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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3-07-31 17:16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1884년)_F.엥엘스
 글쓴이 : a16827441143918
조회 : 591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Der Ursprung der Familie,
des Privateigentums
und des Staats

프리드리히 엥겔스 지음(1884).


*노동자의책 이용자 여러분께 알립니다^^*
〔본 게시물은 김대웅 선생의 1994년판 번역본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을 참고하여 작성되었음을 알립니다.〕
〔본 게시물은  게시자의 능력상 한계로 인하여 각주 및 미주는 모두 생략하였다는 점을 알립니다.〕
〔현재 목차에 북마크 기능을 추가하기 위한 노력중에 있습니다. 다만 임시방편으로서 (ctrl+F)키를 누르고 찾으시는 단어 혹은 문장을 입력하시면 해당 위치로 이동이 가능하오니, 참고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차례]

■ 일러두기
■ 1884년 제I판 서문
■ 1891년 제4판 서문
■제I장 선사시대 문화와 단계들
1. 야만
(a) 낮은 단계
(b) 중간 단계
(c) 높은 단계
2. 미개
(a) 낮은 단계
(b) 중간 단계
(c) 높은 단계
■제Ⅱ장 가 족
1. 혈연가족一가족의 첫째 단계
2. 푸날루아 가족
3. 대우혼 가족
4. 일부일처제 가족
■제Ⅲ장 이로쿠오이 씨족
■제Ⅳ장 그리스인의 씨족
■제Ⅴ장 아테네 국가의 발흥
■제Ⅵ장 로마의 씨족과 국가
■제Ⅶ장 켈트인과 게르만인의 씨족
■제Ⅷ장 게르만인의 국가 형성
■제Ⅸ장 미개와 문명
■ 부록 一칼 맑스의 「모오간의 저서 『고대 사회』의 발췌」
에 대하여
■ 찾아보기
■ 역자후기



■ 일러두기 ■

1. 이 책은 번역 대본은 MEW, Bd.21, Dietz Verlag, 1981이며 Works of Marxism - Leninism, Vol.22, International Publisher, New York, 1942와 대조했다.
2. 주(註)의 처리 방식은 다음과 같다.
1) 저자 앵겔스의 주는 * 표시를 하여 각주로 처리했다.
2) 독어판 편집자의 주, 영어판 편집자의 주, 역주는 모두 종합하여 장(章)마다 1),2),3)…으로 표시하여 각주로 처리했다. 단, 영어판 편집자의 주는一 Ed. 역자의 주는一 역주라고 끝에 표시하여 구별했다. 따라서 각주에서 아무런 표시가 없는 것은 독어판 편집자의 주이다.
3) 부록의 주는 원문대로 후주로 처리했다.
3. 이 책의 좌우 여백에는 번역 대본의 해당 쪽수를 표시하여 원문을 쉽게 대조할 수 있도록 했다.(따라서 제4판의 서문만 영어판의 쪽수이며, 나머지는 모두 독어판의 쪽수를 나타낸다.)
4. 이 책의 초판에 실렸던 보론은 삭제하고 대신 모오간의 저서『고대사회』로부터 맑스가 발췌한 내용을 해설한 논문을 부록으로 실었다.
5. 본문의 각주에서, 엥겔스가 『고대 사회』를 인용한 출전의 쪽수는 독어판에 따랐다.(『고대 사회』에 대한 출전 표기에서 영어판과 독어판이 각기 다른 이유는 부록의 후주 1)을 참조.)



■ 1884년 제 I판 서문

여기에 실린 글들은 어떤 의미에서 볼 때 유언의 집행이라 할 수도 있다. 칼 맑스는 모오간(Morgan)의 연구 성과를 자신의— 일정한 한도 내에서는 우리들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유물론적 역사 연구의 결론에 따라 서술함으로써 비로소 그 의의를 명백히 밝히려고 한 사람이었다. 사실 모오간은 맑스가 40년 전에 발견한 유물사관을 미국에서 자기의 것으로 새로이 발견하고 그것을 지침으로 삼아 미개 와 문명을 비교했는데, 중요한 점에서 맑스와 똑같은 결론에 도달했던 것이다. 그리고 『자본론』이 독일의 전문 경제학자들에 의해서 오랫동안 표절되면서도 완강히 묵살되었던 것처럼, 모오간의 『고대 사회』(Ancient Society)도 영국의 선사학 (先史學) 대표자들에 의해서 역시 똑같이 취급당했었다. 나의 이 저작은 세상을 떠난 나의 벗으로서는 이미 수행할 수 없게 된 것을, 불충분하지만 내가 약간 대신 수행한 것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모오간의 저서에서 광범위하게 발췌한 것에 가한 맑스의 평주를 나는 소장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가능한 한 여기에서 해당하는 곳곳에 그것을 수록해 놓았다.
유물론의 관점에 따르면, 역사에서 결정적 계기는 궁극적으로 직접적 생활의 생산 및 재생산이다. 그러나 이것 자체가 다시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그 하나는 생활수단, 즉 의식주의 대상과 이에 필요한 도구의 생산이며, 다른 하나는 인간 그 자체의 생산, 즉 종족의 번식이다. 일정한 역사적 시대 및 일정한 나라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사회조직은 이 두 가지 종류의 생산에 의해, 즉 하나는 노동의 발전단계에 의해, 다른 하나는 가족의 발전단계에 의해 규정된다. 노동의 발전이 미약할수록, 그 생산물의 양이 제한될수록, 따라서 사회의 부(富)가. 제한될수록 사회제도는 혈연적 유대에 대한 의존도가 더욱 높아진다. 그런데 혈연적 유대에 기초한 이 사회구조 속에서 노동생산성이 점차 증대되며, 이와 함께 사적 소유 및 교환, 빈부의 차이, 타인의 노동력에 대한 이용 가능성, 따라서 계급적 적대의 기초가 점차 발전한다. 새로운 사회적 요소들은 여러 세대를 거치는 동안에 낡은 사회제도를 새로운 조건에 적응시키려 하며, 마침내 이 양자의 불상용성(Unvereinbarkeit)은 완전한 변혁을 가져오게 된다. 혈연적 유대에 기초하는 낡은 사회는 새로 발전한 사회계급들 간의 충돌로 말미암아 붕괴되고, 그 대신 지배권이 국가에 집중된 새로운 사회가 출현한다. 이 국가의 최소단위는 더 이상 혈연결합체 (Geschlechtsverbände)가 아니라 지연결합체 (Ortsverbände)이다. 이 사회에서는 가족제도가 전적으로 소유관계에 의해 지배되며 , 또 거기에서는 이미 기술된(geschriebnen) 모든 역사의 내용을 구성하고 있던 계급적 모순과 계급투쟁이 이제는 자유롭게 전개된다.
모오간의 위대한 공적은 기술된 역사의 이 선사적 기초가 지니고 있던 주요 특징을 발견하고 재현했으며, 또한 극히 중요하면서도 오늘날까지 해결되지 못하고 있던 그리스, 로마 및 게르만의 고대 역사가 지니고 있던 수수께끼들을 풀어줄 열쇠를 북아메리카 인디안의 혈연결합체에서 발견한 데 있다. 그러나 그의 저작은 하루 이틀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는 약 40년 간에 걸쳐 자신의 자료를 연구함으로써 그것을 완전히 소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의 저서는 우리 시대의 흔치 않은 획기적인 저작 중 하나라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앞으로의 서술에서 어느 것이 모오간의 것이고 어느 것이 내가 보충한 것인가를 독자들은 대체로 쉽게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 역사와 로마 역사에 관한 장들에서는 모오간의 자료에만 그치지 않고 내가 소장하고 있던 것을 덧붙였다. 켈트인과 게르만인에 관한 장들은 대체로 나의 것이다. 여기에서 모오간은 거의 2차 자료를 이용했을 뿐이며, 게르만인에 관해서는 타키투스(Tacitus)의 것을 제외하면 프리만(Freeman)씨가 함부로 날조한 졸렬한 것들을 이용했을 뿐이다. 경제학적 논증은 모오간이 .내세운 목적을 위해서는 충분했지만 나의 목적을 위해서는 전혀 불충분했기 때문에 다시 쓸 수밖에 없었다. 끝으로 명확히 모오간을 인용하지 않고 내린 모든 결론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나에게 있음을 밝혀두는 바이다.



■1891년 제4판 서문


상당한 부수가 발간된 이 책의 기존 판들은 약 반 년 전에 품절되었으며 신판 준비를 해 달라는 출판사의 요청을 받은 지도 이미 오래이다. 그러나 더 긴급한 용무로 인해 나는 여태껏 그에 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초판이 발행된 지 7년이 지났고 그동안에 원시적 가족형태의 연구에서 큰 성과들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면밀한 정정과 증보를 가할 필요가 생겼다. 더구나 이번에 원문이 예정대로 연판(鉛版)된다면 당분간은 정정을 가할 수 없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그래서 나는 원문 전체를 신중히 재검토하고 일련의 증보를 가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현재의 지식 수준에 응당한 고려를 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 나는 이 서문에서 바호펜(Bachofen)으로부터 모오간에 이르는 가족사에 대한 견해의 발전을 간단히 개괄해 보았다. 그것은 주로 배외주의적 색채를 띤 영국 선사학파가, 모오간의 발견에 의해서 수행된 원시사관에서의 변혁을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계속 묵살하면서도 모오간이 거둔 성과에 대해서는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그것을 횡령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나라들에서도 여기저기서 영국의 이러한 수법을 너무나 열심히 모방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 동안 나의 저작은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었다. 이탈리아어로는 L'origine della famiglia, della proprietà privata e dello Stato versione riveduta dall’autore, di Pasquale Martignetti(Benevento, 1885), 그 다음 루마니아어로는 Origina familei, proprietatei private si a statului, traducere de Joan Nadejde. 이것은 야씨(Yassy)에서 발행되는 잡지 『현대』(Contemporanul)의 1885년 9월 호부터 1886년 5월 호까지에 게재되었다. 또 덴마크어로는 Familjens, Privatejendommens og Statens Oprindelse, Dansk, af Forfatteren genuemgaaet Udgave, besörget af Gerson Trier(Köbenhavn, 1888)가 있다. 독어판을 대본으로 한 앙리라베 (Henri Ravé)의 불어판도 인쇄 중에 있다.
60년대 초까지는 가족사를 문제삼을 수도 없었다. 역사과학은 이 분야에서 아직도 완전히 ‘모세 5경’(the five books of Moses)의 영향 하에 있었다. 다른 어떤 책에서보다도 거가에서 더 상세히 묘사되어있는 가부장제적 가족형태는 최고대의 가족형태로 인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일부다처제 (polygamy)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현대의 부르주아적 가족과 동일시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원래 가족이란 아무런 역사적 발전도 전혀 거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기껏해야 원시시대에는 무규율적인 성교의 한 시기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이 인정되었을 따름이다. 일부일처제(monogamy) 이외에도 동양의 일부다처제라든가 인도-티벳의 일처다부제(polyandry)도 역시 알려져 있긴 했다. 그러나 이 세 가지 형태는 역사적 순서대로 배열되지 못하고 아무런 연관도 없이 나열되었다. 고대 세계의 몇몇 주민들과 아직 생존하고 있는 몇몇 야만인들은 아버지의 혈통이 아니라 어머니의 혈통을 따졌으며, 따라서 모계(母系)만이 유일하게 타당한 것으로 인정되었다는 것, 오늘날 각 대륙의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때까지 아직 깊이 연구되지 않았던 일정한 범위의 큰 집단 내부에서의 결혼이 금지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 관습은 세계 도처에서 볼 수 있다는 것— 이러한 사실들은 물론 알려져 있었으며, 또 이러한 실례는 더욱더 많이 수집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을 어떻게 취급해야 할 것인가는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그리하여 타일러 (E.B. Tylor)의 『인류의 원시사 및 문명의 진보에 대한 연구』(Researches into the Early History of Mankind, etc. 1865)에서조차 아직 그러한 사실들은 몇몇 야만인들에게서 볼 수 있는, 불타는 나무에는 철기를 대지 말라는 금기(禁忌)와 또 이와 비슷한 종교적 우행(愚行)들과 함께 단순히 ‘괴상한 관습’ 으로 취급되고 있다.
가족사의 연구는 바호펜의 『모권론』(Mutterrrecht)이 출판된 1861년부터 시작되었다. 거기에서 저자는 다음과 같은 명제를 제기하고 있다. 즉 (1) 사람들은 최초에는 무규율적인 성교— 그는 이것을‘난혼’(hetaerism)이라는 부적당한 말로 표현하고 있다— 생활을 하고 있었다. (2) 이러한 관계는 아버지를 확정할 온갖 가능성을 배제한다. 그러므로 혈통은 모계에 따라서만, 즉 모권에 따라서만 따질 수 있었다. 그리고 초기의 고대인들은 모두 그러했다. (3) 그 결과 여자는 어머니로서, 즉 젊은 세대의 확실히 알려진 유일한 부모로서 높은 존경과 신망을 받았으며 바호펜의 견해에 따르면 더 나아가서 완전한 여성지배 (gynaecocracy)를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4) 여자가 오로지한 남자에게만 속하는 단혼으로의 이행은 태고의 한 종교적 계율의 침해(즉 사실상 같은 여자에 대한 다른 남자들의 전통적 권리의 침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침해에 대해 여자는 일정한 기간 다른 남자들에게 몸을 맡겨서 속죄하자 않으면 안 되었다. 즉 이 침해를 보상하려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바호펜은 그가 열심히 수집한 고대 고전문헌의 여러 구절에서 이 명제들에 대한 논거를 찾고 있다. 그의 의견에 따르면, "난혼’에서 일부일처제로, 또 모권에서 부권으로의 발전은, 특히 그리스인의 경우에는 종교적 관념에 있어서 진보의 결과이며, 새로운 견해를 대표하는 새로운 신들이 낡은 견해를 대표하는 전통적인 신들 사이에 끼어들아가 후자를 점차 뒤로 밀어내게 된 결과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바호펜에 따르면 남녀 상호 간의 사회적 지위에서 역사적 변천이 일어난 것은 사람들의 현실적 생활조건들의 발전 때문이 아니라 이러한 생활조건들이 사람들의 두뇌에 종교적으로 반영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바호펜은 애쉴루스(Aeschylus)의 『오레스테이아』(Orestia)를 몰락해가는 모권과, 영웅시대에 발생하여 승리를 거두고 있는 부권간의 투쟁의 극적 묘사로 보고 있다. 클리템네스트라(Clytemnestra)는 자기의 정부(情夫) 애기스토스(Aegisthus) 때문에 트로이 전쟁에서 돌아오는 자기의 남편 아가멤논(agamemnon)을 죽였다. 그러나 그 여자와 아가멤논 사이에 낳은 아들 오레스테스는 어머니를 죽여서 아버지를 살해한 데 대해 복수한다. 이 때문에 모권을 수호하는 신들인 퓨리이스(Fudes)들은 그를 고소한다. 모권에 따르면, 어머니를 죽이는 것은 무엇으로도 갚을 수 없는 가장 엄중한 범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탁에 의해 오레스테스로 하여금 이런 범죄를 감행케 한 아폴로(Apollo)와 재판관으로 호출된 아테나(Athem)—이 두 신은여기에서는 부권제도라는 새 제도를 대표한다—는 오레스테스를 옹호한다. 아테나는 양쪽의 진술을 듣는다. 전체 소송 사건은 오레스테스와 퓨리이스들 간에 진행되는 논쟁으로 간단히 요약된다. 클리템네스트라는 그녀의 남편을 죽임과 동시에 그의 아버지를 죽여 두 가지범죄를 저질렀다고 오레스테스는 주장한다. 그런데 왜 퓨리이스들은 훨씬 더 죄가 많은 그 여자를 고소하지 않고 오레스테스를 고소하는가? 대답은 그럴 듯하다. 즉 “그 여자는 자기가 죽인 남편과 ‘혈연관계가 없다.’”
혈연관계가 없는 사람을 죽이는 것은 피살자가 자기의 남편일지라도 속죄될 수 있으므로 퓨리이스들 에게는 그것이 아무런 상관도 없다. 그들의 임무는 혈연관계가 있는 자들 간의 살해를 고소하는 것뿐이며, 또한 모권에 따르면 어머니를 죽이는 것은 무엇으로도 갚을 수 없는 가장 엄중한 범죄이다. 그러나 아폴로는 오레스테스를 옹호하며 나선다. 아테나는 문제를 아레오파고스 성원들(Areopagites)—아테나의 배심원들— 의 표결에 붙인다. 투표 결과는 무죄와 유죄가 동수였다. 여기서 아테나는 재판장으로서 오레스테스를 지지하여 그에게 무죄 판결을 내린다. 부권은 모권에 대하여 승리했다. 퓨리이스들 자신이 말하듯이,‘젊은 세대의 신들’이 퓨리이스들을 이겼고, 마침내 퓨리이스들도 새 질서에 복무할 직책을 떠맡는 데 동의한다.
『오레스테이아』에 대한 새로운, 그러나 아주 정당한 이 해석은 바호펜 의 『모권론』 전권을 통하여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대목 중 하나이다. 그러나 이 해석은 동시에 바호펜이, 적어도 당시 애쉴루스가 그러했던 것처럼 , 퓨리이스들과 아폴로와 아테나를 믿고 있었다는 것을 반증해준다. 즉 그는 이 신들이 그리스의 영웅시대에 모권을 전복하고 그 대신 부권을 세웠다는 기적을 믿고 있는 것이다. 종교를 세계사의 결정적인 공간으로 보는 것과 같은 이러한 견해가 결국에 가서는 그야말로 순수한 신비주의에 빠지게 된다는 것은 명백한 일이다. 그러므로 바호펜의 두터운 책자를 통틀어 연구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도 하거니와 결코 반드시 유익한 일도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새로운 길을 개척한 연구자로서의 그의 공적이 빛을 바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처음으로 미지의 원시 상태에서는 무규율적인 성교가 진행되었다는 헛소리 대신에 다음과 같은 것을 논증해 주었기 때문이다. 즉 그는 그리스인들과 아시아인들 사이에서는 단혼아 있기 전에 한 남자와 여러 여자 사이뿐만 아니라 한 여자와 여러 남자사이에도 관습에 아랑곳없이 성교를 맺었던 그러한 상태가 실제로 있었음을 고대 고전문헌에서 허다하게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 관습이 이미 소멸되기는 했지만 그 흔적은 여자가 일정한 기간 다른 남자들에게 몸을 허락하는 것을 대가로 단혼의 권리를 사야 한다는 형태로 남아 있다는 것,그렇기 때문에 혈통은 최초에는 오직 모계에 따라서, 즉 어머니에게서 어머니에게로만 따질 수 있었다는 것,부자관계가 확실한 것으로 되었거나 어쨌든 그것을 인정받게 된 단혼의 시기에 들어와서도 오랫동안 모계(female line)만이 그토록 중요시되었다는 것,또 아이들의 유일하고 확실한 부모로서 어머니의 이러한 초기의 지위는 어머니들에 대해,동시에 여성일반에 대해,그 후에는 그들이 다시는 획득하지 못한 그러한 높은 사회적 지위를 보장해 주었다는 것 등을 논증했다. 바호펜은 물론 자기의 신비주의적 견해로 말미암아 이러한 명제들을 위에서 말한 것처럼 그렇게 명백하게는 정식화하지 못했지만 이러한 명제들을 논증해 놓았다. 그리고 이것은 1861년 당시로서는 그야말로 하나의 완전한 혁명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바호펜의 두터운 책자는 독일어로,즉 그 당시 현대 가족의 선사(先史)에는 제일 관심이 없었던 민족의 언어로 집필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저서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이 분야에서의 첫 후계자가 1865년에 나타났는데,그 역시 바호펜에 대해서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이 후계자는 맥레난(J.F. McLennan)이었다. 그는 자기의 선행자와는 정반대의 사람이었다. 즉 그는 천재적인 신비주의자가 아니라 무미건조한 법률가였으며,거침없는 시인적인 공상가가 아니라 법정에 나선 변호사처럼 그럴듯한 논증을 내놓는 인물이었다. 멕레난은 고대와 현대의 여러 미개인과 야만인들 사이에서, 심지어 문명인들 사이에서까지도 신랑이 혼자서 또는 자기의 친구들과 함께 신부를 그 친척들로부터 외견상 폭력으로 약탈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결혼형태를 발견하고 있다. 이러한 관습은 확실히 한 종족의 남자가 자기의 아내를 다른 곳에서,즉 다른 종족으로부터 실제로 폭력을 휘둘러 약탈하던 옛날 관습의 유물이다. 그러면 이 ‘약탈혼’(marriage by capture)은 어떻게 발생했는가? 남자들이 자기 종족 내에서 넉넉히 아내를 발견할 수 있었던 때에는 그런 식의 결혼을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런데 우리가 역시 흔히 보게 되는 바와 같이 발전하지 못한 종족들에서는 그 내부에서의 혼인이 금지되어 있는 일정한 집단(1865년 경에는 아직도 이 집단을 종족 자체와 동일시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이 있어서 남자는 아내를,또 여자는 남편을 자기 집단 밖에서 구해야만 했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종족들에서는 일정한 집단의 남자가 자기 자신의 집단 내에서만 아내를 구해야 하는 관습이 있다. 맥레난은 전자를 족외혼(exogamous) 집단, 후자를 족내혼(endogamous) 집단이라고 부르고 그저 덮어놓고 족외혼 종족과 족내혼 ‘종족’(tribes) 간의 엄격한 대립을 설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대립은 대부분의 경우나 모든 경우는 아니더라도 많은 경우에,그의 관념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족외혼에 대한 그 자신의 연구를 통해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대립을 자기의 전체 이론의 기초로 삼고 있다. 이 이론에 따르면,족외혼 종족은 다른 종족한테서만 아내를 얻을 수 있는데,야만시기에 상응한 종족 간의 끊임없는 전쟁 상태로 인해 그것은 다만 약탈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계속하여 맥레난은 “이러한 족외혼의 관습은 어다서 발생했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혈연관계나 근친상간(incest)의 관념은 이것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 이 관념들은 훨씬 후기에 와서야 발전한 것이다. 아마 이 족외혼은 여자애를 낳으면 곧 죽여버리는 야만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있는 관습에 기인한 것 같다. 그 결과 개개의 모든 종족 내에서는 남자가 남아돌게 되고 그 직접적인 필연적 결과로서 남자 여럿이 아내 하나를 공유하게 된다. 즉 일처다부제를 보게 된다. 그런데 그 결과 또 아이의 어머니가 누구인지는 알지만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모르게 되었으며,이 때문에 친족관계는 부계(male-line)를 따라서가 아니라 모계(female-line)를 따라서만 따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모권이 발생했던 것이다. 그리고 종족 내에서와 여자의 모자람은 일처다부제에 의하여 완화는 되었지만 제거되지는 않았는데,그 모자람의 두 번째 결과가 곧 타종족의 여자에 대한 전통적인 폭력적 납치였다.


족외혼과 일부다처제는 동일한 원인, 즉 남녀 양성 간의 수적 불균형의 산물이기 때문에 족외혼 인종에서는 모두 일처다부제가 본래부터 실시되고 있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렇가 때문에 족외혼 인종들이 가지고 있던 최초의 친족제도가 어머니 편을 따라서만 혈통을 따진 제도였다는 것은 논쟁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McLennan, Studies in Ancient History, 1866 ;Primitive Marriage, p.124)


맥레난의 공적은 그의 소위 족외혼이라는 것이 각처에 널리 보급되어 있으며,큰 의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지적한 점이다. 그는 결코 족외혼 집단의 존재사실을 발견한 것도 아니며,또 그 사실을 처음으로 옳게 이해한 것도 아니다. 여러 관찰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그보다 앞선 단편적 기록(이것들이야말로 맥레난의 典據였다)은 물론이고 라탐(Latham, Descriptive Ethnology,1859)은 인도의 마가르족들 사이에서 볼 수 있는 이 제도를 상세하고도 정확하게 서술하고,그것이 널리 보급되어 세계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을 지적했다—이것은 맥레난 자신이 인용하고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모오간도 이미 1847년의 이로쿠오이인(Iroquois)에 관한 자기의 서한(American Review)과 1851년 의 『이로쿠오이인 동맹』(The League of the Iroquois)에서 이같은 제도가 이 종족에게도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또 정확히 서술했다. 그런데 우리가 아래에서 보게 되겠지만 맥레난의 변호사적 두뇌는 모권 문제에서 바호펜의 신비주의적 공상이 일으킨 것보다 훨씬 더 큰 혼란을 족외혼 문제에서 일으켰다. 또한 맥레난의 공적은 후에 그 자신도 시인한 바와 같이, 바호펜이 그보다 앞서 예측한 것이지만, 모권적 혈통제도를 초기의 혈통제도로 인정한 점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서도 그의 견해는 명확치 않다. 그는 ‘모계만에 의한 친족관계’(kinship through females only)라는 것을 늘 되뇌이면서 초기의 발전단계에 타당한 이 말을 후기의 발전단계에 대해서도 계속 적용하고 있다. 즉 혈통과 상속권은 물론 아직도 오직 모계로 따지지만, 친족관계는 남자 편에 따라서도 인정•표현되는 그러한 단계에 대해서도 계속 적용하고 있다. 이것은 엄밀한 법률 용어를 일단 제정한 후 그것이 이미 적용될 수 없게 된 그런 상태에 대해서도 그대로 계속 적용하려는 법률가적 현학성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런데 맥레난의 이론은 매우 그럴듯하기는 하나 저자 자신에게도 아마 그다지 확고한 근거를 지닌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 자신은 적어도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아차렸다. 즉 그는 “외견상 여자 약탈의 형태가 다름 아닌 남자 측 친족관계(즉 부계의 혈통)가 지배하는 종족들 사이에서 가장 뚜렷하고 또 명백하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것”(Ibid.,p.140)이라고 말했으며, 또 “유아의 살해는 우리가 알고 있는 한,족외혼과 가장 오랜 친족형태가 병존하는 곳에서는 결코 체계적인 것으로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Ibid., p.146)라고 말했다. 이 두 사실은 그의 설명 방법과 직접적으로 모순된다. 그는 오직 새로운,한층 더 혼란된 가설을 가지고 이 사실들에 대항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론은 영국에서 대단한 찬사와 공명을 받았다. 영국에서는 모두가 맥레난을 가족사학의 창시자로,이 분야의 으뜸가는 권위자로 인정했다. 그에 의한 족외혼과 족내혼의 두 ‘종족’의 대치는 그 개별적인 예외도 있고 변종도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배적인 견해의 기초로 공인되었다. 이러한 대치는 이 연구 분야에 대한 일체의 자유로운 고찰과 일체의 결정적인 진보를 가로막은 장애물로 되었다. 맥레난을 과대평가하는 것은 영국과 또 그의 본을 따르는 다른 나라들에서도 보편적인 현상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순전히 오해에 기초한 그의 족외혼 ‘종족’ 과 족내혼 ‘종족’의 대치로 인해 그가 까친 해독은 그의 연구가 가져다 준 이익보다 오히려 더 크다는 사실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얼마 안 가서 그 이론의 말쑥한 틀에 들어맞지 않는 사실들이 잇달아 나타나기 시작했다. 맥레난은 다만 세 가지 혼인형태, 즉 일부다처제와 일처다부제 그리고 단혼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일단 이점에 주의가 돌려지자 다수의 남자가 다수의 여자를 공유하던 혼인형태가 미발전 종족들 사이에 있었다는 증거가 날이 갈수록 더 많아 발견되었다. 그리고 러보크(Lubbock, The Origin of Civilization, 1870)는 이 군혼(group marriage, communal marriage)을 역사적 사실로 인정했다.
이에 곧 뒤이어 1871년에는 모오간이 새로운 그리고 많은 점에서 결정적인 자료를 발표했다. 그는 이로쿠오이인에게서 실시되고 있는 독특한 친족제도는 그것이,아메리카 원주민들 사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혼인제도와 실제적 산물인 친등관계(the degress of relationship)와는 직접 모순됨에도 불구하고, 아메리카 원주민 전체에 공통적 인친족제도로서 전체 대륙에 퍼져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아메리카 연방 정부를 동원하여 자기가 작성한 질문 용지와 표식에 따라 다른 종족들의 친족제도에 관한 자료도 수집해두었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아냈다. 즉 (1) 아메리카 인디안의 친족제도는 아사아의,그리고 형태가 좀 다르기는 하지만 아프리카와 오스트레일리아의 수많은 종족들 사이에서도 행해지고 있다는 것, (2) 이 제도는 하와이와 기타 오스트레일리아의 여러 섬들에서 지금 소멸단계에 있는 군혼형태에 근거해서 전면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 (3) 그런데 이 혼인형태와 더불어 그 섬들에는 지금은 이미 소멸해버린 한층 더 원시적인 군혼형태에 근거해서만 설명할 수 있는 친족제도도 역시 있다는 것이다. 그는 수집된 자료와 이에 근거한 자기의 결론을 『친족제도와 인척제도』(Systems of Consanguinity and Affinity, 1871)라는 노작으로 발표했으며,그 결과 논쟁을 무한하고도 보다 광범한 영역으로 끌고나갔다. 그는 각종 친족제도에서 출발하여 그에 상응하는 가족형태들을 재현함으로써 새로운 연구방법을 개척했고,인류 선사의 보다 먼 과거를 더듬어 볼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 방법이 적용된다면 맥레난의 말쑥한 입론은 완전히 안개처럼 사라지고 말 것이다.
맥레난은 『원시적 혼인』(Primitive Marriage)으] 신판(『고대사 연구』,Studies in Ancient History, 1876)에서 자기의 이론을 변호했다. 그 자신은 가족사를 순전한 가설로써 그야말로 인위적으로 꾸며대고 있으면서도 러보크와 모오간에게는 그들의 주장의 하나하나에 대한 증거를 요구할 뿐만 아니라, 스코틀랜드 법정에서나 통할 수 있는 그런 논박할 여지가 없는 증거를 요구하고 있다. 그런데 그런 것을 요구하는 그 사람은, 게르만인들 사이에서는 외숙과 생질 간의 관계가 밀접하다는 것(Germania,제20장),브리튼족들은 10명 내지 12명씩의 남자가 아내를 공유한다는 케사르의 이야기,그리고 여타 고대 저술가들이 쓴 미개인들의 아내 공유에 관한 이야기 등에 근거해서 서슴지 않고 이 모든 종족들 사이에서 일처다부제가 지배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것은 마치 자기의 논고를 정당화하기 위한 사료 이용에서는 완전한 자유를 갖고 있으면서도, 변호인에게는 말 한 마디에 대해서도 형식이 완비되고 법률상 효력이 있는 증거를 요구하는 검사의 말을 듣는 느낌을 준다.
군혼은 순전한 허구라고 그는 주장한다. 그리하여 그는 바호펜보다 훨씬 뒤떨어지고 있다. 맥레난은 모오간의 친족제도를 단순한 사회적 예법에 불과하다고 몰아붙이면서 이것은 인디안이 이방인인 백인에 대해서도 형제 또는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실로써 증명된다고 한다. 이것은 천주교의 신부와 수도원장도 역시 ‘아버지’ ‘어머니’라고 불리며, 수사나 수녀 그리고 프리메이슨(freemason)이나 영국 동업조합원들도 의식을 진행하는 집회에서는 상호간에 ‘형제’ ‘자매’라고 부르기 때문에 아버지,어머니,형제, 자매와 같은 명칭은 아무런 내용도 없는 호칭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요컨대 맥레난의 변호는 형편없이 미약한 것이었다.
그러나 맥레난은 아직 한 가지 점에서만은 비난의 화살을 모면했다. 그의 체계 전체의 기초인 족외혼과 족내혼의 두 ‘종족’의 대립은 동요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전체 가족사의 초석으로서 공인받기까지 했다. 이 대립을 설명하려는 맥레난의 노력이 불충분한데다가 그 자신이 인증한 사실과 모순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사람들은 이 대립 자체, 즉 서로 배제하는 자주적이며 독립적인 두 종족 —그 하나는 아내를 그 종족 내부에서 얻으며, 다른 하나는 그렇게 하는 것이 절대로 금지되어 있는— 의 존재는 확고부동한 진리로 생각했다. 예컨대 지로-멜롱(Giraud-Teulon)의 『가족의 기원』(Origines de la famille,1874)과 러보크와 『문명의 기원』(Origin of Civilization, 제4 판,1882)을 비교해 보라.
여기서 모오간은 본 연구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주요 저서 『고대사회』(1877)를 진척시키고 있다. 모오간이 1871년에는 막연하게 추측만 하고 있었던 것이 여기에서는 아주 명확하게 전개되고 있다. 족내혼과 족외혼은 결코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족외혼 ‘종족’의 존재는 지금까지 아무 데서도 입증되지 않았다. 그러나 군혼이 아직 지배적이었던 시대에서 —그런데 군혼이 한때 어디서나 지배하고 있었던 것은 거의 확실하다— 종족은 어머니 편과 혈연관계가 있는 일련의 집단의 씨족들로 갈라졌다. 씨족 내부에서는 혼인이 엄격히 금지되었기 때문에 한 씨족의 남자는 종족 내부에서 아내를 얻을 수 있었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보통이기는 했지만, 그러나 그는 반드시 자기 씨족 밖에서 아내를 얻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와 같이 씨족은 엄격히 족외혼적이었지만, 전체 씨족의 결합체인 종족은 그에 못지 않게 엄격히 족내혼적이었다. 이리하여 맥레난의 인위적인 입론은 그 마지막 흔적까지 완전히 전복되고 말았다.
그러나 모오간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아메리카 인디안 씨족은 더 나아가서 그가 자기의 연구 영역에서 두 번째의 결정적인 진보를 이룩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모권에 따라 조직된 이 씨족에서 그는 고대의 문화 인민들에게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은,후기의 부권에 따라 조직된 씨족의 원형을 발견했다. 종래의 모든 역사가의 수수께끼로 남아있던 그리스 씨족과 로마 씨족이 이제는 인디안 씨족에 의해서 풀리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전체 원시사는 새로운 토대를 갖게 되었다.
시초의 모권제 씨족이 문화 인민들의 부권제 씨족의 선행단계라는 이 새로운 발견은 생물학에서의 다아윈의 진화론이나 정치경제학에서의 맑스의 잉여가치론과 동일한 의의를 원시사에서 가진다. 이 발견으로 모오간은 처음으로 가족사를 개괄할 수 있었다. 거기에서 그는 이제까지 알려진 자료를 가지고 할 수 있는 한에서 적어도 고전적 발전단계를 대체로 확립해 놓았던 것이다. 이것이 원시사 연구에서 새로운 기원을 열어놓았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명백하다. 모권제 씨족은 이 과학 전체의 굴대(pivot)로 되었다. 모오간의 발견은 어떠한 방향에서 무엇을 연구할 것인가 또 이마 거둔 성과를 어떻게 분류할 것인가를 알려주었다. 그 결과 오늘날 이 분야에서는 모오간의 책이 나오기 전과는 달리 급속한 발전을 보고 있다.
모오간의 발견은 이제는 영국에서도 역시 모든 선사학자들에게 인정받고 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횡령당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견해상의 혁명이 다름 아닌 모오간의 덕택이라는 것을 공공연히 인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영국에서 그의 저서는 가능한 한 묵살당하고 있으며, 또 그 자신은 이전의 업적으로 약간의 칭찬을 받는 정도로 매장되어 있다. 또 그들은 그의 서술의 개별적 부분만 열심히 들추어내면서도 그의 진실로 위대한 발견만은 완강히 묵살하고 있다 .『고대사회』의 초판은 절판되었다. 미국에서 이런 종류의 책은 잘 팔리지 않으며, 영국에서는 이 책이 체계적으로 박해를 받고 있는 것 같다. 그리하여 이 획기적인 노작의 독일어 번역판만이 아직도 책방에서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이런 냉대는 묵살의 음모로밖에 볼 수 없으며, 특히 우리의 공인된 선사학자들이 그 저서들에서 순전히 예의상 필요나 동지애의 표시로 동료들의 글을 허다하게 인용하고 있는 것을 고려해 볼 때 더욱 그러하다. 그런데 이 냉대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아마 모오간이 미국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자료의 수집에서는 영국 선사학자들이누구에게나 인정받을 만한 열성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료의 정리와 분류에 필요한 일반적 관점에서는, 즉 간단히 말해서 그들의 사상에서는 바호펜과 모오간미라는 천재적인 두 외국인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대단히 불쾌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독일인이라면 그래도 참을 수 있으나 미국인인데 어찌 참을 수 있겠는가! 미국인을 대할 때 영국인은 모두 애국자가 된다. 합중국에서 나는 그런 우스꽝스러운 실례들을 가끔 보았다. 뿐만 아니라 맥레난은 말하자면 영국 선사학파의 공인된 창시자이며 지도자였다. 그리고 유아살해로부터 일처다부제와 약탈혼을 거쳐 모권제 가족에 이르는 역사에 대한 그의 인위적 입론에 대해 최대의 경의를 표사하는 것이 선사학 분야에서는 일종의 예의처럼 되어 있었다. 또 도저히 상용(相容)될 수 없는 족외혼 ‘종족’과 족내혼 ‘종족’의 존재를 조금이라도 의심하는 것은 불손한 이단자적인 행위로 간주되었다. 그러므로 이 신성한 교조를 분쇄해버린 모오간은 일종의 신성모독 행위를 감행한 셈이다. 더구나 그에 의한 이 교조의 분쇄는 한 마디의 논증으로써 능히 모든 사람을 설복할 수 있을 정도로 명쾌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족외혼과 족내혼 사이를 허둥지둥 동요하던 맥레난 숭배자들은 “어쩌면 우리는 그렇게도 우둔한가,이런 것을 지금까지 발견하지도 못하다니!” 하고 주먹으로 자신의 머리를 두드리다시피 하면서 절규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조차도 아직은 어용학파로 하여금 모오간을 냉대하고 배척케 할 만한 죄가 못 되었다. 그러나 모오간이 도를 지나쳐서 단지문명 —우리 현대사회의 기본 형태인 상품생산의 사회— 에 대해서 푸리에를 연상케 하는 비판을 가할 뿐만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이 사회의 변혁에 대해 칼 맑스가 할 만한 말까지 하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맥레난은 격분하여 “이 역사적 방법이 나로서는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불평을 모오간에게 던지게 되었고,또 제네바와 교수 지로-뗄롱 씨가 1884년에 이 말을 다시 확인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사실상 이 지로-뗄롱 씨는 1874년(『가족의 기원』)에는 아직 맥레난의 족외혼의 미궁에서 허둥지둥 방황하고 있다가 모오간에 의해서 비로소 구원을 받은 사람이다!
모오간이 원시사에 기여한 기타 성과를 여기에서 새삼스럽게 고찰할 필요는 없다. 이에 필요한 모든 것은 나의 저서에 지적되어 있다. 모오간의 주요 저서가 나온 이후 14년 간에 걸쳐 원시 인류 사회사에 관한 자료는 매우 풍부해졌다. 선사학자,여행가, 그리고 전문 원시사가 이외에 비교법학자들이 끼어들어 새로운 자료들과 새로운 관점들을 더러 도입하기도 했다.
그 결과 모오간의 개별적인 가설 중 일부는 흔들리거나 논박당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새로 수집된 자료도 결코 그의 위태한 기본 관점을 버리게 하지는 못했다. 그가 원시사에 세워놓은 질서는 지금도 대체로 타당한 것이다. 심지어 이 위대한 진보의 창시자가 바로 모오간이라는 사실을 감추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이 질서는 더욱 더 일반적 승인을 얻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1891년 6월 16일 런던에서,
프리드리히 엥겔스.








■제I장 선사시대 문화와 단계들


모오간은 깊은 조예를 가지고 안류의 선사에 일정한 체계를 세우려고 시도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의 시기 구분은 자료가 현저히 풍부해져 변경되지 않을 수 없게 되지 않는 한, 언제나 타당성을 지닐 것이다.
야만(Wildheit), 미개 (Babarei), 문명 (Zivilisation)의 주요한 세 시기 중에서 그가 연구하고 있는 것은 물론, 처음 두 시기와 세 번째 사기로의 아행뿐이다. 그는 아 두 시기를 식품(생활수단) 생산의 진보에 따라 다시 낮은 단계, 중간 단계, 높은 단계로 각각 구분하고 있다. 그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아 말하고 있다.

자연에 대한 인류의 우월성의 모든 문제는 이 생산에서의 기교에 달려있다. 모든 생물 중에서 인류만이 식품의 생산을 절대적으로 지배할 수 있게까지 되었다…… 인류 진보와 온갖 큰 시기들은 생존자원 확대의 시기와 어느 정도 직접 합치한다.

가족의 발전도 이와 병행은 하지만, 여기서 그 시기는 그렇게 확실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1. 야만

(a) 낮은 단계 : 인류의 유년기. 인간들은 아직 자기의 원시적 거처인 열대 또는 아열대의 삼림 속에서 살았다. 적어도 그 일부는 나무위에서 살았다. 그들이 맹수들 가운데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이 때문이다. 먹을 것은 열매, 견과(堅果 ,Nüsse), 뿌리 등이었다. 이시기의 주요한 성과는 분절 언어 (artikulierter Sprache)의 발생이다. 유사(有史) 시기(geschichtlichen Periode)에 와서 알려진 인민들 중 이러한 원시 상태에 있었던 것은 하나도 없다. 이 원시 상태가 아마 수천 년 계속되었을 것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직접적인 증거를 가지고 증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인간이 동물계로부터 발생했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이러한 과도 상태를 가정하지 않을 수 없다.

(b) 중간 단계 : 어류(여기에다 우리는 갑각류,패류,기타 수생동물도 포함시킨다)를 잡아먹고 불을 사용함으로써 시작된다. 이 두 가지는 서로 관련되어 있다. 어류라는 것은 불을 이용해서만 먹기 좋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새로운 식품의 이용과 더불어 더 이상 기후나 지리적 조건에 의존하지 않게 되었다. 그들은 야만 상태에서조차 하천과 해안을 따라 지구상의 대부분 지역에 퍼져 살 수 있었다. 초기의 석기시대,즉 소위 구석기시대에 만든 조잡한 석기는 전부 또는 대부분이 이 시기의 것들인데, 이것들아 전 대륙에 퍼져 있다는 사실은 그만큼 널리 이동했다는 증거이다. 새로운 지역으로의 이주와 그 부단한 적극적인 탐색은 마찰에 의한 불의 획득과 함께 새로운 식품을 제공했다. 즉 뜨거운 재나 불구멍(흙 아궁이) 속에서 구워낸 전분을 함유한 뿌리 와 괴경(塊莖, Knollen), 또는 최초의 무기인 몽둥이나 창의 발명과 함께 때때로 보충 음식으로 쓰인 짐승 고기 같은 것이 바로 그것이다. 책에 씌어 있는 것처럼 수렵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즉 오로지 수렵만으로 생활하는 사람들은 결코 없었다. 그렇게 하기에는 수렵이 너무나 불확실한 수확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이다. 식료 자원의 공급이 항상 불안정했기 때문에 이 단계에서 식인(食人)이 시작된 듯한데,그것은 그후 오랫동안 존속된다. 오스트레일리아인과 많은 폴리네시아인은 지금도 이 야만의 중간 단계에 머물러 있다.

(c) 높은 단계 : 활과 화살의 발명으로 시작된다. 이것을 이용해서 짐승 고기가 일상적 음식이 되고 수렵이 정상적인 노동의 일부분으로 되었다. 활과 시위와 화살은 벌써 매우 복잡한 도구로서 그 발명은 오래 축적된 경험과 보다 다듬어진 지력 (Geisteskräfte)을 전제로 하며,따라서 기타 허다한 발명들도 역시 그와 동시에 알려져 있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활과 화살은 이미 알고 있지만 아직 토기 제조법(이것을 모오간은 미개로의 이행의 시초로 잡는다)을 모르고 있는 사람들을 서로 비교해 보면, 벌써 촌락 형식으로 정착 생활을 한 약간의 단서들과 어느 정도 생활수단 생산을 통제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우리는 목제 용기와 도구,나무껍질 섬유로(직기 없이) 만든 수직물,나무껍질이나 갈대로 엮은 광주리, 연마한(신석기시대의) 석기 등을 실제로 발견한다. 불과 돌도끼로써 대부분의 경우에 이마 통나무배를 만들 수 있었으며,각재와 널판지가 때때로 가옥 건축에 사용되었다. 이러한 모든 성과는 예컨대 아메리카 서북부 인디안들에게서 볼 수 있다. 그들은 활과 화살은 알고 있었으나 토기 제조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야만시대의 활과 화살은 미개시대의 철검이나 문명시대의 총포와 같은 결정적인 무기였다.

2. 미개

(a) 낮은 단계 : 토기 제조법의 도입으로부터 시작된다. 이것은 여러 경우에서 증명될 수 있고 또 도처에서 그러했을 것으로 믿어지는 사실인데, 엮어서 만든 용기나 목제 용기를 불에 견디도록 진흙을 바른 데서 시작된 것이다. 그 후 얼마 안 가서 발라놓은 진흙이 내부의 용기 없이도 그 목적에 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는 발전 과정을 일정한 시기의 모든 사람에게,그 거주지와는 상관없이 타당한 일반적인 것으로서 고찰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미개에 들어오면서부터는 두 대륙의 자연 조건의 차이가 중요성을 띠게 된다. 미개 시기의 특징적인 계기는 동물을 길들이고 사육하며 식물을 재배하는 것이다. 동부 대륙, 즉 소위 구세계에는 길들이기에 적당한 거의 모든 동물과,한 가지를 제외하고는 재배할 수 있는 모든 곡물이 있었다. 서부 대륙, 즉 아메리카에는 길들일 수 있는 전체포유동물 중 오직 라마(llama)만 있었고 그것도 남방 일부에만 있었으며, 전체 재배 곡물 중에서는 한 가지뿐이지만 그 대신 가장 좋은 것, 즉 옥수수가 있었다. 이 자연 조건의 차아로 말미암아 이때부터 두 반구의 주민은 제각기 딴 길을 따라 발전하게 되고,각 발전단계의 경계선도 두 반구에서 각각 달라지게 된다.

(b) 중간 단계 : 동부 대륙에서는 가축을 길들이는 것으로부터 시작되고, 서부 대륙에서는 관개(Berieselung)에 의해 식용작물을 재배하며 아도브(Adoben, 햇볕에 말린 벽돌)와 돌을 건축에 사용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서부 대륙부터 시작하자. 그것은 유럽인이 아메리카를 정복할 때까지 이 대륙에서는 어느 곳이나 미개의 중간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미개의 낮은 단계에 있던 인디안(미시시피강 동부 지역에 사는 종족은 모두 이 단계에 있었다)은 그들이 발견된 당시 이미 옥수수라든가 혹은 호박, 참외, 기타 야채의 재배법을 알고 있었는데, 이것은 그들의 극히 중요한 식품이었다. 그들은 울타리를 친 마을에서 목조 가옥에 살고 있었다. 서북부의 종족들, 특히 콜롬비아강 유역 주민들은 아직도 야만의 높은 단계에 있었으며 토기 제조법도 식물 재배도 모르고 있었다. 이와는 반대로 뉴멕시코에 사는 푸에블로(pueblos)라고 불리는 인디안, 멕시코인, 중앙아메리카인 및 페루인은 정복 당시 미개의 중간 단계에 있었다. 즉 그들은 아도브나 돌로 지은 성채 비슷한 가옥에 살고 있었으며, 인공적으로 관개되는 채마밭에다 지형과 기후에 따라 옥수수나 기타 여러 가지 작물을 재배하고 있었는데, 이것들은 그들의 중요한 식료자원이었다. 그리고 또 몇몇 종류의 동물,즉 멕시코인은 칠면조와 기타 조류를, 페루인은 라마를 각각 길들이기까지 했다. 그 밖에도 그들은 금속의 가공도 알고 있었으나 철만은 예외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아직 석제의 무기나 도구 없이는 꾸려나갈 수가 없었다. 스페인에 의한 정복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그 이상의 독자적 발전을 지속시켜 나갈 수가 없었다.
동부 대륙에서 미개의 중간 단계는 젖과 고기를 대주는 동물을 길들이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대륙에서는 작물 재배가 이 시기에도 아직 매우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것 같다. 가축을 길들이고 사육하여 대가축군을 형성하게 됨에 따라 아리안인(Arier)과 셈인(Semiten)이 기타 미개인 군(群)에서 분리된 것이 확실하다. 유럽과 아시아의 아리안인은 가축에 대해서 아직도 다 같은 이름으로 부르고 있지만 재배 작물에 대해서는 거의 다르게 부르고 있다.
가축군의 형성으로 말미암아 적당한 조건이 있는 곳에서는 목축민 생활이 시작되었다. 즉 셈인은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의 초원에서, 아리안인은 인도, 옥수스(Oxus), 약사르테스(Jaxartes) 돈(Don)및 드네프르(Dnjepr)강 유역 등의 초원에서 그러했다. 이런 목초 지대의 변두리에서 처음으로 동물을 길들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후세 사람들은 목축민의 발생지가 인류의 요람지이기는커녕 오히려 인류의 야만 시기와 선조나 미개의 낮은 단계 사람들조차 거의 살 수 없는 그런 지역이었던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사실은 그와 반대이다. 즉 일단 목축민 생활에 익숙하게 된 이 중간 단계의 미개인들은 하천의 초원을 버리고 자기 선조들이 거처했던 삼림 지대로 자진해서 돌아갈 생각은 도저히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때문에 셈인과 아리안인은 북부와 서부로 쫓겨났을 때에도 서부 아시아나 유럽의 삼림 지대로는 이주할 수 없었다. 그들은 아직 이러한 척박한 토지에서 곡물 재배를 이용한 가축사육 능력이 없었고, 특히 겨울을 보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지대의 곡물 재배는 우선 가축 사료에 대한 필요에서 발생했으며, 그 후에야 비로소 사람들의 중요한 식품 원천으로 되었다고 보는 것이 아주 정확할 것이다.
아리아인과 셈인의 두 인종이 뛰어난 발전을 보게 된 것은 아마 그들이 육류와 젖을 풍부히 섭취한 탓일 것이며, 특히 그것은 아이들의 발육에 좋은 영향을 준 탓이라고 여겨야 할 것이다. 사실상 뉴멕시코의 푸에블로 인디안은 거의 초식만 했기 때문에, 미개의 낮은 단계에 있으면서도 짐승고기와 물고기를 더 많이 먹는 인디안들보다 뇌의 크기가 작았다. 하여간 이 단계에서는 식인이 점차 없어지고 다만 종교적 행위로서 혹은—이 경우에는 거의 같은 것이지만— 무술(巫術)로서만 보존되었다.

