘리엇 고온:퍼듀 대학 역사학과 교수로 저서에 『미국 스포츠 약사』와 『남성무술, 미국의 맨주먹 타이틀전』이 있다.

≪마더 존스 -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여성≫(녹두)은 40이 넘은 중년의 나이에 노동운동에 투신해 평생을 노동자 투쟁과 함께했던 불멸의 노동운동가 마더 존스의 생애를 기록한 책이다. 우리에게 마더 존스가 처음 소개된 것은 1978년 12월에 번역 출판된 자서전을 통해서다. 안타깝게도 이 자서전은 절판되어, 우리는 마더 존스의 치열했던 삶을 그녀 자신의 생생한 육성을 통해서 접할 기회를 잃게 되었다.

그러나 마더 존스에 대한 기록은 이 책을 통해 새롭게 부활했다. 이 새로운 전기를 집필한 엘리엇 고언은 비록 온전히 노동자계급다운 시선으로 마더 존스를 되살려내지 못했지만, 매우 성실하게 20세기 초 미국자본주의의 발전 과정과 극악한 착취, 그리고 이에 맞서는 노동자들의 치열한 투쟁, 계급투쟁의 한 복판에서 용기와 정열, 헌신으로 살다간 마더 존스의 삶을 생생하게 복원해내고 있다. 이 격동의 시기에 마더 존스는 노동자들의 벗이자 어머니로, 그리고 미국에서 가장 크고 진보적인 노동조합이었던 UMW(미국광산노동조합)의 가장 유능한 조직가이며, 사회주의 투사로서 격정적인 삶을 살았다.

그녀가 항상 성공한 것은 아니었으며, 또한 언제나 옳았던 것도 아니다. 예컨대, 그녀는 자본주의의 착취를 분쇄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사회주의적 신념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실천은 항상 노동조합운동을 조직하는 것에서 머물렀다. 정치운동에 참여한 경우에도 의회를 장악함으로써 변혁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녀는 노동자들을 노동조합으로 단결시키고 그들의 가치를 일깨운다는 선한 목적을 가지고 행동했지만, 1차 세계대전에 미국이 참전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다. 이런 점들은 분명 마더 존스가 가졌던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한계였다. 그러나 이런 한계는 그녀 개인의 한계보다 그 시대의 한계, 즉 당시 미국노동운동의 발전 단계가 보여주었던 한계이기도 했다.

또한 이 한계가 개인의 약점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지라도 마더 존스의 위대함이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자신의 삶 전체를 통해 그 자신이 노동조합의 관료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자본가들과 싸우기를 겁냈던 기회주의자들과는 명백히 다른 존재임을 증명했다. 또한 그녀는 노동자 대중과 함께 하고, 그들과 호흡하며, 자신의 투쟁 의지를 수천, 수만의 노동자 대중의 의지로 바꾸어 나갈 수 있었던 진정한 노동운동의 조직가였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가 있다. 그리고 동일한 이유로 이 글에서는 마더 존스의 여러 치명적인 약점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영원히 잠들기 전까지 노구를 이끌고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기꺼이 갔으며, 자본가와 맞서고 노동자계급의 정신을 일깨우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그녀가 국회의 한 위원회에 출석해서 주소를 말해달라는 주문에 했다는 다음의 말은 그녀의 삶을 단적으로 증언한다.

“나는 미국에서 살지만 주소가 정확히 어딘지는 나도 몰라요. 왜냐면 나는 폭압에 맞서 싸우기 때문이고, 투쟁이 벌어지는 곳이면 어디든지 뛰어가야 하니까요. 그러니 나는 정말 이렇다 할 주소가 없는 셈이라오.” 그리고 그녀는 이렇게 덧붙였다. “내 주소는 내 신발 주소와 같소. 내 신발은 내가 어디를 가든 나와 함께 여행하니까.”

바로 이것이 그녀를 미국노동운동의 ‘어머니’로 남게 한 참된 이유였다. 그녀의 삶은 오늘날 자본주의의 착취에 맞서 투쟁하려는 모든 노동자들에게 깊은 감동과 영감을 준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어떻게 대중과 결합하고, 자신의 사상과 의지를 대중 자신의 의지로 만들 수 있는가에 대해 배울 수 있다.


마더 존스가 탄생하기까지

마더 존스는 250쪽이 넘는 자서전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단 다섯 문장으로 압축했다. 그리고 그녀가 운동에 투신하기 전의 그 불행했던 일생의 전반기를 이야기하는데 겨우 여섯 쪽만을 할애했다. 이것은 그녀가 자신의 삶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노동운동에 투신하기 전 그녀의 삶은 가난과 불행 그 자체였다. 그녀는 죽음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해야 했던 한 가난한 아일랜드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나 험난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그녀의 삶에서 유일하게 안락하고 평온했던 시기는 결혼 직후의 6년여의 시간이 전부였다. 그녀는 24세가 되던 1861년, 철주조기술자노동조합의 열렬한 조합원이었던 남편과 결혼하여 멤피스에 정착했다. 그러나 이 짧은 행복은 1867년 황열병이 그녀의 남편과 자식들을 앗아감으로써 끝이 나고 말았다.

그러나 그녀의 인생 전반기에 닥친 가혹했던 시련은 결코 그녀를 멈추게 할 수 없었다. 오히려 이 거대한 불행과 슬픔은 그녀를 새로운 삶에 다가서게 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노동운동가로 다시 태어난 그 순간 그녀는 ‘진정한 자신의 삶’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자신의 생일까지도 노동자들의 저항의 상징일인 메이데이로 바꾸어 말할 정도였으며, ‘마더’라는 이름도 노동자의 어머니로, 투사로 살겠다는 그녀의 신념에 따라 새롭게 붙인 이름이다. 이처럼 그녀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그녀가 노동자로서 각성하고, 투사로서 살았던 바로 그 순간이며, 삶이란 바로 이 순간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녀가 노동자 투사로서 자신의 삶에 대해 얼마나 큰 자부심과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는가는 한 집회에서 사회자에 의해 아주 ‘위대한 박애주의자’로 소개되었을 때, 말을 낚아채서 “말은 똑바로 하게. 나는 박애주의자가 아니라 소란꾼이라네.”라고 말했다는 에피소드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난다.

그녀가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에 눈을 뜨게 되었던 것은 그녀가 모든 것을 잃고 시카고로 이주했던 1870년대 후반 ‘노동기사단’의 강연에 참석하고 나서부터이다. 이 당시 시카고는 빠른 속도로 공업화가 진행 중에 있었으며, 거대한 노동자 도시로 발전해가고 있었다. 그녀는 미국노동운동의 ‘청년기’로 평가되는 이 시기에 노동기사단에서 저항과 희생정신, ‘이러저러한 형식적 제도보다 대의에 헌신하는 순수함’을 배우게 된다. 특히 1887년에 있었던 대파업과 1886년 메이데이의 기원이 되었던 헤이마켓 사건은 그녀의 인생에서 대전환점이 되었다. 노동자들의 대중적 저항이 보여준 힘과 용기, 대의를 위한 투사들의 숭고한 희생은 중년에 접어 든 마더 존스에게 평생 노동운동에 헌신하겠다는 결의를 갖게 한 상징적 사건이 되었다.

마더 존스가 노동운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게 된 것은 1894년 4월, UMW의 전국적인 탄광파업에서부터다. 이 시기 미국자본주의는 무서운 속도로 발전해가고 있었고, 석탄은 미국의 산업을 떠받치는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이 발전의 이면에는 노동자들에 대한 가혹한 착취가 있었다. 록펠러나 J. P. 모건 등 여전히 악명 높은 자본가들은 이 시기에 미국의 광산노동자들을 쥐어짜는 선봉에 서 있었다. 1870년부터 1914년 사이에 약 5만 명의 석탄 광부가 산업재해로 숨졌다. 그들은 하루 12시간이 넘도록 할당량을 다 채울 때까지 일하기를 강요받았으며, 진폐, 관절염, 폐기종 같은 난치병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이렇게 죽도록 일하고도 노동자들은 자신의 가족조차 부양할 수 없는 형편없는 임금을 받았다.

그 결과 대다수 광부의 아내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섬유와 봉제공장에서 일해야 했고, 심지어는 미성년자였던 아이들까지 먹고 살기 위해 봉제공장과 광산으로 내몰려야 했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비참한 처지에 저항했으며, 1894년의 파업도 그 중 하나였다. 파업에 나선 노동자들은 어김없이 자본가들의 총알 세례를 받아야 했다. 이 파업은 자본가들의 군대에 의해 4개월 만에 폭력적으로 진압되다. 그러나 마더 존스는 난생 처음 노동조합의 힘과 인종 구분 없이 연대하는 것이 얼마나 위력적인지를 실감하게 되었고, 이 파업은 그녀의 진정한 삶의 본격적인 출발점이 되었다.