(c) 높은 단계 : 철광석의 제련에서 시작되어 문자와 발명과 문헌의 기록에 문자를 이용하는 것을 거쳐서 문명으로 이행한다. 이 단계는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동반구(東半球)에서만 독자적으로 거친 것인데, 생산 분야에서의 성과는 그 이전의 모든 단계를 합친 것보다도 더 풍부하다. 영웅시대의 그리스인,로마가 건설되기 직전의 이탈리아 종족, 타키투스가 서술한 게르만인, 바이킹 시대의 노르만인이 이에 속한다.
이 단계에서 우리가 무엇보다도 먼저 보게 되는 것은 가축이 끄는 철제보습날(Pflugschar)이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대규모의 농업, 즉 전야 경작(Feldbau)이 가능하게 되었으며 또 그와 함께 당시의 사정으로서는 사실상 무한하다고 할 만한 생활수단의 증대가 가능하게 되었다. 그 다음에는 삼림의 개간과 그것을 경지나 목장으로 개척하는 것을 보게 되는데, 이것 역시 대규모로 하자면 철도끼나 철삽 없이는 불가능했다. 이와 함께 인구도 급속히 증가하여 그리 크지 않은 지역에 밀집하여 살게 되었다. 전야 경작을 하기 전 시기에 50만의 사람들이 단일한 중앙 조직 하에 통일되려면 그야말로 비상한 조건이 있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런 조건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미개의 높은 단계의 전성기는 호메로스의 서사시, 특히 『일리아드』(Ilias)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발전한 철기,대장간 풀무,손절구,도기 제조용 회전대, 식물성 유지 및 주류의 제조,공예로 넘어가고 있는 발전된 금속 가공,짐차와 전차(戰車),각재와 널판지를 이용한 선박 건조,예술로서의 건축의 시작, 이빨형 성벽과 탑으로 둘러싸인 도시, 호메로스의 서사시와 모든 신화—바로 이러한 것들은 미개 시기에 그리스인들이 문명에 넘겨준 중요한 유산이다. 만일 이러한 것을 게르만인—이들은 호메로스 시대의 그리스인들이 보다 높은 단계로의 이행을 준비하고 있던 그 문화 단계의 입구에 있었다—에 관한 케사르의 저술과 비교해 보고, 나아가 타키투스가 쓴 것과 비교해본다면 미개의 높은 단계가 생산의 발전에서 얼마나 많은 성과를 거두었는가를 알 수 있다.
나는 모오간의 견해를 좇아 이상과 같이 인류가 야만과 미개를 거쳐 문명의 시초에 이르는 모습을 대강 서술했다. 이 광경에는 새로운 특징이 이미 아주 풍부하다. 더구나 그것들은 직접적으로 생산에서 나왔기 때문에 논쟁할 여지가 없다. 그렇지만 이 광경은 우리가 여행을 끝냈을 때 우리 앞에 전개될 광경과 비교하면 빈약하고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때에야 비로소 미개에서 문명으로의 이행과 이 양자 간의 현저한 대립이 충분히 천명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우선 모오간의 시기 구분을 다음과 같이 개괄할 수 있다. 즉 야만一주로 기성의 자연 산물 획득의 시기, 인간이 만든 것들은 주로 그 자연 산물을 획득하기 위한 보조도구로 사용된다. 미개一목축과 경작을 도입하는 시기, 인간의 활동에 의한 자연물 공급의 증대 방법을 습득하는 시기.  문명一자연물에 대한 보다 나은 가공술을 습득하는 시기, 본래적 의미에서의 공업 및 기술의 시기가 바로 그것이다.



■제Ⅱ장 가족


지금도 아직 뉴욕주에 거주하고 있는 이로쿠오이인들과 함께 자기 생애의 대부분을 보내고, 그 중 한 종족(세네카 종족)의 양자가 된 모오간은 자기네들의 실제 가족관계와 모순되는 친족제도가 그들 사이에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 사이에서는 모오간의 소위 ‘대우혼가족’(對偶婚家族, Paarungsfamilie), 즉 쌍방에서 용이하게 이혼할 수 있는 단혼제가 지배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부부의 자녀들은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었고 또 인정하는 바였다. 아바지,어머니, 아들,딸, 형제, 자매란 칭호를 누구에게 쓸 것인가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호칭의 실제적 사용은 이것과 모순되고 있다. 이로쿠오이인의 남자는 자기 자신의 자녀들뿐만 아니라 자기 형제의 자녀들까지도 자기의 아들,자기의 딸이라고 부르며, 이 아이들은 또 그를 아버지라고 부른다. 그런데 자기 자매의 자녀에 대해서는 그는 자기의 조카 또는 조카딸이라고 부르며,그 아이들은 그를 아저씨라고 부른다. 이와 반대로 이로쿠오이인의 여자는 자기 자매의 자녀들을 자기 자신의 자녀들과 같이 자기의 아들,자기의 딸이라고 부르며,그 아이들은 그 여자를 어머니라고 부른다. 그런데 자기의 남자 형제의 자녀들에 대해서 그 여자는 조카 또는 조카딸이라고 부르며,자기 자신은 아주머니라고 불린다. 형제의 자녀들은 서로 형제 또는 자매라고 부르며,이와 꼭 마찬가지로 자매의 자녀들도 역시 서로 형제자매라고 부른다. 이와 반대로 한 여자의 자녀들과 그 여자의 남자 형제의 자녀들은 서로 종형제 또는 종자매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것은 결코 공허한 호칭이 아니라 혈연관계의 원근 여부 및 동일한 항렬(Gleichheit)인가 아닌가에 대한 실제적 관념의 표현이다. 또 이 관념은 개개인의 수백 가지 친족관계를 능히 표시해줄 수 있는 완성된 친족제도의 기초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제도는 모든 아메리카 인디안들 사이에서만 전면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지금까지 한 개의 예외도 발견되자 않았다) 인도의 원주민, 데칸고원의 드라비다 종족 그리고 힌두스탄의 가우라 종족들 사이에서도 거의 그대로 행해지고 있다. 남인도 타밀족의 친족관계 표시법과 뉴욕주의 세네카 종족, 즉 이로쿠오이인의 친족관계 표시법은 지금도 200종 이상의 친족관계에서 서로 같다. 그리고 이 인도 종족들 사이에서도 모든 아메리카 인디안들 사이에서와 마찬가지로 현존 가족형태에서 출발하는 친족관계는 역시 친족제도(Verwandtschaftssystem)와 모순되고 있다.
그러면 어째서 이렇게 되는가? 모든 야만인과 미개인들의 사회제도에서 친족관계가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그렇듯 광범위하게 보급되어 있는 그 제도를 몇 마디의 문구로써 넘겨 버릴 수는 없다. 아메리카에서 널리 보급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인종이 전혀 다른 아시아인들 사이에도 있고,또 형태가 좀 다를 뿐이지 아프리카나 오스트레일리아의 어디서나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이러한 제도에 대해서 우리는 역사적으로 설명해야만 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맥레난처럼 몇 마디의 문구로써 넘겨 버려서는 안된다. 아버지,아들, 형제,자매라는 칭호는 단순한 존칭이 아니며,아주 명확하고 극히 엄격한 서로간의 의무를 수반하는 것으로서 이 의무의 총체가 이 사람들의 사회제도의 본질적인 부분을 이루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는 해답을 찾게 되었다. 샌드위치 제도(하와이)에는 현 세기 전반까지도 아직 아메리카식이나 고대 인도식의 친족제도가 요구하는 바로 그러한 아버지와 어머니,형제와 자매,아들과 딸, 아저씨와 아주머니,조카와 조카딸이 있던 가족형태가 존재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하와이 제도에서 실시되고 있던 친족제도도 역시 이 섬에 실제로 있던 가족형태와는 일치하지 않았다. 즉 그 곳에서도 형제자매의 자녀들은 예외 없이 모두 형제자매로 인정되고, 또 그들은 비단 자기 어머니와 어머니 편 자매의 공동의 아이들로나 자기 아버지와 아버지 편 형제의 공동의 아이들로 인정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자기들의 모든 부모의 형제자매 전체의 공동의 아이들로 인정되고 있다. 따라서 아메리카식 친족제도는, 아메리카에는 사라졌으나 아직 하와이 제도에서 실제로 보게 되는 보다 원시적인 기족형태를 전제로 하고 있고,다른 한편 하와이의 친족제도는 그보다 더 원시적인 가족형태가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물론 오늘에 와서는 이런 가족형태가 있었다는 것을 어디서도 증명할 수 없다. 하지만 틀림없이 그것은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다면 그에 상응하는 친족 제도가 발생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모오간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가족은 능동적인 요소이다. 그것은 결코 한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보다 낮은 단계로부터 높은 단계로 발전함에 따라, 보다 낮은 형태로부터 보다 높은 형태로 이행한다. 반대로 친족제도는 수동적이다. 그것은 오랜 시간이 경과한 후에야 비로소 가족이 수행한 진보를 기록하며, 가족이 근본적으로 변화할 때 비로소 근본적인 변화를 이룩하게 된다.

맑스는 다음과 같이 부언한다. “그리고 정치, 법률, 종교,철학 등의 각 체계 일반에서도 사태는 이와 꼭 같다.” 가족이 발전을 계속하고 있는 동안에 친족제도는 굳어진다. 그리고 친족제도가 관습에 따라 존속하는 동안에 가족은 친족제도의 범위를 벗어나 발전하는 것이다. 그러나 퀴비에(Cuvier)가 파리 근처에서 발견된 유대동물(有袋動物)의 몇 개의 뼈에 근거하여 그 뼈가 유대동물의 것이며, 그 곳에는 사멸한 유대동물이 일찍이 살고 있었다는 것을 결론지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의 정확성을 가지고, 우리는 역사적으로 전해받은 친족제도에 근거하여 지금은 없지만 이 친족제도에 상응하는 가족형태가 일찍이 있었다는 것을 단언할 수 있다.
방금 언급한 친족제도와 가족형태는 각 아이들에게 여러 명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 지배하고 있는 것과는 다르다. 하와이의 가족에 상응하는 아메리카식 친족제도에 따르면, 형제와 자매는 같은 한 아이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될 수 없다. 그러나 하와이의 친족제도는 그와 반대로 이것이 규칙으로 되어 있던 가족을 전제로 한다. 여기서 우리는 지금까지는 보통 한 가지밖에 없는 것으로 생각되었던 가족형태와는 직접 모순되는 일련의 가족형태를 보게 된다. 종래의 관념에 따르면 다만 단혼, 그리고 이와 함께 일부다처제, 기껏해야 일처다부제가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공적 사회에 의해 제기된 이 장애물들이 사실상 슬그머니 그리고 염치없이 간과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종래의 관념은 도학자연한 속물답게 침묵을 지킨다. 그런데 원시사 연구가 보여 주는 바에 따르면, 남편들이 다처제 생활을 하고 있는 한편 그 아내들도 동시에 다부제 생활을 하며, 이에 따라 쌍방의 아이들이 그들 모두의 공동의 자녀로 인정되던 상태가 있었다. 그런데 이런 상태 자체는 또 단혼으로의 최종적인 이행에 이르기까지 숱한 변천을 겪는다. 즉 공동부부의 유대가 포섭하는 범위가 최초에는 대단히 광범하다가 점차 축소되어 나중에는 오늘날 지배하고 있는 바와 같은 한 쌍 한 쌍의 부부만이 남게 되는 것이다.
모오간은 이와 같이 가족의 역사를 거꾸로 훑어감으로써 그의 대다수의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한 종족 내에서 구속 없는 성교가 지배하고 있는 원시 상태, 즉 모든 여자가 모든 남자에게 또 모든 남자가 모든 여자에게 평등하게 속해 있던 원시 상태가 있었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 이러한 원시 상태에 관해서는 이미 전 세기부터 언급들이 있었지만 그것은 일반적인 언급에 지나지 않았다. 바호펜은 처음으로—이 점이 바로 그의 큰 공적의 하나다— 이 문제를 진지하게 취급하고 이런 상태의 흔적을 역사 이야기라든가 종교적 전설에서 탐구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그가 발견한 그 흔적은 결코 무규율 성교라는 하나의 사회 단계로 우리를 되돌아가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후기의 형태인 군혼으로 되돌아가게 한다. 바호펜이 말하는 바와 같은 원시적인 사회단계가 실지로 존재했다 하더라도 아득하게 먼 시대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과거에 있었다는 직접적 증거를 미발전된 야만인들 사이에서 사회적 화석으로서 발견한다는 것은 거의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다. 바호펜의 공적은 바로 그가 이 문제를 연구의 전면에 내걸었다는 점에 있다.
근래에 와서는 인류의 성생활의 이러한 초기 단계를 부인하는 것이 유행으로 되고 있다. 인류에게 이러한 ‘치욕’을 면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에 대해 그들은 그러한 단계에 대한 아무런 직접적인 증거도 없다는 것을 구실로 삼을 뿐만 아니라, 특히 다른 동물계의 실례를 구실로 삼고 있다. 르뚜르노(Letourneau,『혼인 및 가족의 진화 L’evolution du mariage et de la families』 1988)는 동물계에서 수많은 사실을 수집했는데, 그에 의하면 동물계에서도 무규율적인 성교는 낮은 발전단계에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사실로부터 내가 결론지을 수 있는 것은 인류와 인류의 원시 생활조건에 대해서는 그 사실들이 절대로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한다는 것뿐이다. 척추동물의 비교적 오랜 교미관계는 예컨대 조류의 경우에 부화하는 동안 암컷이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생리학적 원인으로써 충분히 설명된다. 조류의 경우에 볼 수 있는 엄격한 일부일처제의 실례는 인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증명해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인류는 조류에서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만일 엄격한 일부일처제가 모든 덕행 중에서 최상의 것이라면 50 내지 200의 편절(片節,Proglottiden) 혹은 체절(體節,  Leibesabschnitte)이 각기 완전한 암수의 생식기관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체절 하나하나가 자기 교미를 하면서 일생을 지내는 촌중(Abschnitte)이야말로 당연히 최고 영예를 누려야 할 것이다. 그런데 포유동물의 경우만 보면 여기서는 무규율 성교(Regellosigkeit),군혼 비슷한 것,일부다처제(Vielweiberei), 단혼제(Einzelehe) 등 온갖 형태의 성생활을 찾아볼 수 있다. 다만 일처다부제(Vielmännerei)만은 없는데 이것은 인간에게만 있을 수 있었다. 우리와 제일 가까운 친척인 원숭이류의 경우에도 암수의 배합은 아주 다양하다. 그런데 범위를 좀 더 좁혀 4종의 유인원만을 가지고 볼 때 르뚜르노는 이 유인원들이 때로는 일부일처제 생활을 하고,때로는 일부다처제 생활을 한다고 말하는 수밖에 없다. 지로-뗄롱의 책에 인용되어 있는 바에 따르면, 소쉬르(Saussure)는 그 유인원들이 일부일처제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유인원의 일부일처제에 관한 웨스터마아크(Westermarck,『인류혼인사 The History of Human Marriage』,London,1891)의 최근 주장도 아직은 결코 증거로 될 수 없다. 요컨대 현재 있는 자료라는 것은 정직한 르뚜르노가 인정하는 다음과 같은 말 따위의 것이다.

그러나 포유동물들에게는 지적 발전의 정도와 교미형태 간에 엄밀한 관계가 전혀 없다.

또 에스피나스(Espinas, 『동물 사회에 관하여 Des societes animates』, 1877)는 솔직히 이렇게 말하고 있다.

군(群,Horde)은 동물계에서 볼 수 있는 최고의 사회적 집단이다. 그것은 가족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처음부터 가족과 군과는 적대적 관계에 있는 것으로서, 그것들은 반비례하여 발전하는 것이다.

위에서 이미 명백히 보아 온 바와 같이, 우리는 유인원의 가족적 집단이라든가 기타 공동생활 집단에 대하여 확실한 것은 사실상 거의 없는 실정이다. 이 문제에 관한 자료들은 직접 서로 모순되고 있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야만시대의 인간 종족에 관한 자료조차도 극히 모순적이며, 따라서 비판적인 검토와 선택이 절실히 요구된다. 그런데 원숭이 사회는 인간 사회보다 훨씬 더 관찰하기 힘들다. 따라서 우리는 당분간, 이 절대로 믿을 만한 것이 못되는 자료를 기초로 내린 결론을 일체 거부하지 않으면 안된다.
반대로 위에서 인용한 에스피나스의 명제는 우리에게 보다 더 확실한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고등동물의 경우에 군(群)과 가족은 상호 보완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 대립되는 것이다. 에스피나스는 교미기에 수컷의 질투로 인해 모든 사회적 군의 유대가 약화되며, 때로는 한 군이 일시 해체되는 광경을 매우 훌륭히 보여주고 있다.

가족이 긴밀히 단합된 곳에서 군은 다만 드문 예외로서만 형성된다. 이와 반대로 자유로운 성교나 일부다처제가 지배하는 곳에서는 군이 거의 저절로 형성된다. …군이 형성되자면 가족적 유대가 약화되고 개체가 또다시 자유롭게 되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조류의 경우에 는 조직된 군을 보기가 극히 드물다. 이와 반대로 포유동물의 경우에는 어느 정도 조직된 사회를 볼 수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여기서는 개체가 가족에 흡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군으로서의 공통성에 대한 감정이 발생하는 데 있어서 최대의 적은 가족적 공통성에 대한 감정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만일 가족보다 더 높은 사회형태가 발전했다면 그것은 이사회형태가 근본적인 변화를 겪은 가족을 해체•흡수한 결과로서만 발생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바로 이러한 과정을 통해 그 가족이 나중에 무한히 더 좋은 조건 밑에 새로이 조직될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에스피나스의 『동물사회에 관하여』, 지로-뗄롱의 『혼인과 가족의 기원』,1884, pp.518〜520에서 인용)

여기서 명백한 바와 같이 동물 사회는 인간 사회를 추리하는 데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긴 하지만, 그것은 소극적 가치일 뿐이다. 고등척추동물들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한두 가지 가족형태, 즉 일부다처제 및 개별적 부부들의 동서(同棲,Einzelpaarung)가 있을 뿐이다. 그 어느 경우에도 다만 한 마리의 성장한 수컷만이,즉 하나의 남편만이 허용된다. 수컷의 질투는 동물의 가족을 결속시키는 힘인 동시에 가족을 한정하는 장애물이기도 하기 때문에,그것은 동물의 가족을 군과 대립시킨다. 이러한 질투로 인해 보다 높은 군서형태(Geselligkeitsform)인 군은 어떤 경우에는 존속하지 못하게 되며, 또 어떤 경우에는 약화되거나 또는 교미기 동안 분해되며, 기껏해야 군은 그 발전이 저지될 뿐이다. 이것만 가지고서도 동물의 가족과 인류의 원시 사회는 서로 일치하지 않으며,동물 상태에서 갓 벗어난 원시인은 가족을 전혀 몰랐거나,또는 기껏해서 동물들 사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그러한 가족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진화 과정에 있던 인류와 같이 방어력이 없는 동물도 더러는 고립된 상태에서도 살아나갈 수 있었다. 웨스터마아크가 사냥꾼들의 이야기에 근거해서 말한 바에 따르면, 고릴라나 침팬지의 경우에 그러하듯이 당시 최고의 군서형태는 한 쌍이 되어 사는 것이었다. 그러나 동물 수준에서 한층 더 발전하여 자연이 지시하는 최대의 진보를 수행하자면 또 하나의 요인이 필요했다. 즉 개체의 방어능력의 부족을 군의 단합된 역량과 집단적 행동으로써 보충할 필요가 있었다. 현재의 유인원의 생활조건을 가지고는 도저히 인류로의 이행을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이 유인원들은 점차 멸망할 운명을 지녔으며 어쨌든 쇠퇴하고 있는, 옆길로 들어선 방계(Seitenlinien)라는 인상을 준다. 이것만으로도 이 유인원 가족형태에서 원시인의 가족형태를 결코 짐작해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그런데 성숙한 수컷들이 참고 질투하지 않게 된 것이야말로 동물을 인간으로 전환시킬 수 있을 만큼 비교적 크고 영속적인 집단을 형성케 한 첫째 조건이었다. 그러면 실제로 역사에서 명백하게 증명할 수 있고,또 현재도 아직 이러저러한 데서 연구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되고 가장 원시적인 가족형태는 어떤 것인가? 그것은 군혼 (Gruppenehe)이다. 이런 혼인형태 하에서는 남자의 전체 집단과 여자의 집단이 서로 관계를 가지며, 질투의 여지는 거의 남지 않게 된다. 그리고 또 보다 후기의 발전단계에서 우리가 예외적인 형태로서 보게 되는 일처다부제는 질투심과는 전혀 상용되지 않는 것이며,그렇기 때문에 동물계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군혼형태들은 그야말로 유달리 복잡하다. 즉 그것들은 명확히 보다 초기의 단순한 성교형태를 말해주는 동시에 결국에 가서는 동물 상태로부터 인간 상태로의 이행에 상응하는 무규율 성교의 시대를 말해주는 것이다. 따라서 동물의 혼인을 예로 드는 것은 우리가 단연코 떠나지 않으면 안되었던 바로 그 지점으로 우리를 되돌아가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 무규율 성교란 무엇을 말하는가? 이것은 현재나 혹은 먼 과거의 어느 시기에 있었던 그런 금제(禁制, Verbotsschranken)가 당시에는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본 바와 같아 질투의 울타리는 이미 무너졌다. 그런데 질투의 감정이 비교적 늦게 발전했다는 것은 지극히 확실하다. 근친상간의 관념도 마찬가지라고 말할 수 있다. 형제와 자매가 최초에는 부부였을 뿐 아니라,부모와 자녀 간의 성교도 아직 많은 인종들 사이에서 허용되고 있다. 뱅크로프트(Bancroft, 『북아메리카 태평양 연안 주들의 토착인종 The Native Races of the Pacific state of North America』 1875, Vol. 1.)는 베링 해협의 카비아트인(Kabiats),알래스카 부근의 카디아크섬 주민(Kadiaks), 영령 북아메리카 오지인 틴네인들(Tinnehs) 사이에 이런 관계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으며. 르뚜르노는 치피와 인디안(Chippeway-Indianern),칠레의 쿠쿠스인(Cucus),인도 후방(영어판은 버어마一역주)와 카라이브인(Karaiben), 카렌인(Karens)들 사이에서도 동일한 사실에 대한 자료를 수집•제공하고 있다. 파르티아인(Parther), 페르시아인(Parser), 스키타이안(Scythen), 훈인(Hunnen) 등등에 관한 고대 그리스인과 로마인의 이야기에 관해서는 논할 여지가 없다. 근친상간이 발견—이것은 하나의 발견이며, 그것도 극히 가치있는 발견이다—되기 전에는 형제와 자녀 간의 성교가 세대를 서로 달리 하는 사람들 간의 성교보다 더 혐오스러운 것일 수는 없었다. 사실 후자의 경우는 간혹 극히 속물적인 나라들에서 지금도 일상적으로 자행되고 있다. 60세를 넘은 늙은 ‘처녀’라도 재산만 많으면 30세쯤 되는 젊은 남자와 결혼하는 수가 더러 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원시적인 가족형태에서 그것과 연결되어 있는 근친상간의 관념—우리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며, 또 종종 그것과 직접 모순되는 관념— 을 제거한다면 무규율적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성교형태를 얻게 된다. 그러한 형태는 나중에 와서 관습적으로 정해졌던 제한이 아직 없었던 한에서 무규율적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직 일상적인 실제 생활에서 성교의 완전한 무질서가 불가피하게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개별적 부부들의 일시적인 동서는 현재 군혼의 경우에 있어서조차 대개 그러한 것처럼 결코 배제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최근 웨스터마아크가 이런 원시상태를 부정하면서 양성(兩聖)이 아이를 낳을 때까지 사는 것을 모두 혼인이라고 한다면,이런 종류의 혼인은 무규율 성교상태 하에서도 무규율성과는,즉 성교에 대한 관습적으로 제정된 제한의 결여와는 조금도 모순됨이 없이 충분히 존재할 수 있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물론 웨스터마아크의 입장의 출발점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즉 “ 무규율성은 개인적 애정의 억압을 포함한다.” 따라서 “매음은 그 가장 순수한 형태이다.” 오히려 유곽의 색안경을 통해서 보는 한에 있어서는 원시 상태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문제는 군혼을 고찰할 때 다시 다루도록 하자.
모오간에 따르면 무규율 성교의 이러한 원시상태로부터 다음과 같은 가족형태가 매우 일찍부터 발전해 나왔다.

1. 혈연 가족 : 가족의 첫째 단계

여기에서는 혼인 집단이 세대별로 되어 있다. 즉 가족의 범위 내에 들어 있는 모든 조부와 조모는 서로 부모가 되며,그들의 자녀들,다시 말해서 아버지들과 어머니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이 후자들의 자녀들은 공동부부로서 제3집단을 형성하며, 그 자녀들,즉 제1집단의 증손들은 제4집단을 형성한다. 이와 같이 이 가족형태에서는 다만 선대와 후대 간에서만,즉 부모와 자녀들 간에서만 서로 부부로 될(우리들이 쓰는 용어로) 권리와 의무가 배제된다. 형제와 자매, 즉 친형제와 천자매,종형제와 종자매, 재종형제와 재종자매 등등은 상호간 모두 형제자매이며,바로 그렇기 때문에 서로가 모두 부부이다. 이 단계의 가족에서 형제자매의 관계는 서로간의 성교를 어떤 당연한 것으로서 여기고 있다. 이와 같은 가족의 전형적인 모습은 한 쌍의 부부의 자손들일 것이다. 각 다음 세대의 자손들은 모두 서로가 형제자매이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서로가 부부이다.
혈연 가족은 전멸했다. 역사가 전해주는 가장 야만적인 종족들도 이에 대한 확실한 실례를 단 하나도 보여 주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가족이 반드시 존재했으리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지금도 폴리네시아 제도 어디에서나 통용되고 있는 하와이식 친족제도는 바로 이러한 가족형태 하에서만 발생할 수 있는 혈연적 친등관계를 나타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또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 후 가족의 전체적인 발전이 이러한 가족형태를 필연적인 시초 단계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2. 푸날루아 가족

가족을 조직하는 데서 부모와 자녀 간의 성교를 배제하는 것이 진일보한 것이라면, 제2의 진전은 형제와 자매간의 성교를 배제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진전은 당사자들의 연령이 한층 균등하기 때문에 제1의 경우보다 더 중요했으나 더욱 곤란한 일이었다. 그것은 서서히 진행되었다. 즉 그것은 아마 처음에는 친형제 자매(같은 어머니의 자녀)끼리의 성교를 배제하게 되고,이것이 최초에는 개별적인 현상이던 것이 점차 규칙적인 것으로 되어 가면서(하와이 제도에서는 현세기에 들어와서도 아직 예외가 있었다) 마침내는 방계(傍系) 형제 자매, 즉 오늘날의 호칭으로 친형제 자매가 낳은 아들들끼리나 손자들끼리나 증손자들끼리의 혼인까지도 금지되게 된다. 이에 대하여 모오간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것은 자연도태의 원칙이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보여주는 훌륭한 실례이다.

이러한 진보로 근친상간이 제한을 받게 된 종족들인 종전대로 형제와 자매 간의 혼인을 법칙과 의무로 삼는 종족들보다 급속하게 전면적으로 발전했으리라는 것은 의심할 바가 없다. 또 이러한 진보가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가는 이 진보의 직접적 산물이며 또한 본래의 목적을 훨씬 넘어선 씨족 제도(gens)가 잘 말해주고 있다. 이 씨족제도는 지구상의 미개인 전부는 아니라도 그 대부분의 사회제도의 기초를 이루며,또 그리스나 로마에서는 이 씨족제도에서 직접 문명시대로 이행한다.
모든 원시 가족(Urfamilie)은 늦어도 수 세대를 지나면서 분해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미개의 중간 단계에 이르기까지 예외없이 지배하고 있던 공산주의적 합동세대 (Gesamthaushaltung)는 조건에 따라 달라지기는 했지만 각지에서 대체로 일정한 가족공동체의 최대 한도를 규정했다. 한 어머니의 자녀들 간의 성교가 허용될 수 없다는 관념이 생기자,그것은 낡은 세대공동체의 분해와 새 세대공동체(이 공동체는 반드시 가족집단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의 수립에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한 계열 또는 여러 계열의 자매가 한 세대공동체의 핵심이 되고 그들의 친형제들은 다른 세대공동체의 핵심이 된다. 이러한 또는 이와 유사한 방법으로 모오간이 푸날루아 가족(Punahiafamilie)이라고 부른 가족형태가 혈연 가족으로부터 발생했다. 하와이의 관습에 따르면,일정한 수의 친자매 또는 촌수가 먼 자매(즉 종자매, 계종자매 또는 그보다 촌수가 먼 자매 등등)는 그들의 공동 남편들의 공동 아내였다. 그러나 그들의 형제는 그들의 공동 남편들 중에서 제외되었다. 이 남편들은 이미 서로 형제라고 부르지 않고—이제는 그렇게 부를 필요조차 없었다— 푸날루아라고 불렀다. 즉 친근한 동료,말하자면 동반자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 계열의 친형제 또는 촌수가 먼 형제들도 자기의 자매를 제외한 일정한 수의 아내와 공동 혼인의 생활을 했으며, 이 아내들도 서로 푸날루아라고 불렀다. 이러한 것이 가족 구성의 고전적인 형태이다. 이것은 그 후 일련의 변화를 일으켰지만 그 주된 특징은 일정한 가족권 내에서 남편과 아내를 서로 공유하고 있는 점이다. 그러나 이 가족권에서 최초에는 아내 편의 친형제, 후에는 또 촌수가 먼 형제가 배제되었으며, 그리하여 다른 편에서는 또 남편의 자매가 배제되었다.
바로 이러한 가족형태야말로 아메리카식 친족제도에 표현되어 있는 바와 같은 친등관계를 가장 정확히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이다. 내 어머니의 자매의 자녀들은 역시 내 어머니의 자녀이기도 하며,그와 마찬가지로 내 아버지의 형제의 자녀들은 또한 내 아버지의 자녀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들 모두는 또 나의 형제 자매이다. 그러나 내 어머니의 형제의 자녀들은 내 어머니의 조카 또는 조카딸이고,내 아버지의 자매의 자녀들은 내 아버지의 조카 또는 조카딸이며, 그들 모두는 또 나의 종형제 또는 종자매이다. 실제로 내 어머니의 자매의 남편들은 역시 내 어머니의 남편이다. 또 마찬가지로 내 아버지의 형제의 아내들은 내 아버지의 아내들인데—실제로는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니지만 규율상으로는— 친형제 자매간의 성교가 사회적으로 비난받게 됨으로써, 종래에는 차별 없이 형제 자매라고 인정되던 형제 자매의 자녀들이 두 부류로 구분되었다. 즉 하나는 여전히 서로(촌수가 먼 사이에서도) 형제 자매이며,다른 하나는 형제의 자녀들과 자매의 자녀들이 이미 형제 자매일 수는 없다. 그들은 공동의 양친도, 즉 공동의 아버지도 공동의 어머니도 가질 수 없다. 따라서 여기서 처음으로 종래의 가족제도 하에서는 전연 무의미하던 조카와 조카딸,종형제와 종자매라는 친등(die Klasse)이 필요하게 된다. 이러저러한 종류의 단혼에 기초하는 가족형태 하에서는 전혀 불합리한 것으로 보였던 아메리카식 친족제도가 푸날루아 가족에 의해서는 가장 세밀한 점에 이르기까지 합리적인 설명과 자연적인 근거를 얻게 된다. 적어도 이 친족제도가 보급되어 있던 한에서는 푸날루아 가족 또는 그와 유사한 어떤 형태도 역시 틀림없이 존재했을 것이다.
만일 경건한 선교사들이 아메리카에 와 있던 기왕의 스페인 승려들처럼 이와 같은 비기독교적 관계 속에서 ‘혐오’(Greuel) 이상의 것을 간파할 능력이 있었더라면, 이미 하와이 제도에서 실제로 존재했던 이 가족형태는 아마 폴리네시아 전체에서 증명될 수 있었을 것이다. 케사르는 당시 미개의 중간 단계에 있던 브리튼인(Briten)에 관해 “그들은 10명 내지 12명마다 아내를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으며, 그것도 대부분 형은 동생들과 함께, 부모는 자녀들과 함께 소유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이것은 군혼이라고 보아야 타당하다. 미개 시대의 어머니들에게는 공동의 아내를 가질 수 있을 만큼 성장한아들이 10명 내지 12명씩 있을 수 없지만, 푸날루아 가족에 상응하는 아메리카식 친족제도에는 많은 형제가 있게 된다. 왜냐하면 각 남자의 종형제와 그보다 촌수가 먼 형제가 모두 그의 형제이기 때문이다. ‘부모는 자녀들과 함께’라고 하는 것은 아마 케사르의 오해일 것이다. 이 아메리카식 친족제도가 아버지와 아들이 동일한 혼인집단에 망라되거나 또는 어머니와 딸이 동일한 혼인 집단에 망라될 가능성을 절대로 배제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와 딸, 어머니와 아들이 하나의 혼인집단에 망라되는 것이 허용된 것은 아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 군혼형태 또는 이와 유사한 군혼형태에 기초한다면 야만인과 미개인들의 아내 공유에 관한 헤로도투스와 기타 고대 저술가들의 보고는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아우드(Audh, 갠지스강 북부)의 티쿠르인(Tikurs)에 관한 와트슨(Watson)과 케이(Kaye)(『인도의 주민 The People of India』)의 다음과 같은 보고에 대해서도 역시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즉 “그들은 큰 공동체 안에서 거의 무질서하게(성적 관계에서) 공동으로 생활하고 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서로 부부라고 인정되고 있는 경우에도 이 부부의 인연은 다만 명목상의 것임에 불과하다.”
씨족이라는 제도는 압도적 다수의 경우가 푸날루아 가족에서 직접 발생한 것 같다. 하긴 오스트레일리아의 반족(半族)제도 역시 씨족제도의 출발점이 될 수 있었다. 오스트레일리아인들 사이에는 씨족은 있으나 아직 푸날루아 가족은 없고 보다 미숙한 군혼형태가 있다.
형태 여하를 불문하고 군혼 가족제도 하에서는 누가 아이의 아버지인가는 알 수 없어도 누가 그의 어머니인가는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어머니는 전체 가족의 모든 자녀를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며, 또 그들에 때한 어머니로서의 의무를 진다. 그러면서도 그 여자는 역시 자기의 친자녀들을 다른 아이들과 구별한다. 여기서 명백한 바와 같이 군혼이 존재하는 한,혈통은 다만 어머니 편에 따라서만 확정될 수 있으며 따라서 모계(Weibliche Linie)만이 인정된다. 어떤 야만인과 어떤 낮은 단계의 미개인들에게 있어서도 바로 이렇게 되어 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처음으로 발견한 것이 바로 바호펜의 두 번째 커다란 공적이다. 이와 같이 모계 혈통만이 인정되고 또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여기서 발전하여 나온 상속관계를 바호펜은 모권이라고 불렀다. 간단하기 때문에 나는 이 명칭을 그대로 둔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발전의 단계에서는 법률에서 말하는 권리가 아직 문제될 수 없었기 때문에 빼어난 표현은 못된다.
이제 만일 우리가 푸날루아 가족에서 두 개의 전형적인 집단 중 하나,즉 자매의 집단—친자매와 촌수가 먼(즉 친자매에게서 파생하는 제1,제2 또는 그 이상의 친등의) 자매의 집단과, 또한 그들의 자녀들 및 어머니 편의 친형제나 촌수가 먼 형제들(이들은 우리의 전제에 따르면 그 여자들의 남편이 아니다)의 집단 중 하나를 추려보면 후에 이르러 시초 형태의 씨족의 성원으로 될 사람들의 범위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모두 공동의 한 시조모를 가지고 있다. 이 시조모의 혈통을 이어 나왔기 때문에 각 세대의 여자 후손들은 모두 자매이다. 그러나 이 자매의 남편은 벌써 그들의 형제일 수 없기 때문에 이 시조모의 혈통을 이을 수 없다. 따라서 앞으로 씨족으로 될 이 혈연집단의 성원으로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자녀들은 이 집단에 속한다. 왜냐하면 오직 모계 혈통만이 확실하고 그것만이 결정적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모든 형제와 자매간의 성교가 금지되고,나아가서는 어머니 편의 가장 먼 촌수의 방계 친족끼리의 성교까지 금지됨에 따라 위에서 말한 집단은 씨족으로 전화했다. 즉 서로 혼인해서는 안되는 모계(母系) 혈족자들의 공고한 집단으로 형성되었다. 이 집단은 그 이후 기타의 사회적 . 종교적 공동제도에 의해 더욱더 공고화되고, 동일 종족의 다른 씨족과 서로 다른 특징을 갖게 된다. 이에 관해서는 후에 상세히 논하기로 하자. 그런데 푸날루아 가족으로부터 씨족으로의 발전이 비단 필연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자연스럽기까지 하다고 인정한다면,씨족제도를 발견할 수 있는 모든 종족, 즉 거의 모든 미개인과 문명인이 과거에 이러한 가족형태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거의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단정할 수 있다.
모오간이 자기의 저서를 쓰던 당시에는 군혼에 관한 우리의 지식은 아직 극히 제한된 것이었다. 반족(半族)으로 조직된 오스트레일리아인의 군혼에 관한 것을 좀 알고 있었고,그 밖에는 모오간이 수집해 이미 1871년에 발표한 하와이 푸날루아 가족에 관한 자료를 가지고 있었을 뿐이었다. 푸날루아 가족은,한편으로는 모오간의 전체 연구 의 출발점이었던 아메리카 인디안들 사이에서 지배적인 친족제도에 대해 완전한 설명을 해주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모권적 씨족을 해명하는 데 충분한 시발점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그것은 오스트레일리아인들의 반족제도보다 훨씬 더 높은 발전단계를 나타내주고 있었다. 그러므로 모오간이 그것을 대우혼에 필연적으로 선행하는 발전단계로 보 고,태고 시기에는 이것이 일반적으로 보급되어 있었다고 생각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이후 우리는 군혼의 다른 형태들을 무수히 알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모오간이 이 점에서 너무 지나치게 앞서 나아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다행히도 자기의 푸날루아 가족에서 군혼의 최고 형태, 고전적 형태, 즉 보다 높은 형태로의 이행을 아주 간단히 설명할 수 있도록 해준 출발점인 바로 그러한 형태를 만났던 것이다.
군혼에 관한 지식이 참으로 풍부하게 된 것은 영국 선교사 로리머 파이슨(Lorimer Fison)의 덕택이다. 그는 이 가족형태를 그 본고장인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다년간 연구했다. 그는 그 최저 발전단계를 남오스트레일리아의 감비어산(Mount Gambier) 지대에 사는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에게서 발견했다. 여기서는 모든 종족이 양대 반족—크로키 (Kroki)와 쿠미테(Kumite)——으로 갈라져 있었다. 이 각 반족 내에서의 성교는 엄금되어 있다. 반대로 한 반족 내의 각 남자는 다른 반족 내의 각 여자의 타고난 남편이며, 또 후자는 전자의 타고난 아내이다. 개인이 아니라 한 집단 전체가,즉 반족과 반족이 서로 결혼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자적해야 할 것은 족외혼적인 두 반족으로의 분열에 의한 제한을 제외하고는 연령의 차이도,혈연관계의 원근도 성교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쿠미테의 각 여자는 임의의 크로키 남자의 정당한 아내이다. 그러나 크로키 남자 자신의 딸은 쿠미테 여자의 딸로서 모권에 의해 역시 쿠미테인이기 때문에,그 여자는 날 때부터 각기 크로키 남자의 아내이며 따라서 자기 아버지의 아내이기도 하다. 하여간 우리가 알고 있는 이 형태에서는 반족조직이 이러한 현상을 방해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이 조직은 근친상간을 제한하려는 어렴풋한 경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부모와 자녀 간의 성교를 별로 혐오스러운 일로는 보지 않던 그러한 시대에 발생했거나(그런데 만일 그렇다면 이 반족제도는 무규율 성교 상태에서 직접 발생했을 것이다),그렇지 않으면 반족제도가 발생했을 당시에는 이미 부모와 자녀 간의 성교가 관습상 금지되어 있었거나(그런데 만일 그렇다면 현재의 그 상태는 그 이전에 혈연 가족이 존재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며 또 그것을 극복하려는 첫걸음이기도 하다.) 둘 중의 하나이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후자가 더 확실한 것 같다. 내가 알고 있는 한, 부모와 자녀끼리의 성교의 실례로 든 것 중에는 오스트레일리아의 것은 없으며 ,족외혼의 보다 후기 형태인 모권적 씨족도 보통은 이미 씨족 발생 당시에 이러한 성교가 금지되어 있었다는 것을 암암리에 전제로 하고 있다.
이 두 반족제도는 남오스트레일리아의 감비어산 지대 이외에도 멀리 동부의 달링강(DariingfluB) 유역과 동북부의 퀸스랜드(Queensland)에서도 볼 수 있다. 따라서 그것은 광범히 보급되어 있었다. 두 반족제도는 오로지 어머니 편 형제 자매 끼리의 혼인과 또한 형제의 자녀들끼리 및 자매의 자녀들끼리의 혼인을 배제할 뿐인데, 그것은 그들이 동일한 반족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와는 반대로 자매의 자녀와 형제의 자녀는 서로 결혼할 수 있다. 뉴사우스 웨일즈의 달링강 유역의 카밀라로이 종족(Kamilaroi)에서는 근친상간의 금지로 한 걸음 더나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여기에는 최초와 두 반족이 네 반족으로 갈라지고, 이 네 반족들은 또 각각 일정한 다른 반족과 집단으로 결혼한다. 첫번째 두 반족은 서로 타고난 부부이다. 어머니가 제1반족에 속하느냐 제2반족에 속하느냐에 따라서 그 자녀들은 제3 또는 제4반족에 속하게 된다. 역시 서로 결혼을 하게 되는 이 제3 및 제4반족의 자녀들은 제1 및 제2반족의 성원으로 된다. 이리하여 첫 세대는 언제나 제1 및 제2반족에 속하며, 그 다음 세대는 제3, 제4반족에,그리고 제3세대는 다시 제1 및 제2반족에 속한다. 이에 상응하여(어머니 편의) 형제 자매의 자녀들은 부부로 될 수 없으나 형제 자매의 손자들은 부부로 될 수 있다. 이 독특하게 복잡한 제도는—어쨌든 조금 후기의 일이지만一 모권 씨족이 끼어들어옴으로써 점점 더 복잡하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것을 상세히 논할 수 없다. 보는 바와 같이 근친상간을 막으려는 경향이 여러 번 나타나기는 하지만,그것은 목적에 대한 명확한 의식이 없이 본능적•자연발생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 곳 오스트레일리아에서의 군혼은 아직도 반족혼(Klassenehe)으로써 가끔 전 대륙에 산재하는 남자들의 전 반족과,역시 광범히 분포되어 있는 여자들의 반족과의 대규모 혼인이다. 이 군혼을 좀 상세히 관찰하면, 매음굴만 보아 오던 속물들이 상상하듯이 그렇게 사람들을 몸서리치게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사람들은 비로소 그것의 존재를 어렴풋이 느껴 왔으며 그리고 극히 최근에 와서도 그 존재에 대한 논쟁이 다시 벌어지고 있는 형편이다. 피상적 관찰자에게 이 군혼은 때에 따라서 부정(不貞)을 수반하는 견고치 못한 단혼이나 혹은 일부다처제로 보인다. 이러한 혼인 관습—오히려 실제로 유럽의 보통 사람들은 이 혼인 관습이 자기 나라의 그것과 거의 비슷함을 발견한다—을 규제하는 규범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예컨대 파이슨이나 호위트(Howitt)처럼 몇 해의 세월을 송두리째 바쳐야만 한다. 이 규범에 따라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은 수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타향에 가서 말도 통하지 않는 사람들을 찾아 헤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마을과 모든 종족들에서 저항이나 격분도 하지 않고 서슴없이 몸을 허락하는 여자를 종종 찾아낸다. 또 이 규범에 따라 아내를 많이 가진 자는 그 중의 하나를 자기 손님에게 하룻밤 양보하기도 한다. 유럽인에게는 비도덕적이고 불법적인 것으로 보이는 곳에 실은 엄격한 규범이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 여자들은 이방인들의 혼인반족에 속하며,따라서 그들은 이 이방인의 타고난 아내인 것이다. 이 양자에게 인연을 맺게 해주는 바로 그 도덕적 규범에 따라 함께 속해 있는 혼인반족 밖에서의 어떠한 성교도 금지되며,위반할 경우에는 추방하는 것이다. 여자를 약탈하는 것은 흔한 일이며 또 많은 지방에서 일상적으로 되어 있는데, 그러한 경우에도 혼인반족의 규범은 엄격히 준수된다.
그러나 여자를 약탈하는 시기에는 벌써 적어도 대우혼 형태의 단혼제로 이행하는 징조가 나타난다. 즉 젊은이가 자기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처녀를 약탈하거나 유혹했을 경우에 그들은 모두 순서대로 그 여자와 성교를 하지만, 그 후에 여자는 약탈을 부추긴 젊은이의 아내로 인정된다. 그런데 이와 반대로 만일 약탈당한 여자가 그에게서 달아나 다른 남자가 그 여자를 붙잡으면 그 여자는 후자의 아내로 되며, 전자는 그 여자에 대한 우선권을 상실한다. 그리하여 일반적으로 존속하고 있는 군혼과 병행해서—또 이 군혼의 테두리 내에서— 배타적 관계, 즉 다소라도 장기간의 대우(對偶)관계가 발생하며, 또 이와 함께 일부다처제가 발생한다. 그 결과 이 경우에도 군혼은 일찍 몰락하기 시작한다. 따라서 문제는 다만 유럽인의 영향 하에 어느 것이 먼저 무대에서 사라지는가, 군혼인가,그렇지 않으면 이를 엄수하고 있는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인가 하는 데 있다.
하여간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지배적인 전체 반족 사이와 혼인은 원시적이고 극히 저급한 군혼 형태이지만, 푸날루아 가족은 우리가 알고 있는 한 군혼의 최고 발전단계이다. 전자는 유랑하는 야만인의 사회발전 수준에 상응하는 것이며, 후자는 이미 공산주의적 공동체의 상당히 확고한 정착을 전제로 하며,보다 높은 그 다음 발전단계로 직접 이르게 한다. 이 두 혼인형태 사이에는 아직도 많은 중간 단계가 있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이것은 문만 열리고 아직 손은 대보지 못한 새로운 연구영역이다.

3. 대우혼 가족

다소라도 지속적인 기간 동안의 일정한 대우관계는 이미 군혼 하에서도 있었고 그 이전에도 있었다. 남자는 많은 아내들 중에서 본 아내(아직 애처라고는 말할 수 없다)를 가지고 있었고 또 여자로서도 그가 여러 남편들 중의 본남편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선교사들의 머리를 적지 않게 혼란시켜 그들로 하여금 군혼을 때로는 무규율적인 아내공유로 보게 하고,때로는 방자한 간통으로 보게 했다. 그러나 관습으로 된 이러한 대우관계는 씨족이 발전할수록, 또 이제는 서로 결혼할 수 없게 된 ‘형제’ 집단들과 ‘자매’ 집단들의 수가 많아질수록 더욱더 공고화될 수밖에 없었다. 씨족의 형성은 혈족 간의 혼인을 방지하는 데 충격을 주었는데, 이 충격은 계속되었다. 이처럼 우리는 이로쿠오이인과 기타 미개의 낮은 단계에 있는 대다수 인디안들 사이에서는 그들의 제도에서 수백 갈래나 되는 모든 친척들 간의 혼인도 금지되어있음을 보게 된다. 혼인 금지가 이와 같이 더욱 복잡하게 됨에 따라 군혼은 더욱 불가능하게 되었으며, 그것은 대우혼 가족에 의해 대체되었다. 이 단계에서 한 남자는 한 여자와 함께 생활한다. 그러나 남자에게는 계속해서 일부다처제의 권리와 때로는 불의의 행위를 할 권리가 있었다. 하지만 일부다처제는 경제적 이유로 그리 흔한 현상은 아니었다. 반면에 여자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경우 같이 사는 생활기간 중 정조를 엄격히 지킬 것을 요구했으며,그들의 간통은 잔인한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부부와 인연은 쌍방이 다같이 손쉽게 끊을 수 있으며, 자녀들은 종전대로 어머니에게만 속한다.
이렇게 혈족 (Blutsverwandten)이 혼인관계로부터 점점 더 배제되어나가는 과정에서도 역시 자연도태의 작용은 계속된다. 모오간의 말에 따르면,

혈연이 아닌 씨족 성원들 간의 혼인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더 강한 인종을 낳는 경향이 있다. 진보하는 그러한 두 종족아 혼합된 결과 새 세대의 두개골과 뇌수는 자연히 커져 드디어 두 종족의 능력이 합쳐지게 되었다.