‘투사의 눈’과 ‘관료의 눈’

1890년에 결성된 UMW는 1800년대 후반과 1900년대 초반 미국의 계급적 노동자운동을 대표했다. 이 시기의 노동자운동은 한국의 전노협 운동을 연상시킨다. 특히 1897년, 라티머 대학살(평화 행진을 벌이던 노동자들에게 총격을 가해 19명이 사망하고 39명이 부상당했던 사건)은 노동조합을 대중화하는 계기되었을 뿐만 아니라 대중의 투쟁의식과 행동성을 높이는 촉매제가 되었다.

1900년 가을, 12만 명의 광부들이 6주 동안 파업을 벌였고, 1902년 5월에도 15만 명에 달하는 노동자들이 6개월 동안 파업을 벌였다. 마더 존스는 이 투쟁을 선두에서 이끌었다. 이 파업이 시작되었을 때, 그 선봉에 선 사람들은 투쟁적인 일반 조합원들이었는데, 그때 노조 간부들은 그들의 뒤를 따라잡기도 버거워했다. 조합원들은 협상을 선호하는 관료적 지도부와 맞서면서 노조 지도자들에게 보다 더 큰 행동을 할 것을 요구했다. 노동자들이 거대한 힘을 동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자본가들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 결과 파업은 격렬하게 진행되었지만, 객관적 상황은 노동자들에게 유리한 것만은 아니었다. UMW의 위원장이었던 미첼은 투쟁에 나선 노동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협상을 통해 이 투쟁을 마무리하려 했다.

이 파업에서 마더 존스는 일반 조합원들의 투쟁의지를 대변했다. 그녀는 자본가들이 굴복하지 않는다면 더 많은 노동자들을 파업에 동참시키고, 그 가족들까지 투쟁의 대열로 조직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행동했다. 그녀가 이후에 여성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하게 된 것은 이런 맥락에서였다. 그녀는 여성들의 헌신성과 이타주의, 희생정신이 노동조합을 더욱 강하게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녀는 노동자들이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들에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점점 더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그들의 힘을 조직하고 그것을 과시해, 필요하면 파업을 통해서 정당한 처우를 받을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이를 위해 그녀는 노동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여러분에게 진실할 것을, 또 굽신거리는 노예들이 아니라 정말 남자가 되라고, 그리고 무엇보다 여러분의 조직을 배반하는 사람들이 되지 말아달라고 호소하는 바입니다.” 나아가 그녀는 소수의 개인들이 세상의 부를 소유하고 지배하는 체제가 정당한가에 대해 의문을 던졌다.

1897년 라티머 대학살로 촉발된 이 파업은 상당한 양보를 이끌어 내며 결국 협상을 통해 타결되었다. 그러나 동일한 사건으로부터 모든 이들이 같은 교훈을 끌어내는 것은 아니었다. 이 작은 승리를 통해 UMW의 위원장이었던 미첼은 계급투쟁이 꼭 불가피한 것은 아니라는 식의 결론을 끌어냈고, ‘협상을 통한 문제 해결’이라는 관료들의 사상은 점차 뿌리를 내리게 된다. 그리하여 1908년에 이르자, 노동자들은 그가 자본가들과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자본가들의 하수인 조직인 ‘전국시민연맹’의 총재로 변신한다.

그러나 마더 존스가 보기에 1897년과 그 이후 노동자들의 투쟁이 보여주는 것은 ‘자본가들을 움직이게 만든 것은 오로지 노동자들의 단결이었다’는 것이다. 마더 존스는 ‘광산노동자들이 사측의 양보를 얻어낸 것을 기뻐했지만, 그녀는 궁극적으로 노동자들이 전 산업을 장악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투사와 관료가 투쟁을 통해 배우는 것은 이렇게 달랐다.

이런 차이는 어떤 투쟁이 가지는 의미와 가치를 평가하는 데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미첼은 웨스트버지니아 무연탄 지대의 광부들의 ‘수가 적다’는 것을 이유로 이 지역에서의 적극적인 조직화 작업을 회피한다. 그러나 마더 존스가 보기에 이 지역은 탄광노동자 투쟁에서 매우 중요한 거점이다. 이 지역의 노동자 수는 적었지만, 이곳은 싼 노동력과 노출된 광맥들로 인해 노동조합이 있는 ‘다른 지역의 석탄을 시장에서 몰아내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지역을 조직하지 않는다면, 웨스트버지니아의 석탄은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심장을 겨눈 비수’가 될 것이 분명했다. 이렇게 마더 존스는 투쟁을 바라 볼 때, 그것이 전체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를 심사숙고했다. 그리고 그것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싸움이라면 어떤 난관도 두려워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 싸웠다.

1902년, 이곳은 자본가들에 대한 비판적 신문들을 정기적으로 몰수하고, 집회를 금지시켰으며, 자신들의 입장에 반대하는 정당의 설립을 불법화시켰을 정도로 자본가들에 의한 전제적인 지배가 성행한 곳이었다. 게다가 이곳은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열악한 처지에 있는 흑인과 이민자들로 구성되어 조직화가 쉽지 않은 상황에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신념을 가지고 아무런 불평도 없이 한 단계 한 단계 전진했다. 그와 함께 작업했던 한 조직책은 ‘그녀의 이야기를 듣기를 원하는 노동자가 있는 곳이라면 그녀가 못 오를 정도의 높은 산도, 그녀가 못 갈 만큼 험한 길도 없었다.’고 그녀에 대해 회상하고 있다. 그녀는 12마일이 넘는 산길을 걸어와 세 시간씩이나 연설을 하고는 다시 왔던 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이런 헌신적인 삶은 노동자들에게 불굴의 용기를 심어주었고, 노동조합으로 단결하여 투쟁하겠다는 생생한 의무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녀는 결코 그들의 ‘당장의 모습’에 실망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들이 ‘희망의 별’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웨스트버지니아 노동자들의 파업은 투사들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폭력과 합법을 가장한 위협에 의해 분쇄되고 말았다. UMW는 그 이후 10년간, 웨스트버지니아에서 발도 못 붙일 처지가 되었지만, 그 이후 웨스트버지니아는 그녀의 예견대로 가장 강력한 거점 중의 하나로 발전하였다.


계급적 단결을 일깨우다

UMW의 관료적 지도부들은 노동조합의 분파적 이해에 따라 투쟁을 결정했다. 콜로라도에서 UMW의 조직 활동은 미미한 것이었다. 이 지역은 서부광부연맹(WFM)의 주도하고 있었다. WFM이 8시간 노동제를 요구하며 파업에 나섰을 때 UMW의 관료들은 결코 마음 내키지 않았지만, 투쟁에 나서지 않으면 그 지역 노동운동의 주도권을 완전히 상실할 것을 우려하여 파업에 참여했다.

파업이 1주일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 자본가들은 UMW의 관료들에게 협상을 제안했다. 미첼은 그 협약을 수락하라고 촉구했다. 하지만 많은 수의 투쟁적인 노조원들이 이것은 배신이며, 이런 일이 일어날 경우 파업 전체를 위기에 빠뜨릴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마더 존스는 노조원들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함께 작업했던 노조관료가 UMW에서 마더에게 월급을 지급하고 있고, 위원장인 미첼이 원한다는 것을 근거로 이 배신적인 협상에 반대하지 말라고 요구하자, 마더 존스는 ‘이 파업이 미첼의 이익을 위한 것이냐’고 반문하며, 파업 철회에 반대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지는 월급은 광부들이 한 푼 한 푼 어렵게 벌어들인 돈이지, 미첼이 주는 것이 아니라고 맞받아쳤다. 그리고 협상 타결을 설득하는 이 관료에 맞서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형제들! 여러분은 남부의 형제들에게 그들을 끝까지 지원하겠노라고 약속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여러분은 그들을 배반하고 따로 협상안에 타협하라는 요구를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공동의 적을 두고 있고, 끝까지 싸우는 것은 여러분의 사명입니다. 여기서 여러분이 파업을 철회하고 복귀하면, 남부에 있는 여러분의 형제들은 쓰러지게 됩니다. 만약 그들이 파업에서 지게 된다면, 그 책임은 여러분이 져야 할 것입니다. 자본가들은 여러분의 대오를 지역과 국적에 따라 이간시켜 정복하려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모두는 공동의 명분을 위해 사용자와 싸우는 노동자들입니다. 자본가들의 칼끝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목을 겨누고 있습니다. 가난, 고통, 그리고 여러분의 자녀들의 미래가 여러분에게 더 강력하게 연대하라고 요구합니다.”