이와 같아 씨족제도에 입각한 종족들은 낙후된 종족들을 타도하가나 혹은 그들로 하여금 자기의 모범을 따르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이처럼 원시시대와 가족의 발전을 보면 최초에는 한 종족 전체를 포괄하던 양성 간의 공동 혼인생활의 범위가 끊임없이 줄어들고 있다. 최초에는 근친, 다음에는 점차로 원친,최후에는 단순한 인척까지도 점차 배제됨으로써 마침내 모든 종류의 군혼이 실제로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 결과 아직도 튼튼히는 맺어지지 못한 한 쌍의 부부가 남게 된다. 이 부부는 일단 분해되면 혼인 일반이 소멸하는 그러한 분자인 것이다. 이미 이것만으로도 현대적 의미에서의 개인적 성애(性愛)라는 것이 단혼의 발생과는 거의 무관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발전단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실천이 이 사실을 더욱 잘 증명해 준다. 이전의 가족형태에서는 남자는 결코 여자의 부족을 느끼지 않았고 오히려 여자가 너무 많을 정도였지만, 이제는 여자가 적기 때문에 그들을 찾아다녀야만 했다. 그러므로 대우혼이 발생한 시기부터 여자의 약탈과 매매가 시작된다. 이 약탈과 매매는, 이미 시작된 훨씬 더 뿌리 깊은 변화가 널리 확산된 징표이지만 그 이상의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런데 아내를 얻어내는 방법에 지나지 않는 이 징표에 기초해 현학적인 스코틀랜드인 맥레난은 ‘약탈혼’(Raubehe)과 ‘매매혼’(Kaufehe)으로 이루어지는 특수한 가족형태를 꾸며냈다. 그렇지 않아도 (동일한 발전단계에 있는) 아메리카 인디안과 기타 종족들 사이에서 약혼은 흔히 혼인 당사자들이 맺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들과는 전혀 의논도 없이 어머니가 맺어 준다. 이리하여 전혀 알지도 못하는 두 사람이 약혼하게 되며, 혼인 날짜가 임박해서 비로소 그들은 자기들이 약혼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일이 종종 있다. 혼례 전에 신랑은 신부의 친족(즉 신부의 어머니 편 친족이지 아버지와 그의 친족이 아니다)에게 선물을 보낸다. 이 선물은 양도되는 처녀에 대한 보상으로 간주된다. 혼인은 부부 중 각자의 의사에 따라 취소할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종족, 예컨대 이로쿠오이인들의 경우에 점차 이러한 이혼을 부정적으로 여기는 여론이 형성되었다. 부부 사이에 분쟁이 있을 때에는 쌍방 친구들이 조정자의 역할을 맡으며, 그들의 간섭이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경우에만 비로소 이혼하게 된다. 이 경우 아이들은 아내가 차지하게 된다. 이혼 후 쌍방은 다 같이 재혼할 수 있다.
대우혼 가족은 그 자체가 아직 극히 미약하고 견고치 못하기 때문에 독자적인 세대를 가질 것을 요구한다거나, 심지어 그렇게 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따라서 이전부터 전해 내려온 공산주의적 세대를 결코 해체하지 못한다. 그러나 공산주의적 세대는 가정에서의 여성의 지배를 의미한다. 이것은 친아버지를 확실히 알 수 없는 조건 하에서 친어머니만을 인정하는 것이 여성에 대한, 즉 어머니에 대한 높은 존경을 의미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사회발전의 초기에 여자가 남자의 노예였다고 하는 견해는 18세기 계몽사상에서 물려받은 지극히 불합리한 관념의 하나이다. 어느 야만인들에게서나 또 미개의 낮은 단계, 중간 단계 및 부분적으로는 높은 단계에 있는 어느 종족을 막론하고 여성은,비단 자유를 향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극진한 존경을 받는 지위에 있었다. 이 지위가 대우혼 하에서는 어떤 것이었는가는 다년간 이로쿠오이인의 세네카 종족들 가운데서 선교사 노릇을 했던 아더 라이트(Arthur Wright)가 잘 증명해주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들이 아직 옛날식의 길다란 집(여러 가족의 공산주의적 세대)에서 살고 있던 시기의 가족제도에서는 ……거기에 항상 어느 한 ‘씨족’(clan, gens)만이 있었으며, 그리하여 여자는 남편을 다른 ‘씨족들’(clans, gentes)에서 맞아들였다……. 가정에서는 보통 여성이 지배했고 저장물은 공유했다. 그러나 너무 태만하거나 재간이 없어서 공동저장에 자기 몫을 채우지 못하는 불운한 남편 또는 연인은 재난을 당했다. °그가 집에 아무리 많은 자녀들과 자기에게 속하는 재산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역시 그는 언제든지 짐을 싸 가지고 나가라는 명령을 받을 각오를 하고 있어야 했다. 그리고 그는 감히 명령에 반항하려고 조차 하지 않았다. 집은 그에게 지옥이나 다름없었으며, 그는 자기 본래의 ‘씨족’으로 돌아가거나 또는—"대개는 늘 그러했지만— 다른 씨족에게 새로 결혼을 하거나 하는 이외에 별 도리가 없었다. 여자들은 ‘씨족들’에서, 아니 일반적으로 어디서나 커다란 힘을 가지고 있었다. 때로는 그녀들이 우두머리를 파면하고 그를 보통 병졸로 떨어뜨리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여자가 대부분 또는 전부 같은 한 씨족에 속하는 한편, 남자가 여러 씨족에 분속되어 있는 공산주의적 세대는 원시시대의 어디에서나 보급되어 있던 여성 지배의 현실적 기초이다. 이러한 여성 지배를 발견한 것이 바호펜의 세 번째 공적이다. 덧붙여 말한다면, 야만인과 미개인에게 있어서 여성들이 과도한 노동을 부담하고 있다는 여행가 또는 선교사들의 보고는 상술한 바와 결코 모순되지 않는다. 양성간의 분업은 여성의 사회적 지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와는 전혀 다른 원인에서 온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여성들이 훨씬 더 많은 노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종족들은 우리 유럽인보다 여성들에게 훨씬 더 참된 존경심을 표한다. 문명시대와 귀부인은 외견상 대단히 존경을 받으며 실제적 노동이라고는 전혀 하지 않거만,그 사회적 지위는 심한 노동을 하는 미개시대의 여성들보다 굉장히 낮다. 후자는 자기 종족들에게서 진정한 귀부인(Dame ; lady, frowa, Frau= Herrin, 여주인)으로 인정되었으며,또 바로 그 지위의 성격상 귀부인이었다.
오늘날 아메리카에서 군혼이 대우흔 가족에 의해 완전히 대체되었는가 하는 문제는 아직도 야만의 높은 단계에 있는 서북 지방 주민들,특히 남아메리카 주민들에 관한 보다 상세한 연구가 있어야 해명될 것이다. 남아메리카 주민들에 관한 보고들은 도저히 고대의 군혼이 완전히 극복되었다고는 할 수 없을 정도로 가지각색의 성적 방종의 실례를 전하고 있다. 하여간 아직은 그 흔적이 전부 소멸되지는 않았다. 적어도 북아메리카의 40개 종족들의 경우에 맏언니와 결혼한 남자는 그 여자의 동생들이 적당한 연령에 달하면 이들도 역시 모두 자기의 아내로 삼을 권리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자매의 한 집단 전체가 남편을 공유하던 관습의 잔재이다. 그리고 캘리포니아 반도의 주민들(야만의 높은 단계) 사이에서는 무규율 성교를 목적으로 여러 ‘종족’(Stämme)이 한데 모이는 명절(Festlichkeiten)이 있다고 뱅크로프트는 말하고 있다. 이것은 명백히 어떤 씨족들 사이에서는, 일찍이 한 씨족의 여자들이 다른 씨족의 남자를 모두 공동의 남편으로 삼고 있었으며 또 그와 반대이기도 했던 시기의 어렴풋한 기억을 이런 명절을 통해 보존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와 동일한 관습이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아직도 지배적이다. 어떤 종족들 사이에서는 연장자, 우두머리 및 마술사, 승려들이 아내 공유제를 이용하여 대부분의 여자를 독점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 대신 그들은 일장한 명절이나 종족 대집회 때에는 지난날의 공유제를 허용하여 자기 아내들에게 젊은 사람들과 향락하는 것을 허락해야만 한다. 예전의 자유성교가 단기간 다시 유효하게 되는 이러한 주기적인 사투르누스 제전(Saturnalienfeste)과 같은 것의 허다한 실례를 웨스터마아크는 자기의 저서 (『인류혼인사』,1891,PP.28,29)에서 인도와 호(Hos), 산탈(Santals),판쟈(Pandschas) 및 코타르(Kotars) 종족들과 아프리카의 몇 종족들에게서 들고 있다. 군혼의 존재를 부인해 오던 웨스터마아크는 이 사실을 가지고 그것은 군혼의 유습이 아니라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원시인들도 가지고 있는 그 교미기의 유습이라는 괴상한 결론을 내리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바호펜의 네 번째 위대한 발견,즉 군혼으로부터 대우혼에 이르기까지 널리 보급된 과도기적 형태의 발견에 도달한다. 바호펜이 옛 신의 계율을 위반한 데 대한 속죄一여자가 정조에 대한 권리를 획득하는 속죄一라고 묘사하고 있는 그것은 사실상 여자들이 옛날의 남편공유제(Männergemeinschaft)에서 해방되어 오직 한 남자에게만 몸을 바치는 권리를 획득하는 속신(贖身, die Buße)에 대한 신비적 표현에 불과한 것이다. 이 속신이란 요컨대 일정한 기간 몸을 맡기는 관습을 말한다. 즉 바빌론 여자들은 일년에 한 번은 밀리타(Mylitta) 신전에서 여러 남자들에게 몸을 맡기지 않으면 안되었다. 기타 서부 아시아 주민들은 자기 딸을 수년간 아나이티스(Anaitis) 신전에 보냈는데,거기서 그들은 자기가 지목한 사람들과 마음껏 자유연애를 한 후에야 비로소 결혼할 권리를 얻었다. 종교적 외피에 싸인 이와 같은 관습들은 지중해와 갠지스강의 중류 지역에 사는 거의 모든 아시아인들 사이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속신을 위한 이러한 희생은 바호펜이 이마 지적한 바와 같이 시일이 지남에 따라 점차 완화된다.
 
매년 반복되던 희생은 한 번만 바쳐도 무방하게 된다. 즉 중년 이상의 기혼 여자들의 난혼은 처녀들의 난혼으로 되고, 혼인 중에도 실시되던 것이 혼인 전에만 실시되며, 구별없이 모든 사람에게 몸을 바치던 것이 일정한 사람에게만 바치게 된다.(『모권론』,p. 19)

다른 종족들에게는 이와 같은 종교적 외피가 없다. 즉 어떤 종족들—고대의 트라키아인 및 켈트인 등과, 현재는 인도의 많은 원주민, 말레이인, 태평양 제도 토인 및 많은 아메리카 인디안들一 사이에서는 처녀들이 혼인 전에 최대의 성적 자유를 향유한다. 특히 남아메리카에서는 거의 어디서나 그러했으며, 이 대륙의 오지를 좀 다녀 본 사람이면 누구나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예컨대 아가씨즈(Agassiz, 『브라질기행』,A Journey in Brazil, Boston and New York, 1868, p. 266)는 인디안 계통의 어떤 부유한 가족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즉 그가 그 집 딸과 첫인사를 하면서 당시 장교로 파라과이 전쟁에 참가하고 있던 사람이 그 여자의 아버지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여자의 아버지가 누구냐고 물어 보았더니, 그 어머니는 미소를 띄우면서 “그 애는 아버지가 없답니다. 그 애는 우연히 생긴 애지요” 하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이렇듯 인디안 여자들과 혼혈종 여자들은 자기의 사생아에 관해 언제나 부끄럼없이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런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가 이상한 일인 것처럼 보인다. 아이들은……흔히 어머니만을 알고 있다. 그것은 모든 배려와 책임이 어머니에게 전가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아버지에 관해서 아무 것도 모른다. 그리고 아내도 자기나 자기 아이들이 아버지에 대해 무엇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보는 바와 같이 문명인으로서는 이상하게 생각되는 그것이 모권 그리고 군혼에 있어서는 단순한 예사로 되어 있다.
어떤 종족들 사이에서는 신랑의 동료나 친족 또는 결혼식에 참가한 손님들이 바로 결혼식 때 신부에 대한 전통적인 권리를 요구한다. 신랑의 순번은 맨 마지막이다. 고대에는 발레아르 제도(Balearen)와 아프라카의 아우질라인들(Augilern) 사이에서 그러했으며, 아비씨니아(Abyssinien)의 바레아인(Baireas)은 현재도 이러한 관습을 가지고 있다. 또 어떤 경우에는 종족 또는 씨족의 우두머리,카지크(Kazike), 샤만(Schamane),승려,영주라든가 기타 그 칭호에 관계없이 한 공직자가 공동체의 대표자로서 신부와의 초야권을 행사한다. 신낭만주의자들이 제아무리 이 사실을 미화한다 할지라도,초야권은 오늘도 아직 군혼의 유습으로선 대부분의 알래스카 토착민들(Bancroft,Native Races, Ⅰ ,p.81),북부 멕시코의 타후인들(Tahus) (Ibid., p.584)과 기타 여러 종족들 사이에 남아 있다. 그리고 초야권은 적어도 본래 켈트인들이 있던 나라들(스페인, 프랑스,아일랜드),예컨대 아라곤(Aragonien)같은 데서는 중세기의 전 기간에 걸쳐서 존재했는데, 이 나라들에서 초야권은 군혼의 직접적인 산물이었던 것이다. 카스틸리아(Kastilien, 스페인중부)에서는 농민이 농노로 된 적이 없었지만,아라곤에서는 1486년의 가톨릭 왕 페르디난트(Ferdinand)의 중재판결 직전까지 가장 추악한 농노제가 지배하고 있었다. 그 공문서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나는 다음과 같이 판결하고 선고한다. 상기 영주들(Senyors,Barone)은 …… 농민이 아내를 얻은 첫날밤에 그 여자와 자리를 같이 하거나 또는 농민의 아내가 결혼식 날 밤 자리에 누웠을 때 자기의 지배권의 표시로서 그 잠자리와 여자를 밟고 넘어갈 권리도 역시 가지지 못한다. 상기 영주들은 유상, 무상을 막론하고 농민의 딸이나 아들들을 그들의 의사에 반하여 사역시킬 권리도 역사 가지지 못한다.(Sugenheim,『농노제 Leibeigenschaft』, Petersburg, 1861, p.35에서는 카탈로니아어 Katalanischen 원문이 인용되어 있다)

그리고 바호펜은 자신이 이름지은 그 ‘난혼’ 또는 ‘문란 생식’으로부터 단혼으로의 이행이 주로 여자에 의해 수행되었다고 완강히 주장하고 있는데, 이것은 무조건적으로 정당하다. 경제적 생활조건이 발전하여 원시 공산주의가 분해되고 인구밀도가 증가됨에 따라 예전부터의 전통적인 양성관계가 소박한 원시적인 성격을 잃게 될수록, 그러한 양성관계는 여자에게 더욱 더 굴적이고 억압적인 것으로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여자는 정조에 대한 권리, 즉 오직 한 남자와의 일시적 또는 지속적 혼인에 대한 권리를 구원의 길로 여기고, 이것을 획득하려고 더욱더 꾸준히 노력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남자는 결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사실상 군혼의 쾌락을 버리려고는 생각조차 해본 일이 없었기 때문에 남자가 이러한 진보를 가져올 수는 없었다. 여자에 의해서 대우혼으로의 이행이 실현된 후에야 비로소 남자들은 엄격한 일부일처제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것이 여자 측에만 한정된 것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대우혼 가족은 야만과 미개의 경계에서,대개는 이미 야만의 높은 단계에서 발생했고, 곳에 따라서는 미개의 낮은 단계에서 비로소 발생했다. 야만시대에는 군혼,문명시대에는 일부일처제가 그러했듯이,미개시대에는 대우혼 가족이 특징적인 가족형태이다. 대우혼 가족이 더욱 발전하여 확고한 일부일처제로 되려면 지금까지 작용하던 것들 이외에 또 다른 원인이 필요했다. 혼인집단은 대우혼에서 그 마지막 단위, 즉 두 개의 원자로 된 분자로,다시 말해서 한 명의 남편과 한명의 아내로서 좁혀졌다. 자연도태는 공동혼인 생활권에서의 배제대상이 많아지게 함으로써 자기의 임무를 마무리지었다. 이 방면에서 자연도태는 더 이상 할 일이 없게 되었다. 따라서 만일 새로운 추동력,즉 사회적 추동력이 작용하지 않았더라면 대우혼에서 새로운 가족형태가 발생할 근거는 전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추동력은 작용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대우혼 가족의 본고장인 아메리카를 떠나기로 하자. 아메리카에서는 이보다 높은 가족형태가 발전하고 있었다고 단정하거나,또 발견되고 정복되기 전의 아메리카 어떤 곳에서도 확고한 일부일처제가 일찍이 있었다고 단정할 만한 증거를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러나 구세계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구세계에서는 가축을 길들이고 사육함으로써 전대미문의 부의 원천이 조성되었고,전혀 새로운 사회관계가 발생했다. 미개의 낮은 단계 직전까지만 하더라도 고정적인 재부(財富,Reichtums)라고 하면 거의 모두가 가옥,의류,조잡한 장식품,식료를 획득하고 조리하는 도구一쪽배,무기,극히 단순한 종류의 가구—들뿐이었다. 식료품은그날 그날 새로 획득하자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데 이제 선진적인 목축민들—인도의 5개 강 유역(펀잡) 및 갠지스강 유역과 당시 아직 물이 훨씬 풍부하던 옥수스(Oxus)강 및 약사르테스(Jaxartes)강 유역 초원의 아리아인들,유프라테스강 및 티그리스강 연안의 셈인들一은 말,낙타,나귀,유각가축,양,산양 및 돼지 등의 가축을 재산으로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감시나 하고 웬만큼 거두어만 주면 끊임없이 대량 번식하여 젖과 고기를 매우 풍부히 공급받을 수 있었다. 그 이전의 모든 식료품 획득방법은 이제 중요성을 상실했다. 이전에는 절대로 필요하였던 수렵이 이제는 사치로 되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재부는 누구의 것이었는가? 원래는 물론 씨족의 것이었다. 그러나 가축들에 대한 사적 소유는 틀림없이 일찍부터 발전하고 있었을 것이다. 소위 모세 창세기의 저자가 가부장인 아브라함을 그의 가축군의 소유자로 본 것은 가족공동체의 가장으로서의 그 자신의 권리 때문이었는지,그렇지 않으면 사실상 세습적인 씨족장의 지위 때문이었는지 그것은 단언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를 오늘날 말하는 의미의 소유자로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만은 틀림없다. 그리고 또 이미 확실한 역사의 초기에 가축군이 어디서나 미개시대의 공예품,금속기,사치품, 마지막으로 인간 가축인 노예 등과 마찬가지로 가장의 특별 재산이었다는 것도 역사 의심할 바 없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노예제도(Sklaverei)가 나타났었기 때문이다. 미개의 낮은 단계 사람에게는 노예가 소용이 없었다. 그러므로 아메리카 인디안들은 포로들을 보다 높은 발전단계의 종족들과는 다르게 취급했다. 그들은 남자를 살해하거나 또는 형제로서 승리자의 종족에 받아들였으며,여자는 아내로 삼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녀의 살아남은 아이들과 함께 종족의 한 성원으로 받아들였다. 이 단계에서 인간의 노동력은 아직 그 유지에 필요한 이상의 이렇다 할 만한 잉여를 창출 해내지 못했다. 목축,금속가공,직조,마지막으로 전야 경작 등이 시작됨에 따라 사태는 달라졌다. 이전에는 그렇듯 쉽게 얻을 수 있었던 아내가 이제는 교환가치를 지니게 되어 매매되는 것과 마찬가지로,무엇보다도 가축군이 결국 가족의 소유로 넘어간 이후로는 노동력도 그와 같이 되었다. 가족은 가축처럼 그렇게 빨리 늘지는 못했다. 가축을 감시하는 데 필요한 사람이 더 많이 요구되었다. 포로가 된 적들이 이 목적에 이용되었고,더구나 그들은 가축과 마찬가지로 번식될 수 있었다.
이러한 재부는 일단 개별 가족의 사적 소유로 넘어가서 번식이 빨라지자 대우혼과 모권 씨족에 입각한 사회에 강력한 타격을 주었다. 대우혼은 가족에 새로운 요소를 끌어들였다. 대우혼은 친어머니와 함께 누가 친아버지인가를 확정할 수 있도록 해주었으며,이 아버지는 우리 시대의 ‘아버지들’보다도 더 확실한 것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것이었다. 당시의 가족 내에서의 분업에 따르면, 식료품의 획득과 그에 필요한 노동도구의 획득은 남편이 담당했으며,따라서 그것에 대한 소유권도 그에게 있었다. 이혼하는 경우에는 이것들은 남편이 차지하고,아내는 자기의 가구를 차지했다. 그러므로 당시의 사회적 관습에 의해 남편은 새로운 식료 원천인 가축의 소유자이기도 했으며,후에는 새로운 노동도구인 노예와 소유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동일한 관습에 의해 그 자녀들은 그의 상속자로 될 수가 없었다. 상속 문제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모권에 따르면,따라서 모계에 의해서만 혈통을 따졌던 시기 동안은,그리고 씨족 내에서의 초기의 상속 관습에 따르면 사망한 씨족성원의 상속자는 그 친족들이었다. 재산은 씨족에 남겨놓아야 했다. 그러나 상속 대상이 보잘 것 없었던 만큼 재산은 사실상 오래 전부터 가장 가까운 친족들에게, 따라서 어머니 편 혈족들에게 넘어갔을 것이다. 그런데 사망한 남편의 자녀들은 남편의 씨족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어머니 편 씨족에 속했다. 그들은 처음에 어머니 편의 다른 혈족들과 함께,나중에는 아마 우선적으로 어머니의 상속자로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아버지를 상속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그들이 아버지 편 씨족에 속하지 않았으며 아버지의 재산은 아버지 편 씨족에 남겨놓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가축군의 소유자가 사망한 후에 그와 가축군은 우선 그의 형제자매들과 그의 자매의 자녀들에게 넘어가든가 그의 어머니 편 자매의 자손들에게 넘어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그 자신의 자녀들에게는 상속권이 없었다.
이리하여 재부가 증대함에 따라 그 재부는,한편으로는 아내보다도 남편이 더 유력한 지위를 가족 내에서 차지하게 했으며,다른 한편으로는 이 강화된 지위를 이용하여 전통적인 상속제도를 자기의 자녀들을 위해 폐지하려는 경향을 낳게 했다. 그러나 모권에 의해서만 혈통을 따졌던 시기 동안은 그것이 실현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이 모권은 폐지되어야 했으며 또 폐지되었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듯이 그렇게 어려운 일은 결코 아니었다. 실로 이 혁명―이것은 인류가 체험한 가장 근본적인 혁명 중의 하나이다—은 살아있는 씨족 성원중의 단 한 사람도 건드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씨족 성원들은 모두 이전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었다. 앞으로는 남자 성원의 자손이 씨족에 남아 있어야 하고,여자 성원의 자손은 이 씨족에서 제외되어 자기 아버지 편 씨족으로 넘어가야 한다는 간단한 결정만으로 충분했다. 이것으로써 모계에 의한 혈통의 결정과 모권적 상속은 폐지되고,부계에 의한 혈통의 결정과 부권적 상속이 도입되었다. 우리는 이런 혁명이 문화인들에게서 어떻게 또 언제 일어났는지를 전혀 알지 못한다. 이 혁명은 전적으로 선사시대에 있었던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혁명이 일어났다는 것은 특히 바호펜이 수집한 모권에 관한 수많은 자료를 통해서 아주 충분히 증명되었다. 이 혁명의 수행이 용이했다는 것은 수많은 인디안 종족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거기서는 혁명이 일어난지 얼마 되지 않았거나 또는 아직 진행 중에 있다. 이에 영향을 준 것은,일부는 증대되는 재부와 변화한 생활양식(삼림에서 초원으로의 이주)이었으며, 일부는 문명 및 선교사들의 도덕적 영향이었다. 미주리강 유역의 8개 종족 중에서 6개 종족은 부계에 의한 혈통 결정과 상속이 인정되고 있으나,두 종족은 아직도 모계만이 인정되고 있다. 쇼니(Shawnees),마이애미(Miamis),델라웨어(Delawares) 종족들 사이에서는 자식들이 아버지를 상속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아버지 편 씨족이름을 붙여 아버지 편 씨족에 편입시키는 관습이 보급되어 있었다.
“이름을 바꿈으로써 사물을 바꾸려는 것, 그리고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충분한 동기를 제공했을 때 전통의 틀 안에서 전통을 타파하기 위해 출구를 찾으려는 것은 인간의 타고난 도학자적 근성이다!”(맑스)
이 때문에 불가피한 혼란이 일어났고, 이 혼란은 부권으로의 이행을 통해서 제거될 수 있었으며,또 부분적으로는 사실상 제거되었다. “일반적으로는 이러한 이행이 가장 자연스러운 것으로 생각된다.”(맑스) 구세계 문화인들 사이에서의 이러한 변화의 정형에 관해 비교법학이 우리들에게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물론 이것은 대부분이 가설뿐이지만—에 관해서는 코발레프스키(M. Kovalevsky)의 『가족과 재산의 기원 및 발전 개요』(Tobleau des origines et de L’évolution de la famille et de la propriété, Stockholm, 1890)를 보라.
모권의 전복은 여성의 세계사적 패배(Weltgeschichtliche Niederlage des Weiblichen Geschlechts)였다. 남자는 가정에서도 지배권을 장악하게 되어 여자는 자기의 존귀한 지위를 상실하고 노비로,남자의 정욕의 노예로,순전한 산아도구로 전락했다. 여성의 이와 같은 굴욕적인 처지는 특히 영웅시대의,다욱이 고전시대의 그리스인들 사이에서 노골적이었는데,점차 경감되어 그럴듯하게 꾸며졌으며,때로는 보다 완화된 형태로 표현되기도 했다. 그러나 결코 그러한 처지가 제거된 것은 아니다. 이리하여 확립된 남성 독재의 최초의 산물은 당시 발생하고 있던 가부장제 가족(patriarchalischen Familie)이라는 중간형태이다. 그 주된 특징은 후에 논의하게 될 일부다처제가 아니라 다음과 같은 것이다.

일정한 수의 자유민과 비자유민이 토지를 소유하고 가축군을 돌보기 위해서 가장의 권력 하에 가족으로 조직되는 그것이다. …(셈인의 가족에서는) 이 가장은 일부다처제 생활을 하며…비자유민은 아내와 자식을 거느리고 일정한 구역에서 가축을 돌보고 있었다.

본질적민 것은 비자유민이 가족의 성원으로 된 것과 가장의 권력이다. 따라서 이런 가족형태의 완성된 유형은 로마의 가족이다. 파밀리아(famila)라는 말은 원래 감상주의와 가정 불화의 혼합물인,오늘날의 속물의 관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로마인에게 있어서는 이 말이 원래는 부부나 그 자녀들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고 다만 노예만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파물루스(famulus)는 가내 노예를 의미했고,파밀리아는 한 사람에 게 종속되는 노예의 총체였다. 가이우스(Gajus) 시대에도 아직 파밀리아는 상속재산(id est patrimonium ; das Erbteil)으로서 유언을 통해 증여되었다. 로마인들은 새로운 사회적 유기체를 표시하기 위해 이 말을 만들어 냈는데,이 유기체의 우두머리는 처자와 일정한 수의 노예를 이들 모두에 대한 생사여탈의 권리를 가진 로마식 부권 하에 두고 있었다.

따라서 이 말은 전야 경작(Feldbau)이 시작되고 노예제가 법제화된 이후에,또 아리안계 이탈리아인이 그리스인에게서 분리된 이후에 발생한 라틴계 종족들의 철갑식(鐵甲式,eisengepanzerte) 가족제도 이전의 것은 아니다.

맑스는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있다. “현대의 가족은 그 맹아 속에 비단 노예제(Seirvitus) 뿐만 아니라 농노제도 포함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처음부터 농경을 위한 노력과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의 가족은 그 후 사회와 그 국가에서 광범하게 발전한 온갖 모순을 축소판의 형태로(In Miniatur)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가족형태는 대우혼으로부터 일부일처제로의 이행을 나타내주고 있다. 아내의 정조를 보장하고 따라서 그 자녀들이 아버지의 혈통을 확실히 잇도록 하기 위해 아내는 남편의 권력에 절대적으로 복종한다. 남편이 아내를 살해한다고 해도 그것은 남편으로서의 권리를 행사한 것에 불과하다.
가부장제 가족의 출현과 함께 우리는 쓰여진 역사의 영역으로,동시에 비교 법학이 우리에게 현저한 도움을 줄 수 있는 영역으로 들어선다. 사실상 또 비교 법학의 도움으로 우리는 여기서 본질적인 진보를 이룩했다. 지금도 아직 세르비아인들이나 불가리아인들 사이에서 자드루가(Zádruga ; 우인 단체 Verfreundung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는 브라트스트보(Bratstvo : 형제 단체 Brüderschaft)라는 명칭으로 존재하며,또 변형된 형태로 동양인들 사이에도 존재하는 가부장적 세대공동체( Hausgenossenschaft)는 군혼에서 발생한 모권적 가족으로부터 현대세계의 개별 가족으로 이행하는 과도적 단계라는 사실에 대한 논거를 얻게 된 것은 막심 코발레프스키(『가족과 재산의 기원 및 발전 개요』,스톡홀름,1890, pp. 60〜100.)의 덕택이다. 어쨌든 구세계의 문화인들,즉 아리안인이나 셈인의 경우에는 이 문제가 이미 논증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남슬라브인의 자드루가는 아직까지도 존재하는 이러한 가족공동체의 가장 좋은 실례이다. 자드루가는 한 명의 아버지에서 파생된 몇 세대에 걸친 자손들과 그들의 아내들을 포괄하고 있으며, 이들은 모두 한 집안에서 같이 살면서 공동으로 밭을 갈고, 공동저장물을 먹고 입으며,여분의 수확을 공동으로 소유한다. 이 공동체는 가장(domacin)의 최고 관리 하에 있다. 가장은 외부에 대해서는 공동체를 대표하고,대수롭지 않은 물품을 처분할 권리를 가지며, 수입 지출을 관리하고,이와 더불어 규칙적인 사업의 진행에 대해 책임을 진다. 가장은 선출되지만 반드시 연장자가 뽑히는 것은 아니다. 여자들과 그들의 노동은 주부(主婦. domaĉica)一보통은 가장의 아내이다一의 통제에 따른다. 주부는 또한 공동체 내 처녀들의 남편을 고르는 데 있어서 종종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나 최고 권력은 가족회의,즉 성장한 모든 남녀들의 회의가 장악하고 있다. 이 회의에서 가장은 사업 보고를 한다. 이 회의는 최종적인 결정을 채택하며,성원에 대한 재판을 집행하고,매우 중대한 매매, 즉 토지매매에 관한 것을 결정하기도 한다.
약 10년 전에야 비로소 이러한 대가족공동체들(großen Familiengenossenschaften)이 러시아에도 존속하고 있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이것이 바로 촌락공동체 (Obschtschina,Dorfgemeinschaft)로서 러시아인의 뿌리깊은 관습으로 되어 있다는 것은 오늘날 누구나 인정하는 바이다. 이 가족공동체는 러시아의 가장 오랜 법전인 야로슬라브(Jaroslaw)와 「프라브다」(Prawda)45)에서 「달마찌야 법률」(dalmatinischen Gesetzen)에서와 동일한 명칭(웨르위,Werwj)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또 폴란드와 체코의 사료에서도 고증될 수 있다.
호이슬러(Heusler, 『독일의 법제도 Institutionen des deutschen Rechts』)에 따르면, 게르만인들 사이에서도 살림살이의 단위가 최초에는 현대적 의미의 개별 가족이 아니라 ‘세대공동체’이며,이것은 여러 세대의 가족들로 구성되어 있고,더구나 비자유민을 포괄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로마의 가족도 이런 유형에 속한다. 이에 따라 최근에는 가장의 절대권과 가장에 대한 기타 가족 성원들의 무권리에 관한 이론이 아주 많다. 켈트인들 사이에서도 아일랜드 같은 데서는 역시 이와 유사한 가족공동체가 있을 듯하며, 프랑스에서는 빠르손느리(parconneries)라는 명칭으로 프랑스 혁명 직전까지 니베르네 지방(Nivernais)에서 유지되고 있었고,프랑스-꽁떼지방(Franche-Comté)에서는 그것이 지금도 아직 완전히 없어지지 않고 있다. 루앙 지방(Louhans)〈사오느 Saône와 르와르 Loire〉같은 데는 대농가가 있다. 이 농가에는 지붕까지 달하는 높은 공동의 중앙 광실 (Zentralsaal)이 있고,이 광실을 중심으로 침실이 6개 내지 8개의 층층대를 거쳐 출입하게 되어있으며,여기서 같은 가족을 이루는 여러 세대가 살고 있다.
토지를 공동경작하는 인도의 세대공동체에 관해서는 이미 알렉산더 대왕시대에 네아르쿠스(Nearchos)가 지적한 바 있다. 이 세대 공동체는 지금도 아직 본래의 그 지방,즉 펀잡과 서북부 인도 전체에 걸쳐 존속하고 있다. 코카서스에서는 코발레프스키  자신이 세대공동체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었다. 알제리아에서는 그것은 아직도 카빌인들(Kabyles) 사이에 존속하고 있다. 확실히 아메리카에도 세대공동체가 있었던 것 같은데,주리타(Zurita)가 쓰고 있는 고대 멕시코의 ‘칼풀리스’(Calpullis)를 그러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와는 반대로 쿠노브(Cunow, Ausland 誌,1890, Nos. 42~44)가 상당히 명확하게 증명한 바와 같이,페루가 정복당하던 무렵에 여기서는 경지가 정기적으로 재분배되며,결국에는 토지가 개인적으로 경작되는 마르크 비슷한 제도(Art Markverfassung)(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마르크는 마르카Marca라고 불리었다)가 있었다.
여하튼 토지를 공동 소유하면서 공동 경작을 하는 가부장적 세대공동체는 이제 종전과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미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바이지만,이 세대공동체는 구세계의 문화인들과 기타 몇몇 종족들 사이에서 모권적 가족으로부터 개 별 가족으로의 이행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코발레프스키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가부장적 세대공동체는 개별 가족들이 개별적으로 경작하면서 경작지와 목초지를 처음에는 정기적으로 분배하다가 다음에는 아예 분배해 버리는 촌락공동체 또는 마르크공동체로의 과도적 단계이기도 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다시 언급하기로 하자.
이 세대공동체 내부의 가족생활과 관련해서 지적해 두어야 할 점은 적어도 러시아에서는 가장들이 공동체의 젊은 여자들,특히 자기의 며느리에 대해 자기의 지위를 악용하여 종종 그들을 자기와 소실로 삼는다는 풍문이 있다는 사실이다. 러시아 민요가 이 사실을 매우 잘 말해주고 있다.
모권의 붕괴와 함께 급속히 발전한 일부일처제 문제로 넘어가기 전에 일부다처제와 일처다부제에 대해서 몇 마디 더 논의해보기로 하자. 이 두 혼인형태가 한 나라에서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면,그 어느 것이나 예외적인 경우로서만,말하자면 역사적 사치품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다. 이미 알고 있듯이 동시적 존재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일부다처제에서 제외된 남자들은 일처다부제로 말미암아 남아돌았던 여자들에게서 위안을 구할 수 없었으며,또 남녀의 수효는 사회제도 여하와는 상관없이 지금까지 대체로 동일했으므로 자연히 어느 한 혼인형태도 보편화될 수는 없었다. 현실적으로 일부다처제라는 것은 확실히 노예제의 산물로서 특수한 지위를 차지한 개인들만이 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셈인의 가부장적 가족의 경우에는 가장 자신과 기껏해야 그 자식들 중 몇 사람만이 일부다처제 생활을 하고,기타 사람들은 한 명의 아내에 만족해야만 했다. 지금도 동양에서는 어디서나 바로 이와 같은 형편에 있다. 일부다처제는 부자와 귀족의 특권으로서 주로 여자 노예의 구입을 통해 실현되었다. 반면에 일반 백성들은 일부일처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인도나 티벳의 일처다부제도 역시 하나의 예외적인 현상으로서 그 기원이 군혼에 있다는 설은 확실히 흥미로운 문제이기 때문에 앞으로 더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일처다부제가 회교도와 질투에 찬 하렘 제도(Haremswirtschaft)보다 훨씬 더 참을 만한 것 같다. 적어도 인도의 나이르인(Naris)의  경우에는 3〜4명 내지 2명 이상의 남자가 1명의 아내를 공동으로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들은 또 각각 다른 3명 내지 그 이상의 남자들과 함께 후처를 공유하며, 또 이와 마찬가지로 제3, 제4 등등의 아내를 소유할 수 있다. 맥레난이 이혼인집단一한  집단의 구성원이 동시에 여러 집단의 구성원으로 될 수 있는一을 서술하면서 집단혼(Klubehe)이라는 새로운 범주를 발견하지 못한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이 혼인집단의 제도는 결코 진정한 일처다부제는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지로-뗄롱이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이것은 단지 군혼의 특수한 형태로서 남자는 일부다처제,여자는 일처다부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4. 일부일처제 가족

이것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아 미개의 중간 단계와 높은 단계의 경계에서 대우혼 가족으로부터 발생한다. 그 궁극적인 승리는 바로 문명시기 개시의 한 표식이다. 일부일처제 가족은 남편의 지배에 따른 것으로서 아버지의 혈통이 확실한 아이를 낳자는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혈통이 확실해야 할 필요성은 아이들이 후에 직계상속인으로서 아버지의 재산을 소유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족제도는 대우혼과는 달리 혼인 유대가 훨씬 더 공고하다. 따라서 이제는 어느 편에서나 마음대로 이 유대를 끊일 수 없게 된다. 이제는 원칙적으로 남편만이 이 유대를 끊고 자기 아내를 버릴 수 있다. 남편은 이 단계에서도 정조를 지키지 않을 권리를 적어도 관습상 보장받고 있으며(『나폴레옹 법전, Code Napoléon』은 남편이 정부를 집안으로 끌어들이지 않는 한,  그러한 권리를 그에게 명확히 부여했다), 또 사회가 한층 더 발전함에 따라서 그 권리는 더욱 확대된다. 그런데 아내가 지난날의 성생활 습관을 잊지 못하여 그런 내색을 보인다면 이전의 그 어느 때보다도 엄중한 처벌을 받는다.
그리스인들 사이에서는 이 새로운 가족형태가 매우 엄격하게 유지되고 있다. 맑스가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신화에 나오는 여신들의 지위는 여자들이 아직 보다 자유로웠고 존경받던 시대를 반영하고 있지만,영웅시대에 들어와 그들은 이미 남성의 지배와 여자 노예의 경쟁으로 굴욕적인 존재로 전락하게 되었다. 『오딧세이』에서 텔레마코스(Telemachos)가 자기 어머니를 격리시켜 놓고 바깥 출입을 못하게 하는 장면만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호메로스의 작품에서는 포로가 된 젊은 여자들이 승리자의 정욕의 희생물로 되고 있다. 즉 상관들은 자기들의 위계 서열에 따라 그 여자들 중 가장 아름다운 자를 선택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일라아드』는 그 전체가 그러한 여자 노예들 때문에 생긴 아킬레스와 아가멤논 사이의 싸움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호메로스의 좀 주목할 만한 영웅시의 경우에도 모두가 천막과 침상을 같이 하는,포로가 된 처녀의 이야기이다. 승리자들은 예컨대 애쉴루스의 작품에서 아가멤논이 카산드라(Kassandra)를 붙들어 가듯이 자기의 아내가 있는 고향으로 이 처녀들을 데려가는 경우도 있다. 그러한 여자 노예가 낳은 아이들은 아버지의 유산 중에서 보잘 것 없는 일부를 받으며 자유민으로 인정된다. 테우크로스(Teukros)는 텔라몬(Telamon)의 서자(庶子)로서 아버지의 성을 따를 수 있었다. 본 아내는 이러한 모든 일을 참고 있어야 하며,그러면서도 자신은 엄격한 정조와 부부 간의 의리를 지켜야 한다. 비록 영웅시대의 그리스 여자가 문명시대의 여자보다 더 많은 존경을 받았다고 하지만, 역시 그 여자는 남자와의 관계에서는 결국 그 상속자인 적자(嫡子)의 어머니이며 주부이고 또한 여자 노예들—남자는 이들을 제멋대로 자기의 첩으로 만들 수 있었으며, 또 사실상 만들고 있다—의 감독자에 불과하다. 일부일처제와 노예제의 병존, 남자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젊고 아름다운 여자 노예의 존재야말로 애당초부터 여자에 한해서만 일부일처제이자, 남자에 한해서는 일부일처제가 아니라는 그런 특수한 성격을 부여했다. 일부일처제의 이러한 성격은 오늘날에도 보존되고 있다.
그 후기의 그리스인에 대해서 우리는 도리아인과 이오니아인을 구별해 보아야 한다. 스파르타를 전형으로 하는 전자의 경우에는 혼인관계가 몇 가지 점에서 호메로스의 작품에 묘사되어 있는 것보다 훨씬 고대적이다. 스파르타의 혼인형태는 이곳의 국가관에 따라 변형은 되었으나 아직도 많은 점에서 군혼을 연상시키는 대우혼이 존재하고 있다. 자식없는 부부는 이혼하게 된다. 즉 아낙산드리다스 왕(König Anaxandridas, 기원 전 560년 경)은 아내가 아이를 낳지 못했기 때문에 후처를 얻어 두 살림을 했다. 거의 같은 시기에 아리스톤 왕(König Ariston)은 두 아내가 모두 아이를 갖지 못해서 제3의 아내를 얻고 전처 중 한 사람은 내보냈다. 한편 형제 여럿이 아내를 공유할 수도 있었으며, 자기 친구의 아내가 마음에 드는 사람은 친구와 함께 그의 아내를 공유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자기의 아내를 건장한 ‘종마’(種馬,Hengst)—비스마르크라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의 처분에 맡기는 것은 설혹 그 종마가 비자유민일지라도 예절에 어긋나지 않는 일로 인정되었다. 『플루타크 영웅전』(Plutarch)의 어느 구절에는 스파르타의 한 여자가 자기에게 사랑을 구하는 연모자더러 자기 남편한테 가보라고 하는 장면이 있다. 이 구절로 미루어 보아 —쇠만(G. F. Schömann)에 따르면— 한층 더 자유로운 풍습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진짜 간통, 즉 아내가 남편 모르게 배반행위를 한다는 것은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다. 한편 스파르타에서는 적어도 그 전성기에는 가내 노예를 알지 못했고, 또 비자유민인 헬로트들(helots)은 농장에 떨어져 살고 있었다. 그러므로 스파르타 남자들은 헬로트의 아내와 성교를 맺는 데는 그리 마음이 쏠리지 않았다. 이모든 사정으로 말미암아 스파르타 여자들은 당연히 다른 그리스인 여자들보다 훨씬 더 많은 존경을 받고 있었다. 스파르타 여자와 선발된 아테네의 헤테레(hetairai)는 고대인들이 존경을 가지고 말하며,그 언행을 기록해둘 만한 것으로 인정한 유일한 그리스 여자들이었다.
아테네인을 전형으로 하는 이오니아인의 상태는 이와 전혀 달랐다. 처녀들은 길쌈이나 바느질을 하며 기껏해야 얼마간의 읽고 쓰기를 배우는 것 뿐이었다. 이들은 거의 감금된 생활을 했으며 한갖 여자들과만 교제했다. 여자의 방은 윗층 또는 뒷채와 같은 외딴 데 있었다. 남자,특히 외래인은 좀처럼 들어가지 못했고,남자가 집에 찾아오는 경우에 여자는 그리로 몰려갔다. 여자가 외출할 때에는 반드시 여자 노예를 데리고 다녔으며, 집에 있을 때는 문자 그대로 감시 하에 있었다. 아리스토파네스의 말에 따르면,간통자를 쫓기 위해 사람들은 몰로시야 개(molossischen Hunden)를 기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적어도 아시아의 여러 도시에서는 아내를 감시하기 위해 고자( Eunuchen)를 두었다. 이러한 고자는 이미 헤로도투스 시대 중기에 키오스 섬(Chios)에서 판매용으로 양육되었다. 바흐스무트(W. Wachsmuth)에 따르면 그것은 단지 미개인만이 사들이는 것은 아니었다. 에우리피데스(Euripides)의 시를 보면 아내는 오이쿠레마(oikurema)라는 단어, 즉 가정용 물건(이 단어는 중성 명사이다)이라는 단어로 표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테네인들의 경우에 아내라는 것은 아이 낳는 일을 제외한다면 하녀의 우두머리에 불과했다. 남편은 운동경기라든가 공공사업 등에 참가했으나,아내는 그럴 수 없었다. 이 밖에도 남편은 각종 여자 노예를 두고 자기의 욕망을 채웠다. 아테네 전성시대에는 적어도 국가의 보호를 받는 매음제도가 널리 보급되어 있었다. 바로 이러한 매음제도에 기초해서 그리스 여성에 특유한 품성이 형성되었다. 스파르타 여성의 인품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리스 여성의 재질과 예술적 소양은 고대 여성의 일반적 수준보다 훨씬 뛰어났다. 그러나 여자이기 위해서는 우선 헤테라(hetaira)가 되어야 했다는 사정이 아테네 가족에 대한 가장 준엄한 선고였다.
아테네의 이러한 가족은 시일이 지남에 따라 본보기로 되어 다른 이오니아인들뿐만 아니라,점차 본국과 식민지 내의 모든 그리스인들도 그 본을 따라 자기의 가풍을 수립했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유폐와 감시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여자들은 자기 남편을 속일 기회가 많이 있었다. 남편은 아내에 대해서는 애정 표시를 전혀 꺼리면서도 헤테레와는 온갖 사랑놀음으로 도끼자루 썩는 줄을 몰랐다. 그러나 아내에 대한 모욕은 남편들 자신에 대한 모욕으로 되돌아와 마침내 그녀들을 혐오스러운 남색에 빠지게 했고,가니메데스(Ganymed) 신화로써 자기 자신과 함께 자기 신들을 모욕케 했다.
이상이 가장 분명하고 가장 발전한 고대인들에 대해서 최대한으로 구명해낼 수 있었던 일부일처제의 기원이다. 일부일처제는 결코 개인적 성애의 소산이 아니었다. 그것은 성애와는 절대로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왜냐하면 혼인은 종전 그대로 어디까지나 타산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일부일처제는 자연적 조건이 아니라 경제적 조건에 기초한, 즉 원시적•자연발생적 공동소유에 대한 사적 소유의 승리를 기초로 한 최초의 가족형태였다. 가족 내에서의 남편의 지배와 자기의 재산을 상속해야 할 확실한 자기의 자식을 보자는 것—이것이 그리스인이 공공연히 선포한 단혼의 유일한 목적이었다. 이 외에는 단혼이 그들의 부담으로 되었으며,반드시 이행해야 할 신과 국가와 자기 선조에 대한 의무였다. 아테네에서는 법률이 비단 결혼만을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남편이 소위 최소한의 혼인상 의무를 이행할 것도 강제했다.
이와 같이 단혼은 결코 남녀 간의 합의에 의한 결합으로서 역사에 나타난 것이 아니다. 더구나 합의의 최고 형태로서 나타난 것이 아니라,그와 반대이다. 그것은 한 성(性)에 의한 다른 성의 압제로서, 과거 어느 시대에서도 알지 못했던 양성 간의 모순의 선언으로서 나타나고 있다. 인쇄는 되지 않았으나 1846년 맑스와 필자가 쓴 오래된 한 원고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즉 “최초의 분업은 자식을 생산하기 위한 남녀 간의 분업이었다.” 이제 나는 여기에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자 한다. 즉 역사에 나타난 최초의 계급적 대립은 단혼(Einzelehe) 하에서 보게 되는 남녀 간 적대의 발전과 일치하며,따라서 최초의 계급적 압박은 남성에 의한 여성의 압제와 일치한다. 단혼은 역사상 일대 진보이기는 했으나, 동시에 그것은—노예제 및 사유재산과 함께— 현재까지도 그렇지만,온갖 진보가 동시에 상대적 퇴보이기도 하며, 한 사람의 행복과 발전이 다른 사람의 고난과 억압을 대가로 하여 실현되는 그러한 시대를 열어 놓는다. 단혼은 문명사회의 세포로서, 지금은 이것을 바탕으로 문명 사회 내부에서 완전히 발전한 대립과 모순의 본질을 연구할 수 있다.
기왕의 비교적 자유로운 성교는,대우혼이 승리하고 나아가 단혼이 승리한 경우에도 결코 소멸하지 않았다.

이전의 혼인제도는 ‘푸날루아’ 집단이 점차 소멸됨으로써 한계가 한층 더 좁아지기는 했지만,그래도 역시 그것은 가족의 발전을 규정하는 환경으로서 문명시대 직전까지 그 가족의 발전을 저해하다가…드디어 난혼이라는 새로운 형태 속으로 용해되고 말았다. 난혼은 가족 위에 드리워진 검은 그림자처럼 문명시대에도 인간을 따라다닌다.

모오간이 말하는 난혼이라는 것은 단혼과 병존하는(neben der Einzelehe) 남자와 미혼 여자의 야합을 말한다. 그것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문명시대 전체를 통해 갖가지의 형태로 발전하여 점점 더 공공연한 매음으로 되었다. 난혼은 직접적으로 군혼에서 유래하며 여자가 정조의 권리를 사기 위해 다른 남자에게 몸을 바치는 의식에서 유래한 것이다. 돈을 위해 몸을 허락하는 것은 최초에는 종교적 행위였다. 그것은 사랑의 여신의 신전에서 진행되었고,그 돈은 처음에는 신전의 재산으로 되었다. 아르메니아(Armenien)의 아나이티스 신(Anaitis)과 코린트(Korinth)의 아프로디테 신(Aphrodite) 등의 신전노예 및 사원에 배속된 인도의 종교적 무희(舞姬),즉 바야데레(Bajaderen)— 포르투갈어 bailadeira에서 와전된 것으로서 무희를 의미한다—는 최초의 매춘부였다. 딴 남자에게 몸을 허락하는 것은 원래는 모든 여자의 의무였으나, 후에는 이러한 무녀(巫女)들만이 다른 모든 여자를 대신하여 수행했다. 다른 종족들의 경우 난혼은 결혼 전에 처녀에게 허락된 성적 자유에서 유래되었다. 따라서 이것 역시 군혼의 유물이다. 다만 다른 길을 따라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왔을 따름이다. 재산상 불평등의 출현과 함께,즉 이미 미개의 높은 단계에서 노예노동과 함께 임금노동도 여기저기서 나타났다. 또 그와 동시에 그에 필연적으로 동반하는 것으로서,여자 노예가 강요되어 남자에게 몸을 허락하게 되고,그와 함께 자유민 여자가 직업적 매음에 종사하게 된다. 이리하여 군혼이 문명에 물려준 이 유산은, 문명이 생산한 모든 것이 양면적이고 이분법적이며 모순을 가지고 있듯이,그것도 역시 양면성을 띠고 있었다. 즉 그 한 측면은 일부일처제이고 다른 한 측면은 난혼과 그 극단적 형태인 매음제도이다. 난혼도 역시 다른 모든 사회제도와 다름없는 하나의 사회제도이다. 그것은 남자를 위한 것이기는 하지만 지난  날의 성적 자유의 존속을 보장한다. 그것은 실제로도 관대한 취급을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특히 지배계급에 의해서 광범하게 이용되고 있으면서도 말로만 비난받고 있었다. 그러나 이 비난의 실질적 대상은 남자 측이 아니라 여자 측이다. 이렇듯 여성을 사회에서 멸시•배척함으로써 그에 대한 남성의 무제한적인 지배가 사회의 기본법칙으로서 다시금 선포되게 된다.
그러나 이와 함께 일부일처제 자체 내부에서 제2의 모순이 전개된다. 난혼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즐겁게 하고 있는 남편의 곁에는 버림받은 아내가 있다. 절반을 먹어버린 사과를 다시 온전한 사과로 만들 수 없는 것처럼,모순의 한 측면은 다른 한 측면 없이는 생각할 수가 없다. 그러나 아내가 남편을 깨우쳐 주기 전에는 남자는 그렇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단혼과 함께 종전에는 알지도 못했던 두 개의 특징적인 사회적 인물, 즉 아내의 정부와 배반당한 남편이 나타난다. 남자가 여자에 승리하기는 했으나 승리자의 월계관은 패배자가 유유히 차지하게 되었다. 단혼 및 난혼과 함께 간통(Ehebruch)도 불가피한 사회현상으로 되었다. 이것은 금지되고 가혹하게 처벌되기는 했으나 근절되지는 않고 있다. 그 아이가 확실히 그 아버지의 혈통을 이었는가 어떤가 하는 것은 종래도 그러했지만 기껏해야 도덕적 믿음에 입각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해결할 수 없는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나폴레옹 법전』 제312조는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혼인 중에 잉태한 아이ᅵ의 아버지는 곧 남편이다.(L’enfant concu pendant le mariage a pour pére le mari).

이것이 3,000년에 갈친 단혼의 최후의 결실이다.
이렇듯 개별 가족(Einzelfamilie)은 자체의 역사적 기원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으며, 또한 남편의 전제적 지배로 말미암아 이 가족형태에서 남녀 간의 적대감이 명백해진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 개별가족이란 문명기 초기에 계급으로 분열된 이래,사회로서는 해결할 수도 없고 극복할 수도 없었던 사회적 대립과 모순의 축소판에 불과하다. 물론 내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부부 생활양식이 전체 사회제도의 본래적 성격에 실제로 부합되더라도 아내가 남편의 지배에 항거하는 그런 단혼의 경우에만 그러하다는 것이다. 모든 혼인생활이 다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국가생활에서와 마찬가지로 자기 가정에서도 주인 노릇을 못하며, 따라서 완전히 천대받고 사는 독일 속물들이 특히 잘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신보다 더 자주 흉악한 일을 당하는 불행한 프랑스 친구보다는 자기가 훨씬 나은 줄로 착각하고 있다.
그러나 개별 가족이 언제 어디서나 그리스인들의 경우처럼 그렇게 고전적인 엄격한 형태를 취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미래의 세계 정복자로서,그리스인보다 세련되지는 못했지만 훨씬 더 넓은 식견을 가졌던 로마인의 경우에, 아내는 보다 더 자유로왔고 보다 더 존경을 받았다. 정조는 아내에 대한 남편의 생사여탈권(die Gewalt über Leben und Tod)으로써 충분히 보장되어 있다고 로마인들은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로마인들은 아내도 남편과 마찬가지로 자유로이 이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단혼은 게르만인들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함과 더불어 확실히 최대의 진보를 달성했다. 왜냐하면 게르만인들 사이에서는 확실히 그 빈궁 때문에 대우혼으로부터 일부일처제로의 발전이 당시에는 아직 완전히 진행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타키투스가 서술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사정에 기초하여 이런 결론을 내리게 된다. 즉 첫째로,혼인이 대단히 신성시되어 “그들은 하나의 아내에 만족하고,여자는 정조의 울타리 안에서 산다”고는 하지만 역시 귀족과 종족장들 사이에서는 대우혼 당시의 아메리카인들처럼 일부다처제 생활이 보급되어 있었다. 둘째로,그들이 모권에서 부권으로 이행한 것은 불과 얼마 전의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들 사이에서는 어머니의 형제—모권에 따르면 가장 가까운 남성 친족이다—가 아직도 자기의 친아버지보다 더 가까운 친족으로 인정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또 아메리카 인디안—맑스는 그가 가끔 말한 바와 같이 이들에게서 우리들 자신의 과가를 이해하는 열쇠를 발견했다—의 관점에서 부합되는 것이다. 셋째로, 게르만인 여자들은 대단한 존경을 받았으며 공공사업에도 큰 영향을 주었는데, 이것은 일부일처제에 특유한 남성지배와는 직접 모순된다. 이 모든 점에서 게르만인은 이미 우리가본 바와 같이 대우혼도 역시 완전히 극복하지 못한 스파르타인과 거의 비슷한 형편에 있었다. 이리하여 게르만인의 출현과 함께 이 방면에서도 전혀 새로운 요소가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민족들의 혼합 과정에서 로마 세계의 폐허 위에 발전된 새로운 일부일처제는 남성의 지배에 한결 부드러운 형태를 부여했으며, 여자들에게는 적어도 외견상 고전적 고대의 그 어느 때보다도 영예롭고 자유로운 지위를 부여했다. 이리하여 처음으로 일부일처제—사정에 따라 때로는 그 내부에서, 때로는 그와 병행하여, 때로는 그에 대립하여—에서 최대의 도덕적 진보는 일부일처제의 덕택으로 이루어진, 즉 과거의 어느 세계도 알지 못했던 근대적인 개인적 성애이다.
그러나 이 진보를 이룩하게 된 것은 오로지 게르만인이 아직 대우혼 가족시대에 살고 있었고, 이에 상응하는 여자의 지위를 가능한 한 일부일처제로 옮겨놓게 한 사정 때문인 것이지, 결코 전설적이며 놀라울 만큼 도덕적으로 결백한 게르만인의 천성 때문은 아니다. 그리고 이 천성이라는 것도 결국 대우혼에는 사실상 일부일처제에서처럼 심한 도덕적 모순이 없다는 데 귀착된다. 오히려 게르만인은 그들의 이동 시기에,특히 흑해 연안의 초원 유목민들이 있는 동남쪽으로 이동하던 시기에 도덕적으로 몹시 타락하여 유목민들의 승마술뿐만 아니라 추잡한 반자연적 악덕까지도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에 대해 암미아누스(Ammianus)는 타이팔인(Taifalern)의 실례로써,또 프로코피우스(Prokop)는 헤룰라인(Herulern)의 실례로써 명확히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가족형태 중에서 일부일처제만이 근대적 성애를 발전시킬 수 있는 유일한 형태였다고 해서, 이 근대적 성애가 전적으로 또는 주로 일부일처제 내에서 부부 상호 간의 애정으로서 발전했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남편의 지배하에 있는 견고한 단혼의 본성 자체가 이것을 배제한다. 역사에서 능동적인,즉 지배적인 모든 계급들 사이에서의 혼인은 대우혼 이래 부모가 정하는 바대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열정으로서, 더욱이 누구나 다(적어도 지배계급의 출신이라면) 가질 수 있는 열정으로서,그리고 성적 충동의 최고 형태로서—이것이야말로 성애의 특성을 이루는 것이다— 역사상에 나타난 성애의 최초의 형태인 중세기 기사의 연애는 결코 부부 간의 사랑은 아니었다. 그와 정반대이다! 그 고전적 형태로서 프로방스인의 경우를 살펴보면 기사의 연애란 철두철미하게 간통으로 일관되어 있었으며, 연애시인들은 또 이를 찬미하고 있다. 프로방스의 연애시의 정수는 알바스(Albas), 즉 독일어로 여명(黎明)의 노래 (Tagelieder)였다. 이 노래의 중심적인 장면을 보면 기사는 자기 연인一유부녀一과 동침하고,밖에서는 파수꾼이 서 있다가 몰래 빠져나갈 수 있도록 동이 트는 것 (Morgengrauen,alba)을 그에게 알려 준다. 그 다음의 이별 장면은 이 노래의 클라이막스를 이룬다. 북부 프랑스인과 그리고 씩씩한 독일인도 역시 그러한 시풍과 함께 그런 기사식 연애방식을 채택했다. 우리의 볼프람 폰 에쉔바하(Wolfram von Eschenbach)도 역시 같은 풍자적인 소재로 3편의 절묘한 시를 남겨놓았는데, 나로서는 그의 기다란 3편의 영웅시보다 이것이 훨씬 더 마음에 든다.
근대 부르주아적 결혼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가톨릭 각국에서는 종전대로 부모가 부르주아지인 아들을 위해 적당한 여자를 구해준다. 그 결과 일부일처제에 고유한 모순이 그야말로 전면적으로 전개된다는 것은 물론이다. 즉 남편의 난혼도 아내의 간통도 절정에 달한다. 가톨릭교회가 이혼을 금지한 것은 확실히 불사약이 없는 것처럼,간통을 막는 약이 없다는 것에 대한 확신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이와는 반대로 프로테스탄트 각국에서는 보통 부르주아지의 아들이 자기 계급 중에서 아내를 선택할 자유를 다소라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연애가 어느 정도 결혼의 기초로 될 수 있으며,또 체면상 이렇게 하는 것이 프로테스탄트적 위선의 정신에도 맞는 것이다. 이 나라들에서는 남편의 난혼도 그다지 심하지 않고 아내의 간통도 그리 빈번치는 않다. 그러나 어떤 방식의 혼인에서든 사람들은 혼인 이전이나 다름이 없으며, 프로테스탄트 각국 부르주아지는 대개가 속물들이므로 이 프로테스탄트의 일부일처제가 주는 것은 역시 최선의 경우들을 총괄해 볼 때 ‘가정적 행복’이라고 알려진 견딜 수 없이 싫증나는 부부생활뿐이다. 이 두 혼인방법의 가장 좋은 본보기는 소설이다. 가톨릭식은 프랑스 소설이고, 프로테스탄트식은 독일 소설이다. 어느 경우를 막론하고 영웅은 ‘여성을 얻는다’(Kriegt er sie). 즉 독일 소설에서 청년은 처녀를 얻으며 프랑스 소설에서 남편은 뿔(die Hörner)을 얻는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 누가 더 열악한 처지에 있는가는 반드시 명확치는 않다. 그러므로 프랑스 소설이 독일 속물들로서는 놀랄 만치 ‘패륜적’(Unsittlichkeit)이었던 것처럼, 독일 소설이 프랑스 부르주아지들에게는 놀랄 만치 싫증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최근에 ‘베를린이 세계적 도시로 된’ 이후 독일 소설은 오래 전부터 이곳의 명물이 된 난혼과 간통에 대해 그리 겁내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어느 경우를 막론하고 결혼은 당사자의 계급적 위치에 의해 규정되며, 따라서 언제나 타산적인 것이다. 이 타산적인 결혼은 어느 경우를 막론하고 극심한 매음— 때로는 쌍방의,그러나 훨씬 더 흔히는 아내의 매음—으로 변하는 일이 상당히 많다. 이 아내가 보통의 매춘부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여성 임금노동자가 자기의 노동을 도급제로 팔듯이 자기의 육체를 도급제로 파는 것이 아니라,자기의 육체를 영영 노예로 팔아 버린다는 것뿐이다. 푸리에의 다음과 같은 말은 어떠한 타산적인 결혼에도 타당한 말이다.

문법상 두 개의 부정이 하나의 긍정으로 되듯이,결혼 도덕에서도두 개의 매음은 ‘하나의’ 덕행으로 간주된다.

성애가 여자와의 관계에서 하나의 규범으로 될 수 있고,또 되고 있는 경우는 오직 피압박계급 사이에서뿐이다. 따라서 오늘날에는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에서뿐이다. 여기서 이 관계가 공인되어 있는가 어떤가 하는 것은 상관이 없다. 이 계급에게서는 고전적 일부일처제의 기초도 역시 모두 제거되어 있다. 남성의 지배와 일부일처제는 다름 아닌 재산의 보존과 그 상속을 위해 이룩된 것인데,그들은 이러한 재산을 가지고 .있자 않으며 따라서 그들에게는 남성 지배의 확립을 위한 아무런 동기도 없다.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는 그렇게 할 수단도 없다. 즉 남성 지배를 보호하는 부르주아 법은 오직 유산자들과 프롤레타리아 통제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가난한 노동자의 아내에 대한 지위에는 아무런 효력도 갖지 못한다. 그의 경우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은 이와는 전혀 다른 개인적•사회적 관계이다. 또한 대공업으로 인해 여자가 가정에서 노동시장과 공장으로 나와 종종 가족의 부양자로 됨으로써, 프롤레타리아 가정에서의 남편의 지배는 그 마지막 잔재마저 존재할 여지가 없게 되었다. 그런 일부일처제 이래 그칠 줄 모르는 아내에 대한 학대는 예외이다. 그리하여 프롤레타리아 가족은 쌍방이 열렬히 사랑하고 정조를 엄격히 지키는 경우에 있어서조차, 또 가지각색의 종교적 의식이나 세속적 의식을 다 지녔다 할지라도,엄밀한 의미에서는 이미 일부일처제적 가족이 아니다. 그러므로 일부일처제의 영원한 동반자인 난혼이나 간통도 여기서는 전혀 보잘것 없는 역할을 한다. 아내는 이혼의 권리를 실질적으로 회복했으며,또 당사자들이 행복하게 살 수 없는 경우에는 차라리 이혼해 버린다. 요컨대 프롤레타리아트의 혼인은 어원학적으로 보면 일부일처제적이기는 하지만, 그 역사적 의미에서는 결코 일부일처제가 아니다.
하긴 우리 법률가들에 따르면,입법이 진보할수록 여자들이 불평할 온갖 소지가 더욱더 제거된다고 한다. 현대의 문명 입법체계는 날이 갈수록 첫째로,혼인이 유효한 것으로 되자면 당사자 쌍방이 자유로이 혼인계약을 체결해야 하며,둘째로 혼인생활 중 당사자 쌍방은 상호 동일한 권리와 의무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시인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만일 이 두 가지 요구가 관철되어 있다면, 여자는 아무 것도 더 바랄 것이 없을 것이다.
이러한 순 법률가적인 논의는 급진적 부르주아 공화주의자가 간혹 프롤레타리아트를 진정시키려고 할 때 이용하는 논법과 전적으로 일치한다. 언뜻 보기에 노동계약은 당사자 쌍방이 자발적으로 체결하는 듯이 보인다. 그런데 노동계약이 자발적으로 체결된 것으로 인정되는 것은 법률이 당사자 쌍방을 종이쪽지 위에서(auf dem Papier) 평등한 처지에 놓고 있기 때문이다. 계급적 처지가 달라서 한편에서는 권력을 가지게 되고,따라서 다른 편에서는 억압을 당하게 된다는 것에 대해서는,즉 당사자 쌍방의 현실적인 경제적 처지 여하 문제에 대해서 법률은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리고 노동계약 유효기간 중에는 한쪽이 자기의 권리를 포기한다고 표명하지 않는 한,당사자 쌍방은 역시 동등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 경제적 처지로 말미암아 노동자가 동등권의 마지막 껍질마저 포기할 수 없게 되는 데 대해서도 역시 법률은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는다.
결혼 문제에서도 아무리 진보적인 법률이라도 자기들의 결혼이 자발적인 것임을 당사자들이 형식상 확증하기만 한다면 그 이상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법률 무대의 뒷전에서 벌어지는 현실생활은 어떠하며,이 자발적 동의가 어떻게 실현되는가에 대해서는 법률이나 법률가로서는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일이다. 그런데 이 자발적 동의란 무엇인가를 법률가에게 보여주는 데는 각국의 법률을 대충 비교해보아도 될 것이다. 부모의 재산 일부를 자식들이 반드시 상속할 수 있도록 법률로 보장되어 있는 나라들에서는 그들의 상속권이 박탈당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독일이나 프랑스법 계통 나라들과 기타 몇몇 나라들에서一 자식들은 결혼할 때 부모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부모의 동의를 결혼 당시의 법률상 요건으로 하지 않는 영국법계통의 나라들에서는 부모는 자기 재산의 유증에 있어서 완전한 자유를 가지며,그들은 자기 자식들의 상속권을 자유로이 박탈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아니 바로 그렇게 때문에 결혼의 자유는,상속할 것이 있는 계급들 사이에서는 영국이나 미국에서도 사실상 프랑스나 독일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는 것이 명백하다.
결혼한 부부 간의 법률상 동등권 문제도 별다른 점이 없다. 지난 시기의 사회관계로부터 물려받은 부부 간의 법률상 불평등은 여성에 대한 경제적 억압의 원인이 아니라 그 결과이다. 많은 쌍의 부부와 그 자녀들을 포괄하던 옛날의 공산주의적 세대에서 여성이 집안 살림을 맡아보는 것은 남성이 식료품을 획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적으로 필요한 일종의 사회적 활동이었다. 가부장적 가족의 발생과 함께,더욱이 일부일처제적 개별 가족의 발생과 함께 사태는 변했다. 집안 살림은 그 사회적 성격을 상실했다. 그것은 사화와는 무관하게 되었다. 그것은 사사로운 일(Privatdienst)로 되었다. 아내는 하녀의 우두머리가 되어 사회적 생산에서 제외되었다. 우리 시대의 대공업만이 여성에게,그것도 오직 여성 프롤레타리아트에게만 사회적 생산으로의 길을 다시 열어주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만일 여성아 자기의 사사로운 가정 살림만 돌본다면,그는 여전히 사회적 생산에서 제외되어 아무것도 벌 수 없게 된다. 또 만일 그가 사회적 노동에 참가하여 독립적인 벌이를 하려고 하면,그는 자기의 가정 살림을 할 수 없게 된다. 이런 점에서 여성의 지위는 공장에 진출하건, 의사 및 변호사를 막론하고 어느 직업 분야에 진출하건 마찬가지이다. 현대의 개별 가족은 아내의 공공연한 또는 은폐된 가내 노예제에 기초하고 있으며,그리고 현대 사회는 순전히 개별 가족이라는 그런 분자로만 구성된 집단이다. 오늘날 남편은 대다수의 경우에, 적어도 부르주아 계급에 있어서는 돈을 벌어들여야 하며 가족의 부양자이어야 한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그에게 지배적 지위를 부여한다. 그것은 법률상의 어떠한 특권도 별도로 필요로 하지 않는다. 가정에서 남편은 부르주아지이고 아내는 프롤레타리아트이다. 그러나 산업 분야에서는 자본가계급의 법률상 특권이 모두 제거되고,두 계급 간에 법률상 완전한 동등권이 수립된 연후에야 비로소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경제적 억압의 특성이 가장 명백히 드러나는 것이다. 민주주의 공화국이라고 해서 이 두 계급의 대립이 완전히 근절되지는 않는다. 반대로 민주주의 공화국은 이 대립의 해결을 위한 투쟁의 기초를 만들어놓을 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부가 법률상 완전히 동등해졌을 때 비로소 현대 가정에서 아내에 대한 남편의 지배의 특성,그리고 부부 간의 진정한 사회적 평등을 수립할 필요성과 그 방법도 역시 완전히 해명될 것이다. 그때야말로 여성해방의 첫째 조건은 여성 전체가 사회적 노동에 복귀하는 것이며,그러기 위해서는 또한 개별 가족이 사회의 경제적 단위로 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명백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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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혼인에는 대체로 인류 발전의 3개의 주요단계에 상응하는 3개의 주요 형태가 있었다. 야만시대에는 군혼,미개시대에는 대우혼,문명 시대에는 간통과 매음으로 보충되는 일부일처제가 있었다. 미개의 높은 단계에서는 대우혼과 일부일처제 사이에 여자 노예에 대한 남자의 지배와 일부다처제가 있었다.
이상의 서술에서 명시된 바와 같이 혼인형태는 한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순차적으로 엇물려 갔는데, 이 진행 과정의 특징은 군혼시대의 성적 자유를 여자는 점차 박탈당하나 남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사실상 남자는 오늘날까지도 실질적으로 군혼생활을 하고 있다. 여자의 경우에는 범죄로 간주되며, 엄중한 법률적•사회적 물의를 초래하게 되는 일도 남자의 경우에는 일종의 명예스러운 일로 간주되며,최악의 경우에도 그리 탓할 것이 못되는 사소한 도덕상의 오점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전통적인 난혼이 우리 시대에 와서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의 영향을 받아 이 생산에 적응하게 되면 될수록, 즉 공공연한 매음으로 되면 될수록 난혼은 더욱더 퇴폐적 작용을 한다. 더욱이 그것은 여자보다도 남자를 훨씬 더 타락시킨다. 매음은 여자들 중 불행하게도 그런 길에 빠지게 된 사람만을 타락시키며,그것도 보통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심하지는 않다. 이와 반대로 남자의 경우에 매음은 인류의 절반을 차지하는 그들 전체를 타락시킨다. 그리하여 예컨대 남자의 장기간의 약혼생활은 대부분 사실상 간음의 예비 학교가 된다.
그러나 우리는 일부일처제를 위한 기존의 경제적 기초가 그 보충물인 매음의 기초와 마찬가지로 불가피하게 소멸하고야 말 사회적 변혁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일부일처제는 많은 재화가 한 사람의 수중에,그것도 남자의 수중에 집중된 결과 발생했으며, 그 재화를 다른 남자가 아니라 바로 그 남자의 자식에게 상속시키려는 욕망에서 발생했다. 그렇기 때문에 남편의 일부일처제가 아니라 아내의 일부일처제가 필요했으며,따라서 이 아내의 일부일처제는 결코 남편의 일부다처제의 공공연한 또는 은폐된 장애물로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다가올 사회적 변혁은 적어도 상속할 수 있는 항구적인 재화— 생산수단— 중 한없이 많은 부분을 사회적 소유로 만들기 때문에 누구를 상속자로 할 것인가를 가지고 신경 쓸 필요는 최소한도로 감소될 것이다. 그러나 일부일처제가 경제적 원인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고 해서 이 경제적 원인이 소멸하면 그것도 소멸할 것인가?
일부일처제는 소멸하지 않을 뿐 아니라,반대로 그때에야 비로소 제대로 실현될 것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생산수단이 사회적 소유로 됨과 더불어 임금노동도 프롤레타리아트도 소멸할 것이다. 따라서 또 통계적으로 산출할 수 있는 일정한 수의 여자가 돈을 받고 몸을 팔 필요도 소멸할 것이기 때문이다. 매음은 소멸될 것이나 일부일처제는 붕괴되는 것이 아니라 마침내 남자에 대해서도 현실로 될 것이다.
그리하여 여하튼 남자의 지위는 상당히 변할 것이다. 그러나 여자의 지위, 즉 모든 여자의 지위에도 역시 심한 변동이 일어날 것이다. 생산수단이 공동소유로 됨으로써 개별 가족은 이제 사회의 경제적 단위로는 되지 않을 것이다. 사사로운 집안 살림은 사회적 산업으로 되고, 아이들을 돌보며 교육시키는 것은 공공사업으로 될 것이다. 사회는 적자나 사생아를 막론하고 모든 아동들을 똑같이 돌보아 줄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처녀가 마음 놓고 사랑하는 남자에게 몸을 맡길 수 없게 만드는 가장 본질적인 사회적 계기—도덕적 및 경제적—인 그 ‘결과’에 대해서 처녀들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것은 강요받지 않은 성교를,따라서 또 처녀의 명예 및 여성의 수치에 관한보다 관대한 여론을 점차 발전시키기에 충분한 원인으로 되지 않을까? 그리고 끝으로 우리가 이미 본 바와 같이 근대세계에서는 일부일처제와 매음이 비록 대립물이지는 하나,그것은 서로 불가분의 대립물이며 동일한 사회질서의 양극이 아니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연 일부일처제를 함께 타파하지 않고서도 매음을 청산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서 일부일처제 발전 당시에는 기껏해야 맹아적 존재였던 새로운 계기,즉 개인적 성애가 작용하게 된다.
중세기 이전에는 개인적 성애가 전혀 문제로 될 수 없었다. 용모가 곱다든가 친밀한 교제라든가 취미가 같다든가 하는 것 등등이 이성간의 성적 관계를 환기시켰다는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누구와 이러한 가장 친밀한 관계를 맺는가 하는 것이 남녀 어느 편에 대해서나 전혀 상관없는 일이 아니었던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것과 오늘의 성애 간에는 아직도 상당히 거리가 멀다. 고대에서는 언제나 부모가 혼사를 정했고,당사자들은 부모의 말을 따를 뿐이었다. 고대에 알려져 있던 그 약간의 부부애는 주관적 애정이 아니라 객관적 의무였으며,혼인의 기초가 아니라 그 보충물이었다. 오늘날 말하는 연애관계는 고대에는 공적 사회 밖에서만 찾아볼 수 있었다. 테오크리투스(Theocrit)와 모스쿠스(Moschos)가 노래한 사랑의 환희와 번뇌의 주인공인 저 목동들 즉, 롱구스(Longos)의 다프니스(Daphnis)와 클로에(Chloe)는 순전한 노예들로서,자유민의 생활 범위인 국가사업에는 참가하지 못했다. 그러나 노예들 간의 연애관계를 제외한다면 기타의 연애관계는 오직 멸망해 가는 고대 세계의 분해의 산물로서만 존재했으며,그나마도 공적 사회 밖에 있는 여자인 헤테레(Häteren), 즉 외국 여자 또는 해방된 여자 노예와의 관계였다. 이것은 멸망 전야의 아테네와 제정 로마시대에서 볼 수 있다. 그리하여 만일 자유민 남녀 사이에 연애관계가 실제로 있었다면 그것은 간통의 경우뿐이었다. 그런데 고대의 고전적 연애 시인인 늙은 아나크레온(Anakreon)에게는 우리가 말하는 의미의 성애는 아무래도 좋은 것이었다. 애인의 성별조차 그에게는 아무래도 좋을 정도였으니까.
현대의 성애는 고대인들의 단순한 성적 욕망,즉 에로스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첫째로 그것은 사랑을 받는 자가 상대방을 사랑해주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여자는 남자와 평등하다. 그런데 고대의 에로스에서는 그러한 사랑이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둘째로,성애의 힘과 지속성은 대단한 것이었기 때문에 실연이나 이별이 쌍방에 대해 최대의 불행은 아닐지라도 대단한 불행이었다. 남녀는 서로 배우자를 얻기 위해 그야말로 커다란 모험을 하며 심지어 생명까지도 내건다. 고대에는 간통의 경우에만 이런 일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성교의 평가를 위한 새로운 도덕적 기준이 나타났다. 즉 성교가 혼인에 의한 것인가 혹은 야합에 의한 것(außerehelich)인가 하는 것뿐만 아니라,사랑과 그 보답에 의한 것이냐의 여부도 문제로 된다. 봉건적 관습이나 부르주아적 관습에서 이 새로운 기준이 다른 모든 도덕적 기준보다 나은 형편에 있지 않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즉 그런 것은 고려조차 되지 않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것들보다 경시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즉 그것은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승인은 받고 있었다—이론상 종이쪽지 위에서. 그러나 현재로서는 그 이상을 요구할 수 없다.
고대 세계가 성애로의 발전을 멈춘 그 지점으로부터,즉 간통으로부터 중세기는 시작한다. 우리는 이미 『여명의 노래』에서 보는 바와 같은 기사의 연애에 대해 서술한 바 있다. 혼인을 파괴하려는 이런 연애에서부터 혼인의 토대로 될 연애까지의 거리는 기사도로서는 도달할 수 없을 정도로 멀었다. 경박한 로마인을 떠나 덕성 있는 게르만인에게 눈을 돌리기만 해도 우리는 『니벨릉겐의 노래』(Nibelungenlied)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한다. 즉 크림힐트(Kriemhild)는 지그프리트(Siegfried)가 자기를 연모하는 것 못지않게 내심으로는 그를 연모하고 있었기 때문에,군터(Gunther)가 이름도 알리지 않고 어떤 기사와 자기를 약혼시켰다는 말을 듣고 크림힐트는 간단히 이렇게 대답한다.

당신께서 저에게 부탁할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언제나 당신이 명령하는 대로 행하겠습니다. 황제께서 어느 분을 남편으로 삼아주시든 저는 기꺼이 그와 약혼하겠습니다.

보는 바와 같이 그 여자는 도대체 자기의 애정이 고려되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한다. 군터는 브륀힐트(Brünhild)를 그리고 에쨀(Etzel)은 크림힐트를 한번도 보지 못하고 구혼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구트룬』(Gutrun)에서도 아일랜드의 지게반트(Siegebant)는 노르웨이의 우테(Ute)에게,헤겔링엔(Hegelingen)의 헤텔(Hetel)은 아일랜드의 힐데(H ilde)에게,끝으로 모를란트(Morland)의 지그프리드, 오르마니(Ormanien)의 하르트무트(Hartmut) 및 젤란트(Seeland)의 헤르비히(Herwig)는 구트룬에게 구혼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비로소 구트룬은 자기 마음대로 헤르비히를 얻기로 결정하게 된다. 보통 젊은 군주의 신부는 부모가 아직 살아 있는 경우에는 부모가 고르고,그렇지 않는 경우에는 발언권이 제일 큰 신하들의 조언을 받아 그 자신이 고른다. 그 밖에 다른 방도는 있을 수 없었다. 기사 또는 영주에 대해서도,군자 자신에 대해서도 결혼은 정치적 행위이며,새로운 동맹에 의한 세력 확장의 기회였다. 결혼에 있어서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은 결코 당사자의 의향이 아니라 가문(Hauses)의 이해타산이었다. 그러니 결혼 문제에서 어떻게 연애가 결정적 발언권을 가질 수 있었겠는가? 중세기 도시에 살던 동업조합 시민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동업조합 시민을 보호하는 특권,여러 가지의 유보조건이 붙어 있는 동업조합 규약, 다른 동업조합원으로부터 자기 자신의 동업조합원과 자기의 직인 및 도제를 법률적으로 구분하는 인위적인 경계선(Grenzlinien)등—이미 이것만으로도 동업조합 시민이 자신에게 어울리는 아내를 구할 수 있는 범위를 상당히 좁혀놓았다. 이런 복잡한 제도 하에서 나이가 찬 처녀들 중 누구를 고르는 것이 가장 적절한가 하는 것은 절대로 그 당사자의 의향에 따라서가 아니라 가족의 이해타산(Familieninteresse)에 의해 결정되었다.
그리하여 중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결혼은 대부분 처음과 같이 여전히 당사자 자신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았다. 최초에는 태어나면서부터 혼인이 정해져 있었다. 즉 이성의 한 집단 전체와 이미 정혼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군혼이 마지막 형태에서도 다만 그 집단의 범위가 약간 좁아졌을 뿐이지 실정은 같았다고 말할 수 있다. 대우혼의 경우에도 보통은 어머니가 자기 자식들의 혼사를 정했다. 이 경우에도 역시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새로 맺게 되는 친족관계(Verwandtschaftsbande)를 통하여 젊은 부부가 씨족이나 종족 내에서 보다 더 공고한 지위를 보장받게 되는가 어떤가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적 소유(Privateigentums)가 공동소유(Gemeineigentum)로부터 승리를 거두고 재산의 유증(Vererbung)에 대한 관심이 나타남과 더불어 부권과 일부일처제가 지배하게 되자 결혼은 전적으로 경제적 타산 여하에 좌우되었다. 매매혼의 형식은 소멸했으나 실질적으로 그것은 더욱 확대된다. 그리하여 여자뿐만 아니라 남자까지도 그의 인품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의 재산에 의해 평가되었다. 다른 어느 것보다도 당사자 상호간의 애정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은 지배계급의 관습으로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러한 일은 기껏해야 낭만파나 무시당한 피압박계급에서만 볼 수 있었다.
자본주의적 생산이 지리상의 발전시대 이래 세계무역과 매뉴팩츄어를 통해 세계 지배를 준비하기 시작한 때의 형편은 이러했다. 자본주의적 생산에는 이러한 결혼방식이 더없이 적합한 것으로 생각되었고 사실 또 그러했다. 그러나 세계사의 묘한 장난은 알 수 없는 노릇이기 때문에 바로 자본주의적 생산으로 하여금 그 결혼방식에다 결정적인 파열구를 뚫어놓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모든 것을 상품화함으로써 자본주의적 생산은 지난날의 모든 인습을 타파하고 전통과 역사적 권리를 매매와 ‘자유’(freien) 계약으로 바꾸어 놓았다. 영국의 법률가 메인(H.S. Maine)이 자기의 위대한 발견이라고 하면서 주장하는바에 따르면,지난 여러 시대와 비교해 볼 때 우리가 이룩한 진보라는 것은 곧 ‘신분으로부터 계약으로’(from status to contract), 즉 세습제도로부터 자유계약제도로 이행한 데 있다는 것이다. 이 논의는 그것이 일반적으로 정당한 한 이미 「공산당 선언」(제2장)에 서술되어있다.
그러나 계약은,자기의 인격,행위 및 재산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고,권리가 서로 동등한 사람들만이 체결할 수 있다. 이러한 ‘자유롭고’ ‘평등한’(gleichen) 인간을 만들어 내는 것이 바로 자본주의적 생산의 주된 과업 중의 하나였다. 하긴 최초에 이것은 채 의식적이지 못하고 더구나 종교적으로 위장되었지만, 루터와 캘빈의 종교개혁 이래 민간은 오직 완전한 자유의사를 가지고 행동했을 경우에만 자기의 행동에 대해 완전한 책임을 지며,비도덕적 행위의 강요에 대해서는 일체 반항하는 것이 도덕적 의무라는 명제가 확립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지금까지의 결혼관습과 어느 정도로 부합되는 것이었겠는가? 부르주아지의 견해에 따르면,혼인은 계약이며 법률행위이다. 더구나 그것은 두 인간의 육체적 및 정신적 운명을 일생 동안 결정하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중요한 법률행위이다. 과거에도 물론 혼사는 형식상 자발적으로 체결되었으며, 당사자의 승낙 없이는 실행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승낙이 어떻게 얻어졌는가,또는 누가 사실상으로 혼인을 맺었는가 하는 것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다른 모든 계약을 체결할 때 요구되던 그 진실로 자유로운 결정이 왜 결혼의 경우에는 요구되지 않았던가? 결혼하게 된 두 젊은이가 자기 자신을,자기의 신체와 그 기관을 제 마음대로 할 권리가 없었단 말인가? 성애는 기사도의 덕분으로 유행하게 된 것이 아니었던가? 또 간통과 연결되어 있는 기사의 연애와는 반대로 부부애야말로 성애의 정당한 부르주아적 형태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만일 서로 사랑하는 것이 부부의 의무라면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결혼하고 다른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는 것 역시 그들의 의무가 아니었던가? 또 과연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 권리가 부모나 친척이나 기타 인습적인 결혼 뚜쟁이나 중매자들의 권리보다 더 귀중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또 자유로운 개인의 선택이라는 권리가 교회나 종교의 영역으로 거침없이 침해당한 이 마당에서,어떻게 그 개인적 선택의 권리가 젊은 세대의 육체,정신, 재산,행복 및 불행을 좌우하려는 구세대의 견딜 수 없는 강요 앞에서 물러설 수가 있었다는 말인가?
이러한 모든 질문은,사회의 모든 낡은 유대가 느슨해지고 모든 전통적 관념이 동요된 시대에 제기되지 않을 수 없었다. 세계는 갑자기 거의 10배나 커졌다. 서유럽인들 앞에는 반구의 1/4이 아니라 이제는 지구 전체가 전개되었다. 그들은 나머지 7/8 을 전부 소유하려고 서둘렀다. 그리고 고국이라는 케케묵고 협소한 울타리와 함께 천년을 내려온 중세기적 사고방식의 울타리도 무너졌다. 인류 앞에는 외적으로 또 내적으로 무한히 더 광활한 지평이 열렸다. 인도의 재부와 멕시코와 포토시(Potosis)의 금•은광에 유혹된 청년들에게는 예절이 바르다는 평판이나 대대로 물려받은 영예로운 동업조합적 특권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이때는 부르주아지가 기사도를 닦는 시대였다. 또한 이 시대에 그들은 낭만과 사랑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부르주아적인 입장에 선 것이었으며, 결국은 부르주아적인 목적을 가진 것이었다.
그리하여 신흥 부르주아지,특히 현존 질서의 동요가 가장 심한 프로테스탄트 각국의 부르주아지는 혼인에 대해서도 점점 계약의 자유를 승인하게 되었고,상기한 바와 같은 방식으로 이를 실현했다. 혼인은 의연히 계급혼인이었으나 계급 내부에서는 당사자들이 어느 정도 선택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종이쪽지 위에서는,즉 도덕론이나 문예물들에서는 성애의 상호성과 진실로 자유로운 부부의 합의에 기초하지 않은 온갖 혼인은 비도덕적이라는 명제가 그야말로 확고부동하게 확립되어 있었다. 요컨대 연애결혼은 인권으로서, 그것도 비단 남자의 권리(droit de L’homme)로서뿐만 아니라, 예외적 형태로는 여자의 권리(droit de femme)로서도 선포되었다.
그러나 이 인권은 한 가지 점에서 다른 모든 종류의 소위 인권과 다르다. 이 후자의 인권들은 실제로 지배계급인 부르주아지만이 향유하는 것으로 되었고, 피압박계급인 프롤레타라아트는 직접 또는 간접으로 박탈당하고 있다. 여기서 역사는 또 다시 묘한 장난을 치고 있다. 지배계급은 도저히 상술한 바와 같은 경제적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므로,참으로 자유로운 혼인이란 그들 사이에서는, 예외적인 것이지만, 피압박계급들 사이에서는 이미 본 바와 같이 그것은 당연한 것으로 되고 있다.
따라서 완전히 자유로운 결혼은 자본주의적 생산과 이에 기인하는 소유관계가 지양됨으로써, 오늘날 아직도 배우자의 선택에 아주 큰 영향을 주고 있는 그 모든 부차적인 경제적 고려가 제거되는 때에야 비로소 일반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 그때에는 이미 상호 간의 애정 이외에 다른 아무런 동기도 없게 될 것이다.
 성애는 그 본질상 배타적이기 때문에—이 배타성을 현재는 오직 여자만이 준수하고 있지만一 성애에 기초한 혼인은 그 본질상 단혼이다. 이미 본 바와 같이 바호펜은 아주 정당하게도 군혼으로부터 단혼으로의 발전으로 주로 여자가 이룩한 진보라고 말했다. 다만 대우혼으로부터 일부일처제로의 이행만은 남자가 이룩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 이행은 본질상 여자의 지위를 약화시켰으며, 남자 자신의 정조의 파괴를 조장했다. 때문에 여자로 하여금 남자의 이러한 관습적인 정조 파괴를 참도록 만들었던 그 경제적 고려—자기 자신의 생존에 대한 염려와 특히 자기 자녀들의 장래에 대한 염려—가 소멸하면,이 소멸로써 달성된 여자의 평등권은 종래의 경험에 비추어 보아 여자의 일처다부제보다는 남자의 참된 일부일처제를 무한히 더 촉진시키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일부일처제가 소유관계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가지게 된 그 모든 특징들은 완전히 사라지게 될 것인 바,그것은 첫째로 남자의 지배이며,둘째로 이혼의 불가능성이다. 혼인에 있어서 남자의 지배적 지위는 그의 경제적 지배의 단순한 결과이며,후자의 소멸과 함께 자연히 소멸한다. 이혼의 불가능성은 부분적으로는 이 경제적 조건과 일부일처제 사이의 연관이 아직 옳게 이해되지 못하고 종교적으로 위장되고 있던 시대의 전통이다. 이혼의 불가능성은 이미 오늘에도 몇 천 번이나 위반되었다. 만일 사랑에 기초한 혼인만이 도덕적이라면 사랑이 지속되는 동안의 혼인만이 도덕적인 것이다. 그러나 개인적 성애의 지속성은 사람마다 다르며,특히 남자의 경우에 그러하다. 그리고 일단 애정이 아주 식어 버리거나 또는 딴 사람과의 정열적 사랑으로 구축되고 말 때에,이혼은 당사자 쌍방에 대해서나 사회에 대해서나 선한 행위로 변한다. 이혼소송이라는 불필요한 진흙탕을 거치지 않게 하는 것만으로도 그러하다.
그리하여 앞으로 자본주의적 생산을 지양(Wegfegung)한 후에 규제될 양성끼리의 관계의 형태에 관해 우리가 지금 예상할 수 있는 것은 주로 부정적인 측면들로서, 대다수의 경우에 소멸하게 될 그러한 것들이다. 그러나 새로 나타나게 될 것은 어떤 것들인가? 그것은 남녀의 새로운 세대가 자라나서,남자는 일생을 두고 금전이나 기타 사회적 권력수단으로 여자를 사는 일이 없게 되고 여자는 진정한 사랑 이외에는 다른 어떠한 동기로도 결코 남자에게 몸을 맡기지 않게 되며,사랑하는 사람에게 경제적 결과에 대한 두려움으로 몸을 허락해 버리는 일을 거부하게 될 때 확정될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이 출현할 때면 현재 그들의 의무로 간주되고 있는 것들에 대해 그들은 조금도 애태우지 않게 될 것이다. 그들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스스로 알 것이며,또 이에 따라서 각자의 행동에 관한 여론을 스스로 조성할 것이다. 오직 그뿐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모오간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졌으니 이제는 모오간으로 되돌아가기로 하자. 문명시기에 발전한 사회제도를 역사적으로 연구하는 것은 그의 저작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다. 때문에 이 시기의 일부일처제의 운명에 대해서 그는 극히 간단히 언급하고 있다. 그도 역시 일부일처제 가족의 가일층의 발전에서 일정한 진보,즉 양성의 완전한 동등권(Gleichberechtigung)으로의 접근을 보고 있으나, 그것이 이미 실현된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가족이 네 가지의 형태를 차례로 밟아 오다가 지금은 다섯번째의 형태에 있다는 사실을 승인한다면,이 형태가 장래에도 지속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가능한 대답은 단 하나뿐이다. 즉 가족은 바로 과거에도 그러했던 것처럼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서 발전할 것이며, 사회가 변함에 따라서 변할 것이다. 가족은 사회제도의 한 산물이므로 그 문화발전 상태를 반영한다. 일부일처제 가족은 문명 초기 이래 개선되어 왔으며, 또 최근에 와서는 특히 두드러진 개선을 보았다. 그러므로 그것이 한층 더 완성되어 드디어 양성의 평등이 실현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쯤은 적어도 예상할 수 있다. 그런데 만일 일부일처제 가족이 머나먼 장래에 가서 사회적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게 된다면 그 뒤를 이은 형태가 어떠한 것이겠는가 하는 것은 예측할 수 없다.