그녀는 자신이 어느 노동조합에 속했느냐를 기준으로 노동자들의 투쟁을 판단하지 않았다. 이 점에서 그녀는 노동조합주의적 분열의식에서 자유로웠다. 그녀는 모든 노동자는 하나라는 계급적 태도를 분명히 하고, 노동자들로 하여금 더 넓은 세상을 보게 함으로써, 그들에게 진지한 책임감을 갖게 만들었다. 이 연설은 노동자들의 마음을 움직여 파업을 계속하도록 만들었지만, 이 승리는 오래 가지 못했다. UMW의 관료들은 마더 존스가 없는 틈을 타 노동자들을 협박해댔으며, 결국 일주일 만에 UMW는 파업에서 철수하게 되었다. 이는 UMW와 WFM을 분열시켰고, 파업의 자신감을 떨어뜨리는데 일조했다. 노동자들은 이 투쟁에서 패배했다. 투쟁이 패배한 이후 관료들은 항의하는 지역 책임자를 제명하고, 마더 존스에게도 UMW의 결정을 위반하고 WFM을 지지하든지, 아니면 사임하라고 통보했다.

그러나 관료들이 이렇게 행동하는 동안 마더 존스는 전혀 다르게 행동했다. 그녀는 패배감에 휩싸인 노동자들의 투쟁을 옹호하며, 자본가들을 맹비난하면서, ‘그녀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다음 전투를 준비시키고, 그녀를 믿는 사람들에게 마니교처럼 엄격하고 대담한 그림을 보여주고, 그들에게 정의의 밝은 날을 약속’했다.

“당신들이 그들을 물리쳤다고? 천만에. 당신들은 그런 무시무시한 투쟁에 기꺼이 돌입한 그 용감한 노동자들을 결코 이길 수 없다. 그들은 단지 작전상 후퇴를 한 것뿐이다. 그들은 가까운 장래에 산업노동자들의 자유를 위해 투쟁의 깃발을 다시 올릴 것이다. 콜로라도 연료철회사, 빅티 연료회사의 장사꾼 해적들과 그들의 수치스러운 똥개들은 분노한 국민들 앞에서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며 기어 다니게 될 것이다. 그들은 또 산 위에서 사람들의 분노로부터 자신들을 숨겨달라고 소리치리라.”


마더 존스로부터 배우기

1910년대 마더 존스의 사회적 영향력은 그 폭과 깊이 모두에서 더욱 증대하였고, 그녀의 의식은 더욱 성숙해졌다. 그녀는 80에 가까운 나이로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정력적이고 헌신적으로 활동했다. 마더 존스는 노동조합 관료체계 속에 있었지만, 그의 정서와 행동은 전투적 현장 노동자들의 모습과 일치했다. 그의 모든 연설은 노동자들의 계급투쟁 의식을 고취시키고, 자본주의의 폭압성과 국가 권력의 본질을 폭로하며, 노동자계급으로서 단결할 것을 촉구하는 것이었다. 그는 결코 자신의 견해를 숨기지 않았으며, 노동자들이 이해하기 쉬운 언어와 재기 넘치는 유머를 활용하여 자신의 생각을 노동자들의 생각과 일치시켜 나갔다.

이 책의 후반부는 이런 마더 존스의 활약과 날카로운 계급의식을 보여주는 연설문들로 넘쳐난다. 이것을 직접 읽고 진지하게 배우는 것은 독자들의 몫이다. 그가 아동노동을 철폐하기 위한 투쟁에서, 그리고 노동자 정당(사회당)을 발전시키고, 멕시코 혁명가들을 구출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놀라운 헌신과 10년 후 그녀에게 패배를 안겼던 웨스트버지니아와 콜로라도에서 80이 넘은 나이에 보여준 용기와 희생정신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그녀는 노구를 이끌고 웨스트버지니아와 콜로라도의 곳곳을 누볐으며, 선두에서 자본가들의 총구에 맞섰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강렬하게 노동자들에게 투쟁의지를 불어 넣었으며, 그들의 열정에 불을 지폈고, 때로는 매서운 비판으로 질책하고, 그들이 당한 착취에 함께 울었다. 그녀는 모든 투쟁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승리하고 함께 패배했다.

1910년, 웨스트버지니아와 콜로라도 노동자들에게 임금은 더 이상 쟁점이 아니었다. 2년여에 걸친 자본과의 치열한 공방을 거치면서, 노동자들은 보다 광범위한 자유, 존엄성, 인권, 자본주의의 본질 등의 문제에 관심을 돌리게 되었다. 그들은 자본을 소수가 독점하고 다수는 그들의 임금노예가 되는 체제가 정말 정당한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만약 마더 존스와 같은 계급의식적 투사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노동자들의 이런 성장을 훨씬 더뎠을 것이다. 이런 끈질긴 투쟁의 결과로 자본은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더 존스는 위대한 투사였고, 웅변가였다. 그러나 그녀가 성공할 수 있었던 진정한 힘은 그녀의 계급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사랑, 헌신과 성실성 때문이었다. 우리는 다른 무엇보다도 이 점을 배울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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