제Ⅲ장 이로쿠오이 씨족



이제는 모오간의 또 다른 발견을 살펴보기로 하자. 이 발견은 적어도 원시적 가족형태(Urfamilienform)를 친족제도에 근거해서 다시 묘사해 놓은 것에 못지 않게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모오간이 증명한 바에 따르면,아메리카 인디안의 한 종족 내에서 동물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혈연결합체들(Geschlechtsverbände)은 본질상 그리스인들의 게네아(genea)나 로마인들의 겐테스(gentes)와 동일한데,아메리카의 형태는 시초적인 것이고,그리스•로마의 그것은 보다 나중의 것이며 파생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씨족,부족 및 종족으로 이루어져 있는 고대 그리스인과 로마인들의 사회조직은 아메리카 인디안의 사회조직과 같으며,씨족이라는 것은 문명 직전 시기나 나아가서는 그 이후 시기의(현존하는 자료에 기초하여 판단할 수 있는 한) 모든 종족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제도라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것을 논증함으로써 모오간은 그리스와 로마의 최고대사에서 풀기 힘들었던 문제들을 단번에 해명했으며,그와 동시에 뜻밖에도 국가 발생 이전의 원시시대에 있던 사회제도의 기본특징들을 밝혀 주었다. 이러한 발견은 알고 보면 극히 간단하게 보이지만 최근에야 비로소 모오간이 발견한 것이다. 1871년에 출판된 그의 이전 저서에는 아직 이 비밀이 해명되지 못했다. 이 비밀이 밝혀지자 평소에는 그처럼 자기를 과신하고 있는 영국 선사학자들이 한동안 침묵을 지키지 않을 수 없었다.
모오간이 도처에서 이러한 혈연결합체를 가리키는 말로 쓰고 있는 라틴어의 gens라는 말은 같은 뜻의 그리스어 genos와 마찬가지로 ‘낳는다’(erzeugen)는 것을 의미하는 아리안어 공통의 언어 gan(독일어로는 kan이다. 왜냐하면 독일어에서는 통례로 아리안어의 g를 k로 쓰기 때문이다)에서 유래된 것이다. Gens, genos, 산스크리트어의 dachanas, 고트어(위에서 지적한 통례에 의하여)의 Kuni, 고대 북유럽어 및 앵글로一색슨어의 kyn, 영어의 kin, 중부 고지 독일어의 Künne는 모두 씨족 또는 혈통을 의미한다. 그런데 라틴어의 gens와 그리스어의 genos라는 말은 공통의 혈통(이 경우에는 같은 시조부에서 나온 혈통)을 자랑하며,일정한 사회제도와 종교제도에 의해 특수한 공동체를 이룬 그러한 혈연결합체를 가리키는 전문 용어로서 쓰이고 있다. 그러나 이 공동체의 기원과 본성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우리 시대의 어느 역사가도 아직 해명하지 못하고 있었다.
위에서 푸날루아 가족을 고찰할 때 시초 형태의 씨족 구성이 어떠한 것인가를 이미 살펴보았다. 그것을 구성하는 것은 푸날루아식 혼인에 의해,그리고 이 혼인에서 불가피하게 지배하는 관념에 따라 일정한 한 시조모,즉 씨족 창시자의 공인된 자손을 이루는 모든 사람들이다. 이러한 가족형태에서는 아버지를 확인할 수가 없으므로 여계만이 인정되었다. 형제들은 자기의 자매들과는 결혼할 수 없고 다만 다른 혈통의 여자들과 결혼할 수 있으므로,이러한 족외의 여자들과의 사이에 출생한 아이들은 모권에 의해 그 씨족 밖에 있게 된다. 그리하여 그 혈연결합체 내에서 각 세대의 딸들의 자손만이 남고 아들들의 자손은 자기 어머니의 씨족으로 넘어간다. 이러한 혈연집단이 종족 내의 다른 혈연집단에 대해 특수한 집단으로서 형성된 후에 그것은 어떻게 되는가?
이러한 시초적 씨족의 고전적 형태로서 모오간은 이로쿠오이인들의 씨족,특히 세네카 종족의 씨족을 든다. 이 세네카 종족에는 동물의 명칭을 가진 8개의 씨족이 있다. 즉 (1)이리, (2)곰,(3)거북, (4)해리(海狸),(5)사슴,(6)도요새,(7)황새,(8)매 등인데,각 씨족에는 다음과 같은 관습이 있다.
1. 씨족은 자기의 사쳄(Sachem, 평상시의 우두머리)과 군사수령(전시지휘관)을 선출한다. 사쳄은 씨족 자체의 성원 중에서 선출되어야 했다. 그리고 그 직위는 공석일 때는 곧 보충되어야 했기 때문에 씨족 내에서 세습적인 것이었다. 전시 지휘관은 씨족 성원이 아니라도 선출될 수 있었으며 때로는 전혀 없을 수도 있었다. 이전의 사쳄의 아들이 사쳄으로 선출되는 일은 전혀 없었다. 왜냐하면 이로쿠오이인들 사이에서는 모권이 지배하고 있었고,따라서 아들은 다른 씨족에 속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대 사쳄의 형제나 그 자매와 아들이 선출되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 선거에는 남녀 ‘모두가’ 참가했다. 그러나 선거는 다른 일곱개 씨족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그 후에야 비로소 피선자는 엄숙히 그리고 또 이로쿠오이인 동맹 전체의 공동평의회(gemeinsamen Rat)에 의해 그 직위에 임명되었다. 왜 이렇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후에 가서 알게 될 것이다. 씨족 내에서의 사쳄의 권력은 부성적(乂性的)인 것으로서 순전히 도덕적인 것이었다. 그는 강제수단을 가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그 직위상 이로쿠오이인 공동동맹평의회(Bundesrats der Gesamtheit)의 성원인 동시에 세네카 종족평의회(Stammesrats)의 성원이기도 했다. 군사수령은 출정시에만 어떤 명령을 내릴 수 있었다.
2. 씨족은 임의로 사쳄과 군사수령을 파면한다. 이것도 역시 남녀가 공동으로 결정한다. 파면당한 자들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단순한 병사로 되거나 사인(私人)으로 된다. 그러나 종족평의회도 역시 사쳄을 파면할 수 있으며,씨족의 의사를 거역해서까지도 집행할 수 있다.
3. 씨족 성원은 누구도 씨족 내부에서는 결혼할 수 없다. 이것은 씨족의 기본규칙이며 씨족을 결속시키는 유대이다. 이것은 개인을 비로소 씨족으로 단합시키는 극히 적극적인 그 혈연관계의 소극적 표현이다. 이런 간단한 사실을 발견함으로써 모오간은 처음으로 씨족의 본질을 밝혔다. 이 본질에 대한 종래의 지식이 보잘 것 없었다는 것은 야만인과 미개인에 관한 종전의 보고들이 잘 말해준다. 즉 이 보고들에서는 씨족제도의 구성요소인 각종 조직체들이 아무런 분별도,구별도 없이 일률적으로 종족, 씨족,종족(宗族,Thum) 등등의 이름으로 불리었으며,그리고 이 단체들 내부에서는 결혼이 금지되어있다는 말도 적지 않았다. 이것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을 일으켰다. 여기서 맥레난씨는 모든 종족이 족내에서 혼인이 금지되어 있는(족외혼적인) 종족과 허락되어 있는(족내혼적인) 종족으로 구분된다는 나폴레옹식의 절대적인 판결로써 질서를 세움으로써 혼란을 가중시켰다. 이와 같이 문제를 결정적으로 혼란시켜 놓고, 이어서 그는 자기의 이 불합리한 두 개의 범주 중 대체 어느 것이 더 오랜 것인가—족외혼이냐 족내혼이냐 하는 심오하기 그지없는 연구에 몰두했다. 혈연관계와 이에 기인하는 씨족 성원 간 혼인의 불가능성 위에 수립된 씨족이 발견됨에 따라 그러한 망발은 저절로 사라져 버렸다. 우리가 알게 된 당시의 이로쿠오이인들의 발전단계에서는 씨족 내 혼인의 금지가 엄수되고 있었다는 것은 물론이다.
4. 사망자의 재산은 남아 있는 씨족 성원의 손으로 넘어갔다. 그것은 그 씨족 내에 남아 있어야만 했다. 한 이로쿠오이인이 남겨놓을 수 있는 물건이란 보잘 것 없는 것이었으므로 그의 유산은 그의 가장 가까운 친족들끼리 나누어 가졌다. 남자가 사망했을 때에는 그의 친형제, 친자매들과 어머니의 남자 형제들끼리 나누었고,여자가 사망했을 때에는 그 여자의 자녀들과 친자매끼리 나누었는데,그 여자의 남자 형제들은 여기서 제외되었다. 역시 같은 이유로 남편과 아내는 서로 상속할 수 없었으며, 부자 간에도 역시 상속할 수 없었다.
5. 씨족 성원들은 서로 돕고 보호할 의무가 있었으며,특히 족외자의 침해에 대한 복수에 협력할 의무가 있었다. 개인은 자기의 안전을 씨족의 비호에 의지했으며 또 그럴 수 있었다. 그에 대한 가해자는 씨족 전체에 대한 가해자였다. 이로부터, 즉 씨족의 혈연적 유대로부터 피의 복수에 대한 의무가 발생했다. 이것은 이로쿠오이인들이 무조건적으로 승인하는 것이었다. 만일 어느 한 씨족 성원이 다른 씨족성원에게 살해당했을 때에는 피살자 측 씨족 전체가 피의 복수를 할 의무가 있었다. 우선 화해책이 취해진다. 살해자 측 씨족은 씨족평의회를 소집하고 피살자 측 씨족평의회에게 대부분의 경우 애도의뜻의 표시와 함께 막대한 선물을 제공함으로써 사건을 평화적으로 마무리지을 것을 제의한다. 이 제의가 접수되면 이것으로 사건은 마무리된다. 그렇게 되지 않을 경우에는 피해자 측 씨족이 한 명 또는 약간 명의 복수자를 지명해 그들이 살해자를 찾아내 죽일 책임을 부여한다. 이와 같이 복수를 당해도 복수당한 씨족으로서는 불평을 말할 권리가 없었다. 사건은 이것으로서 종결되었다.
6. 씨족은 전체 종족 내에서 오직 자기 씨족만이 사용할 수 있으며, 따라서 각 씨족 성원의 이름이 동시에 그의 소속 씨족을 명시해주는 그런 특정한 명칭 또는 한 계열의 명칭을 가지고 있다. 씨족적 권리도 역시 씨족 명칭과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다.
7. 씨족은 족외자를 양자로 삼아서 전체 종족의 성원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리하여 죽이지 않은 포로는 어느 한 씨족의 양자가 되어 세네카 종족의 성원으로 되었고,그럼으로써 그는 씨족과 종족의 성원으로 되었으며,그 씨족과 종족의 모든 권리를 가졌다. 양자로 삼는 것은 개별적 씨족 성원들의 제의에 따라 수행되었다. 즉 제의자가 남자일 때에는 족외자를 형제나 또는 자매로서 받아들였고,여자일때에는 그를 자기의 자녀로서 받아들였다. 이와 같이 양자를 삼을 경우에는 씨족에 받아들이는 의식(儀式)을 통해 확인받는 것이 필요했다. 특수한 사정으로 인원이 감소한 개별적 씨족은 이런 식으로 딴 씨족의 동의 아래 그 성원을 양자로서 대량으로 받아들여 자체를 다시 강화하는 일이 가끔 있었다. 이로쿠오이인들의 경우에는 그 씨족으로의 편입의식이 종종 평의회의 공개회의에서 거행되었다. 이리하여 그것은 사실상 종교적 의식으로 굳어졌다.
8. 인디안 씨족들이 자기의 고유한 종교적 제전(祭典)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기는 곤란하다. 그러나 인디안의 종교적 의식은 다소간 씨족과 연관되어 있다. 매해 6차례씩 진행되는 이로쿠오이인들의 종교적 제전 때에는 개별적 씨족의 사쳄과 군사수령들이 그 직위상 ‘신앙 옹호자’(Glübenshutern)로 취급되어 승려의 직능을 수행했다.
9. 씨족은 공동묘지를 가지고 있다. 뉴욕주(州) 이로쿠오이인들은 백인들한테 사면에서 포위되어 지금은 가지고 있지 않지만,전에는 묘지를 가지고 있었다. 다른 인디안들은 아직도 가지고 있다. 예컨대 이로쿠오이인들과 혈연적으로 가까운 투스카로라인들(Tuskaroras)의 경우가 그러하다. 그들은 기독교 신자이지만 씨족마다 제각기 묘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아이들과 나란히 같은 묘지에 매장되었으나 아버지는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이로쿠오이인의 경우에도 역시 장례식에는 사망자 측 씨족 전체가 참가하며,무덤 일도 거들어주고 추도연설 등의 행사를 거행한다.
10. 씨족에는 평의회가 있다. 그것은 평등한 투표권을 가진 전체 성년 남녀 씨족 성원들의 민주주의적 회의이다. 이 평의회는 사쳄과 군사수령들뿐만 아니라 다른 ‘신앙 옹호자’들 역시 선출하거나 파면했다. 평의회는 살해당한 씨족 성원에 대한 배상금(Bußgaben,Wergeld)또는 대의 복수에 관한 결정을 채택했으며,족외자(Fremde)의 씨족성원으로의 편입을 결정했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것은 씨족 내의 최고권한이었다.
이러한 것이 전형적인 인디안 씨족의 권한이었다.

그 전체 성원은 서로 자유를 보위해 줄 의무를 진 자유민들이다. 그들의 개인적 권리는 모두 평등하다. 사쳄도 군사수령도 특권이라고는 조금도 탐내지 않는다. 그들은 혈연적 유대로 결합된 형제관계를 이루고 있다. 자유, 평등, 우의는 성문화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씨족의 기본원칙이었다. 씨족은 또 완전한 한 단위의 사회제도였으며, 조직된 인디안 사회의 기초였다. 만인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인디안들의 백절불굴의 독립정신과 자존심은 이에 기인하는 것이다.

아메리카 발견 당사에는 전체 북아메리카 인디안들이 모권제의 원칙 위에서 씨족으로 조직되어 있었다. 다만 소수의 종족들,예컨대 다코타(Dakotas)같은 종족의 경우에는 씨족이 와해 중에 있었고,약간의 다른 종족들,즉 오지브와인(Ojkbwas)과 오마하인(Omahas)의 경우에는 씨족이 부권제의 원칙 위에서 조직되어 있었다.
5〜6개 내지 그 이상의 씨족을 가진 대부분의 인디안 종족들은 각각 3〜4개 내지 그 이상의 씨족을 한데 묶어서 따로 한 집단을 조직하고 있었다. 모오간은 이러한 집단을 부족(部族,Phratrie, 형제관계)이라고 했다. 이것은 인디안의 명칭을 그에 해당하는 그리스의 명칭으로 정확히 옮겨놓은 것이다. 예컨대 세네카 종족에는 두 개의 부족이 있었다. 첫째 것에는 1〜4개의 씨족이 있었고,둘째 것에는 5〜8개의 씨족이 있었다. 좀 더 자세히 연구해 보면 이 부족들은 대개 종족이 최초에 분열된 때에 생긴 시초 씨족들이었다. 왜냐하면 족내혼이 금지된 조건 아래서 각 종족이 자립적으로 생존 할 수 있으려면 필연적으로 적어도 두 개의 씨족을 포괄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종족이 늘어남에 따라 이번에는 각 씨족이 두 개 내지 그 이상의 씨족으로 분열되어,이것들이 이제는 자립적인 씨족으로서 나타나게 된다. 한편 시초 씨족은 이 모든 새로이 파생한 씨족들을 포괄한 채로 계속해서 부족으로서 존재한다. 세네카 종족과 기타 대다수 인디안들 사이에서는 같은 한 부족의 씨족들은 형제 씨족으로 인정되지만,다른 부족의 씨족들은 그들의 종형제 씨족이다. 이 명칭은 우리가 이미 본 바와 같이 아메리카식 친족제도에서는 극히 현실적이고 또 아주 명확한 의미를 지닌다. 어느 세네카인도 원래는 자기 부족 내부에서 결혼할 수 없었지만, 이런 관습은 이미 오래 전에 없어지고 현재는 씨족 내에서만 할 수 없는 것으로 되어 있다. 세네카 종족의 전설에 따르면,곰 씨족과 사슴 씨족이 시초 씨족이고 기타 씨족은 여기서 파생한 씨족이었다. 일단 이러한 새 조직이 뿌리를 내린 다음에는 필요에 따라 그 형태가 조금씩 달라졌다. 한 부족 내 몇몇 씨족이 사멸했을 경우에는 다른 부족과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다른 부족들내의 몇 개 씨족을 몽땅 그 곳으로 옮기는 일도 가끔 있었다. 그 결과 같은 명칭을 가진 씨족들이 상이한 부족에 분속되어 있는 것을 상이한 종족들에게서 보게 된다.
이로쿠오이인 부족의 기능은 일부는 사회적인 것이었으며,일부는 종교적인 것이었다. (1)공놀이 때면 부족들은 서로 대항해 각각 자기네들의 가장 우수한 경기자를 골라 내보내고 나머지 사람들은 부족별로 나뉘어 구경을 하면서 자기 편 경기자들의 승리를 걸고 서로 내기를 한다. (2)종족평의회에서는 각 부족의 사쳄들과 군사수령들이 각각 패를 지어 마주 앉으며,각 발언자는 별개 집단으로서의 각 부족대표자들에게 발언한다. (3)종족 내에서 살인이 일어나고 살해자와 피살자의 소속 부족이 각각 다를 때는 피해를 입은 씨족이 자기의 형제 씨족들에게 호소하는 일이 종종 있다. 호소를 받으면 형제 씨족들은 부족평의회를 소집하고 다른 부족 전체에 대해서도 역시 사건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자기의 평의회를 소집할 것을 요청했다. 그리하여 여기서는 부족이 다시 시초 씨족으로서 파생된,한층 미약한 개별적 씨족보다 성공에 대한 가능성을 더 많이 가지게 된다. (4)유력한 사람이 죽을 경우에는 상대편 부족이 매장과 장례에 대한 처리를 도맡았는데 사망자 편 부족 성원들은 상가 사람들로서 장례에 참가했다. 사쳄이 죽었을 때에는 그 자리가 공석임을 상대편 부족이 이로쿠오이인 동맹평의회에 통지했다. (5)사쳄 선거 때에도 역시 부족평의회가 활약했다. 선거에 대한 형제 씨족들의 동의를 받는 것은 거의 자명한 것으로 간주되었으나,다른 부족의 씨족들은 이의를 제기할 수 있었다. 이런 경우에는 제기 받은 부족의 평의회가 소집되었다. 그 평의회가 제기된 이의를 정당하다고 간주했을 때 선거는 무효로 인정되었다. (6)전에는 백인들이 마술 집회소(medicine-lodges)라고 부르는 특수한 종교적 비밀의식 이 이로쿠오이인들 사이에 있었다. 이 비밀의식은 세네카 종족의 경우에는 두 개의 종교공동체 (religiöse Genossensschaften)에 의해 의식이 진행되었다. 두 부족은 각각 이러한 공동체를 한 개씩 가지고 있었다. (7)거의 확실한 사실이지만 만일 정복 당시까지 틀라스칼라(Tlascala)의 네 개 지역에 거주했던 네 개의 혈통(linages, Geschlechter)이 네 개의 부족이었다면,이것들은 그리스인들의 부족이나 이와 유사한 게르만인들의 혈연결합체처럼 역시 군사적 단위이기도 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들 네 개의 혈족은 각각 별개 부대로서 제복이 달랐고 깃발도 달랐으며 서로 다른 통솔자의 지휘 하에 싸움에 나갔다.
몇 개의 씨족이 모여서 부족을 형성하는 것처럼 고전적인 형태에서는 몇 개의 부족이 모여서 종족을 형성한다. 인원이 대단히 모자라는 종족들에서는 간혹 부족이라는 중간 고리가 없는 경우도 있다. 그러면 아메리카 인디안 종족의 특징은 무엇인가?
1. 자기 자신의 영토와 자기 자신의 명칭을 가지고 있었다. 각 종족은 자기의 실제적인 거주지 외에 수렵과 어로를 위한 광대한 지역도 가지고 있었다. 이 지역과 인접 종족의 영지 사이에는 광대한 중립지대가 있었다. 언어가 서로 비슷한 종족들 사이에는 이 중립지대는 약간 좁았고 그렇지 못한 종족들 사이에는 약간 넓었다. 예컨대 게르만인의 경계림(境界林),케사르가 말한 스웨브인들(Sueven)이 자기 영토 주위에 설정한 공지가 그러한 것이었으며,덴마아크인과 게르만인 사이에 있던 이자른홀트(isarnholt, 덴마아크어로는 jarnved, limes Danicus) 그리고 게르만인과 슬라브인 사이에 있는 작센림(Sachsenwald), 또한 브란덴부르크라는 지명의 어원인 브라니보르(branibor,슬라브어로는 방어림 Schuzwald이라는 뜻)가 그러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불확실한 경계선으로 구획된 지역은 종족의 공유지였으며 인접 종족들도 그의 공유지로서 인정하고 있었고,또 종족 자신이 이를 침략으로부터 방위했다. 경계의 불확실성은 대개 인구가 상당히 증가하게 되자 사실상 불편한 것으로 되었다. 종족의 명칭은 의식적으로 선택되었다기 보다는 대부분 우연히 발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인접 종족들이 한 종족에게 그 종족 자신이 부르는 것과는 다른 명칭을 붙인 일이 가끔 있었다. 예컨대 켈트인들이 게르만인들에 대한 최초의 역사적 총칭으로서 그들을 ‘게르만인’이라고 부른 경우가 그러하다.
2. 이 종족에게만 독특한 방언이 있었다. 실제로 종족과 방언은 본질상 일치한다. 분열에 의한 종족 및 방언의 새로운 형성은 아메리카에서는 최근까지도 진행되었으며, 아마 지금도 진행을 완전히 멈추지는 않았을 것이다. 수적으로 약해진 두 개의 종족이 하나로 통합되는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동일한 종족 내에서 매우 비슷한 두 가지 방언이 사용되는 일도 있었다. 아메리카의 여러 종족들의 평균 인구는 약 2천명 미만이다. 그러나 체로키 종족(Tscherokesen)은 2만 6천명으로서 아메리카 인디안들 중 같은 방언을 사용하는 가장 큰 종족이다.
3. 씨족들이 선출한 사쳄과 군사수령을 엄숙하게 임명할 권리가 있다.
4. 그들을 선출한 씨족의 의사에 거슬리더라도 그들을 파면할 권리가 있었다. 이 사쳄과 군사수령은 종족평의회의 성원이므로 그들에 대한 종족의 이러한 권리는 당연한 것이었다. 종족동맹이 형성되어 이에 편입된 모든 종족이 동맹평의회(Bundesrat)에 대표를 파견하고 있는 경우에는 위에서 말한 권리는 동맹평의회가 행사하게 된다.
5. 공동의 종교적 표상(신화)과 예배의식이 있다.

인디안은 미개인의 본을 따른 종교적 종족이었다.

인디안의 신화는 여태껏 비판적으로 연구된 일이 아직 전혀 없었다. 그들은 자기의 종교적 관념의 형상—온갖 종류의 영(靈)一에다 이미 인간의 모습을 부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처하고 있던 미개의 낮은 단계에서는 형상적 표현인 소위 우상(Götzen)은 아직 없었다. 그것은 다신교로 발전하는 과정에 있던 자연 및 자연력 숭배였다. 각 종족은 춤이나 경기 같은 일정한 예배형식을 갖춘 정기적인 제전을 진행했는데,특히 춤은 모든 종교의식의 본질적인 구성부분이었다. 각 종족은 자기의 제전을 각각 따로 거행했다.
6. 공동사업을 심의하기 위한 종족평의회가 있었다. 평의회는 각 씨족의 전체 사쳄과 군사수령들로 구성되었는데,이들은 씨족의 진정한 대표자들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언제든지 파멸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평의회 회의는 토론에 참가하여 자기 의견을 발표할 권리를 가지는 다른 종족 성원들도 참가한 가운데 공개적으로 진행되었다. 평의회는 결정을 채택했다. 보통은 회의 참가자들 모두가 자기의 요구에 따라 의견을 말할 수 있었으며,여자들도 역사 자기들이 선정한 발언자를 통해 의견을 제시할 수 있었다. 이로쿠오이인들의 경우에는,게르만인들이 마르크공동체 아래에서 어떤 문제를 결정할 경우 그러했던 것처럼 최종 결정은 만장일치의 가결을 요구했다. 특히 다른 종족들과의 관계를 조절하는 문제 등은 종족평의회에서 다루어졌다. 종족평의회는 사절을 접견 또는 파견하고,선전을 포고하며 강화를 체결했다. 일단 전쟁이 일어나면 그것은 대개 의용병들에 의해 치루어졌다. 어느 종족이든지 평화조약을 제대로 체결하지 않고 있는 상태라면 원칙적으로 그들은 전쟁상태에 있는 것으로 간주했다. 이러한 적들에 대한 출정군은 대개 개개의 우수한 전사들로써 조직되었다. 그들은 전쟁 무도회를 개최했으며,여기에서 춤을 춘 사람들은 모두 그것으로 자기의 출정의사를 표명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곧 부대가 편성되어 진군했다. 침공당한 종족의 영토방위도 역시 대부분 의용병들이 수행했다. 이러한 대열의 출정과,출정에서의 그들의 귀환은 언제나 공적 제전을 위한 기회가 되었다. 이러한 출정에 대해서는 종족평의회의 동의가 필요치 않았다. 그것은 요구되지도 않았으며 주어지지도 않았다. 그것은 타키투스가 말하는 게르만인 친병단(deutscher Gefolgschaften)의 사적 출정과 꼭 같은 것이었다. 다만 다른 점은 게르만인들의 경우에는 친병단이 어느 정도 상비적 성격을 띠며,이미 평화시에 조직되어 전시에는 의용군들(Freiwilligen)이 가세하여 그 친병단의 견고한 핵심을 이룬다는 것 뿐이다. 이러한 출정부대가 대부대인 경우는 드물었다. 인디안의 극히 중요한 원거리 원정의 경우에서조차 그리 많지 않은 전투력으로써 수행되었다. 이러한 출정 부대가 연합하여 어떤 큰 계획을 수행하는 경우에도 각 부대는 오직 자기 자신의 군사수령에만 복종했다. 출정 계획의 통일은 이 수령들의 평의회를 통해서 어느 정도 보장되었다. 암미아누스 마르셀리누스(Ammianus Marcellinus)가 서술한 바에 따르면 4세기에 상부 라인 지방에서 알레만인들(Alemanni)이 보여 준 전쟁 수행방법이 바로 그러했다.
7. 몇 개의 종족에는 한 사람의 수석 우두머리 (Oberhäuptling)가 있었다. 그러나 그의 권한은 극히 미약하다. 그는 사쳄와 한 사람으로서 긴급한 행동이 요구되는 경우에는 평의회가 소집되어 최종 결정이 채택될 때까지 임시 조치를 취할 책임이 있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집행권을 가진 공직자와 맹아를 보게 된다. 그러나 겨우 싹트기 시작한 이 맹아는 대개 더 이상의 발전을 보지 못하고 말았다. 오히려 이러한 공직자가 나타나게 된 것은,앞으로 보게 되겠지만,모든 경우는 아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최고 군사수령의 권력이 발전한 결과이다.
 아메리카 인디안들의 압도적 다수는 종족의 연합 이상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폭넓은 경계선으로 서로 구분되어 있고,끊임없는 전쟁 때문에 약화되어, 인구가 적은 종족들은 소수 인원으로 광대한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근친종족들 사이의 동맹이 여기저기서 결성된 경우도 있었으나,그것은 일시적인 필요에 의한 것이고 그 필요성이 소멸되면 붕괴되곤 했다. 그러나 어떤 지방에서는 원래 근친관계에 있다가 후에 분열된 종족들이 다시 결합하여 영속적인 동맹을 형성하기도 했다. 이리하여 민족 형성은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아메리카의 이로쿠오이인의 경우에는 이러한 동맹이 가장 발달한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그들은 미시시피강 서부의 자기 거주지—여기서는 그들이 대(大)다코타 가족 중 한 개의 곁가지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를 떠나 오랜 기간 방랑한 끝에 현재의 뉴욕주에 정착하여, 세네카(Senecas),카유가(Cayugas),오논다가(Onondagas),오네이다(Oneidas) 및 모호크(Mohawks) 등 5개 종족으로 갈라졌다. 그들은 어로,수렵 및 조잡한 채마밭 경작(Gartenbau)으로 살아 갔으며,대개는 울타리를 둘러친 부락에 살았다. 그들의 수는 2만명을 넘은 적이 없었으며,5개 종족 전체에는 몇 개의 공통된 씨족이 있었다. 그들은 동일한 언어에 속하는 비슷한 방언을 썼으며,5개 종족 사이에 나누어진 서로 연결된 한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 지역은 그들이 정복한 지 얼마 안되었기 때문에 축출당한 종족들에 대해 그들이 통일적인 보조를 취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리하여 늦어도 15세기 초에 와서는 정규적인 ‘영구동맹’(ewigen Bund), 즉 연합(Eidgenosssenschaft)이 생기게 되었다. 그런데 이 연합은 자기가 획득한 세력을 자각하게 되자 침략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그 위력의 절정기인 1675년 경에는 주변의 광대한 지역을 정복하고,때로는 그 주민들을 쫓아내거나 때로는 공물을 바치게 했다. 이로쿠오이인 동맹은 미개의 낮은 단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던 인디안들(따라서 멕시코인,뉴 멕시코인 및 페루인을 제외한)이 창조할 수 있었던 가장 발전한 사회조직이었다. 동맹의 기본 특징은 다음과 같았다.
1. 종족의 모든 내부 문제에서 완전한 평등권과 자주성을 바탕으로 수립된 5개 혈연종족의 영구동맹. 이 혈연관계는 동맹의 진정한 기초였다. 5개 종족 중 셋은 아버지 종족이라고 불리었고 서로 형제간이었다. 다른 두 종족은 아들 종족이라고 불리었는데 역시 상호간 형제종족이었다. 세 개의 씨족一가장 오랜一은 전체 5개 종족 내에 아직도 자기의 고유한 대표를 가지고 있었으며,다른 세 개의 씨족은 세 개의 종족 내에 역시 대표를 가지고 있었다. 이 씨족들의 각 성원은 5개 종족 전체를 통해 모두 형제로 간주되었다. 방언상의 차이밖에 없는 공통 언어는 혈통이 같다는 표현이며 증거였다.
2. 동맹의 기관은 지위와 권위가 평등한 50명의 사쳄으로 구성된 동맹평의회였다. 이 평의회는 동맹의 모든 문제에 대한 최종 결정을 내렸다.
3. 이 50개의 사쳄 자리는 동맹의 여러 가지 목적을 위해,특별히 설치된 새로운 지역의 담당자로서 동맹 창립시에 종족과 씨족들 사이에 배정되었다. 결원이 생겼을 때는 해당되는 씨족이 새 사람을 선출했으며, 또 언제나 그를 파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임명권은 동맹평의회가 가졌다.
4 이 동맹 사챔들은 동시에 자기네 종족의 사쳄이기도 했으며 종족평의회에 참석할 권리와 투표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5. 동맹평의회의 모든 결정은 만장일치의 가결을 요구했다.
6. 투표는 종족별로 실시되었다. 그러므로 결정이 유효한 것으로 인정되자면 각 종족이,또 각 종족 내에서는 평의회의 각 성원이 만장일치로 찬성투표를 해야만 했다.
7. 5개의 종족평의회 중 어느 평의회나 동맹평의회를 소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동맹평의회는 자기 자신의 발의로 소집될 수는 없었다.
8. 회의는 소집된 인민들 앞에서 진행되었으며,이로쿠오이인은 누구나 발언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결정은 평의회만이 내릴 수 있었다.
9. 동맹에는 개인적으로 공인된 우두머리(Chef), 즉 행정권의 맨 위에 서있는 개인이라고는 아무도 없었다.
10. 그 대신 동맹에는 평등한 권한과 평등한 권력을 가진 두 사람의 최고 군사수령이 있었다(스파르타인들에서는 두 사람의 왕Könige, 로마에서는 두 사람의 집정관Konsuln).
이러한 것이 이로쿠오이인들이 그 밑에서 400년 이상이나 살아왔으며, 아직까지도 살고 있는 사회제도였다. 내가 모오간에 의거하여 이 제도를 상세히 서술한 것은 그것이 아직 국가를 형성하지 못한 사회조직을 연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엿보여주기 때문이다. 국가라는 것은 항구적으로 그 성원이 되고 있는 자들의 총체와는 유리된 특수한 공적 권력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우러(Maurer)는 올바른 직감으로 독일의 마르크제도를一비록 후에 와서는 그 대부분이 국가의 기초로 되기는 했지만一 국가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순전히 사회적인 제도라고 인정했다. 그는 자기의 모든 노작에서 마르크,촌락,장원 및 도시 등의 원시적 조직 내에서,또 그 조직과 함께 공적 권력이 점차로 발생하는 과정을 연구했다. 북아메리카 인디안들의 실례에서 본래는 단일의 종족이 어떻게 해서 광막한 대륙 위에 점차 퍼져가는가,어떻게 해서 종족들은 분할을 통해 종족들의 전일적인 한 집단인 민족으로 되어 가는가,어떻게 해서 언어는 변해 서로 이해할 수 없게 될 뿐만 아니라 원래 가지고 있던 통일성의 온갖 흔적을 거의 상실하게 되는가를 보게 된다. 이와 함께 어떻게 해서 여러 종족 내에서 개별적 씨족들이 몇 개의 씨족으로 분열되고,본래 있던 모체 씨족들은 부족의 형태로 보존되며,또한 가장 오랜 여러 종족들에게도 역시 여전히 남아 있게 되는가一이리와 곰이라는 말은 전 인디 안 종족의 대부분이 아직도 씨족 명칭으로 쓰고 있다一를 보게 된다. 그리고 근친종족들의 동맹에까지는 이르지 못했을 뿐이지 이 전체 종족들은 대체로 상술한 바와 같은 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씨족이 일단 사회의 기본세포로 되자 거의 붐불가항려겆ㄱ인 필연성을 가지고一왜냐하면 그것은 극히 자연적이기 때문이다一이 세포로부터 씨족,부족 및 종족이라는 하나의 체계가 발전하는 것도 역시 우리는 보게 된다. 이 세 집단은 모두 혈연관계의 각기 다른 정도를 표시한다. 그것들은 각각 폐쇄적인 존재로서 자기 일은 모두 자기 스스로 처리하기는 하나 서로 보충하기도 한다. 이 세 개 집단이 맡고 있는 사업의 범위는 미개의 낮은 단계에 있는 인류의 모든 사회적 사업을 포괄하고 있다. 따라서 어떤 인민에게 씨족이 사회의 기본세포로서 존재한다면,우리는 상술한 바와 같은 종족조직도 역시 거기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인이나 로마인들의 경우처럼 사료가 풍부한 곳에서 그러한 조직을 발견할 뿐만 아니라,비록 해당되는 사료가 없는 경우에도 아메리카의 사회제도와 비교함으로써 가장 풀기 힘든 의문과 수수께끼를 풀게 되리라는 확신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씨족제도는 그야말로 얼마나 소박하고 단순하기 그지없는 놀라운 조직인가! 군인도 헌병도 경찰관도 없으며,귀족도 왕도 총독도 지방 장관도 또는 재판관도 없고 감옥도 소송도 없지만 모든 것이 규정된 절차에 따라 운영된다. 온갖 분쟁과 알력은 관계자들에 의해,씨족 또는 종족에 의해, 또는 개별적 씨족들에 의해 공동으로 해결된다. 피의 복수는 다만 드물게 사용되는 극단적인 수단으로써 위협을 줄 따름이다. 그런데 오늘날 사형(Todesstrafe)은 피의 복수의 문명화된 형태에 불과한 것으로서,그것은 문명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모두 가지고 있다. 공동 사무가 지금보다 훨씬 많았지만 집안 살림은 여러 가족들에 의해 공동으로,공산주의적 원칙 위에서 운영되었으며,토지는 종족 전체의 재산이었다. 다만 얼마 안되는 채마밭만은 개별적 세대가 일시적으로 이용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과 같은 복잡다단한 행정기관은 흔적도 없다. 모든 문제는 관계자들 자신이 해결했으며 대부분의 경우 수천 년 내려온 관습이 이미 모든 것을 조절했던 것이다. 가난하거나 불행한 사람이란 있을 수 없다. 공산주의적 세대와 씨족은 노인,병자,전쟁불구자들에 대한 자기들의 의무를 잘 알고 있었다. 여성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자유로왔다. 노예는 아직 없었으며 다른 종족에 대한 억압도 대체로 아직 없었다. 이로쿠오이인들은 1651년경에 이리 종족(Eries)과 ‘중립종족’(Neutrale Nation)을 정복하고는 이들이 동등권을 가진 성원으로서 자기네 동맹에 가입할 것을 제기했다. 그들은 피정복자들이 그것을 거절한 뒤에야 비로소 자기 영역에서 이들을 추방했다. 그런데 이러한 사회에서 자란 남녀가 어떤 사람인가는 타락하지 않은 인디안과 접촉해 본 백인들이면 누구나 이 미개인들의 자존심,솔직함,강인함 그리고 용감성들을 찬양해 마지않는 것으로 잘 알 수 있다.
이러한 용감성의 실례를 우리는 아주 최근에 아프리카에서 보았다. 줄루캐퍼인들(Zulukaffern)은 수년 전에 그리고 또 누비아인들(Nubier)은 수개월 전에—이 종족들에게는 씨족제도가 아직도 소멸하지 않은 채 있었다— 유럽의 어느 군대로 해내지 못할 일을 해냈다. 무기라고는 창과 투창 뿐이고 화기(火器)도 없었던 그들이었지만,영국 보병一밀집대형에 의한 전투에서는 세계에서 제일이라고 모두가 인정하는—이 비 오듯 쏘아대는 후장총(後裝銃)을 무릅쓰고 육박전 지점까지 진격했다. 그리하여 무장이 엄청나게 차이나고 또 의무병제도 없으며,전투훈련이란 어떠한 것인지도 몰랐던 그들은 영국 보병의 대열을 여러 번 혼쭐내었으며 격퇴시킨 일까지 있었다. 그들이 얼마나 인내력이 강하고 또 무엇을 해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카피르인(Kaffir)이 하루 종일 말보다 더 빨리, 더 먼 길을 달린다는 영국인의 탄식에서 잘 알 수 있다. 그들의 근육은 아주 가는 것까지도 강철같이 단단하고,엮어서 만든 혁대같이 질기다고 어떤 영국 화가는 말하고 있다.
각종 계급으로 분열되기 전까지의 인류와 인류 사회는 이러했다. 그리고 만일 그들의 상태를 현대 문명인의,압도적 대다수의 상태와 비교한다면,오늘날의 프롤레타리 아트나 소농민과 고대의 자유로운 씨족 성원 간의 차이는 엄청나게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사실의 일면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조직이 멸망할 운명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 이 조직은 종족 이상으로는 발달하지 못했다. 종족동맹의 형성은 우리가 후에 또 보게 되는 바와 같이,그리고 이로쿠오이인들이 다른 종족들을 억압하려고 한 실례에서 이미 본 바와 같이 이미 그 붕괴의 시초였던 것이다. 종족 밖에 있던 것은 모두 법적 보호 밖에 있었다. 평화조약이 제대로 체결되지 않은 경우에는 종족들 사이에 늘 전쟁이 일어났으며,그 전쟁은 인간 이외의 동물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잔인성을 띤 것이었다. 이 잔인성은 후기에 와서 물질적 이해타산 때문에 비로소 약간 완화되었다. 전성기에 씨족제도도 우리가 아메리카에서 본 바와 같이 생산의 발전이 극도로 미약하다는 것, 따라서 지역은 넓지만 인구는 극도로 희박하다는 것, 따라서 인간은 자기 주위의 적대적인, 이해할 수 없는 자연에 거의 전적으로 지배되고 있었다는 것— 이것은 그들의 유치한 종교적 관념에 반영되고 있다—을 전제로 한다. 종족은 타 종족에 속한 자에 대해서나, 자기 종족 자체에 대해서나 여전히 한계로 남아 있었다. 즉 종족,씨족 및 그 제도는 신성불가침한 것이었으며,자연에 의해 주어진 최고의 힘이었다. 개인은 그 감정,사상 및 행동에 있어서 무조건적으로 이 힘에 복종하고 있었다. 이 시대의 사람들이 우리가 보기에는 아주 위풍당당하게 보이지만,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맑스의 표현대로— 원시적 공동체의 탯줄에서 아직 떨어지지 못하고 있었다. 이 원시적 공동체의 힘은 깨져야 했으며,마침내 그것은 깨지고 말았다. 그리고 이 붕괴에 영향을 준 것은 우리들에게는 바로 타락으로 생각되는 것,즉 구씨족제도의 높은 도덕적 수준에서 볼 때 패륜적인 행위로 생각되는 그러한 것들이었다. 야비한 탐욕,한계를 모르는 향락욕,더러운 인색,공유재산의 이기적이며 약탈적이고 저급하기 그지없는 욕심은 새로운 문명 사회,즉 계급사회를 출현시켰던 것이다. 절도,폭행,사기,배신 등과 같은 추악하기 그지없는 수단이 계급 없는 옛 씨족사회를 파헤치고 그것을 붕괴시킨다. 그런데 새로 발생한 사회의 2,500년에 걸친 역사는 끊임없이 압도적 다수자를 억압•착취하는 극소수자의 발전사였다. 과거의 그 어느 때보다도 오늘날은 특히 그러하다.


제Ⅳ장 그리스인의 씨족



그리스인들은 펠라스고이인(Pelasger)과 기타 이와 종족을 같이 하는 인민들처럼 이미 선사시대에 아메리카인과 같은 씨족, 부족,종족,종족동맹(Bund von Stämmen) 등의 조직 계열에 따라 조직되어 있었다. 부족은 도리아인(Doriern)의 경우처럼 없을 수도 있었고, 또 종족동맹은 반드시 어디서나 형성될 수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씨족은기본세포로서 어느 경우에나 있었다. 그리스인들은 역사 무대에 등장하자 이미 문명의 문턱에 서 있었다. 그들과 앞에서 말한 아메리카의 여러 종족 간에는 거와 완전한 두 개의 큰 발전 시기가 있었다. 그러므로 영웅시대의 그리스인들의 씨족은 이미 이로쿠오이인들보다 앞서 있었으며, 군혼의 흔적은 현저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모권은 부권에 자리를 양보했고, 이에 따라 발생 중에 있던 사적 재화는 씨족제도에 첫 틈을 갈라놓게 되었다. 두 번째 틈은 첫 번째 것의 당연한 결과였다. 즉 부권제가 실시된 이후 부유한 여자 상속인의 재산은 여자의 출가와 함께 그 남편이, 따라서 다른 씨족이 차지하게 되어 씨족법 전체의 기초가 흔들리게 되었다. 따라서 그런 경우에는 비단 그 여자의 재산을 자기 씨족 내에 보존하기 위해 처녀가 자기의 씨족 내에서 결혼하는 것이 허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의무적인 것으로(gebot) 되었다.
그로테 (Grote)의 『그리스의 역사』(griechischer Geschichte)에 따르면,아테네의 씨족의 기초로서는 특히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었다.
1. 공동의 종교적 제전(祭典)이 있었으며, 제관(祭官)은 씨족의 시조부(Stammbater)로 여겨지는 특정한 신을 위해 신성한 의식을 거행할 전권을 가지고 있었다. 씨족의 신으로 생각되었던 만큼 그 신은 특별한 이름으로 불리었다.
2. 공동묘지(데모스테네스의 『에우불리데스』를 보라.)
3. 상호 상속권(Gegenseitiges Beerbungsrecht)
4. 폭력이 가해지는 경우에 서로 돕고 보호하며 지원할 의무.
5. 일정한 경우에,특히 처녀가 고아이거나 여자가 상속인인 경우에 씨족 내에서 결혼할 상호간의 권리 및 의무.
6. 적어도 약간의 경우에 자체의 아르콘(Archon,우두머리)과 회계원을 두고서 재산을 공동소유하는 것.
그리고 몇몇 씨족들은 부족으로 연합되기는 했지만,그 유대는 씨족보다 긴밀하지 못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우리는 상술한 바와 유사한 상호 간의 권리와 의무, 특히 일정한 종교적 의식의 공동거행과 부족 성원이 살해당했을 경우에 이를 고소할 권리 등을 보게 된다. 또한 종족의 전체 부족들은 공동의 신성한 정기적 제전을 귀족층(에우파트리데스,Eupatriden)에서 선출된 종족의 우두머리(필로바실레우스,Phylobasileus) 의 지도 하에 거행했다.
이상과 같이 그로테는 말하고 있다. 맑스는 여기에다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있다. 즉 “그러나 그리스와 씨족을 통해 야만인(예컨대 이로쿠오이인)이 훤히 내다보인다.” 우리의 연구가 좀 더 진전함에 따라 야만인은 보다 상세히 알려지게 될 것이다.
사실, 그리스의 씨족은 또 다음과 같은 특징들도 가지고 있었다.
7. 부권에 의해 혈통을 따지는 것.
8. 여자 상속인과의 결혼을 제외한 족내혼의 금지. 이 예외의 설정과 그것의 법제화는 옛 규칙이 아직도 효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확증해 준다. 이것은 또한 공인된 규칙,즉 여자는 출가하면 남편의 부족에 입적하게 되어 자기 씨족의 종교적 의식을 준수하는 것이 아니라 남편의 그것을 준수하게 된다는 데에도 가인한다. 이 사실을 통해서, 또한 디캐아르쿠스(Dicäarchos)와 유명한 한 구절을 통해서 족외혼이 원칙으로 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베커(Becker)는 『카리클레스』(Charikles)에서 아무도 자기 씨족 내에서 결혼할 수 없었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하고 있다.
9. 씨족이 양자를 맞아들일 권리. 이 권리는 한 가족이 양자를 맞아들임으로써 실현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공개적 예식을 거쳐야 했으며 또 예외로서만 실시되었다.
10. 우두머리를 선출 또는 파면할 권리. 우리는 각 씨족이 아르콘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지만,이 공직이 어떤 가족의 세습으로 되었다는 것은 아무 데도 적혀 있지 않다. 미개 말기까지는 이 공직의 엄격한 세습제가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도대체 공직의 세습이란 부자와 빈자가 씨족 내에서 완전한 평등권을 가지는 제도와는 전혀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비단 그로테 뿐만 아니라 니부어(Niebuhr), 몸젠(Mommsen)과 기타 고전적 고대의 모든 역사가들도 아직까지 씨족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씨족에 대한 그들의 수많은 특징 묘사가 아무리 충실하다 할지라도 그들은 씨족을 언제나 가족의 집단(Gruppe von Familien)으로 보았기 때문에 씨족의 본성과 그 기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씨족제도 하에서 가족은 결코 사회제도의 세포가 아니었으며 또 그럴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남편과 아내는 반드시 서로 다른 두 씨족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한 씨족 전부가 부족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가족은,절반은 남편의 씨족에, 절반은 아내의 씨족에 속해 있었다. 국가도 역시 공법상으로는 가족을 인정하지 않는다. 가족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법의 대상으로만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모든 역사과학은 현재에 이르기까지도 문명 시기보다 더 오래 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는 일부일처제적 개별 가족(die monogame Einzelfamilie)을 핵심으로 해서 사회와 국가가 점차 결정(結晶)되어 왔다는 황당무계한 전제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이 전제는 특히 18세기 이래 감히 침범할 수 없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로테씨에게 또 한 가지 지적해주어야 할 것은,그리스인들이 자기 씨족의 유래를 신화에서 끌어내고 있지만,그 씨족들이 그들 자신에 의해 창조된 신과 반신(半神)의 신화보다도 오래 전에 있었다는 사실이다.”라고 맑스는 덧붙였다.
그로테는 권위있고 전적으로 신뢰 할 만한 증인이라는 이유로 모오간이 즐겨 인용하곤 했던 사람이다. 그로테가 계속 말한 바에 따르면,아테네의 각 씨족은 자기들의 가상적인 시조부로부터 물려받은 명칭을 가지고 있었으며,솔론 이전에는 모든 경우에 그러하지만 솔론 이후에도 유언이 없는 경우에 한해 사망자의 씨족성원(Gentilgenossen,gennetes)이 그의 재산을 상속했다. 또 살인사건이 일어났을 경우에 범인을 법정에 고소하는 것은 첫째로는 피살자의 친족, 그 다음에는 같은 씨족의 성원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같은 부족 성원들의 권리였으며 의무였다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최고대의 아테네 법률은 씨족적 및 부족적구분에 기초하고 있다.(그로테)

여러 씨족들이 선조를 같이 한다는 사실을 맑스가 말한 소위 ‘현학적인 속물들’의 두통거리가 되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씨족의 선조를 순전한 신화적 존재로 생각하는 그들로서는,서로 병존하면서 본래 혈연관계라고는 전혀 없는 가족들로부터 씨족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씨족이 존재한다는 것만이라도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그들은 아무 내용도 없는 말을 부언하면서 고작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즉 가계(Stammbaum)라는 것은 물론 황당한 것이지만 씨족은 현실적인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로테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괄호 안의 말은 맑스의 것이다).

이 가계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다. 왜냐하면 가계에 대해 공개적으로 논의되는 것은 다만 일정한 경우,특히 의식(儀式)이 거행되는 경우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교적 작은 씨족들도 보다 큰 씨족들과 마찬가지로(이것은 참으로 기묘한 일이다. 그로테씨,비교적 작은 씨족들도라니!) 자기네의 공통의 종교적 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며(참으로 기묘한 일이다. 그로테씨!),공통의 초인간적인 시조부와 공통의 가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 기본 구상과 관념적 기초(선생,그것은 관념적이 아니라 육체적인 것,독일어로 fleishlich 한 것이요!)는 어느 씨족들의 경우나 동일했다.

이 문제에 대한 모오간의 대답을 맑스는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즉 “시초 형태의 씨족一그리스인들에게도 다른 인민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한때 이러한 형태가 있었다—에 상응하는 혈연제도는 씨족의 전체 구성원 상호간의 혈연관계에 대한 지식을 보장해주었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극히 중요한 이 지식을 유아기 때부터 실천을 통해 습득했다. 일부일처제 가족의 발생과 더불어 이것은 잊어버리게 되었다. 씨족의 명칭은 하나의 족보를 만들어냈다. 개별 가족의 가계는 이에 비하면 중요치 않은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제는 이 씨족의 명칭이 그 명칭을 쓰는 자들의 혈통이 같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로 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씨족의 가계는 아주 오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게 되었기 때문에 그 구성원들은 비교적 후기의 공동 선조들이 있는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기들 사이에 실제로 있었던 혈연관계를 이미 증명할 도리가 없었다. 양자를 맞아들이는 경우를 도외시한다면 명칭이야말로 혈통이 같다는 증거, 그것도 논쟁할 여지없는 증거였다. 이와 반대로 씨족을 순전한 허구나 시적 창작물로 삼는 그로테와 니부어처럼, 씨족 성원들 간의 온갖 혈연관계를 사실상 부인하는 것은 다만 ‘관념적 인’(idealer),즉 현학적인(stubenhockerischer) 책벌레나 할 일이다. 세대 간의 연관은 특히 일부일처제의 발생과 더불어 아득히 먼 과거의 일이 되었고, 지나간 현실은 신화적 환상에 반영되어 나타나기 때문에 선량한 속물들은 환상적인 가계가 현실적인 씨족을 창조했다고 결론짓게 되었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하고 있다!”
부족은 아메리카와 경우도 그렇지만 몇 개의 딸 씨족(Tochtergentes)으로 분열되었다가 이것들을 다시 규합한 모체 씨족(Muttergens)이었다. 이 모체 싸족은 또 그 모든 딸 씨족들아 공동의 시조부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종종 보여주었다. 예컨대 그로테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헤카테우스(Hekatäus) 부족의 동일한 세대의 모든 성원들은 동일한 신을 자기의 16대 시조부로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부족 내의 씨족은 모두 문자 그대로 형제 씨족(Brudergentes)이었다. 네스토아(Nestor)가 “부족은 부족대로 종족은 종족대로 정렬시켜, 부족이 부족을 원조하고 종족이 종족을 원조하도록 하라.”고 아가멤논에게 조언하는 장면을 보여주는 호메로스의 유명한 구절에서 부족은 아직 군사적 단위로서 나타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부족은 부족 성원의 살해에 대해 고소할 권리와 의무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부족이 초기에는 피의 복수의 의무도 역시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부족에게는 공동의 신전과 제전이 있었다. 모든 그리스 신화는 사실 고대 아리안인의 전통적인 자연숭배로부터 발전한 것인데, 이 발전 자체가 본질상 씨족과 부족에 의해 이룩되었으며 그것들의 내부에서 진행되었다. 다음으로 부족에는 우두머리(프라트리아르코스, the phratriarchos)가 있었으며,그리고 드 꿀랑쥐(de Coulanges)에 따르면,공동회의를 소집했고 구속력 있는 결정을 채택했으며 재판권과 행정권을 가지고 있었다. 씨족을 무시했던 후세의 국가조차도 부족에게는 약간의 행정적 성격의 사회적 기능을 남겨주었다.
친족관계에 있는 몇 개의 부족들은 종족을 형성한다. 아티카(Attika)에는 네 개의 종족이 있었고,각 종족에는 세 개의 부족이, 그리고 각 부족에는 30개의 씨족이 각각 있었다.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질서에 대한 의식적이며 계획적인 간섭이 없이는 집단을 이와 같이 정연하게 구분할 수 없다. 어떻게, 언제,또 왜 이렇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그리스 역사는 침묵을 지키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인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그리스 역사란 겨우 영웅시대 이후의 것뿐이다.
비교적 좁은 지역에 밀집하고 있던 그리스인들의 경우에는 방언상 차이가 광대한 아메리카 삼림에서보다 훨씬 적었다. 그러나 여기서도 우리는,말씨가 기본적으로 같은 종족들만이 보다 큰 조직체로 결합된 사실을 보게 되며,또 작은 아티카에서조차 후에는 그리스의 산문어를 공동사용함으로써 지배적 방언으로 된 자신의 방언을 갖고 있었다.
호메로스의 시에서 우리가 보는 그리스의 종족들을 대부분의 경우 이미 소규모 준민족들(Völkerschaften)로 결합되어 있었으나 씨족,부족 및 종족들은 그 내부에서 여전히 자기의 자주성을 완전히 보존하고 있다. 그들은 이미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에 살고 있었다. 경작이 확대되고 수공업이 발생함과 더불어 가축군과 안구도 증가했다. 이와 함께 재산상 차이도 확대되어 갔다. 이 재산의 차이와 함께 구식의 원시적 민주주의 내부에서 귀족적 요소도 역시 성장하게 되었다. 다양한 소규모 준민족들은 보다 좋은 토지를 점유하기 위해 그리고 또 전리품을 위해 끊임없이 전쟁을 수행했다. 전쟁포로의 노예화는 이미 공인된 제도였다.
이 종족들과 준민족들의 관리 조직은 다음과 같다.
1. 상설적인 권력기관은 평의회, 즉 불레(boule)였다. 본래는 씨족의 우두머리들로 구성된 것이었을 것이나, 후에는 그 수가 너무 많아져 선발된 일부 우두머리들로 구성되었으며, 그 결과 귀족적 요소가 발전 강화될 가능성이 조성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 디오니시우스(Dionysios)도 영웅시대의 평의회를 귀족(크라티스토이 ,Kratistoi)들로 구성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중요한 문제는 평의회가 최종 결정을 내렸다. 예컨대 애쉴루스에 따르면, 테베(Thebes)의 평의회는 에테오클레스(Eteokles)에 대해서는 장례를 정중히 치뤄주고, 폴리니케스(Polynikes)의 시체는 내던져서 개밥으로 한다는 당시로서는 단호한 결정을 내렸다. 후에 국가가 창건되자 이 평의회는 원로원(Senat)으로 되었다.
2. 인민회의(Die Volksversammlung, agora). 이로쿠오인의 경우에는 남녀 인민이 평의회에 배석하여 규정된 절차를 따라 심의에 참가함으로써 평의회의 결정에 영향을 주는 것을 우리는 보았다. 호메로스가 쓴 그리스인들의 경우에 이 ‘배석’(Umstand)—고대 게르만인의 재판상 용어로 한다면—은 고대 게르만인의 경우처럼 이미 진정한 인민회의로 발전했다. 중요 문제를 결정하기 위한 인민회의는 평의회가 소집했으며,남자는 누구나 발언권이 있었다. 결정은 거수[애쉴루스의 『애원하는 여자들』(Schuflehenden)에서 보는 바와 같이] 또는 함성으로써 채택되었다. 종국적인 최고 권력은 인민회의에 속했다. 여기서 쇠만(Schömann, 『고대 그리스 Griechische Altertianer』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민의 협력 하에 수행해야 할 문제에 있어서 그 협력을 그들에게 강요할 수단에 대해서는 호메로스가 아무 것도 지적하지 않고 있다.

실로 종족 내의 모든 성년 남자들이 전사였던 시기에는 인민과 유리되어 그들과 대립할 수 있었던 공권력이란 아직 있을 수 없었다. 원시적 민주주의는 아직 전성기에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평의회나 군사령관의 권력과 지위를 판단할 때 이 사실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된다.
3. 군사령관(바실레우스 basileus). 맑스는 이에 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즉 “대다수가 타고난 궁정노복들(Fükstenbediente)인 유럽의 학자들은 군사령관을 현대에 와서 말하는 군주(Monarchen)로 만들었다. 이에 대해 미국의 공화주의자 모오간은 항의한다. 그는 매우 풍자적으로 그러나 매우 정당하게 말주변 좋은 글래드스톤(Gladstone)과 그의 저서 『세계의 청년시대』 Juventus Mundi)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글래드스톤씨는 영웅시대의 그리스 우두머리들을 왕으로 묘사할 뿐더러 신사라고까지 덧붙이고 있다. 그러나 그 자신도 대체로 그들의 장자상속(Erstgeburtsfolge)의 관습 또는 법률은 충분히 규정되어 있으나,지나치게 엄격하게 규정된 것 같지는 않았음 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아마 글래드스톤씨 자신도,충분히 규정된 것이지만 지나치게 엄격하게 규정된 것이 아니라는 조건이 붙은 장자 상속권은 있으나 마나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로쿠오이인과 기타 인디안들의 경우에 우두머리 직위의 상속이 어떠했던가를 우리는 이미 보았다. 모든 공직은 대부분의 경우 씨족 내부에서 선거에 의해 임명되었으며,또 그러한 한 그것은 씨족이 세습하는 바로 되어 있었다. 자리가 비었을 때에는 가장 가까운 씨족적 친족—형제,또는 자매의 아들들—이 이들을 무시할 이유가 없는 한,차례로 선출되었다. 그러므로 가령 부권제 하의 그리스인들의 경우 군사령관직이 그 자식이나 또는 자식들 중의 한 사람에게 넘어가는 것이 보통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그 자식들이 인민의 선거를 통해서 상속인으로 될 수 있었다는 것을 증명할 따름이며, 그들이 이러한 선거와는 관계없는 법정 상속인(rechtskräftiger Erbfolge)으로 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로쿠오이인들이나 그리스인들의 경우에 씨족 내의 귀족이라는 특수한 존재의 첫 싹을 보게 된다. 그리스인들의 경우에는 그 외에도 장래의 세습적지도자(erblichen Führersechaft), 즉 군주제(Monarchie)의 첫 싹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인의 군사령관은 로마의 ‘왕(K önig,rex)처럼 인민에 의해 선출되거나 혹은 인민이 인정한 기관—평의회 또는 인민회의一를 통해 확인되어야 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일리아드』에서는 ‘전사의 통솔자’(Männerbeherrscher) 아가멤논이 그리스인의 왕으로서가 아니라 도시를 포위한 동맹군의 최고 지휘관으로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인들 사이에 알력이 일어났을 때 오딧세이가 “다두(多頭) 정치는 좋지 않다. 지휘자는 한 사람이어야 한다.”고 운운한 유명한 귀절(이에 계속해서, 널리 애송되고 있는 왕권 이야기가 나오는데,이것은 후세에 와서 덧붙인 것이다)은 상술한 바와 같은 아가멤논의 지위를 말해주는 것이다. “오딧세이는 여기서 통치 형식에 관한 강의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전시에는 총사령관에게 복종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트로이의 성 밑에서 단순한 군대로서 나타났던 그리스인들이지만,인민회의에서는 충분히 민주주의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아킬레스는 선물,즉 전리품 분배 문제에서는 언제나 이것을 아가멤논이나 또는 어떤 다른 군사령관에게도 맡기지 않고 ‘아케이아의 아들들’,즉 인민에게 맡기고 있다. ‘제우스가 낳았다’느니 ‘제우스가 키웠다’느니 하는 수식어는 아무 것도 증명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어느 씨족이나 하나의 신을 시조로 삼고 있으며,종족장의 씨족은 ‘더 고귀한’ 신을,이 경우에는 제우스를 시조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비자유인들, 예컨대 양돈가인 에우메우스(Eumäus)와 기타까지도 ‘신적 존재’(dioi 및 theioi)이다. 더구나 이것은 『오딧세이』에 있는 일이다. 따라서 『일리아드』에 서술된 시대보다 훨씬 후세의 일이다. 바로 그 『오딧세이』에서는 전령사(傳令使,Herold) 물리우스(Mulius)도,맹인 가수 데모도쿠스(Demodokos)도 영웅으로 불리고 있다. 요컨대 그리스 저술가들이 호메로스의 소위 왕권이라는 것을 표시하기 위해 사용하는 바실레이아(basileia)라는 말은 그것과 병존하는 평의회 및 인민회의와 더불어 다만 군사적 민주주의를 의미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왜냐하면 바실레이아의 주된 특징은 군사적 지휘권이기 때문이다.”(맑스)
바실레우스는 군사적 권한 외에 제관(祭官)과 재판관의 권한도 가지고 있었다. 후자에 대해서는 엄밀히 규정되어 있지 않았지만,바실레우스는 종족 또는 종족동맹의 최고대표자로서 제관의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민사상 권리나 행정상 권한에 관해서는 전혀 이야기가 없지만,바실레우스는 그 직책상 평의회의 성원이었을 것임은 틀림없다. 따라서 ‘'바실레우스’를 독일어로 ‘쾨니히’(König)라고 번역하는 것은 어원학적으로 완전히 옳다. 왜냐하면 쾨니히(또는 Kuning)라는 말은 쿠니, 퀸네(Kuni,Künne)로부터 나온 말로서 ‘씨족의 우두머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의 ‘바실레우스’는 ‘쾨니히’라는 말의 현대적 의미와는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투키디데스(Thukydides)는 단정적으로 고대의 바실레이아를 파트리케(patrike),즉 씨족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바실레이아는 엄밀히 규정된,따라서 제한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적하는 바에 따르더라도 역시 영웅시대의 바실레이아는 자유민에 대한 지휘관이었으며,바실레우스는 군사령관,재판관 및 최고 제관이었다고 한다. 즉 바실레우스는 근대적인 의미의 통치권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와 같이 우리는 고대의 씨족적 조직이 영웅시대의 그리스 제도 하에서는 아직도 생생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이미 그 몰락의 단초도 보게 된다. 즉 자녀들의 재산 상속제를 수반하는 부권제가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한 가족에 의한 재화의 축적을 조장했고,가족을 씨족에 대항하는 하나의 세력으로 만들었다. 재산상 차이가 세습적 귀족 및 왕권의 첫 맹아의 형성을 거쳐 사회제도에 반작용을 주게 된 사실과, 노예제도는 처음에는 전쟁포로뿐이던 것이 자기와 같은 종족 성원 및 같은 씨족 구성원까지도 이미 노예화시킬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지난날의 종족 간 전쟁은 이미 가축,노예 및 재물을 획득하기 위한 육지와 바다에서의 체계적인 약탈로 전락하기 시작했고,하나의 상업으로 되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재화는 최고의 선으로서 찬미되고 숭상되고 있었으며 고대의 씨족제도는 재화의 폭력적 약탈을 정당화하는 데 악용되었다. 그러나 아직 한 가지만은 없었다. 즉 새로 획득한 각자의 재화를 씨족제도의 공산주의적 전통으로부터 보호하며,또한 전에는 그처럼 경시해 왔던 사유재산을 신성화하고 그 신성화를 전체 인류 사회의 최고 목적으로 선언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점점 발전해가는 재산 획득의 새로운 형태, 그러므로 재화의 끊임없는 가속도적 축적에 전반적인 승인의 낙인을 찍을 그러한 제도가 없었다. 그리고 또 이미 시작된, 계급으로의 사회분열뿐만 아니라,나아가서는 유산계급이 무산계급을 착취할 권리와 후자에 대한 전자의 지배를 영구화시킬 그런 제도도 없었다.
그런데 그러한 제도가 나타났다. 즉, 국가(Staat)가 만들어진 것이다.
 

제Ⅴ장 아테네 국가의 발흥


국가의 발전과정,즉 씨족제도(Gentilverfassung)의 각 기관들이 더러는 개조되고,더러는 새로운 기관의 설치로 떨려남으로서 마침내 실질적인 국가 권력기관으로 완전히 교체되고 말았다. 한편 그 씨족,부족 및 종족이 자기 방어를 위해 조직했던 현실적인 ‘무장 인민’(Volk in Waffen)이 국가 권력기관들의 도움을 받는 무장한 ‘공권력’(Öffentliche Gewalt)에 의해 대체되며,따라서 인민에 반해서도 적용될 수 있었던 과정—적어도 이러한 과정의 첫 단계를 연구하는 데에는 고대 아테네보다 더 좋은 예가 없을 것이다. 형태의 교체에 대해서는 모오간이 기본적으로 서술했으나,이러한 형태 교체를 일으키는 경제적 내용에 대한 분석은 대부분 본인이 덧붙여야 할 것이다.
영웅시대에 아테네인의 네 개 종족은 아티카(Attika)에서 아직 서로 다른 지역들을 각각 차지하고 있었다. 이 네 종족을 구성하고 있던 12개의 부족도 아직 케크로프(Kekrops)의 12개의 도시에 각각 따로 거주지를 정하고 있었던 것 같다. 관리조직으로는 영웅시대와 마찬가지로 인민회의(Volksversammlung),인민평의회(Volksrat),군사령관(basileus)이 있었다. 쓰여진 역사를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한,그 조기에 토지는 이미 분할되어 사적 소유로 되어 있었다. 이것은 이미 미개 높은 단계의 말기에 있던 비교적 발전된 상품생산과 이에 상응하는 상품거래에 부합되는 것이었다. 곡물과 함께 포도주와 식물성 기름도 역시 생산되었으며,에게해의 해상무역은 날이 갈수록 페니키아인의 손을 떠나 그 대부분이 아티카의 그리스인의 손에 떨어지고 있었다. 소유지의 매매를 통해서, 농업과 수공업의 분업,상업과 항해의 분업이 더욱더 발전함에 따라 씨족,부족 및 종족 성원들의 왕래는 아주 빈번해질 수밖에 없었다. 또한 부족이나 종족의 구역 내에는 같은 지역에 살면서도 이 조직들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자신의 현재 거주지역에서는 족외자였던 주민들도 드디어 정착하게 되었다. 각 부족과 종족은 평상시에는 아테네의 인민평의회나 군사령관에 의거하지 않고 스스로 자기의 일을 처리 했다. 그러나 부족 또는 종족의 구역 내에 살면서 그 부족이나 종족에 속하지 않는 자는 물론 그런 일자리에 참여할 수 없었다.
이처럼 씨족제도의 기관들이 정상적인 기능을 수행할 수 없게 됨으로써 영웅시대에 벌써 이러한 혼란을 제거하기 위한 대책이 마련되어야만 했다. 그리하여 테제우스(Theseus)가 제정했던 제도가 실시되었다. 우선 아테네에 중앙기관이 설치되었다. 즉 종래에 각 종족들이 자립적으로 관리하던 사업 중 일부는 공동적 의미를 가지는 것이기 때문에 아테네에서 열리는 공동의회(Gemeinsamen Rat)에 이관되었다. 이 개혁으로 인해 아테네인은 아메리카의 어느 원주민들보다 더 발전하게 되었다. 즉 인접 종족들 간의 단순한 동맹 대신에 단일한 인민(einzigen Volk)으로의 그들의 융합이 실현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개별적 종족이나 씨족의 법적 관습보다 아테네의 우월한 일반적 인민법 (Volksrecht)이 발생했다. 아테네 시민(Bürger)은 다른 종족의 구역 내에서도 역시 아테네 시민으로서 누리는 권리와 새로운 법적 보호를 받았다. 그러나 이것은 씨족제도 붕괴의 첫걸음이었다. 왜냐하면 이것은 아티카 내에서 족외자로서 전에 아테네의 씨족제도 밖에 있던 사람들이 후에 시민으로서 인정받게 된 첫걸음이었기 때문이다. 테제우스가 제정했다고 하는 두 번째 새로운 제도는 씨족,부족 또는 종족과는 관계없이 전체 인민을 에우파트리다이(Eupadriden, 귀족),게오모로이(Geomoren,농민), 데미우르고이(Demiourgen,수공업자)의 세 계급으로 구분하고,귀족에게는 공직을 차지할 독점권을 부여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구분은 귀족이 공직을 차지하게 한 것 외에 다른 아무런 결과도 가져오지 못했다. 그러니까 아 구분은 이것 외에는 계급들 사이에 아무런 법적 차별도 제정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이 구분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왜냐하면 그것은 눈에 띄지 않게 발전해 오던 새로운 사회적 요소들을 드러내 보여주기 때문이다. 즉 이 구분은 전에는 일정한 가족 성원들이 관습적으로 씨족의 공직을 차지하던 것이 이제는 사회적 공직에 대한 그들의 논쟁할 여지 없는 귄리로 되었다는 것을,또한 그들의 이러한 월권이 아제 겨우 싹트기 시작한 국가에 의해 신성화되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또 그것은 농민과 수공업자 간의 분업이 매우 강화됨으로써 기존의 씨족과 종족 사이의 구분이 사회적으로 그다지 큰 의미를 지니자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마지막으로 그것은 씨족 사회와 국가 간의 불상용적인 모순을 선포하고 있다. 국가 형성의 첫 시도는 각 씨족 성원들을 특권자들과 비ᅵ특권자들로 가르고,후자를 또 그들의 직업에 따라 두 계급으로 갈라서,그들을 서로 대립시킴으로써 씨족유대를 단절하는 것이다.
그 후 솔론(Solon)에 이르기까지의 아테네 정치사에 대한 지식은 극히 불충분하다. 군사령관의 직무는 그 의미를 잃어버렸으며, 국가의 수뇌부에는 귀족층에서 선출된 아르콘들(Archonten)이 앉아 있었다. 귀족의 지배는 갈수록 강화되어 드디어 기원전 600년 경에는 견딜 수 없게까지 되었다. 화폐와 고리대금이 여기에서는 인민의 자유를 억압하는 주요한 수단으로 되었다. 귀족들은 주로 아테네와 그 부근에 거처하면서 해상무역과 함께 아직도 기회만 있으면 가끔 해적행위로써 치부를 도모했으며,화폐재산을 자기 손에 집중시켰다. 이것을 계기로 발전 중에 있던 화폐경제는 부식 작용을 하는 초산처럼 자연경제에 기초한 전통적인 농촌공동체적 생활양식을 침식했다. 씨족제도는 절대로 화폐경제와 양립할 수 없었다. 아티카 영세농은 그들을 비호하던 옛날의 씨족적 유대가 약화됨으로써 영락하게 되었다. 차용증서와 토지저당증권(아테네인들은 이미 저당권도 알고 있었다)은 씨족이나 부족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러나 옛날의 씨족제도는 화폐도,보증금도,금전 채무도 몰랐다. 화폐에 의한 귀족들의 지배가 날로 확대됨으로써 채무자에 대해 채권자를 보호하고,화폐 소유자들에 의한 영세농의 착취를 신성화하기 위해 새로운 관습법도 역시 만들어졌던 것이다. 아티카의 평야에는 어디를 가나 이 토지를 누구누구에게 이러이러한 금액에 저당되었다는 것을 표시하는 푯말이 서 있었다. 이러한 푯말이 없는 경지는 대부분이 저당 대부금이나 이자를 물지 못해 고리대금업자인 귀족의 소유로 되고 만 것들이었다. 농민은 소작인으로서 토지에 그대로 남아서 자기 노동생산물의 6분의 5를 새 주인에게 소작료로서 바치고, 나머지 6분의 1로써 생활하는 것이 허락된다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만일 토지를 판 대가가 부채를 갚기에 모자라거나 또는 부채가 담보에 의해 보증되지 않을 경우에는 채무 청산을 위해 채무자는 자기 자녀들을 외국에 노예로 팔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자녀들을 판다는 것—이것은 부권과 일부일처제가 맺은 첫 열매였다! 그래도 모자랄 경우,흡혈귀는 채무자 자신까지도 노예로서 팔 수 있었다. 이러한 것이 바로 아테네 문명의 빛나는 서광이었다.
이전처럼 인민의 생활조건들이 아직도 씨족제도에 부합되었을 때에는 이러한 변혁이 불가능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것이 실현되었다. 그러나 어떻게 실현되었는지 모른다. 여기서 잠시 이로쿠오이인들을 다시 살펴보기로 하자. 지금 아테네인들이,말하자면 그들의 참가 없이,또 확실히 그들의 의사에 거슬리게 강요당한 그러한 상태는 이로쿠오이인들로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로쿠오이인의 경우 오는 해도 가는 해도 변함 없는 생활수단의 생산방식 하에서는 그러한 외부로부터 강요된 갈등,빈부의 적대관계,착취자와 피착취자의 적대관계가 도저히 조성될 수 없었다. 이로쿠오이인들은 자연을 지배하기에는 아직 거리가 매우 멀었다. 그러나 그들은 나름대로의 일정한 자연적 한계 내에서 자기 자신의 생산에 대한 주인이었다. 만일 자기들의 조그만 밭에서와 흉작,자기들의 호수나 하천에서의 어류자원의 고갈,그리고 삼림에서의 짐승의 소멸 등을 별문제로 한다면,그들은 자기들의 생활수단 획득방식 하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를 미리 알고 있었다. 이 방식은 풍족하게든 빈약하게든 생활수단을 보장했다. 그러나 이 방식은 뜻하지 않았던 사회적 변혁을 초래할 수 없었으며, 씨족적 유대를 단절하고,씨족 성원들이나 종족 성원들을 서로 대립해서 싸우는 계급들로 분열시킬 수 없었다. 생산은 아주 좁은 틀 안에서 진행되었다. 그러나 생산물은 생산자가 완전히 지배했다. 이것은 미개시대의 극히 큰 장점이었다. 이 장점은 문명의 출현과 더불어 상실되었다. 이것을 다시 쟁취하는 것,그러나 이제는 인간이 현재 달성한 강력한 자연지배의 기초 위에서,그리고 현재는 이미 가능하게 된 자유로운 결합체의 기초 위에서 그것을 다시 쟁취하는 것은 다음 세대들의 임무일 것이다.
그리스인들의 경우에는 사정이 달랐다. 가축들과 사치품에 대한 사적 소유의 출현은 개별적 사람들 간의 교환을 초래했고,생산물의 상품화를 가져 왔다. 바로 이것이 그 후에 있었던 모든 변혁의 싹이다. 생산자 자신이 자기의 생산물을 직접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교환을 통해 그것을 양도하게 되자,그는 그 생산물을 지배할 수 없게 되었다. 생산물이 앞으로 어떻게 되는지 생산자는 모른다. 이제는 생산물을 생산자와 대립시키고 생산자를 착취하며 억압하는 데 이용할 가능성이 발생했다. 그러므로 어떤 사회를 막론하고 만일 개별적 사람들 간의 교환을 없애지 않는다면,그 사회는 오래도록 생산에 대한 지배와 그 생산과정의 사회적 결과에 대한 통제를 유지할 수없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개별적 사람들 간의 교환이 발생하고 생산물이 ‘상품’(Waren)으로 전화됨에 따라 생산자에 대한 생산물의 지배가 얼마나 급속히 나타나게 되었는가를 아테네인들은 몸소 체험해야만 했다. 상품생산과 더불어 개개인의 자력에 의한 토지경작이 나타났으며,곧 개개인의 토지소유가 나타났다. 그 다음에는 화폐,즉 다른 모든 상품과 교환되는 일반적 상품이 나타났다. 그러나 사람들은 화폐를 발명함으로써 실은 자기가 새로운 사회적 세력,즉 전체사회가 머리를 숙여야 할 유일한 일반적인 세력을 창조하게 된다고는 전혀 생각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그것을 만들어 낸 사람 자신이 알지도 못하고 바라지도 않았지만,돌연히 발생한 이 새로운 세력은 청춘의 혈기에서 나오는 난폭성을 발휘하여 아테네인들로 하여금 그 지배력을 느끼게 했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고대의 씨족제도는 화폐의 개선 행진 앞에 무력했을 뿐만이 아니라 씨족제도 그 자체 내에서는 화폐라든가,채권자와 채무자라든가,빚을 강제로 받아내는 따위를 받아들일 여지조차 없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새로운 사회 세력이 실제로 있었기 때문에,좋았던 옛 시절로의 복귀를 아무리 바라고 동경해도 화폐나 고리대금업을 이 세상에서 다시 없앨 수는 없었다. 뿐만 아니라 싸족제도에는 부차적이기는 하지만 다른 일련의 틈들도 생기게 되었다. 당시 아직도 아테네인은 자기 씨족 성원 아닌 사람들에게 경작지를 팔 수 있지만 자기 주택은 팔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아티카 전 지역에 걸쳐서,특히 아테네시 자체에서 씨족 및 부족 성원들의 잡거는 세대가 바뀔수록 더욱더 빈번해졌다. 공업과 교환이 가일층 발전함에 따라 농업,수공업(그리고 그 수공업에 속한 허다한 각종 부문들),상업(Handel),항해 (Schiffahrt) 등등 간의 분업은 더욱더 완성되어 갔다. 주민은 이제 작업에 따라 상당히 견고한 집단들로 분리되었으며,이 각 집단은 씨족이나 부족 내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허다한 새로운 공통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이 공통된 이해관계를 돌보기 위해 새로운 공직들이 필요했다. 노예의 수가 현저히 증가해 당시에도 아마 아테네의 자유민의 수를 이미 훨씬 넘고 있었을 것이다. 씨족제도는 원래 노예제를 전혀 몰랐으며,따라서 이러한 비자유민 대중을 억제하는 수단도 몰랐다. 마지막으로 상업은 수많은 외국인을 아테네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그들은 돈벌이가 수월했기 때문에 여기에 정착하고 있었으나,낡은 제도에 따라 그들도 역시 무권리와 무보호 상태에 있었으며,전통적인 관대성에도 불구하고 인민 속에서 불안정을 조정하는 이색 분자였다.
한마디로 말해서 씨족제도의 종말이 다가온 것이다. 사회는 나날이 자라 씨족제도의 울타리를 벗어나고 있었다. 눈앞에 벌어지는 최악의 폐단조차 씨족제도는 억제하지도 제거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에 국가는 슬그머니 발전했다. 처음에는 도시와 농촌 간의,그 다음에는 서로 다른 도시의 노동부문들 간의 분업에 의해 형성된 새로운 집단들은 자기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새로운 기관을 창출했으며,각종 공직을 만들어냈다. 다음으로 새로운 국가는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의 군사력을 필요로 했다. 항해업에 종사하는 아테네인들로서는 우선 개별적인 소규모의 전쟁 수행과 상선 보호를 위한 해군력만으로 충분했다. 시기가 불확실하지만 솔론 이전에 나우크라리아(naukrarien)라고 하는 소지구(小地區, kleine Gebietsbezirke)가 각 종족에 12개씩 조직되었다. 각 나우크라리아는 군함을 한 척씩 두고,무장과 승무원을 갖추고 있어야 했으며,그밖에도 두 명의 기마병을 두어야했다. 이제는 이중으로 씨족제도를 파괴했다. 첫째로 이 제도는 무장한 인민 전체와는 이미 전혀 일치하지 않는 공권력을 창출했다. 둘째로,그것은 처음으로 혈연적 집단별이 아니라,지역적 동거별로(örtlichem Zusammen wohnen) 인민을 사회적 목적을 위해 구분했다. 이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는 나중에 알게 될 것이다.
씨족제도는 피착취 인민에게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었으므로 자라나고 있던 국가에 기대하는 것만이 남아 있었다. 그리하여 국가는 솔론이 제정한 행정조직의 형태로 그들에게 도움을 주었으며,동시에 국가는 낡은 헌법을 희생하여 자체를 다시 강화했다. 솔론—기원전 594년 이루어진 그의 개혁안의 실시방법은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다—은 소유에 대한 침해로서 일련의 소위 정치혁명의 막을 열어놓았다. 종래의 모든 혁명은 한 종류의 소유에 대한 다른 종류의 소유를 보호하기 위한 혁명이었다. 그것은 다른 종류와 소유를 침해하지 않고서는 한 종류의 소유를 보호할 수 없었다. 프랑스대혁명 때에는 부르주아적 소유를 구제하기 위해 봉건적 소유가 희생되었으며,솔론이 실시한 혁명에서는 채권자의 소유가 채무자의 소유를 위해 피해를 입어야 했다. 채무는 간단하게 무효를 선언받았다. 상세한 것은 정확히 모르지만,솔론은 저당잡힌 경작지에서 저당 푯말을 뽑아 버렸으며,채무 때문에 외국으로 팔린 자들과 도망간 자들을 돌아오게 했다는 것을 자기의 시에서 자랑하고 있다. 이것은 소유권의 공공연한 침해에 의해서만 수행될 수 있었다. 사실상 또 소위 정치혁명은 모두 처음부터 끝까지 다른 종류의 소유를 몰수(‘일종의’ 절취 Art이다)함으로써 한 종류의 소유를 보호(‘또다른’ 절취이다)하기 위해 수행되었다. 이리하여 사적소유가 2,500년 동안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소유권의 침해에 의해서만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 이제는 자유로운 아테네인들의 이러한 노예화가 반복되는 것을 방지할 필요가 있었다. 예컨대 그것은 특히 채무자의 인신 자체를 담보로 하는 채무를 금지하는 것과 같은 그런 일반적인 대책에 의해서 달성되었다. 그리고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토지소유의 최대한계가 설정되었다. 이것은 농민 토지의 약탈에 대한 가족들의 탐욕을 어느 정도나마 제한하자는 것이었다. 이에 뒤이어 제도 자체에도 변혁이 일어났다. 우리들에게 극히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평의회는 각 종족에서 100명씩 400명의 인원으로 구성되었다. 여기서도 종족은 아직 그 기초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낡은 제도 중에서 새로운 국가가 받아들인 유일한 점이었다. 다른 것에도 솔론은 토지소유와 그 수입의 다과에 따라 시민을 네 계급으로 구분했다. 곡물 수확량이 최소 한도 500,300 그리고 150 메딤나이 (medimni : 1메딤누스 medimnus는 약 41리터)에 달하는 자들은 각각 제1,제2,제3계급에 속했으며,이보다 적거나 또는 토지가 전혀 없는 자들은 제4계급에 해당했다. 공직은 모두 위로부터 세 계급 출신들만이 차지할 수 있었고, 최고 관직은 제1계급 출신들만이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모든 공직자들은 이 인민회의에서 선출되었고,인민회의 앞에서 자기의 사업을 보고해야만 했으며,여기에서 모든 법률이 제정되었다. 그런데 인민회의에서는 제4계급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귀족적 특권은 재부의 특권이라는 형태로 부분적으로 부활되었다. 그러나 결정적 권력은 인민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네 계급으로의 구분은 새로운 군대조직의 기초가 되었다. 첫 두 계급은 기병대를 이루고,제3계급은 중무장 보병으로서 근무해야 했으며,제4계급은 갑옷과 투구 없는 경보병으로서 근무하거나 함대 근무를 했다. 그리고 근무시에는 근무수당을 받은 것 같다.
이와 같이 통치조직에 사적 소유라는 전혀 새로운 요소가 도입되었다. 국가 공민의 권리와 의무는 그들의 토지재산의 크기에 따라 제정되었다. 그리고 유산계급(Vermögensklassen)이 세력을 잡게 됨에 따라 낡은 혈연결합체들은 밀려나기 시작했다. 씨족제도는 또다시 패배를 당했다.
그러나 재산에 따른 정치적 권력의 부여가 국가의 성립에 필수불가결한 제도의 하나인 것은 결코 아니다. 이 원칙이 국가 형성의 역사에서 거대한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많은 국가들,더구나 가장 발전된 국가들은 그것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아테네에서도 역시 그것은 일시적인 역할을 했을 뿐이다. 아리스티데스(Aristides)시대 이래 모든 공직은 모든 시민(Bügger)앞에 개방되었다.
그 후 80년 동안 아테네 사회는 그 후에 계속된 수백년 간의 발전을 규정한 방향으로 점차 나아가기 시작했다. 솔론 이전 시기에 성행하던 토지저당에 의한 고리대금업도 이제는 토지소유의 무제한적인 집중과 마찬가지로 제한되었다. 상업과 노예노동에 기초하여 더욱더 발전하고 있던 수공업과 공예가 지배적인 영업으로 되었다. 사람들은 더욱더 문명화되었다. 초기처럼 잔인하게 자기와 같은 아테네 시민을 착취하는 대신, 이제는 주로 노예와 아테네 밖에서 아테네 상품을 사는 구매자를 착취하기 시작했다. 동산,즉 화폐,노예 및 선박 등과 같은 재부가 더욱더 증가했다. 그러나 이제는 이 동산이 벌써 폐쇄적이고 국부적이던 지난 시기처럼 단순히 토지재산 획득을 위한 수단으로만 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기 목적으로 되었다. 그 결과 한편에서는 새로운 계급인 부유한 수공업자 및 상인에 의해서 구귀족세력에 대해 승리를 거두는 경쟁이 전개되었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낡은 씨족제도의 잔재가 그 마지막 기반을 상실하게 되었다. 씨족,부족 및 종족들은 그 성원들이 이제는 전 아티카에 분산되어 완전히 잡거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 조직으로서는 전혀 쓸모없게 되었다. 대다수 아테네 시민은 어느 씨족에도 속하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시민권을 받고 있었지만 본래 어느 한 혈연집단들과도 인연이 없었던 이주해온 사람들이었다. 이와 더불어 보호만을 받고 있던 외국인 이주민들의 수가 부단히 증가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 당사자들 간의 투쟁도 계속되고 있었다. 귀족들은 이전의 특권을 회복하려고 시도했으며,한동안 다시 우세를 차지했으나 클레이스테네스(Cleisthenes)혁명 (기원 전 509년)이 마침내 그들을 최종적으로 타도했으며,그들과 함께 씨족제도의 마지막 잔재도 전복되었다.
클레이스테네스의 새로운 통치조직에서는 씨족과 부족에 기초한 네 개의 낡은 종족으로의 구분이 무시되었다. 그 대신 이미 나우크라리아에서 시험해 본,단지 거주지에 의해 시민을 구분한 새 조직이 나타났다. 이제는 소속 혈연집합체 여하가 아니라 오로지 상시적인거주지(Wohnsitz)만이 결정적인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인민이 아니라 영토(Gebiet)가 구분되었다. 주민은 정치적 관계에서는 영토의 단순한 부속물로 되었다.
전체 아티카는 데모스라는 100개의 공동체적 자치구로 구분되었다. 각 데모스(Demen)에 사는 시민들(데모테스,Demoten)은 자기의 우두머리(데마르코스, Demarch)와 재무관 그리고 또 사소한 소송사건을 판결하는 30명의 재판관을 선출했다. 그들은 또 자체의 신전과 수호신 또는 영웅을 가지고 있었으며,이들을 섬기는 제관을 선출했다. 데모스의 최고 권력은 데모테소 회의에 속하고 있었다. 모오간이 올바르게 지적한 바와 같이,그것은 아메리카의 자치적인 도시공동체의 원형이었다. 발생기에 있던 아테네 국가가 출발점으로 삼은 단위는 현대국가가 최고도로 발전한 결과 도달한 그것과 동일한 것이다.
10개의 이러한 단위가, 즉 데모스(Demen)가 한 개의 종족을 구성했다. 그러나 그 종족은 종래의 혈연종족과는 달리 이제는 지역적 종족이라고 불리우게 되었다. 그것은 비단 자치적인 정치조직이었을 뿐만 아니라 군사조직이기도 했다. 그것은 기병대를 지휘하는 필라르코스(Phylarchen), 병력을 지휘하는 스트라테고스(Strategen) 등을 선출했다. 그것은 또 승무원 및 지휘관이 타는 5척의 군함을 비치하고 있었고, 아티카의 어떤 영웅을 자기의 수호자로 삼고 있었으며,그의 이름을 따서 자기 종족 명칭을 정했다. 마지막으로 그것은 아테네 평의회의 대표 50명을 선출했다.
이것의 정점이 바로 아테네 국가였다. 아테네 국가는 10개의 종족에서 선출된 500명의 대표자로 구성된 평의회가 통치했으나,최종 결정권은 전체 아테네 시민이 발언권과 투표권을 행사했던 인민회의에 있었다. 이와 함께 아르콘과 기타 공직자들이 여러 가지 행정 부문과 재판 사무를 처리했다. 집행권의 우두머리가 아테네에는 없었다.
이와 같이 새로운 통치조직이 실시되고 극히 많은 피보호민(Schutzverwandter)一더러는 이주민이고 더러는 해방된 노예一이 시민권을 받게 됨으로써 씨족제도의 기관들은 공공사무의 관리로부터 밀려나고 사적 성격을 띤 단체나 종교단체로 전락했다. 그러나 낡은 씨족제도시대의 도덕적 영향, 인습적인 관점과 사고방식은 아직 오랫동안 전통 속에 남아 있다가 점차적으로 사멸했다. 이러한 사실은 그 후의 국가제도 중 하나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국가와 본질적인 표징은 인민대중과 동떨어진 공적 권력이라는 것이다. 아테네는 그 당시 인민의 군대와 인민이 직접 조직한 함대를 가지고 있었을 뿐이었다. 군대와 함대는 외부의 적을 방비했으며, 또 이미 당시 인구의 대다수를 이루고 있던 노예를 복종시키고 있었다. 공적 권력은 시민들에 대해서 최초에는 경찰로서 존재했을 따름이었다. 경찰은 국가와 마찬가지로 오래 된 것이다. 그러므로 18세기의 소박한 프랑스 사람들도 문명화된 인민의 이야기를 안하면서도 경찰화된 인민(nations policées)에 대해서는 곧잘 이야기했다. 그 당시 아테네인들은 자기의 국가와 함께 경찰대,즉 도보궁수(弓手)와 말 탄 궁수로 된 진짜 헌병대(Gendarmerie)—남부 독일과 스위스에서 말하는 소위 란트예거(Landjäger)—도 창설했다. 그러나 이 헌병대는 노예로 조직되었다. 자유로운 아테네인은 경찰 업무를 그야말로 비천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자신이 그런 수치스러운 일을 하기보다는 무장한 노예에게 체포당하는 편을 택했다. 이것은 낡은 씨족제도의 사고방식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국가는 경찰 없이 존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국가는 아직 생소하고, 도덕적 권위를 충분히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그것은 과거의 씨족 사회 성원들에게 추악하게 보일 수밖에 없는 노릇을 존경하도록 강요할 수는 없었다.
이제는 주요 특징들을 구비하게 된 국가가 아테네인들의 새로운 사회 상태에 얼마나 부합된 것이었는가는 재부,상업 및 공업의 급속한 번영이 잘 말해주고 있다. 사회 및 정치제도와 기초를 이루는 계급적 적대는 이제 이미 귀족과 평민 간의 적대가 아니라,노예와 자유민간의 적대로,피보호민과 완전한 권리를 가진 시민 간의 적대로 되었다. 아테네 전성기에 자유 시민의 숫자는 여자와 아이를 포함하여 대략 6만명이었고, 남녀 노예는 36만 5천명,그리고 피보호민—외국인과 해방된 노예—은 4만 5천명이었다. 이리하여 성인 남자 1명당 적어도 18명의 노예와 2명 이상의 피보호민이 있게 되었다. 노예의 수가 이와 같이 방대해진 것은 그들의 대다수가 감시인의 감독 밑에 수공업 작업장에서, 즉 넓은 일터에서 공동으로 노동을 하게 된 데 그 원인이 있다. 그러나 상업과 공업이 발전하면서 재화는 소수자의 수중에 집중•집적되고, 자유 시민대중은 가난하게 되었다. 그들에게는,수공업에 종사하면서 노예노동과 경쟁하느냐—그것은 수치스럽고 천한 직업으로 간주되었으며,게다가 큰 성과를 보장받지도 못했다— 그렇지 않으면 영락하느냐 그 중 어느 편을 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당시의 조건 하에서 불가피하게 후자의 길을 택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인구의 다수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전체 아테네 국가를 멸망으로 이끌어 갔다. 아테네를 멸망으로 이끌고 간 것은,군주들에게 아첨하는 유럽의 학교 선생님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민주주의가 아니라,자유민의 노동을 천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 노예제였다.
아테네인들에게서는 국가의 발생은 국가 형성 일반의 가장 전형적인 모범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첫째,외부적 또는 내부적인 폭력의 간섭이 전혀 없이 순수한 형태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며—피시스트라투스(Pisistratos)가 한동안 권력을 가로챈 적이 있기는 했으나,그것은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둘째,그것은 민주주의 공화국이라는 아주 고도로 발전한 형태의 국가를 씨족사회로부터 직접 발생시켰기 때문이며,마지막으로,그것은 이 국가 형성의 모든 본질적인 상세한 점을 우리가 충분히 알 수 있도록 해주었기 때문이다.


제Ⅵ장 로마의 씨족과 국가


로마 건국설화에 따르면,최초의 거주자는 하나의 종족으로 결합된 일련의 라틴 씨족들(Latin gentes, 전설에 따르면 100개 씨족)이었는데,얼마 안 가서 역시 100개의 씨족을 가졌다고 하는 사벨리(Sabellian)라는 한 종족이 이에 합류하게 되었으며,또 그 후에 역시 100개의 씨족을 가졌으며, 각기 다른 요소로 구성된 제3의 종족이 합류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야기 전체를 통해 곧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여기에는 씨족을 제외하고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으며,더욱이 약간의 경우에는 그 씨족도 옛 고향에 그대로 존속하고 있던 모체 씨족(Muttergens)의 곁가지에 지나지 않았다. 이 종족들은 인위적으로 형성된 흔적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대개는 혈연적 요소들로 조직되었으며,그것도 인위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자연발생적으로 자라난 고대 종족(alter stamm)의 본을 따라서 조직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세 종족 각자의 핵심이 진짜 고대 종족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배제되지는 않는다. 중간고리 (Mittelglied)인 부족은 10개 씨족으로 구성되었으며,쿠리아(Curie)라고 불리었다. 따라서 쿠리아는 30개였다.
로마의 씨족이 그리스의 씨족과 같은 제도였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는 바이다. 그리스의 씨족이 아메리카 인디안을 원형으로 하는 그런 사회적 세포가 가일층 발전된 것이라고 한다면,로마의 씨족에 대해서도 역시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좀 간단히 지나칠 수 있다.
로마의 씨족은 적어도 로마가 존재하던 최고대 시기에는 다음과 같은 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1. 씨족 성원들의 상호 상속권 : 재산은 씨족 내에 남아 있었다. 그리스 씨족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로마의 씨족에서도 이미 부권이 지배하고 있었으므로,모계의 후손은 상속에서 제외되었다. 세상에 알려진 가장 오랜 로마 성문법 인 12동판법(Gesetz der Zwölf Taflen)에 따르면,우선 자식들이 직계 상속인으로서 상속을 했고,그들이 없는 경우에는 아그나테스(agnaten, 부계의 친족)가 상속했다. 만일 이들도 없는 경우에는 씨족 성원들이 상속했다. 어느 경우에 있어서나 재산은 씨족 내에 남아 있었다. 우리는 여기서 재부의 증대와 일부일처제에 의해 발생한 새로운 법적 규범이 씨족적 관습을 점차 침해하는 것을 본다. 즉 원래는 전체 씨족 성원들에게 평등하던 상속권을 실제로는우선—그리고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아 매우 일찍부터— 아그나테스만이 가질 수 있었고,나중에는 자식들과 부계의 후손들만이 가질 수 있게 되었다. 12동판법에는 상속 순위가 이와 반대로 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2. 공동묘지의 소유 : 클라우디우스(Claudia)라고 하는 귀족적 씨족은 레길리 (Regili)라는 도시로부터 로마로 이주했을 때에 약간의 땅과 그 밖에 또 시내의 공동묘지를 얻었다. 이미 아우구스투스 시대에서 테우토부르그 삼림(Teutoburger Walt)에서 살해당한 바루스(Varus P.Quinctilius)와 머리를 로마에 가져다 씨족의 언덕(gentilitius tumulus)에 매장했다. 따라서 그 씨족(Quinctiliaa,큉크틸리우스)은 아직도 묘지를 따로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3. 공공의 종교적 제전 : 이것은 씨족제(sacra gentilitia)로서 알려져 있다.
4. 씨족 내에서 결혼하지 않을 의무 : 이것은 로마에서는 단 한 번도 성문법으로 된 적이 없었던 것 같으나 관습으로서는 남아 있었다. 오늘날까지 알려져 있는 그 수많은 로마인 부부들 중에서 부부 간의 씨족명이 같은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상속권도 역시 이라한 관습을 증명해주고 있다. 여자는 결혼하면 부계 친족으로서의 권리를 상실하고 자기의 씨족을 떠난다. 그 여자와 그 여자의 자식들은 그 여자의 아버지나 아버지의 형제를 상속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아버지 쪽 씨족의 상속 부분이 상실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은 여자가 씨족 성원과는 결혼하지 못한다는 전제 밑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5. 토지의 공동소유 : 이것은 종족에 소속된 토지가 분할되기 전까지는 원시시대에 언제나 있었다. 라틴 종족들 사이에서는 토지가 일부는 종족의 소유로,일부는 씨족의 소유로,일부는 당시 아직 개별 가족이라고는 거의 볼 수 없었던 세대의 소유로 되어 있었다. 로물루스(Romulus)가 처음으로 1인당 약 1헥타(2 유게라 jugera)씩 개인들에게 토지를 분배했다고 한다. 그러나 토지는 그 후에도 씨족의 소유로 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물론 공화국 전체 국내 정치사의 중심 문제로 떠오른 국유지는 제외하고서 하는 말이다.
6. 씨족 성원들이 서로 보호하고 원조할 의무 : 쓰여진 역사는 이에 대한 단편만을 제공해주고 있다. 로마국가는 애초부터 매우 강력했기 때문에 침략에 대한 방위권은 국가가 담당하게 되어 있었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Appius Claudius)가 체포되었을 때 그 씨족의 전체 성원은 물론 심지어 그의 개인적 적들까지도 상복을 입었다. 제2차 포에니전쟁 때 씨족들은 포로로 된 자기 성원들의 석방을 위해 단결했다. 그러나 원로원은 이것을 금지시켰다. (verbot)
7. 씨족명을 달 권리 : 이것은 제정시대에 이르기까지 존속되었다. 해방된 노예는 자기들의 이전 주인의 씨족명을 다는 것이 허락되었으나 씨족 성원으로서의 권리는 얻지 못했다.
8. 다른 씨족 성원을 씨족의 양자로 삼을 권리 : 이것은 한 가족이 양자를 들임으로써 수행되었는데(인디안의 경우처럼),그것 자체가 씨족으로 편입시키는 것이 되었다.
9. 족장을 선출하며 파면하는 권리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이 없다 : 그러나 로마의 역사 초기에는 선출된 왕을 비롯해 일체의 공직이 선출되거나 임명되었으므로,그리고 쿠리아의 제관들 역시 쿠리아에 의해서 선출되었으므로 우리는 씨족의 우두머리 (principes)의 경우에도 역시 그러했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씨족 내의 동일가족 중에서 선출하는 것이 이미 규칙으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것들이 로마 씨족의 권리들이었다. 이미 부권으로 완전히 이행했다는 사정을 제외한다면, 이 권리들은 이로쿠오이 씨족의 권리와 의무를 정확히 재현하고 있다. 여기서도 “이로쿠오인이 선명하게 나타난다.”
오늘날에 있어서 가장 이름난 역사가들조차 아직 로마의 씨족제도 문제에 대해 얼마나 혼란에 빠지고 있는가를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기로 하자.
공화제 시대와 아우구스투스 시기의 로마의 고유명사에 관한 몸젠의 저작(Römische Forschungen, Berlin, 1864, I, Band)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노예는 물론 제외되었지만,양자들과 피보호민들을 포함한 모든 남성씨족 성원들 외에 여성들에게도 역시 씨족명이 붙는다…… 종족(Der Stamm ; 몸젠은 여기서 gens라는 말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다)은……공통적(현실적인 또는 상상적인 또는 허구적이기조차 한) 혈통에 기초해 발생했으며 제전,장례식 및 상속의 공통성에 의해 결합된 공동체로서,인식적으로 자유로운 모든 개인, 따라서 모든 여성들도 이 공동체의 성원으로 자처해야 하며,또 자처할 수 있다. 결혼한 여자들의 씨족명을 정하는 것만은 곤란했다. 여자가 오로지 자기 씨족 성원과 결혼할 수 있었던 동안은 물론 이러한 어려움이 없었다. 그리고 이미 증명된 바와 같이 오랜 기간 여자들은 자기 씨족 내에서보다 그 밖에서 결혼하는 것이 더 어려웠었다. 그것은 씨족 밖에서의 결혼의 권리(gentis enuptio)가 기원전 6세기에 들어서서도 아직 개인적 특권으로서,보수로서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고대에는 이러한 족외혼이 실시되었을 경우,여자는 반드시 남편의 종족으로 넘어간 것 같다. 고대의 종교적 결혼에 따르면 여자가 남편의 법률적 및 종교적 공동체로 완전히 편입되며,자기의 공동체로부터 떠난다는 것은 아무런 의심할 여지도 없다. 결혼한 여자가 자기 씨족에게서는 상속에 대한 능동적 및 수동적 권리를 상실하지만,그 대신 자기 남편,자녀 및 일반적으로 그 씨족 성원들과 함께 상속권을 공유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만일 그 여자가 남편집의 양녀가 되어 그의 가족의 한 성원으로 된다면,어떻게 그 여자가 남편의 혈족에 대해 타인으로 남아 있을 수 있겠는가?(S. 8〜11)

이와 같이 몸젠은, 로마의 어떤 씨족의 여성들은 원래 자기 씨족 내에서만 결혼할 수 있었고,따라서 로마 씨족은 족외혼이 아니라 족내혼이었다고 주장한다. 다른 사람들의 모든 경험과 모순되는 이 견해는 전적으로 그것에만 근거한 것은 아니지만,주로 많은 물의를 일으킨 리비우스(Livy)의 한 귀절(제39권,제19장)에 근거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로마 창건 568년,즉 기원 전 186년에 원로원은 다음과 같이 결정했다. 즉 “페케니아 히스팔라(Fecenia Hispala)는 마치 자기의 (죽은) 남편이 유언으로써 그러한 권리를 그에게 양도한 것처럼 자기 재산을 관리하고, 그것을 사용하며, 씨족 밖에서 결혼하고,후견인을 선택하는 등의 권리를 가질 것이다. 그 여자는 자유민과 결혼할 수 있으며,이것이 그 여자를 아내로 삼은 자에게 악행이나 불명예로 간주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Uti Fecenia Hispalae datio deminutio gentis enuptio tutoris optio item esset, quasi ei vir testamento dedisset ; utique eiingenuo nubere liceret, neu quid ei qui cam duxisset ob id fraudi ignominiaeve esset)
보는 바와 같이 여기서는 해방된 노예 페케니아가 씨족 밖에서 결혼할 권리를 얻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남편은 유언으로써 자기가 죽은 후에 씨족 밖에서 결혼할 권리를 자기 아내에게 줄 권리를 가지고 있었으리라는 것도 역시 틀림없다. 그러나 씨족 밖에서란 어느 편의 씨족을 말하는가?
만일 몸젠이 추측하는 바와 같이 여자가 반드시 자기 씨족 내에서 결혼해야 했었다면,그 여자는 결혼 후에도 그 씨족에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첫째로 다름 아닌 씨족이 족내혼 운운의 이런 주장자체가 증명을 필요로 하는 문제이다. 둘째로 만일 여자가 자기 씨족 내에서 결혼했다면 당연히 남자도 역시 그러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는 자기의 아내를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남편은 자신이 가지고 있지도 않으며,또 자기 자신을 위해 행사할 수도 없는 권리를 유언으로써 자기 아내에게 줄 수 있었다는 것으로 된다. 이것은 법률적 견지로 보아 황당한 이야기이다. 몸젠도 역시 이 점을 느낀 모양인지 다음과 같은 추측을 하고 있다.

씨족 밖에서 결혼하자면 법률상으로 아마 권력자의 동의뿐만 아니라 전체 씨족 성원의 동의도 필요했던 것 같다.(S.10.의 주)

이것은 첫째로 매우 대담한 추측이다. 둘째로 이것은 명백히 앞의 인용문과 모순된다. 원로원이 남편을 대신하여(an Stelle des Marines)이 권리를 그 여자에게 주고 있다. 원로원이 그 여자에게 주는 것은 확실히 그 여자의 남편이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다. 그러나 원로원이 그 여자에게 주는 것은 다른 어떠한 제한도 받지 않는 절대적인 권리이므로, 그 여자가 이것을 행사하더라도 그 여자의 새로운 남편에게 그것이 고통으로 되어서는 안된다. 원로원은 그것 때문에 여자가 피해를 입는 일이 조금도 없도록 배려할 것을 현재와 장래의 집정관(Konsuln) 및 대법관(Prätoren)에게 위임하기까지 했다. 따라서 몸젠의 추측은 전혀 용납될 수 없다.
혹은 또 여자가 다른 씨족 출신의 남자와 결혼하고도 자신은 자기가 태어난 씨족에 그대로 남아 있는 다른 경우를 가정해보자. 그때에는 위에 인용된 귀절대로 그 여자의 남편은 그 여자 자신의 씨족 밖에서 결혼하는 것을 아내에게 허락하는 권리를 가지는 것이 될 것이다. 이것은 그가 전혀 속해 있지 않던 씨족의 문제를 처리할 권리를 가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더 말할 나위 없이 불합리한 말이다.
그리하여 이제 유일하게 추측 가능한 것은 몸젠도 이러한 경우를 사실상은 시인하고 있는 바이지만, 여자가 첫 결혼 때에는 다른 씨족 출신의 남자와 결혼하고, 그 결과로서 무조건적으로 남편의 씨족으로 넘어간 경우뿐이다. 이 경우에는 모든 상호관계가 곧 명백해진다. 여자는 결혼함으로써 자기의 종래의 씨족과 분리되어 남자 쪽의 새로운 씨족집단에 편입되며, 거기서 매우 특수한 지위를 차지한다. 그 여자는 씨족의 성원이기는 하나 그것과 혈연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씨족의 성원으로 편입되는 의식을 거쳐 그녀는 족내혼의 금지로부터 전적으로 배제된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제 결혼을 통해 씨족으로 편입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그 여자는 상속의 일반적 권리를 가진 씨족집단에 편입되어,남편이 사망하는 경우에 그의 재산,즉 씨족 구성원의 재산을 상속한다. 이 재산을 씨족 내에 보존하기 위해 여자는 자기의 첫 남편의 씨족 구성원과 결혼해야 하고,다른 누구와도 결혼하지 말아야 한다는 규칙보다 더 당연한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만일 예외를 허용해야 한다면,여자에게 그렇게 할 권리를 부여할 자격이 있는 자는 재산을 유증한 최초의 남편이 아니고 다른 누가 할 수 있겠는가? 그는 여자에게 계산의 일부를 유증하고 동시에 결혼에 의해 또는 결혼의 결과로서 다른 씨족에 그것을 양도할 것을 그 여자에게 허락하는 그 순간까지 이 재산은 아직 남자에게 속해있다. 따라서 그는 문자 그대로 자기의 재산을 처리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아내 자신에 대해, 그리고 그 남편 쪽 씨족과 그 여자의 관계에 대해 말한다면, 그 여자를 끌어들인 것은 다름 아닌 남편이 자기의 자유의사 행위—결혼—에 따른 일이었다. 때문에 그 여자에게 두번째 결혼에 의해 이 씨족으로부터 이탈할 수 있는 권리를 허락할 수 있는 사람도 역시 다름 아닌 바로 그 사람이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로마 씨족의 족내혼이라는 기묘한 관념을 버리고, 모오간처럼 그것이 원래 족외혼이었다는 것을 받아들이자마자 문제는 단순하고도 자명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추측이 가능한 경우가 또 하나 있다. 이것도 역시 지지자가 있었으며, 더구나 그 수는 가장 많았을 것이다. 그것은 앞에서 예를 든 귀절이 다음과 같은 것을 말할 따름이라는 것이다.

해방된 노비들(libertae)은 특별한 허가 없이는 씨족 밖에서 결혼(egente enubere)하거나,또는 가족권의 상실(capits deminutio minima)과 관련해서 씨족집단으로부터 노비와 이탈을 초래케 하는 여하한 행위도 할 수 없었다.[Lange, Römische Altertiäner, Berlin 1856, I,S. 195. 여기에서 필자는 우리가 인용한 리비우스의 귀절에 관해 후쉬케(Huschke)를 인정하고 있다.]

만일 이 추측이 옳다면,인용문은 자유로운 로마 여성의 지위에 관해서는 전혀 아무 것도 증명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그들이 씨족 내에서 결혼해야 할 의무에 관해서는 사실상 전혀 문제가 될 수 없다.
enuptio gentis(씨족 외 결혼)라는 표현은 리비우스의 이 한 귀절에서만 볼 수 있을 뿐이고,그 밖에는 전체 로마문헌의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enubere, 즉 밖에서 결혼하다라는 말은 리비우스의 책에서도 세 번밖에 안 나오며, 그것도 씨족과는 관계없이 나온다. 로마 여성들이 자기 씨족 내에서만 결혼할 수 있었다는 환상을 일으키게 한 것은 오로지 이 한 귀절뿐이다. 그러나 이 환상은 절대로 비판을 감당해내지 못한다. 왜냐하면 만일 이 귀절이 해방된 여자 노예들에 대한 특별한 제한에 관한 것이라면,그것은 자유민들(ingenuae)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증명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혹은 또 그것이 자유민들에 대해서도 타당한 것이라면,그것은 도리어 여자는 보통 자기의 씨족 밖에서 결혼했으나 출가하면 남편의 씨족으로 옮아갔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며, 따라서 몸젠을 논박하고 모오간을 변호하는 것밖에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로마 창건 후에도 거의 300년 동안은 씨족적 유대가 매우 견고했기 때문에 한 귀족적 씨족,즉 파비우스(Fabii) 씨족은 원로원의 허가를 받아 자력으로 인접 도시 베이 (Veji)에 대한 출정을 계획할 수 있을 정도였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306명의 파비우스인이 출정했다가 복병을 만나서 전멸하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한 명의 소년이 씨족을 유지했다고 한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10개의 씨족이 한 개의 부족을 형성했는데, 그것을 여기서는 쿠리아라고 불렀다. 쿠리아는 그리스의 부족보다 한층 더 중요한 사회적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각 쿠리아는 자기의 종교적 의식, 신전 및 제관 등이 있었으며, 이 제관들은 전부 모여서 로마 승려단의 하나를 이루고 있었다. 10개의 쿠리아가 한 개의 종족을 형성했는데,거기에는 기타 라틴 종족들과 마찬가지로 최초에는 자기의 선출된 우두머리—군사령관 겸 제사장—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세 종족 전체가 로마인,즉 Populus Romanus를 형성했다.
이리하여 로마인에는 씨족의 성원인 동시에 자기의 씨족을 통해 쿠리아와 종족의 성원인 사람만이 속할 수 있었다. 이 인민의 최초의 통치조직은 다음과 같았다. 즉 사회적인 문제들은 우선 원로원이 처리했다. 원로원은 니부어가 처음으로 정확하게 알아낸 바와 같이 300개 씨족장들로 구성되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씨족의 족장으로서 아버지,즉 Patres라고 불리었으며, 또 그들 전체는 원로원(Senat, 이것은 연장자 평의회를 의미하며,senex, 즉 노인이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이라고 불리었다. 원로는 언제나 각 씨족의 동일한 가족 중에서 선출되는 관습 때문에 로마에서도 최초의 씨족적 귀족이 형성되었다. 이 가족들은 귀족이라고 불리었으며, 그들은 원로원 의원이 되는 독점적 권리와 기타 일체 공직을 차지할 권리를 요구했다. 시일이 지남에 따라 인민이 이러한 요구를 받아들임으로써 그것이 현실적인 권리로 되었다는 사실은 로물루스가 최초의 원로원 의원들과 그 후손들에게 귀족의 신분과 특권을 주었다는 전설에서 잘 표현되고 있다. 원로원은 아테네의 평의회(Entscheidung)을 가지고 있었으며,그 중에서도 조금 더 중요한 문제,특히 새 법령 같은 것은 사전에 심의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법령의 최종적 채택은 인민회의가 했는데, 이 인민회의는 쿠리아 회의(comitia curiata)라고 불리었다. 인민은 쿠리아별로,그리고 각 쿠리아에서는 확실히 씨족 별로 패를 지어 집합했다. 문제를 결정할 때에는 30개 쿠리아가 각각 한 표씩 투표권을 가지고 있었다. 쿠리아 회의는 모든 법령을 채택 또는 부결했으며, 레크스(rex, 소위 왕)를 포함한 모든 고위 공직자들을 선출하고, 선전을 포고하며(그러나 강화는 원로원이 체결했다) 또 로마 시민의 사형선고 문제에 대해서는 최고 재판소로서 언제나 당사자들의 상소에 의해 최종판결을 내렸다. 마지막으로 원로원 및 인민회의와 함께 레크스가 있었는데,레크스는 꼭 그리스의 바실레우스에 해당하는 것이지 몸젠이 기술한 것처럼 절대군주에 가까운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또 군사령관이기도 하고 제사장이기도 하며,또 어떤 재판에서는 재판장이기도 했다. 군사령관으로서의 군사규율에 관한 권한이나 최고 재판장으로서의 판결 집행권에서 유래한 것을 제외하고, 그는 민사 행정 분야에서의 권한과 또한 시민의 생명,자유 및 재산에 대한 권력을 결코 가지고 있지 않았다. 레크스의 직위는 세습적인 것이 아니었다. 반대로 그것은 전임자의 제안에 따라 우선 쿠리아 회의에서 선출된 후 두번째 회의에서 정식으로 임명된 것 같다. 그가 파면될 수도 있었다는 것은 타르쿠이니우스 수페르부스(Tarquinius Superbus)의 운명이 이를 증명해주고 있다.
영웅시대의 그리스인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소위 왕정시대의 로마인들의 경우에도, 씨족,부족 및 종족에 기초했고, 또 그것들로부터 발전한 군사 민주주의가 있었다. 비록 쿠리아와 종족은 어느 정도 인위적인 구성이기는 했지만, 그것들을 발생시켰고 또 아직도 모든 면에서 그것들을 둘러싸고 있던 사회의 진정한, 원초적인 형태에 따라 조직된 것이다. 원초적인 파트리키우스적 귀족이 이미 견고한 기반을 획득했고,또 레크스들이 자기의 권한을 점점 확대시키려고 노력하기는 했으나, 이러한 모든 것 때문에 제도가 가지고 있던 본래의 기본성격이 바꾸어지지는 않았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의 핵심이 있다.
그러는 동안에 로마 시내와 정복으로 확장된 로마 영역 내의 인구가 더러는 이주민에 의해, 더러는 정복된 지역의 주민, 주로 라틴지역의 주민 때문에 증가했다. 이 새로운 시민들(피보호민에 관해서는 여기서 문제삼지 않는다)은 모두 전부터 있던 씨족, 쿠리아 및 종족과는 인연이 없었으며, 따라서 Populus Romanus, 즉 본래의 로마인의 구성 부분이 아니었다. 그들은 신체적으로는 자유로운 사람으로서 토지재산을 소유할 수 있었고, 세금을 납부하며, 병역에 복무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떠한 공직도 차지할 수 없었으며, 쿠리아 회의에도, 점령한 국유지의 분배에도 참여할 수 없었다. 그들은 온갖 정치적 권리를 박탈당한 평민(Plebs)을 이루고 있었다. 수효가 날로 늘어가고 군사훈련을 쌓고 무장을 하게 됨으로써, 그들은 이제 외래자에 의한 어떠한 증가도 완강히 막고 있던 종래의 포풀루스(Populus)에 대해 위협적인 세력으로 자라났다. 더구나 토지재산은 포풀루스와 평민 사이에 거의 균등하게 분배되어 있었던 것 같으며, 한편 상업적 및 공업적 재화는 아직 그 발전이 강력하지는 않았으나 주로 평민의 수중에 있었던 것 같다.
로마의 전설적인 고대사 전체가 짙은 암흑에 싸여 있는데다가 우리의 사료의 필자들인 후세의 법학적 소양이 있는 문헌학자들이 이것을 합리주의적,실용주의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와 보고로 인해 암흑은 더욱 심해졌는데, 이 때문에 고대의 씨족제도를 마무리지은 그 혁명의시기, 과정 및 원인 등에 관해서는 어느 것 하나 똑바로 말할 수가 없다. 다만 그 원인이 평민과 포풀루스 사이의 투쟁에 있었다는 것만은 의심할 바 없다.
세르비우스 틀리우스(Servius Tullius)라는 레크스가 제정했다고 하는 새로운 통치조직은 그리스의 모범,특히 솔론을 본뜬 것인데,그것은 새로운 인민회의를 창출했다. 이 인민회의에의 참가 여부는 포풀루스냐 평민이냐 하는 차이에 의해서가 아니라,군복무의 여부에 따라 결정되었다. 병역 의무를 지는 전체 남성 주민은 그 재산에 따라서 여섯 계급으로 구분되었다. 다섯 계급의 최저 재산액은 각각 다음과 같았다. 즉 제1계급一10만 아스(asses), 제2계급一7만 5천 아스,제3계급一5만 아스,제4계급一2만 5천 아스,제5계급一1만 1천 아스. 이것은 뒤로 드 라 말(Dureau de la Malle)에 따르면 대략 1만 4천,1만 5백,7천,3천6백 및 1,570마르크에 해당한다. 제6계급인 최하층민(Proletariat)은 가난했기 때문에 병역과 납세를 면제당한 자들이었다. 새로운 켄투리아 인민회의(comitia centuriata)에서는 시민들이 중대별로 각각 100명씩 한 켄투리아를 이루어 군대식으로 정렬했으며,각 켄투리아는 한 표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제1계급은 80켄투리아,제2계급은 22, 제3계급은 20, 제4계급은 22, 제5계급은 30, 제6계급도 역시 체면상 한 켄투리아를 이루었다. 그 밖에도 가장 부유한 시민들로부터 충당된 기사들이 18켄투리아였다. 그리하여 도합 193켄투라아였다. 97표면 족히 과반수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기사와 제1계급은 도합 98표,즉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이 단합하기만 하면 나머지 사람들에게 의견을 전혀 물어보지 않고도 최종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종전에 쿠리아 회의가 가지고 있었던 정치적 권리는(약간의 명목상 권리를 제외하고는) 이제 모두 새로운 켄투리아 회의로 넘어갔다. 따라서 쿠리아와 그것을 구성하는 씨족은 아테네에서처럼 순전히 사적•종교적 단체로 전락했으며,또 그러한 것으로서 오랫동안 그 여명을 보존하고 있었으나,한편 쿠리아 회의는 얼마 후 완전히 없어져 버렸다. 세 개의 낡은 혈연종족도 국가에서 제거하기 위해 네 개의 지역종족이 조직되었다. 이 지역종족들은 각각 도시의 4분의 1 구역에서 살았으며,일련의 정치적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이와 같이 로마에서는 소위 왕권이 아직 폐지되기 전에,인적인 혈연적 유대에 입각하고 있던 낡은 사회제도는 파괴되고,그 대신 영토에 따른 구분과 재산상 차별을 기초로 한 새로운 현실적인 국가제도가 수립되었다. 공권력은 병역 의무를 지는 시민들의 수중에 집중되었다. 그것은 비단 노예뿐만 아니라, 병역 의무와 무장에서 제외된 소위 최하층민을 견제하는 데도 적용되었다.
이 새로운 제도는 현실적 왕권을 탈취한 마지막 레크스인 타르쿠이니우스 수페르부스 왕이 추방되고,레크스가(이로쿠오이인들의 경우처럼) 동일한 권력을 가진 두 사람의 집정관(Konsuln)으로 바꾸어졌을 때에야 비로소 더 나은 발전을 볼 수 있었다. 이 새로운 제도의 틀 안에서 로마 공화국의 전 역사가 전개된다. 즉 귀족과 평민 간에 공직 점유와 국유지 분배에 참여하는 문제를 가지고 투쟁이 전개되었다가, 마침내 파트리키우스적 귀족(Patriziemdels)은 대토지 소유자 및 대화폐 소유자라는 새로운 계급으로 용해된다. 이들은 병역 때문에 영락한 농민들의 모든 토지를 점차 삼켜버렸으며,이렇게 하여 형성된 광대한 영지를 노예를 써서 경작하면서 이탈리아를 황폐화시켰고, 그렇게 함으로써 비단 제정(帝政)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그 후계자인 게르만 미개인들에게도 길을 열어 주게 되었다.


제Ⅶ장 켈트인과 게르만인의 씨족


지면관계로, 각종 야만인과 미개인들이 오늘날에도 아직 어느 정도는 순수한 형태로 가지고 있는 씨족제도나, 또는 아시아의 문화인들의 고대사에서 볼 수 있는 씨족제도의 흔적을 상세히 고찰할 수는 없다. 이러한 것들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몇 개의 예를 들어 보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씨족이란 어떠한 것인지 아직 알려지기 전에 벌써 맥레난은 그 개념을 혼란시키기는 했으나 대단히 노력을 기울여 씨족의 존재를 증명했으며, 칼무크인(Kalmüken), 체르케이스인(Tscherkessen), 사모예드인(Samojeden) 그리고 인도의 세 인민 즉,와랄리인(Waralis), 마가르인(Magars), 문니푸리인(Munnipuris)들의 경우를 들어 대체로 옳게 서술했다. 여기에서는 켈트인 씨족과 게르만인 씨족의 존재에 관해 좀 간단히 고찰하는 데 그치려 한다.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는 켈트인의 가장 오랜 법률을 보면 당시 씨족이 아직 고스란히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아일랜드에서는 잉글랜드인들이 씨족을 폭력적으로 파괴한 지 오래된 오늘날에도 씨족은 아직도 그 인민의 의식 속에서 본능적으로 살아남아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지난 세지 중엽에도 그것은 아직 전성기에 있었다. 여기서도 역시 그것은 오직 잉글랜드인들의 무기와 입법과 재판소에 의해서만 파괴되었다.
잉글랜드인이 정복하기 여러 세기 전에,즉 늦어도 11세기에 제정된 고대 웨일즈인의 법률은 종래의 보편적인 관습의 예외적인 잔재일 따름이기는 하지만, 전체 촌락 사람들이 공동으로 토지를 경작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각 가족은 스스로 경작하기 위해 5에이커씩 가지고 있었으며, 그와 함께 일정한 필지의 경지를 공동으로 경작해서 그 수확물을 분배했다. 이 촌락공동체가 씨족 또는 씨족의 아래 단위를 표시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 사실은 웨일즈인의 법률을 새로 검토한다고 해도—나에게는 그럴 시간이 없다(나의 발췌는 1869년의 것이다)— 직접 확증되지 않겠지만,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사실로 미루어 보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웨일즈의 사료와 또한 아일랜드의 사료가 단적으로 증명하고 있는 바와 같이,11세기의 켈트인들 사이에서는 아직 대우혼이 결코 일부일처제에 의해 밀려나지 않았다. 웨일즈에서는 혼인한 지 7년이 지난 후에는 이혼할 수 없는 것으로 되었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어느 한 쪽에서 이혼을 요구할 수 없는 것으로 되었다. 따라서 7년에 사흘밤만 부족해도 부부는 이혼할 수 있었다. 그때에는 재산을 서로 나누었다. 나누는 것은 아내가 맡았으며, 남편은 거기서 자기의 몫을 차지했다. 가구는 일정한, 그러나 아주 기묘한 법칙에 의해 분배되었다. 만일 혼인관계가 남편 때문에 파탄되었을 때에는 남편이 아내에게 지참품과 기타 약간의 물품을 반환했으며,아내에 의해 파탄되었을 때에는 아내가 보다 적게 받았다. 아이들은 남편이 두 명을 차지하고 아내는 한 명을 차지하되 가운데 아이를 차지했다. 이혼 후 아내가 재혼했을 경우에도 첫 남편이 다시 돌아올 것을 요구하면,설혹 이미 한 쪽 다리를 새 잠자리에 넣었다 하더라도 여자는 이 요구를 들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들이 7년을 같이 생활했다면 그 전에 정식으로 혼인관계가 없었다 할지라도 그들은 부부가 되었다. 결혼 전의 처녀의 정조는 결코 엄수되지 않았으며 또 요구되지도 않았다. 이에 관한 규칙은 극히 조잡한 것이어서 부르주아 도덕과는 전혀 맞지 않는다. 아내가 정조를 지키지 않았을 때,남편은 여자를 구타할 수 있었다(이것은 남편이 아내를 구타할 수 있는 세 가지 경우 중의 하나이다. 기타 경우에 아내를 구타하면 남편은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한번 구타한 후에는 다른 배상을 요구할 권리를 가지지 못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한 가지 죄행에 대해 속죄나 복수 중 어느 하나를 취하는 것은 당연하지만,두 가지를 다 취하는 것은 부당하다.

아내가 갈라 설 때에 자기의 재산상 권리를 하나도 상실하지 않고 이혼을 요구할 수 있는 조건은 아주 여러 가지가 있다. 예컨대 남편의 입에서 악취가 난다는 것으로도 충분했다. 초야권의 대가로서 종장 또는 왕에게 바치는 속금(Loskaufgeld : gobr merch, 이로부터 중세기의 명칭 marcheta, 프랑스어로는 marquette가 나왔다)은 법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여성들은 인민회의에서 투표권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 덧붙여 지적한다면 아일랜드에서도 이와 비슷한 제도가 있었음이 증명되었으며,이 곳에서도 역시 일시적 결혼이 극히 통상적이었다. 또 이혼을 하게 되면 아내에게는 정확히 규정된 많은 특권이 보장되어 있었고, 심지어는 그 여자가 집안 살림살이를 해준 데 대한 보수까지도 보장되어 있었다. 이곳에서는 ‘첫째 아내’가 여러 아내들과 나란히 있었으며, 유산의 분배에서는 적자와 서자 간에 아무런 구별도 두지 않았다. 이 사실로 미루어 볼 때 혼인형태는 대우혼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이것과 비교해 볼 때 북아메리카의 혼인형태는 매우 엄격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전자는 케사르 시대에도 아직 군혼생활을 하고 있던 그런 인민의 11세기 혼인형태인 만큼 놀랄 것이 못된다.
아일랜드 씨족(sept,종족은 clainne,clan으로 불렀다)의 존재는 비단 고대의 법전들에서뿐만 아니라 클랜들의 토지를 잉글랜드 왕의 직할령으로 만들기 위해 아일랜드에 파견되었던 17세기의 잉글랜드 법학자들에 의해서도 확인되었고 서술되었다. 토지는 우두머리들에 의해 그들의 사유지로 되지 않았을 경우에는 17세기 직전까지도 클랜 또는 씨족의 공유재산이었다. 어떤 씨족의 성원이 사망했을 때,따라서 한 세대가 소멸되 었을 때 우두머리(영국의 법학자들은 caput cognationis라고 불렀다)는 나머지 세대들과 함께 전체 토지를 재분배했다. 재분배는 대체로, 독일에서 실시하고 있던 그런 규칙에 따라 진행된 것 같다. 아직도 농촌의 여기저기에는 소위 ‘런데일 제도’(Rundale)하에 있는 전야(Dorffluren)를 보게 되는데,40〜50년 전에는 이러한 전야가 대단히 많았다. 농민들,즉 이전에는 씨족에 속하고 있었으나 후에 잉글랜드 정복자들에 의해 강점된 토지의 개인 소작인들은 자기들이 얻어 부치게 된 토지에 대해 소작료를 지불했다. 그러나 농민들은 모든 뙈기의 경지와 목초지를 통틀어서 그것을 위치와 지질에 따라—모젤강 연안에서 불리우는 대로 하면— ‘게봔’(Gewanne)으로 나누어가지고, 각자는 각 게봔에서 자기의 몫을 받았다. 소택과 방목지는 공동으로 이용된다. 50년 전만 해도 아직 어떤 경우에는 매년 재분할이 실시되었다. 런데일 제도 하에 있는 이러한 촌락의 지적도(地籍圖)는 모젤강 연안이나 호흐발트(Hochwald)의 어딴 독일인 농가공동체(Gehöferschaft)의 지적도와 완전히 동일하다. 씨족은 ‘동아리’(factions)의 형태로도 존속하고 있다. 아일랜드 농민들은 종종 파벌(Parteien)로 갈라져 있었다. 이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불합리하거나 무의미한 차이에 근거한 것 같으며,잉글랜드인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서,명절 때 즐겨 거행하는 그들 간의 편싸움 이외에 다른 목적이 없는 것 같다. 그것은 붕괴된 씨족의 인위적 부활, 멸망한 씨족의 재현으로서 전통적인 씨족적 본능의 강한 생활력을 중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몇 개 지방에서는 씨족 성원들이 아직도 옛날 지역에 한데 모여서 살고 있다. 그리하여 아직 1830년대에도 모나간 군(Grafschaft Monaghan)의 대부분의 주민들 사이에서는 네 개의 성밖에 없었다. 즉 그들은 네 개의 씨족 또는 클랜으로부터 발생한 것이었다.
스코틀랜드에서 씨족제도의 멸망은 1745년 폭동의 진압과 때를 같이 했다. 스코틀랜드의 클랜이 씨족제도의 바로 어느 고리를 이루고 있는가는 연구할 여지가 아직도 남아 있으나,그것이 씨족제도의 한 고리라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월터 스코트의 소설에서는 스코틀랜드 산악지대의 클랜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모오간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클랜은……그 조직과 정신으로 보아 씨족의 훌륭한 전형이며,씨족 성원들에 대한 씨족생활의 지배의 뚜렷한 실례이다…… 그들의 분쟁과 피비린내 나는 복수,클랜에 따른 영토의 분배,그들에 의한 토지의 공동이용, 클랜 성원들의 족장에 대한 신뢰와 그들 상호 간의 신뢰 등 그 어디에서나 우리는 씨족 사회의 확고한 특징을 찾아보게 된다…… 혈통을 따지는 방식은 부권제적이었으므로 남자의 자녀들은 클랜에 남아있었지만,여자의 자녀들은 그 아버지 편의 클랜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이전에 스코틀랜드에서 모권이 지배하였다는 것은—비드(Beda)에 따르면 一픽트인(Picts)의 왕가에서는 모계에 의한 상속이 있었다는 사실에 따라 증명된다. 웨일즈인들과 스코트인들 사이에서는 푸날루아 가족의 유제가 초야권의 형태를 띠면서 중세기에 이르기까지 보존되고 있었다. 이 초야권은 그것이 돈으로 해결되지 않는 한,종족 우두머리나 왕이 이전의 공동 남편들의 최후의 대표자로서 이 권리를 모든 신부들에 대해 행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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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이동 직전까지 게르만인이 씨족으로 조직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들은 기원 수 세기 전에야 비로소 도나우강,라인강, 비스툴라강(Weidsel)과 북해 사이의 지역을 점령하고 있었던 것 같다. 킴브리인(Cimbern)과 튜톤인(Teutonen)은 당시 아직 이동 과정에 있었으며,수에브인(Sueven)은 케사르가 확언한 바에 따르면, 그들은 씨족과 친족집단별로(gentibus cognationibusque) 분포되어 정착했다. 그리고 율리우스 씨족(gens Julia) 출신의 로마인의 언어생활에서는 이 gentibus(즉,씨족별로)라는 말이 조금도 의심할 여지없는 .명확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어느 게르만인의 경우에나 마찬가지여서, 정복한 로마령의 여러 주에서조차 그들은 아직 씨족별로 정착하고 있었던 것 같다. 『알레만 법전』(alamannischen Volksrecht)은 이 인민이 도나우강 이남의 정복지에 씨족(genealogia)별로 분포되어 정착했다는 것을 확증해주고 있다. 이 genealogia는 여기서는 후세의 마르크공동체, 또는 촌락공동체와 매우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코발레프스키의 최근의 견해에 따르면 이들 genealogia라는 것은 대규모의 세대공동체로서 그것들 사이에는 토지가 배정되어 있었으며, 촌락공동체는 나중에 이 세대공동체들로부터 발전해 나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파라(fara)에 대해서도 역시 그렇게 말할 수 있다. 부르군드인과 롬바르드인의 경우,즉 고트족과 헤르미노니아족(Herminonischen), 혹은 고지 독일 종족의 경우에도 이 파라라는 용어는 『알레만 법전』의 genealogia라는 말과 아주 꼭 같지는 않다 하더라도 거의 같은 의미를 나타낸다. 그것이 실제로 씨족인가 또는 세대공동체인가 하는 것은 앞으로 더 연구해야 할 과제이다.
어느 게르만인에게나 공통으로 쓰이는 씨족에 대한 용어가 있었는가,있었다면 바로 어떠한 것이 있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언어에 관한 자료는 대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 어원적으로는 고트어의 kuni,중부 고지 독일어의 künne는 그리스어의 genos, 라틴어의 gens에 상응하며, 또 그것들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된다. 여성을 가리키는 단어가 같은 어근에서 나왔다는 것, 즉 그리스어의 gyne,슬라브어의 zena, 고트어의 qvino, 고대 스칸디나비아어의 kona와 kuna는 모권시대의 존재를 보여 주는 것이다. 롬바르드인과 부르군드인들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fara라는 말을 쓰고 있는데, 그림 (Grimm)은 이 말을 fisan—낳다(zeugen)—이라는 모호한 어근에서 끌어내고 있다. 나는 차라리 그 어근은 faran, fahren이라는 데서 찾는 것이 더 확실하다고 생각한다. 여행하다, 떠돌아다니다, 돌아오다의 뜻을 가진 faran이라는 이 말은, 자명한 일이지만 친족들로만 구성된 어떤 유목집단의 한 무리를 가리키는 것이었으며, 처음에는 동쪽으로 다음에는 서쪽으로 방랑하는 여러 세기 동안에 점차 씨족공동체 자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고트어의 sibja, 앵글로-색슨어의 sib, 고대 고지 독일어의 sippia와 sippa는 혈족(Sippe)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고대 스칸디나비아에서는 복수의 sifjar—혈족—가 있을 뿐이고, 단수는 여신의 이름 시프(Sif)로서만 존재한다. 끝으로 『힐데브란트의 노래』(Hildebrandslied)에서는 힐데브란트가 하두브란트(Hadubrand)에게 질문한 바로 그 구절에서 또 다른 표현을 찾아보게 된다.

남자들 가운데 너의 아버지는 누구인가?…… 또 너는 어떠한 씨족의 사람인가? (eddo huelihhes cnuosles du sis)

그리하여 일반적으로 말해서 씨족에 대한 게르만인 공통의 용어가 있었다면, 그것은 명백히 고트어의 kuni였을 것이다. 이 사실은 여러 동족어들에서 이에 해당하는 용어와의 일치로써뿐만 아니라,이 용어로부터 kuning—원래는 씨족 또는 종족의 우두머리를 의미하는 왕—이라는 말이 나왔다는 것으로도 확증된다. sibja, 즉 친척은 문제도 안될 것 같다. 적어도 sifjar는 고대 북유럽어에서는 혈족뿐만 아니라 인척도 의미한다. 즉 적어도 두 씨족의 성원을 포함한다. 이처럼 sif라는 말 자체는 씨족이라는 의미를 표시할 수가 없었다.
멕시코인과 그리스인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게르만인의 경우에도 기병대( Reiterschwadron)와 쐐기형 보병(Keilkolonne des Fußvolks)은 씨족집단(Gentilkörperschaften)별로 전투 대열을 편성했다. 타키투스는 가족 및 친족집단별로 전투 대열이 편성되었다고 말하지만,이것은 애매한 표현으로서 그가 살던 시대의 로마에서는 씨족이 이마 오래전에 소멸된 집단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타키투스의 다음의 한 구절은 결정적인 의미를 가진다. 즉 어머니의 형제는 자기의 조카를 아들과 같이 생각하고 있다. 심지어 어떤 자들은 어머니 편 아저씨와 조카를 연결시키는 혈연적 유대가 부자 간의 유대보다 더 신성하고 긴밀하다고까지 간주하기 때문에,인질이 요구될 때에는 구속하려는 그 사람의 아들보다도 그 자매의 아들이 한층 더 큰 담보로 인정된다. 우리는 여기서 모권제에 따라 조직된,따라서 원시적인 씨족의 산 유물,그것도 게르만인을 특징짓는 것으로서의 유물을 본다. 만일 이러한 씨족 성원이 자기와 아들을 어떤 엄숙한 의무담보로서 제공했다가 아버지의 약속 위반으로 그 아들이 희생되었을 때,문제는 다만 그 아버지 한 사람의 일로 그쳤다. 그러나 만일 희생된 것이 자매의 아들이었을 때는 씨족의 가장 신성한 권리가 침해된 것으로 여겼다. 다른 누구보다도 그의 가장 가까운 친족이 그 소년이나 청년을 보호할 의무가 있었던 만큼,그들이 그의 죽음에 대해 책임을 져야만 했다. 이 친족은 그를 인질로 삼지 말았거나 또는 약속을 이행했어야 했다. 가령 게르만인들의 씨족제도에서 그 밖에 다른 아무런 흔적도 찾아내지 못했다 할지라도 이 귀절 하나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신들의 황혼과 세계의 멸망을 노래한 고대 북유럽의 노래 『여자 예언자의 예언』(Völuspa) 중의 한 귀절은 그보다 약 800년이나 이후의 것이므로 한층 더 결정적이다. 이 『여자 예언자의 예언』에는 오늘날 방(K .D . Bang) 및 부게(S. Bugge)가 증명한 바와 같이,기독교의 요소도 들어 있었는데,대파국 직전의 전반적 타락과 퇴폐의 시기를 서술하는 장면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Broedhr munu bevjask ok at bönum verdask,
munu systrungar sifjum spilla.
형제들은 서로 반목하여 서로 살해하게 될 것이며,자매의 자녀들은 혈족의 유대를 끊을 것이다.

systrungar는 어머니 자매의 아들을 의미하는데,이 자매의 자녀들이 서로 혈족관계를 파기하는 것이 이 시인에게는 형제 살해보다도 더 큰 범죄로 보였다. 이 범죄를 엄중하게 보고 있다는 것은 어머니 편 친족관계를 강조하는 systrungar라는 말에 표현되어 있다. 만일 이 말 대신에 syskina-börn—형제자매들의 자녀들—이나 또는 syskina- synir—형제 자매들의 아들들—이라는 말을 썼다면,제2행은 제1행에 비해 강화되는 것이 아니라 약화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여자 예언자의 예언』이 창작된 해적시대(바이킹 시대)에 있어서조차 스칸디나비아에서는 아직 모권에 관한 기억이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어쨌든 타키투스 시대에는 적어도 그가 조금 알고 있는 게르만인들 사이에서는 모권이 이미 부권에 자리를 내주고 있었다. 여자들은 아버지를 상속했다. 자녀가 없는 경우에는 형제들과 아버지 편 및 어머니 편 아저씨들이 상속했다. 어머니의 형제가 상속에 참가할 수 있게 한 것은 방금 말한 관습의 존속과 관련되며, 동시에 당시 게르만인들 사이에서는 부권제가 아직 새로운 것이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모권의 흔적은 중세기에도 오직 오랫동안 발굴되었다. 아직 그 당시에도,특히 농노들 사이에서는 아버지의 혈통은 그리 신용이 탐탁치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영주가 도망친 농노의 반환을 어떤 도시에 요구할 때, 예컨대 아우구스부르그,바젤 및 카이저스라우테른 등지에서는 피고가 농노의 신분이라는 것이 6명이나 되는 가까운 혈족들, 그것도 전적으로 어머니 편 혈족들의 서약 하에서 확인되어야만 했다(Maurer,『도시제도』 I, S. 381).
이제는 사라져간 모권의 유물로서 또 하나 들 수 있는 것은 로마인들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여성에 대한 게르만인들의 존경이다. 귀족 가족 출신의 처녀는 게르만인들과 어떤 계약을 체결하는데 가장 확실한 인질로 인정되고 있었다. 그들의 아내나 딸이 포로나 노예로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그들로서는 끔찍한 일이었으며, 따라서 이것은 전투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그들의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그들은 여성을 어떤 신성한 것으로 또 예언자로 보았다. 그들은 가장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까지도 여성의 조언을 중요시했다. 예컨대 리페강변(Lippe)의 브룩테르인의 무녀인 벨레다(Veleda)는 바타비아인들(Bataver)의 전체 봉기의 정신적 추동력이었다. 이 봉기 때 시빌리스(Civilis)는 게르만인 및 벨기에인(Belgiern)의 선두에 서서 갈리아에서의 로마의 지배권을 흔들어 놓았던 것이다. 가정 내에서 아내의 지배는 다룰 여지조차 없는 것 같다. 하긴 집안 살림살이의 일체 노동이 아내와 노인과 또 아이들에게 부담되어 있으며, 남편은 사냥을 하거나 술을 마시거나 그렇지 않으면 건달로 세월을 보냈다고 타키투스는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누가 밭을 가는가를 말하지 않고 있으며,또 노예들은 세금만을 바치고 아무런 부역도 하지 않았다고 단언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성년 남자 대중이 경작에 필요한 약간의 노동을 감당해야 했을 것은 확실하다.
혼인형태는 상술한 바와 같이 점점 일부일처제로 접근해가는 대우혼이었다. 귀족들의 일부다처제가 허용되고 있었던 점으로 보아 그것은 아직 엄격한 일부일처제는 아니었다. 처녀들의 정조는 대체로 엄격히 지켜졌다(켈트인들과는 반대로). 타키투스도 역시 게르만인들 사이에서는 부부관계가 견고하다는 것을 특히 강조하고 있다. 이혼의 사유로서 그는 아내의 간통만을 들고 있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는 이 문제에서 많은 공백을 남기고 있으며,게다가 방탕한 로마인들에게 너무나 노골적으로 미덕의 모범을 보여주려고 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한 가지 사실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즉 게르만인들이 자기들이 삼림 속에서는 그렇듯 놀라운 덕행의 기사였지만, 조금이라도 외부와 접촉하기만 하면 그들은 어김없이 보통 유럽인들의 수준으로 굴러떨어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도덕적 엄격성의 최후의 흔적은 로마인의 세계의 한가운데서 게르만어보다도 훨씬 더 빨리 사라져 버렸다. 이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그레고리우스(Gregor von Tour)의 책만이라도 읽어보라. 독일의 원시림 속에서는 로마에서처럼 극도로 방자한 색정적 향락을 누릴 수 없었음은 물론이다. 그리하여 이 점에서도 게르만인들은 로마인의 세계에 비해 상당한 우월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어디서도, 어떤 민족 전체에서도 결코 없었던 그런 육욕의 절제가 그들에게 있었다고 억지로 꾸며대려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나 친족들의 우정관계뿐만 아니라,원수관계까지도 상속할 의무는 씨족제도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살인이나 침해에 대한 피의 복수 대신에 지불하는 살인배상금제(Wergeld)라든가 벌금제(Buße)도 역시 상속되었다. 아직 한 세대 전만 해도 게르만인들에게 특유한 제도로 인정되고 있던 이 살인배상금제가 이제는 씨족제도에 유래하는 피의 복수를 완화한 일반적인 형태라는 것이 수백 인민들에게서 확인되었다. 우리들은 그것을 손님 접대 의무와 마찬가지로,특히 아메리카 인디안들에게서도 찾아보게 된다. 손님 접대의 풍습에 관해 타키투스가 서술한 것(Germania, c. 21)은 인다안들의 손님 접대에 관한 모오간의 이야기와 상세한 점에 이르기까지 거의 일치한다.
타키투스 시대의 게르만인들이 이미 자기들의 경지를 최종적으로 분배하고 있었는가, 그렇지 않았는가, 또 이에 관한 구절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관한 끝없는 논쟁은 이제 과거와 일로 되었다. 케사르가 수에브인들에게 아직도 있었다고 증명하고 있는 씨족에 의한, 그리고 후에는 공산주의적 가족공동체에 의한 경지의 공동경작과, 그에 뒤이어 진행된 개별적 가족들에 대한 토지의 분배와 정기적 재분배는 거의 모든 인민들에게서 증명되고 있다. 또 지금에 와서는 경작지의 이러한 정기적 재분배가 독일 자체 내에서, 여기저기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으므로 그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조차 없다. 만일 게르만인들이 수에브인들에 대해 케사르가 단정한 그런 토지의 공동경작(그들에게는 분할지도 사유지도 전혀 없었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으로부터 타키투스에 이르기까지의 150년 동안에 토지를 매년 재분배하면서 개별적 세대에 꾀한 경작으로 이행했다면,이것은 사실상 눈부신 진보이다. 이러한 짧은 기간 내에 그것도 외부의 간섭이 전혀 없이 토지의 공동경작으로부터 토지에 대한 완전한 사적소유로 이행한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나는 타키투스의 다음과 같은 간단한 대목, 즉 그들이 경작지는 매년 변경(즉 재분배)하면서도 공유지는 아주 풍부히 남긴다고 하는 점만을 승인한다. 이것이 그 당시의 씨족제도에 정확히 부합되는 게르만인들의 농업 및 토지이용의 단계이다.
나는 위의 단락을 수정하지 않고 기존판에 있는 그대로 적어 둔다. 그 사이에 문제는 달리 전환되었다. 코발레프스키가 모권적인 공산주의적 가족과 현대의 고립적인 가족 사이의 중간 단계로서 가부장적 세대공동체가 보편적으로는 아니지만 광범히 보급되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 이상(이 책의 p.78을 비교해 보라),문제는 벌써 마우러와 바이츠(Waitz) 간의 논쟁점이었던 토지의 공유(Gemeineigentum)냐, 사유(Privateigentum)냐 하는 것아 아니라,공유의 형태 여하인 것이다. 케사르 시대에 수에브인들에게서는 공유뿐만 아니라 공동의 노력에 의한 공동경작도 역시 있었다는 것은 전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경리의 단위가 씨족이었는가, 또는 세대공동체였는가,또는 양자 사이의 어떤 중간적인 공산주의적 친족집단이었는가,또는 토지의 조건에 따라서 이 세 가지 집단이 다 있었는가에 관해서는 아직 오랫동안 논쟁할 여지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코발레프스키가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타키투스가 서술한 그런 상태는 마르크공동체나 촌락공동체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세대공동체를 전제로 하는 것이며,오로지 이 후자로부터 훨씬 후기에 와서 인구가 증가한 결과 촌락공동체가 발달했다는 것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게르만인들이 로마 시대에 점령한 지역이나 그 후 로마인들로부터 탈취한 지역에 정착했을 때에는 촌락을 이룬 것이 아니라,대규모의 가족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 이 공동체는 여러 세대(世代)를 포괄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만큼 넓은 토지를 경작하고 있었으며,주위의 황무지를 공동 마르크로서 이웃들과 함께 이용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경작지 변경에 관한 타키투스의 구절은 사실상 농학상의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즉 공동체는 매년 다른 땅을 경작했으며, 지난 해의 경지는 휴경지로 남겨 두거나 또는 아예 잡초가 무성할 대로 내버려 두었다. 인구가 희박했기 때문에 빈 황무지가 항상 충분히 남아 있었으므로,토지를 둘러싼 분쟁은 도대체 필요치 않았다. 수 세기를 경과한 후 세대공동체의 인원수가 증가하여 당시의 생산조건 아래서는 이미 공동경리(Gemeinsame Wirtschaft)를 할 수 없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세대공동체가 분해되었다. 그때까지는 공동소유로 되어 있었던 경지와 목초지가 당시 발생하고 있었던 개별적 세대들 사이에 최초에는 일시적으로, 후에는 이미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은 방법으로 영구히 분할되기 시작했다. 다른 한편 삼림,목초지, 하천과 호수들은 공동소유로 남아 있었다.
러시아의 경우에는 이러한 발전과정이 역사적으로 완전히 입증된 것으로 보여진다. 독일을 비롯한 기타 게르만 각국의 경우로 말한다면,이 가설이 촌락공동체의 존재를 타키투스 시대까지 더듬어 올라가게 하는 종래의 지배적인 견해보다 많은 점에서 사료를 더 잘 해명해주며, 난점을 더 쉽게 해결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가장 오랜 문헌,예컨대 『라우레스하멘시스 등본』(Codex Laureshamensis)은 일반적으로 말해서 마르크 촌락공동체보다 세대공동체의 도움으로 더 잘 해명될 수 있다. 다른 한편 이 해명은 또 새로운 난점을 불러일으키며 아직 해결이 필요한 새로운 문제를 제기한다. 이 점에서는 새로운 연구만이 최종적인 해결을 가져 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간단계로서의 세대공동체가 독일,스칸디나비아 및 영국에도 역시 많이 있음직하다는 것을 나는 부인할 수 없다.
케사르 시대에는 게르만인들이 한편으로는 이제 겨우 정착했을 뿐이고, 또 한편으로는 정착지를 찾고 있었지만,타키투스 시대에 와서는 그들은 이미 한 세기 동안이나 정착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에 상응하여 생활수단의 생산이 진전된 것도 의심할 바 없다. 그들은 귀틀집에 살았다. 그들은 아직도 삼림 원시인의 의복을 입고 있었다. 즉 조잡한 털외투,짐승가죽 옷을 입고 있었다. 여성들과 귀인들은 아마로 만든 속옷을 입었다. 그들의 음식물은 우유, 짐승고기,야생과실 그리고 폴리니우스가 덧붙인 바와 같이 귀리죽(지금도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는 켈트인의 민족적 음식으로 되어 있다)이었다. 그들의 재화는 가축이었으나 그것은 열등종이었다. 즉 소들은 키가 작고 볼품이 없고 뿔이 없다. 말은 작고 잘 달리지도 못했다. 화폐의 사용은 드물었고 그 수량도 적었다. 그것도 로마에서 사용하는 것뿐이었다. 그들은 금은 제품을 만들지 않았으며 또 소중히 여기지도 않았다. 철은 귀했고 적어도 라인강과 도나우강 연안의 종족들은 대부분 수입에 의존했으며, 독자적으로 채굴하지는 않은 것 같다. 룬 문자(Runenschrift, 그리스 또는 라틴문자를 모방한 것)는 암호로서만 알려져 있었고,또 종교에서 굿을 하는 데나 사용되었다. 아직도 인신공양(人身供養,Menschenopfer)의 습관이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 인민은 겨우 미개의 중간 단계에서 높은 단계에 올라선 것이다. 그러나 로마인들과 직접 인접해 있는 종족들은 로마의 생산물을 수입하기가 쉬웠기 때문에 자립적인 금속제품 생산과 직물생산이 장애를 받았지만,동북부,즉 발틱해 연안에서는 그러한 생산이 발전했을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슐레스비히 늪에서 2세기 말 경의 로마주화와 함께 발견된 무기—철제장검,금속고리로 만든 갑옷,은제투구 등등—와,또한 민족이동으로 널리 파급된 게르만인들의 금속 제품을 보면 로마의 것을 본딴 초기의 것들조차도 발전수준이 상당히 높은 전혀 독특한 생산품이었다. 문명화된 로마 제국에 아주하게 됨으로써 잉글랜드를 제외한 도처에서 게르만 종족들의 그 토착 생산부문은 소멸하게 되었다. 이 토착 생산이 얼마나 똑같이 발생하고 발전했는가는 예컨대 청동제팔목걸이에서 잘 알 수 있다. 부르군디아(Burgund),루마니아,아조브해안(Asowschen Meer) 등지에서 발견된 팔목걸이들은 잉글랜드나 스웨덴에서 발견된 것들과 함께 모두 같은 작업장에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들이었으며,또한 확실히 게르만에 기원을 둔 것들이었다.
통치조직도 역시 미개의 높은 단계에 상응하고 있다. 타키투스에 따르면,도처에 우두머리(principes) 평의회가 있었다. 그것은 비교적 작은 문제에서는 결정을 채택했으나 좀 중요한 문제에서는 인민회의의 결정 채택을 위한 예비심의를 관장했다. 미개 낮은 단계에서의 인민회의는,적어도 우리가 알고 있는 아메리카인들의 경우,씨족에만 있었고 종족이나 종족동맹에는 없었다. 우두머리는 이로쿠오이인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군사령관(duces)과 아직도 엄밀히 구별되었다. 우두머리는 이미 종족 성원들이 존경의 표시로 바치는 가축과 곡물 등등으로 자기 생활의 일부를 꾸려나갔다. 그들은 아메리카에서와 마찬가지로 대개는 동일한 가족으로부터 선출되었다. 부권제로의 이행은 그리스 및 로마에서와 마찬가지로 선출제가 점차 세습제로 이행되도록 촉진시켰으며,따라서 각 씨족 내에서 귀족의 발생을 조장했다. 이러한 고대의 소위 종족적 귀족은 대부분 민족 이동 때와 또는 그 직후에 몰락하고 말았다. 군사령관은 혈통과 상관없이 주로 그 능력에 따라 선출되었다. 그들의 권력은 대단한 것이 아니었으며, 스스로 모범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해야만 했다. 본래 군대 통솔권은 제관들이 가지고 있었다고 타키투스는 단정하고 있다. 실권은 인민회의가 장악하고 있었다. 왕,즉 종족 우두머리는 사회를 보고 결정은 인민이 내렸다. 즉 반대일 때는 투덜거렸고, 찬성일 때는 환호성을 지르며 무기를 두드려 울렸다. 인민회의는 동시에 재판소이기도 했다. 여기에서 소송이 제기되고 판결이 내려지며 사형이 선고된다. 그나마 사형은 비겁,인민에 대한 배반 및 부자연한 음탕에 대해서만 선고되었다. 씨족과 기타의 하부조직에서도 역시 우두머리의 사회 아래서 전원이 재판했는데, 그는 게르만인들의 모든 원시 재판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오로지 심리의 지도자로, 또 심문자로 될 수 있을 따름이었다. 판결을 내리는 것은 게르만인들의 경우에는 언제, 어디서나 전체 집단이었다.
케사르 시대 이래 종족동맹들이 형성되었고, 그 중 일부는 이미 왕을 가지고 있었다. 최고 군사령관은 그리스인이나 로마인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미 전제적 권력의 쟁취를 획책했으며, 때로는 그 목적을 달성했다. 이러한 운 좋은 침탈자들도 결코 무절제한 권력자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이미 씨족제도의 질곡을 타파하기 시작했다. 해방된 노예들은 어떠한 씨족에도 속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예속된 처지에 놓여 있었지만,그들 중에서도 새 왕의 총애를 받게 된 자들은 가끔 높은 직위와 재화와 영예를 획득하기도 했다. 똑같은 경우가 로마 제국 정복 후 큰 나라의 왕이 된 군사령관의 경우에도 있었다. 프랑크인들의 경우에 왕의 노예나 해방된 노예들은 처음에는 궁정에서,그리고 후에는 국가에서 커다란 역할을 했다. 새 귀족들의 대부분은 이들,즉 왕의 노예나 해방된 노예의 출신이었다.
한 제도,즉 친병제(親兵制, die Gefolgschaften)는 왕권의 발생을 촉진시켰다. 우리는 이미 아메리카 인디안들의 실례에서 어떻게 자기 자신의 책임 아래서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사사로이 조직된 집단이 씨족제도와 동시에 형성되었는가를 보았다. 이 사적 집단은 게르만인들의 경우에 이미 상설적인 동맹으로 되어 있었다. 명성을 획득한 군사령관은 자기 주위에 약탈욕에 가득 찬 한 무리의 청년을 긁어모았다. 그들은 군사령관에 대해서 개인적 충성의 의무를 지녔고, 군사령관은 그들을 부양하고 상을 주었으며, 그들 사이에 일정한 위계제도를 설정했다. 소규모의 출정에서는 그들은 친위대로서,또 어느 때나 진격할 준비를 갖춘 부대로서 그에게 복무했으며, 좀 규모가 큰 출정시에는 예비 장교단으로서 복무했다. 이러한 친병제가 미미했을 것이 틀림없었고, 또 후에—이탈리아의 오도아케르(Odovakar)의 경우처럼— 실지로 미미했다 할지라도 그것은 이미 종래의 인민적 자유가 파괴되는 단서였으며, 또 바로 그러한 역할을 민족 이동 시기와 그 후 시기에 보여주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첫째로 그것은 왕권의 출현을 조장했으며, 둘째로 타키투스가 이미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그것은 부단한 전쟁과 약탈적 습격에 의해서만 하나의 조직체로 유지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약탈이 목적으로 되었다. 친병대의 지휘관은 근방에서 할 일이 없을 때에는 전쟁과 전리품 획득의 가망성이 있는 다른 인민들에게로 자기 부대를 거느리고 떠났다. 심지어 로마의 기치 하에 게르만인들과도 싸웠던 그 게르만인 보조군들(Menger)의 상당수가 이러한 친병으로써 구성된 것이었다. 독일인의 수치와 저주거리인 용병 제도의 맹아(Landsknechtswesen)가 이미 여기에 있었다. 로마 제국을 정복한 후에 왕이 거느리는 이 친병들은 로마궁정의 비자유민 신하들과 더불어 후세의 귀족의 두 번째 주요 구성부분을 이루게 되었다.
그리하여 여러 인민으로 결합된 게르만 종족들에게는 대체로 영웅시대의 그리스인들이나,소위 왕정시대의 로마인들에게서 발전한 것과 동일한 통치조직이 있었다. 즉 인민회의, 씨족 우두머리 평의회, 그리고 이제 현실적인 왕권을 탈취하려고 하는 군사령관이 있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말해서 씨족제도 밑에서 이룩될 수 있었던 가장 발전된 통치조직이었다. 그것이 미개의 높은 단계에 와서는 전형적인 것으로 되었다. 이 조직이 자기의 사명을 다하고 있었던 범위를 사회가 벗어나자 씨족제도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그것은 파괴되고 그 대신 국가가 나타났다.


제Ⅷ장 게르만인의 국가 형성


타키투스가 입증한 바에 따르면, 게르만인은 그 수효가 대단히 많았다. 몇몇 게르만인들의 수효에 관해서는 케사르에게서 개략적인 것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라인강 왼쪽 언덕에 있던 우지페테인(Usipeter)과 텐크테리인(Tenkterer)의 수효를 여성들과 아이들을 포함해 18만 명으로 산정하고 있다. 따라서 각 인민은 약 10만명씩 되는 셈인데,이것은 예컨대 전성기의 이로쿠오이인의 총수를 훨씬 능가하는 것이다. 당시 이로쿠오이인들은 그만큼도 못 되면서 대호(大湖)지방으로부터 오하이오와 포토맥강에 이르는 전 지역을 위협하고 있었다. 라인강 부근에 정착한 비교적 잘 알려져 있는 인민들을 지금까지의 보고들에 근거해 지도 위에다 그려 본다면 각 인민이 차지하는 면적은 각각 평균해서 프러시아의 한 행정 구역의 면적과 비슷하다. 즉 약1만 km 또는 182 지리학 평방 마일을 차지한다. 그러나 비스툴라(Vistula)강까지 달하는 로마인의 대게르마니아(Germania Magna)는 약 50만 km에 달한다. 각 인민의 평균 인구가 10만명이라면 대게르마니아 전체의 인구 총수는 500만에 달했을 것이다. 미개시대의 인민집단으로서는 대단한 숫자이지만,1km 당 10명 또는 1지리학 평방 마일당 550명은 우리의 조건과 비교해보면 극히 적은 숫자이다. 당시 거주하고 있던 게르만인의 수효는 결코 이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카르파르 산맥(Karpaten)을 따라서 도나우강 하구에 이르는 지역에는 고트 종족의 게르만 인민들인 바스타르나에인(Bastarner),페우키니인(Peukiner) 등 기타 종족들이 살고 있었는데,그들의 수효가 적지 않았기 때문에 플리니우스는 그들을 게르만인의 제5의 주요 종족으로 간주했다. 또 그들은 이미 기원 전 180년에는 마케도니아 왕 페르세우스 밑에서 용병으로 복무했고, 아우구스투스의 통치초기에는 벌써 아드리아노플 지방까지 진격한 적이 있었다. 여기서 그들의 수효를 불과100만으로 산정한다 하더라도,기원 초기의 게르만인의 수효는 적어도 600만명쯤은 되었을 것이다.
그들이 게르마니아에 정착한 후 인구 증가는 가속화되었을 것이다. 상술한 바와 같이 생산 발전의 진보만으로도 이것을 능히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쉴레스비히 늪에서 발굴된 유물들을 같이 발굴된 로마주화를 가지고 판단한다면 3세기 것으로 추정된다. 요컨대 그 당시 벌써 발틱해 연안에서는 금속 제품 및 방직 제품 생산이 광범히 발전했고,로마 제국과의 무역이 활발하게 진행되었으며, 또 조금 부유한 자들은 어느 정도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이 모든 것은 인구가 보다 더 조밀했다는 증거이다. 또 대략 같은 시기에 라인강,로마의 국경 장벽 및 도나우강의 전 영역에 걸쳐서,또 북해로부터 흑해에 걸쳐서 게르만인들의 총 진격이 시작되었는데,이것은 자기의 영토를 확장해야 할 만큼 인구가 더욱더 증가했다는 직접적인 증거이다. 이 투쟁은 300년이나 끌었으며,그 사이에 고트인의 주류는(스칸디나비아 고트인 및 부르군드인을 제외하고는) 모두 남동 쪽으로 진출해 대공격 전선의 좌익을 형성했다. 그 중앙에서는 고지 게르만인(헤르미노네스인, Hermionen)이 도나우강 상류를 향해,그리고 우익에서는 지금 프랑크인이라고 부르는 이스케보네스인(IsKäVonen)이 라인강을 향해 각각 돌진했다. 브리티니아는 잉게보네스인(IngäVonen)이 정복하게 되었다. 5세기 말에는 로마 제국이 무력해지고 생기를 잃어 고립무원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게르만인들의 침략을 위한 길이 열려 있었던 것이다.
앞의 장에서 고대 그리스 문명과 로마 문명의 요람기를 보았다면 이제는 그 무덤을 보게 된다. 로마의 세계 지배라는 대패가 여러 세기에 걸쳐 지중해 연안 각국을 반반하게 밀어 왔다. 퇴폐한 라틴어는 그리스어의 저항이 없는 곳에서 온갖 민족어를 굴복시켜 버렸다. 민족들 간의 차이는 모두 소멸했다. 이미 갈리아인도,이베리아인도,리구리아인(Ligurer)도, 노리큼인(Noriker)도 없어졌다. 그들은 모두 로마인으로 되어 버렸다. 로마의 행정과 로마의 법률은 도처에서 고대의 씨족적 결합을 파괴했고,그와 함께 지역적 및 민족적 자립성의 마지막 잔재까지도 파괴했다. 풋나기의 로마 문화는 그 대신에 아무 것도 주지 않았다. 그것은 결코 민족성의 표현이 아니라 그 결여의 표현일 뿐이었다. 그러나 새 민족성의 요소는 도처에 있었다. 주(州)들의 라틴방언은 갈수록 거리가 멀어져 갔다. 한때 이탈리아, 갈리아,스페인,아프리카를 자립적 지역으로 만들고 있던 자연적 경계가 존재했으며, 또한 뚜렷했다. 그러나 이러한 요소들을 새 민족으로 규합할 만한 힘은 아무 데도 없었다. 창조적 에너지는 물론 발전력과 저항력의 흔적조차 없었다. 광대한 지역의 방대한 인간 대중을 규합하고 있는 유일한 유대는 로마 국가였다. 그러나 이 국가는 날이 갈수록 인간대중의 최악의 적,즉 압박자로 되었다. 주들은 로마를 멸망시켰다. 로마 자체는 다른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주의 한 도시가 되었다. 특권은 있었지만 이미 지배적인 것도 아니고 세계 제국의 중심도 아니며 이제는 황제와 총독들의 거처지도 아니었다. 이들은 이제 콘스탄티노플,트리에르,밀라노에 살고 있었다. 로마 국가는 오로지 백성의 고혈을 짜내는 거대한 기계로 되었다. 조세,국가 부역 및 각종 가렴주구로 인해 주민 대중은 점점 더 깊은 빈궁에 빠지게 되었다. 총독,세리,병사들의 강탈은 이 압박을 가중시켰으며 견딜 수 없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것이 로마 국가와 그 세계 지배가 가져온 결과이다. 로마국가의 존립권은 대내적으로 질서의 유지에 입각하고 있었으며,대외적으로는 미개인에 대한 방위에 입각하고 있었으나,그 질서는 최악의 무질서보다 더 열악했다. 로마 국가는 미개인을 물리치고 공민을 보호하겠다고 나섰지만,바로 그 미개인이야말로 공민이 갈망하는 구원자가 되었다.
사회적 상황들도 이에 못지않게 절망적이었다. 이미 공화국 말기부터 로마의 지배는 정복한 주들에 대한 무자비한 착취에 입각해 있었다. 제국은 이 착취를 없애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제도화했다. 제국이 쇠퇴해 갈수록 조세와 부역은 더욱 늘어 갔으며,관리들의 약탈과 착취는 더욱 가중되었다. 각국 인민의 지배자로서 로마인들은 상공업에는 결코 종사하지 않았다. 하지만 고리대금업(Zinswucher)에서만은 전무후무하리만큼 누구보다도 뛰어났었다. 이전에는 상업 때문에나마 존재했고 또 유지되었던 것이 관리들의 강탈로 말미암아 소멸했다. 겨우 그것을 모면한 곳은 제국의 동방,즉 그리스 지방인데, 이곳은 우리의 고찰 범위에 속하지 않는다. 전반적 궁핍화,무역,수공업 및 예술에서의 쇠퇴,인구의 감소,도시의 황폐화, 보다 낮은 수준으로의 농업의 전락—이러한 것들이 로마에 의한 세계 지배의 최후 결과였다.
전체 고대세계에 있어서 결정적인 생산 부문이었던 농업이 이제 또 다시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성을 띠게 되었다. 이탈리아에서는 공화국 몰락 후 거의 전체 지역에 퍼졌던 대규모의 통합된 소유지(라티푼디아,Latifundien)가 두 가지로 이용되고 있었다. 그 하나는 목장으로 이용되었다. 여기서는 양과 소가 주민의 자리에 대신 들어앉았으며,그 관리에 요구되는 것은 불과 몇 안되는 노예뿐이었다. 다른 하나는 장원(Villa)으로서 이용되었다. 여기서는 수많은 노예를 이용한 대규모 채마밭 경작이 이루어졌다. 그것의 일부는 사치스러운 생활을 누리는 소유주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였으며, 일부는 도시 시장에서 판매하기 위해서였다. 대규모의 목장이 유지되었고 또 확대되기까지 했다. 따라서 장원과 그 채마밭 경작은 그 소유자들의 영락과 도시의 황폐화와 더불어 쇠퇴해 갔다. 노예 노동에 입각한 라티푼디아 체계는 더 이상 수익을 가져오지 못했다. 그러나 당시 그것은 유일하게 가능한 대규모 농업형태였다. 소규모 경작이 다시금 수익성 있는 유일한 형태로 되었다. 장원은 잇달아 소규모와 분할지로 세분되어 일정한 액을 지불하는 세습 소작인(bestimmte Summe) 또는 분익 소작인(Partiarii)에게 대여되었다. 분익 소작인은 소작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관리인(Verwalter)이었으며, 그는 자기의 노동에 대해 연간 생산물의 6분의 1,때로는 겨우 9분의 1밖에 받지 못했다. 이 소분할지는 주로 콜로누스들(Colonen)에게 대여되었다. 이들은 매년 일정한 액을 지불했으며,토지에 얽매여 그 분할지와 함께 판매될 수 있었다. 그들은 노예가 아니었으나 자유민으로도 인정받지 못했고 자유민과 결혼할 수도 없었으며, 또 자기들 간의 결혼도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되지 않고 노예의 결혼과 마찬가지로 단순한 동서(同棲)관계 (Beischläfere ; Contubernium)로 간주되었다. 그들은 중세기 농노의 선구자였다.
고대 노예제는 그 수명을 다했다. 대규모 농업에서나 도시의 메뉴팩츄어에서나 그것은 이미 지출된 노동을 보상할 만한 수익을 주지 못했다—그 생산물을 위한 시장은 더 이상 거기에 있지 않았다. 그러나 제국 전성기의 거대한 생산이 축소되어 나타난 소규모 농업과 소규모 수공업이 시들해졌기 때문에 대량의 노예를 사용할 여지가 없었다. 사회적으로는 부자들의 가정 살림과 사치한 생활을 위한 노예들만이 아직 남아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노예제는 사멸의 길로 치닫고 있었지만, 노예가 할 일로서의 모든 생산적 노동은 로마의 자유민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지금은 모든 사람이 이러한 자유로운 로마인들이었다. 그리하여 한편으로는 남아돌아서 이제 귀찮은 짐으로 되어버린 해방노예들의 수효가 증대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콜로누스와 영락한 자유민들(아메리카의 이전 노예 소유주들의 가난한 백인을 연상시키는)의 수효가 증대되었다. 기독교는 고대노예제의 점차적 사멸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 기독교는 수세기 동안이나 로마 제국에서 노예제의 지지자였다. 또 그 후에도 기독교는 북부 게르만이나 지중해의 베니스인 등 기독교도들의 노예 매매도, 그보다 후기의 니그로 매매도 결코 방해하지 않았다. 노예제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으며,그렇기 때문에 사멸했다. 그러나 사멸하는 노예제는 생산적 노동에 대한 자유민의 경멸이라는 독침(毒針)을 남겨놓았다. 이것은 로마세계로서는 헤어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이었다. 왜냐하면 노예노동은 경제적으로 불가능하게 되었고, 자유민의 노동은 도덕적으로 천시되었기 때문이다. 노예노동은 이미 사회적 생산의 기본형태로 될 수 없었고, 자유민의 노동은 아직 그러한 것으로 될 수가 없었다. 다만 근본적인 혁명만이 이러한 처지를 벗어날 수 있게 했다.
주들에서도 형편은 그리 나아지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갈리아에 관한 자료가 제일 많다. 여기에는 아작도 콜로누스들과 함께 자유로운 소농들이 있었다. 관리,재판관 및 고리대금업자들의 폭압을 모면하기 위해 그들은 종종 어떤 유력한 자와 파트로나트(Patronat,보호)에 의거했다. 비단 개별적 농민들만이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전체 공동체가 그렇겐 했기 때문에, 4세기에는 황제들이 이것을 금지하는 법령을 여러 번 선포했던 것이다. 그러나 보호를 요구하는 자들에게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보호자는 그들이 토지 소유권을 자기에게 양도하면 그 대신 토지를 일생 동안 이용할 수 있도록 보장해 준다는 조건을 그들에게 제시했다. 신성한 교회는 이 관계를 이용하여 9세기와 10세기에 신의 왕국과 자신의 토지재산을 확장하기에 열중했다. 하긴 마르세이유의 승정 살비아누스(Salvianus)는 아직 475년 경에는 그래도 이러한 약탈에 격분을 표시하면서, 로마 관리들과 대토지 소유자들의 압박이 참으로 견딜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많은 ‘로마인들’이 이미 미개인들이 점령한 지방으로 도주했고, 그 곳에 정착하게 된 로마 시민들은 다시 로마 통치 하에 떨어질 것을 무엇보다도 두려워한다고 말했다. 당시 부모들이 가난에 못 이겨 자녀를 종종 노예로 팔고 있었다는 것은 이것을 금하기 위해 법률이 선포되었다는 것으로써 증명된다.
게르만의 미개인은 로마인들을 그들 자신의 국가로부터 해방시켜준 대가로 전 국토의 3분의 2를 빼앗아 그것을 자기들끼리 분배했다. 분할은 씨족제도에 따라 실시되었다. 정복자들의 수효가 비교적 많지 않았기 때문에 광대한 토지가 분할되지 않은 채로 남아 일부는 전체 인민의 소유로,일부는 개별적 종족이나 씨족의 소유로 되었다. 각 씨족 내에서는 경지와 목초지가 개별적 세대들 사이에 추첨을 통해 균등하게 분배되었다. 그 후에도 재분할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하여튼 재분할은 로마의 주들에서 곧 폐지되었고, 할당받은 각 토지는 양도할 수 있는 사유재산—알로드(Allod)—으로 되고 말았다. 삼림과 목장은 분할되지 않고 종전대로 공동으로 이용하게 되었다. 그 이용과 또한 분할된 경지의 경작방법은 종래의 관습과 전체 공동체의 결정에 의해 규정되었다. 씨족이 자기 촌락에서 오랫동안 거주하고 게르만인과 로마인의 융합이 점점 더 강화될수록,유대의 혈연적 성격은 희박해지고 지역적 성격이 더욱더 강화되었다. 씨족은 마르크공동체에 용해되었다. 그러나 마르크공동체에서는 아직도 공동체 성원들의 친족적 관계의 흔적을 상당한 정도로 찾아볼 수 있다. 이렇게 하여 혈연적 조직은 적어도 마르크공동체가 유지되고 있던 프랑스 북부,잉글랜드,게르마니아 및 스칸디나비아 같은 데서는 어느 새 지역적 조직으로 이행했으며,이에 따라서 국가에 적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지역적 조직은 씨족제도의 특징인 원시적 민주주의 성격을 여전히 보존하고 있었으며,또 후기에 와서 불가피하게 닥쳐 온 쇠퇴 속에서조차 그것은 최근에 이르기까지 씨족제도의 생생한 요소를 보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피압박자들의 수중에 무기를 남겨준 셈이었다.
이와 같이 씨족의 혈연적 유대는 얼마 후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는데,그것은 정복의 결과 종족 내에서도 또 인민 내에서도 그 기관이 역시 쇠퇴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피정복자에 대한 지배는 씨족제도와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그러한 사실의 대규모적인 실례를 보게 된다. 로마주들의 지배자가 된 게르만인은 자기들이 정복한 이 지역을 조직적으로 통치해야만 했다. 그러나 씨족적 조직으로서는 로마인 대중을 흡수해 낼 수 없었으며,또 그들을 지배할 수도 없었다. 초기에는 대부분이 그대로 존속하고 있었던 로마 지방 행정기관의 꼭대기에 로마 국가를 대신할 것이 있어야만 했다. 그런데 그것은 다른 국가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씨족제도의 기관은 국가기관으로 전환되지 않을 수 없었으며,그것도 사정이 절박했기 때문에 매우 신속히 전환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정복 인민의 최고 대표자는 군사령관이었다. 피정복 지역의 대내적 및 대외적 방위는 그의 권력의 강화를 요구했다. 군사령관의 권력이 왕권으로 되어야 할 시기가 다가왔다. 사실 그렇게 되었다.
프랑크 왕국을 예로 들어 보자. 프랑크 왕국에서는 승리한 살리아인(Salier)이 비단 강대한 로마 국가의 직할지뿐만 아니라,아직 크고 작은 각 관구(Gau)나 마르크공동체들에 분할되지 않은 모든 광활한 지대,특히 비교적 광활한 모든 삼림지대를 독차지했다. 평범한 최고군사령관으로부터 진짜 군주가 된 프랑크 왕의 첫 사업은 이 인민의 재산을 왕의 재산으로 만드는 것이었으며,그것을 인민에게서 빼앗아 자기의 신하들에게 증여 또는 대여하는 것이었다. 초기에는 자기의 개인적 전시 수행원들과 기타 하급 지휘관들로 구성되었던 이 신하들은 얼마 안가서 로마인들,즉 로마화한 갈리아인들—이들은 자신의 문필능력,교양,로마의 구어와 라틴 문어 그리고 주법(州法)에 대한 자신의 지식 때문에 곧 왕에게 없어서는 안될 존재로 되었다一 뿐만 아니라,노예,농노 및 해방된 자들로도 증강되었다. 후자들은 왕실의 신하를 이루었고, 왕은 그들 가운데에서 자기의 총신(龍臣,Güstlinge)을 선출했다. 신하들은 모두가 처음에는 대개 민유지(民有地,Volkslandes)를 증여받았으며,후에는 은혜(Benefizien, beneficium)의 형태로— 처음에는 대개 왕이 살아 있는 동안— 대여받았다. 이리하여 인민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귀족의 토대가 이루어졌다.
이뿐이 아니다. 국가의 규모가 확대되었기 때문에 낡은 씨족제도를 가지고서는 통치할 수가 없게 되었다. 우두머리 평의회는 비록 그것이 여명을 유지해 왔다 할지라도 소집은 되지 못하고 얼마 안가서 왕의 측근들로 교체되었다. 지난날의 인민회의는 외관상으로 존속했으나,역시 그것도 점차 하급 지휘관들(Unterführer des Meers)과 신흥 귀족들만의 집회로 변질되었다. 프랑크인들의 대중인,토지를 소유한 농민은 부단한 내란과 정복전쟁으로 말미암아,특히 칼 대제 시기의 정복전쟁으로 말미암아 한때 공화제 말기의 로마 농민이 그러했던 것처럼 피폐 영락했다. 초기에는 전체 군대를 충당했고 프랑크 왕국의 정복 후에는 군대의 기본핵심이었던 이 농민들은, 9세기 초에는 다섯 명 중 거의 한 사람도 군대에 나갈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하게 되었다. 왕이 직접 자유농민을 징집해 조직한 무장 군대는 신흥 귀족의 가신들(Dienstleuten)과 예농들(hörige Bauern)로써 조직된 군대에 의해 교체되었다. 예농들은 전에는 왕 이외의 주인을 몰랐고,그보다 더 이전에는 왕을 포함해 도대체 주인이라는 것을 모르던 사람들의 후손이다. 칼 대제의 후계자들의 통치시기에 프랑크 왕국 농민층의 영락은 국내 전쟁,왕권의 쇠약과 이에 따른 대귀족들—이들과 함께 왕에 의해 각 관구의 장관(백작,Gaugrafen)으로 임명되었고 자기의 직위를 세습화하려고 한 자들—의 발호,끝으로 노르만인들의 침입 등으로 말미암아 절정에 달했다. 칼 대제 사후 50년이 지나서 프랑크 왕국은 로마 제국이 400년 전에 프랑크인들에게 유린당한 것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저항없이 노르만인들에게 유린당했다.
그리고 프랑크 왕국은 외적에 대한 무능력에서뿐만 아니라 내부적인 사회질서, 아니 사회적 무질서에서조차도 로마 국가들과 거의 동일했다. 프랑크 왕국의 자유농민들은 그 선행자인 로마의 콜로누스들과 같은 처지에 있었다. 전쟁과 약탈로 영락해버린 그들은 왕권이 그들을 보호하기에는 너무나 미약했던 조건 하에서 신흥 귀족이나 교회의 보호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런 보호를 받으려면 그들은 비싼 대가를 지불해야만 했다. 일찍이 갈리아 농민들처럼 그들도 보호자에게 자기 토지의 소유권을 양도하고 잡다한 형태로,그러나 언제나 각종 부역과 공조 납부만을 이행하면서도 자기 토지를 소작지로서 다시 받아 부쳐야만 했다. 일단 이러한 예속상태에 놓이게 되자,그들은 점차 자기의 인격적 자유도 잃게 되었다. 수 세대 후에는 이미 그 대부분이 농노로 전락했다. 자유 농민층의 급속한 소멸에 대해서는 이르미농(Irminon)이 작성한 생-제르맹 데 프레(Saint-Germain des pres) 수도원一당시는 파리 교외에 있었으나 지금은 파리 시내에 있다—의 토지대장(Grundbuch)이 잘 말해주고 있다. 이 수도원 주변 각 곳의 광대한 영지에는 칼 대제가 살았던 당시에도 2,788세대—거의 전부 게르만인의 이름을 가진 프랑크인들이다—가 있었다. 그 중 2,080세대는 콜로누스이고, 35세대는 반자유 농민,220세대는 노예이며, 자유이주민은 8세대에 불과했다! 보호자가 강제적으로 농민의 토지를 자기의 소유로 만들고, 그것에 대한 종신 이용권만을 농민에게 주는 관습에 대해 살비아누스는 신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한바 있었지만, 이것이 이제는 교회를 통해 도처에서 실시되었다. 부역이 이제는 점점 더 관습으로 되어가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로마의 앙가리아(Angarien), 즉 국가를 위한 강제노동과,다른 한편으로는게르만의 마르크공동체 성원들의 교량,도로의 건설과 기타 공동목적을 위한 의무를 본받은 것이었다. 이리하여 주민 대중은 말하자면 400년이 지난 뒤 다시 자기가 출발했던 바로 그 상태로 되돌아간 셈이다.
그러나 이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을 증명해줄 뿐이다. 즉,첫째로 로마 제국 쇠퇴기의 사회적 분화와 재산 분배방식은 당시의 농업과 공업의 생산수준에 전적으로 조응한 것이었으며,따라서 불가피한 것이었다는 것, 둘째로 이 생산수준이 그 이후 400년 동안에 본질적으로 낮아지지도 않았고 높아지지도 않았으며 그리하여 꼭 같은 필연성을 가지고 동일한 재산 분배와 동일한 계급 구성을 다시 살펴보도록 했다는 사실이다. 도시는 로마 제국 마지막 수 세기 동안에 농촌에 대한 기존의 지배권을 상실했는데,게르만인이 지배하던 첫 수 세기 동안에는 그것을 회복하지 못했다. 이러한 것은 농업과 공업의 낮은 발전단계를 전제로 한다. 이러한 일반적 정세는 필연적으로 지배적인 대토지 소유자와 예속된 소농을 낳는다. 한편으로는 노예에 의거하는 보다 새로운 로마식 라티푼디아 경영과,다른 한편으로는 부역노동에 의존하는 보다 새로운 대규모 경작을 이러한 사회에 접목하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했는가는 유명한 황실 장원에서의 칼 대제의 굉장한,그러나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시험이 증명해주고 있다. 수도원들만이 이 시험을 계속해 왔었는데 거기서만 유일하게 결실을 보았다. 그러나 수도원은 독신생활에 기초한 비정상적인 사회조직이었다. 그것들은 예외적인 성과를 가져다 줄 수 있었지만,바로 그 때문에 예외로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400년 동안에도 진보는 있었다. 비록 이 시기 말에 와서도 기본계급들은 초기와 거의 같았지만,이 계급들의 구성원들은 달라졌다. 고대 노예제는 소멸했고,노동을 노예의 직업으로서 멸시하던 영락해버린 가난한 자유민들도 소멸했다. 로마의 콜로누스와 새로운 농노와의 중간에 존재했던 것은 프랑크의 자유농민이었다. 멸망해가는 로마 세계의 ‘무익한 회상과 공연한 승강이’(Unnütze Erinnern und der vergebliche Streit)는 이미 사멸하고 매장되었다. 9세기의 사회계급은 멸망해가는 문명 의 붕괴 가운데서가 아니라 새 문명 의 진통 가운데서 형성되었다. 새로운 세대는—주인도 노예도— 로마의 선구자에 비하면 남자의 세대였다. 권세있는 토지 소유자들과 그에게 예속된 농민들과의 관계,즉 로마인들에게서는 고대 세계의 절망적인 멸망을 표현해주었던 이 관계가 새로운 세대를 위해서는 이제 새로운 발전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렇게 볼 때 이 400년이 아무리 헛된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것은 하나의 커다란 성과를 남겨놓았다. 즉 그 성과란 현대적인 민족을 준비한 것,다가오는 역사를 위해 인류의 서유럽 부분을 새로이 형성하고 편성한 것이다. 실제로 게르만인들은 유럽을 소생시켰다. 그러므로 게르만 시기에 일어난 국가 붕괴는 노르만인과 사라센인에 의한 정복으로 끝나지 않고,베네피시움(은혜) 제도와 보호위탁제도(Schutzergebung,Kommendation)가 봉건제도로 발전•성장하는 것으로 종식되었다. 또한 200년도 채 안되어 일어난 여러 차례의 십자군 원정에 의한 대유혈도 문제없이 감당해낼 만큼의 방대한 인구증가로 종식되었다.
게르만인들이 빈사상태의 유럽에 새로이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었던 신비한 마술적 수단은 도대체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우리의 배타주의적 역사기록이 날조하고 있는 바와 같아 게르만 종족만이 갖고 있는 기적적인 힘이었겠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게르만인들은 특히 그 당시에 왕성한 정력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한참 개화기에 있던 아리안 종족의 일원이었다. 그러나 유럽을 재생시킨 것은 그들의 특정한 민족적 특성이 아니라, 단순히 그들의 미개성,즉 그들의 씨족제도였다.
그들의 개인적 능력, 용맹성, 그들의 자유애호 정신과 일체 공적(公的) 사업을 자기 자신의 사업으로 생각케 하는 민주주의적 본능,한마디로 말하자면 로마인들은 이미 잃어버린 것이지만 로마 세계의 붕괴로부터 새 국가를 형성하고 새 민족을 육성하자면 반드시 가져야할 그 모든 품성—이러한 모든 것은 미개 높은 단계 사람들의 특징,또 그 씨족제도의 열매가 아니고 무엇이었겠는가?
게르만인들은 일부일처제의 고대적 형태를 개조하여 가정에서 남자의 지배를 완화하고,일찍이 고전적 세계가 알고 있던 것보다 더 높은 지위를 여자에게 부여했다.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할 수 있게 한 것은 그들의 미개성, 그들의 씨족적 관습,아직도 생기를 잃지 않은 모권제적 유습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들은 적어도 독일, 북부 프랑스 및 잉글랜드 등 세 개의 주요국가에서 본래의 씨족제도의 한 가닥을 마르크공동체의 형태로 봉건국가에 도입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가혹하기 그지없는 중세기적 농노제의 조건 하에서도 피압박계급인 농노들에게,고대의 노예나 근대의 프롤레타리아트가 기존 형태로는 가질 수 없었던 그런 지역적 단결력과 저항수단을 부여했던 것이다. 이것은 그들의 미개성,오로지 미개시대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그들의 씨족별 정착양식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마지막으로 그들은 이미 자기 고향에서 실시한 바 있었고,또 로마제국에서도 노예제도와 점차 교체되어 갔던 보다 완화된 예속 형태를 발전시켜 보편적인 상태에까지 이끌었다. 이 형태야말로 푸리에가 처음으로 강조한 바와 같이 피예속자들에게 계급으로서의 점진적 해방수단을 제공했는데(fournit aux cultivateurs des moyens d’affranchissement collectif et progressif), 따라서 이 형태는 개개인을 과도적 상태를 거치지 않고 즉시 해방시키는 것만이 가능했던 노예제도보다(성공적인 폭동에 의한 노예제도의 폐지를 고대 세계에서는 알지 못했다) 우월한 것이었다. 반면에 중세기의 농노들은 계급으로서의 자기 해방을 점차 실현해 갔는데, 이것은 그들의 미개성 때문이 아니고 무엇 때문이겠는가? 그 미개성의 덕택으로 그들은 이 예속 형태를 완전히 발전한 노예제도로,즉 고대적 노예노동의 형태로도, 동양의 가내 노예제(Hausskkverei)로도 이끌고 가지 못한 것이 아닌가?
게르만인들이 로마 세계에 이식한 생활력 있고 보람있는 그 모든 것은 미개성 (Barbarentum)의 소산이었다. 실로 미개인들만이 노쇠한 빈사상태의 문명 세계를 짊어질 수 있었다. 그리고 민족 이동 이전에 게르만인들이 도달한 미개의 높은 단계야말로 이러한 과정에 가장 유리한 것이었다. 모든 것은 이것으로써 해명된다.


제Ⅸ장 미개와 문명


위에서 우리는 그리스인,로마인, 게르만인 등 세 개의 개별적인 큰 실례를 들어 씨족제도의 분해를 고찰해 보았다. 이제는 이미 미개의 높은 단계에서 씨족적 사회조직을 파괴하고,문명기의 출현과 더불어 그 조직을 완전히 제거시켜버린 일반적인 경제조건들을 연구함으로써 이 글을 마무리짓기로 하자. 여기에서는 『자본론』이 모오간의 저서와 마찬가지로 필요하다.
야만의 중간 단계에서 발생하고,그 높은 단계에서 계속 발전해오던 씨족은 현존 자료를 통해 판단할 수 있는 한,미개의 낮은 단계에서 그 전성기에 달했었다. 우리는 이 발전단계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하기로 하자.
이 단계에서는 씨족제도가 완전히 형성되어 있었는데, 그 실례로서 아메리카 인디안을 들 수 있다. 한 개의 종족이 몇 개의 씨족으로, 대개는 두 개의 씨족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이 시초 씨족들(ursprünglichen Gentes)은 인구의 증가에 따라 각각 몇 개의 딸 씨족(Tochtergentes)으로 분열되고 이 딸 씨족들의 모체 씨족(Mutter gens)은 부족으로서 나타난다. 종족 자체는 또 몇 개의 종족으로 분열되며 이 각각의 종족에서 우리는 대부분 고대 씨족(alten Gentes)들을 다시 발견한다. 적어도 개별적 경우에는 근친종족들(verwandten Stämme)이 모여서 하나의 동맹을 형성한다. 이 단순한 조직은 그것을 낳은 사회적 조건들과 완전히 상응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러한 조건 하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자연발생적인 구조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은 이와 같이 조직된 사회 내부에서 발생할 수 있는 일체의 갈등을 조절할 힘을 가지고 있었다. 외부 세계와의 갈등은 전쟁을 통해서 해소된다. 전쟁은 종족을 전멸시켜 버릴 수는 있지만 예속시키지는 못한다. 씨족제도에는 지배와 예속이 있을 수 없다는 데에 그 위대성과 동시에 그 한계가 나타나고 있다. 씨족제도 내부에서는 권리와 의무 사이에 아직 아무런 구별도 없다. 인디안의 경우 공적 사업에의 참가와 피비린내나는 복수,또는 그 배상이 권리인가 의무인가 하는 문제는 있지도 않았다. 이러한 문제는 식사,수면, 수렵이 권리인가 의무인가 하는 문제와 마찬가지로 그들에게는 무의미한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또한 종족이나 씨족이 상이한 계급으로 분열되는 일도 있을 수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이로 인해 우리는 이 제도의 경제적 토대를 고찰하게 된다.
인구는 매우 희박했으며,단지 종족의 거주지에만 조밀했다. 그 주위에는 우선 광대한 수렵지역이 있었고, 뒤이어 다른 종족들과의 경계를 이루는 동시에 방위의 목적도 갖는 중립적인 삼림지대가 있었다. 분업은 순전히 자연발생적인 것으로서 남녀 양성 간에만 있었다. 남자는 수렵 및 어로에 종사하며 식료를 채취하고, 또 이에 필요한 도구를 만든다. 여자는 가사를 돌보며 음식과 의류를 장만한다. 즉 요리, 베짜기,바느질을 한다. 남녀는 각각 자기의 영역—남자는 삼림에서(in Walde), 여자는 집에서(in Hause)— 에서 주인이다. 각자는 자기가 만들고 자기가 사용하는 도구의 소유주이다. 즉 남자는 무기,수렵 및 어로도구의 소유주이며,여자는 가구의 소유주이다. 가정 살림은 공산주의적 원칙에 입각하여 몇 개의 가족,종종 많은 가족에 의해 운영된다. 공동으로 만들어 이용하는 것은 공동재산이 된다. 즉 가옥, 채마밭, 배가 그러하다. 이리하여 실로 이 경우에,아니 오로지 이 경우에만 문명사회의 법학자와 경제학자들이 날조하고 떠벌리고 있는 ‘자기노동으로 번 재산’(Selbstbearbeitete Eigentum)이라는 말—이것은 현대의 자본주의적 소유를 아직도 지탱케 해주고 있는 최후의 허위적인 법률적 구실이다—이 통용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반드시 어디서나 이 단계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시아에서는 길들일 수 있는 동물을 발견했으며, 후에는 길들여서 사육할 수 있는 동물을 발견했다. 야생 암물소는 수렵을 해서 잡아와야 했지만,길들인 것은 해마다 새끼를 낳았으며 그 밖에 또 우유를 제공했다. 가장 선진적인 몇몇 종족들에게는—아라안인, 셈인 등의 경우와 그리고 투린인(Turanier)의 경우도 역시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처음에는 길들이기와 그 다음에는 가축의 사육 관리가 주된 노동 부문으로 되었다. 목축종족은 다른 미개인들과 분리되었다. 이것은 최초의 커다란 사회적 분업(gesellschaftliche Teilung der Arbeit)이었다. 목축종족은 다른 미개인들보다 많은 것을 생산했을 뿐만 아니라,그들과는 다른 생활수단을 생산했다. 목축종족은 다른 미개인들과 비교하면 훨씬 더 많은 양의 우유, 우유 제품 및 짐승고기를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수피,양모, 산양모도 가지고 있었다. 또 이러한 원료의 증대와 더불어 더욱더 증가해 가는 다량의 실과직물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 처음으로 규칙적인 교환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전의 발전단계에서는 우연적인 교환만이 가능했다. 무기제작과 도구제작에서의 특수한 기능은 일시적인 분업을 가져올 수 있었다. 예컨대 많은 곳에서 틀림없는 신석기시대 석기제작소의 유적이 발견되었다. 여기서 자기의 기능을 연마하고 있던 공인들은 지금도 인도의 씨족공동체 내 고정 수공업자들이 그러하듯이,아마 사회 전체의 비용으로 사회를 위해 일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 발전단계에서는 종족 내부에서만 교환이 발생할 수 있었으며, 그것도 예외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았다. 이와는 반대로 목축종족이 분리된 후에는 상이한 종족들의 성원들 간의 교환과,고정적인 한 제도로서의 교환의 발전 및 공고화를 위한 조건들이 마련되었음을 보게 된다. 시초의 교환은 쌍방의 씨족 우두머리를 통해 종족 간에서 수행되었다. 가축군이 개별재산으로 되기 시작하자 개인들 간의 교환이 점점 더 우세해졌으며,마침내 그것은 교환의 유일한 형태로 되었다. 그러나 목축종족이 그 이웃 종족들과 교환한 물건은 주로 가축이었다. 가축은 모든 상품을 평가해주며,또 어디서나 기꺼이 교환될 수 있는 상품이 되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가축들은 이 단계에서 화폐의 기능을 획득하고 화폐의 역할을 했다. 이렇게 필연적으로 그리고 신속하게 상품교환 발생 당초에 특수한 상품,즉 화폐에 대한 요구가 발전했던 것이다.
아시아인들은 미개의 낮은 단계에서 채마밭 경작(Gairtenbau)을 모르고 있었다고 생각되나,늦어도 그 중간 단계에서 그것은 전야 경작(Feldbau)의 선구로서 그들 사이에 나타났다. 투란 고원의 기후 조건하에서는 길고 매서운 겨울에 대비해 사료를 저장하지 않고서는 목축생활이 불가능했다. 아리하여 여기에서는 목초재배와 곡물재배가 필수적인 것이었다. 흑해의 북방 초원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곡물은 처음에 가축을 위해 재배되던 것이 얼마 안 가서 사람의 식료로도 이용되었다. 경작지는 아직 여전히 종족의 소유였으며, 처음에는 씨족이,후에는 세대공동체가,마지막에는 개인들이 이용하도록 양도되었다. 그들은 경작지에 대해 일정한 소유권을 가질 수 있었고, 그이상의 것은 가질 수 없었다.
이 단계의 산업활동 영역에서 거둔 성과 중 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두 가지가 있다. 즉 첫째는 직기이고, 둘째는 광석의 용해와 금속의 가공이다. 구리와 주석 그리고 그것을 제련한 청동은 가장 중요한 금속이었다. 청동은 유용한 도구와 무기를 제공했으나 석기를 대신하지는 못했다. 철만이 대신할 수 있었지만, 철을 얻는 방법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금과 은은 옷치장과 장식품에 사용되기 시작했는데,이미 동이나 청동보다 귀하게 취급된 것 같다.
목축, 농업, 가내 수공업 등 모든 부문에서 생산이 증대됨으로써 인간의 노동력은 자기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양의 생산물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됨과 동시에 씨족,세대공동체 또는 개별 가족과 각 성원에게 부과되는 매일 매일의 노동량이 증가되었다. 이제 새로운 노동력을 들여와야만 했다. 전쟁이 그것을 충족시켰다. 즉 전쟁포로는 노예로 전락하게 되었다. 최초의 거대한 사회적 분업은 노동생산성의 향상과 재부의 증대 및 생산활동 분야의 확대와 더불어 주어진 모든 역사적 조건 아래서 필연적으로 노예제도를 가져왔다. 최초의 거대한 사회적 분업의 결과 두 계급, 즉 주인과 노예,착취자와 피착취자로서의 최초의 거대한 사회적 분열이 일어났다.
어떻게 또 언제 가축군이 종족 또는 씨족의 공유로부터 개별적 가족장의 소유로 이전되었는지에 관해서는 지금까지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나 이 이행은 기본적으로 이 단계에서 일어났을 것이다. 그리고 가축군과 기타 새로운 재부의 출현과 더불어 가족 내에서 혁명이 일어났다. 획득하는 것은 언제나 남자의 일이었다. 획득에 요구되는 수단은 남자가 만들었고, 또 그것은 남자의 소유였다. 가축군와 생계를 위한 새로운 획득수단이었다. 처음에는 가축을 길들이고 다음에는 그것을 사육 관리했는데,이것은 남자의 일이었다. 그러므로 가축은 남자의 것이며, 가축과 교환해 얻은 상품과 노예들도 역시 남자의 것이었다. 이제 획득하게 된 일체의 잉여는 남자의 것이 되었다. 여자는 잉여의 소비에는 가담했지만, 그것에 대한 소유권은 없었다. ‘사나운’(wilde) 전사와 사냥꾼은 집에서 여자 다음 가는 자리에 만족했지만,‘보다 온화한’(Sanftere) 목축만은 자기의 재부를 뽐내고 첫 번째 자리에 올라서면서 여자를 두 번째 자리로 밀어내렸다. 그러나 여자는 불평을 토로하지 못했다. 가족 내의 분업은 남녀 간의 재산분배를 규정했다. 가족 내의 분업은 전과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오직 가족 밖에서의 분업이 달라졌기 때문에 가족 내 분업이 종래의 가정 내 관계를 완전히 전복시켰다. 전에는 가정에서의 여자의 지배를 보장해주었던 바로 그 원인, 즉 여자가 가사노동(Hausarbeit)에만 종사했다는 사실이 오히려 가정에서의 남자의 지위를 보장해주었다. 여자의 가사노동은 이제 남자의 생활필수품 획득에 비해 그 의미를 상실했다. 남자의 노동이 전부였고, 여자의 가사노동은 보잘 것 없는 부차적인 것이었다. 여성의 해방,남녀의 평등은 여자가 사회적 노동에서 배제되어 사적인 가사노동에만 종사하고 있는 한 불가능하며, 또 앞으로도 불가능할 것이라는 것이 이미 여기서 명백해진다. 여성의 해방은 그들이 사회적 규모의 생산에 광범위하게 참여하고,또 그들이 돌보아야 할 가사가 아주 적을 때에라야 비로소 가능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근대적인 대규모 공업에 의해서만, 즉 여성노동을 대대적으로 허용할 뿐만 아니라 직접 그것을 요구하며, 또 사적인 가사노동을 점점 더 공적인 생산활동(öffentliche Industrie)으로 전화시키려고 하는 근대적인 대공업(moderne große Industrie)에 의해서만 가능하게 되었다.
이제 가정에서 남자의 지배가 실제로 확립됨으로써 남성 독재의 마지막 장애들이 없어졌다. 이 독재는 모권의 전복, 부권의 도입,대우혼으로부터 일부일처제로의 점차적 이행에 의해서 확인되고 영속화되었다. 그런데 이것은 낡은 씨족제도에 금이 가도록 만들었다. 즉 개별가족이 씨족과 대립하는 하나의 위협적인 세력으로 되었던 것이다.
다음의 한 발자국은 우리를 미개의 높은 단계로,즉 모든 문화인이 자기의 영웅시대, 다시 말해서 철검의 시대,그와 동시에 또 철보습 및 철도끼의 시대를 체험하는 시기로 끌고 간다. 역사에서 혁명적 역할을 한 모든 종류의 원료 가운데서 최후의—최후라고 하는 것은 감자의 출현 전까지를 말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원료인 철이 인간에게 봉사하게 되었다. 철은 전보다 더 큰 규모의 전야 경작을 가능하게 만들었으며, 광대한 삼림지대를 개간하여 경지로 만들 가능성을 제공했다. 철은 어떠한 돌도 그리고 당시 알려져 있었던 어떠한 금속도 당하지 못할 정도로 견고하고도 예리한 도구를 수공업자에게 제공했다. 이러한 모든 것은 서서히 이루어졌다. 최초의 철은 종종 청동보다도 물렀다. 그러므로 실제로 무기 소멸은 서서히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비단 『힐데브란트의 노래』(Hildebrandslied)에서 뿐만 아니라 1066년의 헤스팅스(Hastings) 전투에서도 아직 돌도끼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진보는 걷잡을 수 없는 힘으로 꾸준하고도 급속히 진행되었다. 돌담과 탑 그리고 성벽으로 돌집과 벽돌집을 둘러싼 도시가 종족 또는 종족동맹의 중심지로 되었다. 이것은 건축술의 거대한 진보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재부는 급속히 증가했으나 그것은 개인의 것이었다. 직조업,금속가공,기타 수공업들이 점점 더 발전했다. 토지경작은 이제 옥수수,콩류 및 과실 외에도 식물성 기름 및 포도주를 제공해주었다. 이 다양한 활동은 이미 한 사람의 손으로는 해낼 수 없었다. 제2의 거대한 분업이 발생했다. 즉 수공업이 농업에서 분리되었다. 생산의 끊임없는 증가와 이에 따르는 노동생산성의 끊임없는 향상은 인간의 노동력의 중요성을 드높였다. 선행 발전단계에서는 겨우 발생했고 드문드문 볼 수 있었던 노예제도가 이제는 사회제도의 본질적인 구성 부문으로 된다. 노예는 이제 단순한 보조자가 아니며,수십명씩 전야와 작업장에서 혹사당한다. 생산이 농업과 수공업이라는 두 개의 기본 부문으로 분열되면서 직접 교환을 목적으로 하는 생산, 즉 상품생산이 발생한다. 또 그와 함께 종족 내부 및 종족 간의 상업뿐만 아니라 벌써 해외무역도 발생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아직 극히 미진한 상태에 있었다. 귀금속이 우세한 그리고 일반적인 화폐상품으로 되기 시작했지만,아직 주조되지는 못했고,오직 무게에 따라서 교환되고 있었을 뿐이다.
자유민과 노예 간의 차별과 함께 부자와 빈자 간의 차별이 나타나고,새로운 분업과 함께 사회는 계급으로의 분열이 일어난다. 각 가족장들 간의 재산상의 차이는 아직도 낡은 공산주의적 세대공동체를 보존하고 있던 모든 곳에서 그것을 파괴한다. 이와 함께 이 세대공동체의 책임 하에 있던 토지의 공동경작도 소멸한다. 경작지는 처음에는 일시적으로,후에는 영구히 개별 가족들의 이용에 맡겨진다. 토지의 완전한 사적 소유로의 이행은 점차적으로,또 대우혼이 일부일처제로 이행하면서 나란히 진행된다. 드디어 개별 가족(Einzelfamilie)이 사회의 경제적 단위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인구밀도의 증가에 따라 대내적으로나 대외적으로나 한층 더 긴밀한 유대가 필요하게 된다. 근친종족들의 동맹은 도처에서 필연적인 것으로 되었으며,얼마 후 그것들의 통합과, 이에 따라 개별적인 영토들을 전 민족의 하나의 공통된 영토로 통합하는 것까지도 필연적인 것이 되었다. 인민의 군사령관—레크스(rex), 바실레우스(basileus), 티우단스(thiudans)—은 없어서는 안될 상설적인 공직자로 된다. 또한 인민회의가 없었던 곳에서는 그것이 이제 나타난다. 군사령관,평의회, 인민회의는 씨족 사회에서 발전하는 군사적 민주주의 기관을 형성한다. 군사적이라는 것은 전쟁과 전쟁을 위한 조직이 이제 인민생활의 정상적인 기능으로 되기 때문이다. 이웃 사람들의 재부는 재부의 획득을 가장 중요한 생활 목적의 하나로 삼고 있는 인민들의 탐욕을 자극한다. 그들은 미개인들이다. 즉 그들에게는 약탈이 창조적 노동보다 더 쉽고,아니 명예로운 일로까지 보인다. 전에는 침해에 대해 복수를 하거나 또는 부족하게 된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서만 전쟁이 수행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오로지 약탈을 위해 수행되며 상시적인 생업으로 바뀌었다. 새 도시 주위에 견고하고 위협적인 성벽이 솟아 있는 것은 이유 없는 일이 아니다. 그 외호(外潔,Gräben)에서는 씨족제도와 무덤 구덩이가 커다란 입을 벌리고 있으며,문명으로 이어지는 탑이 우뚝 서 있다. 사회 내부에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 약탈전쟁은 최고 군사령관의 권력뿐만 아니라 그 밑에 있는 지휘관들의 권력도 강화한다. 동일한 가족 중에서 후계자를 관습적으로 선출하던 것이,특히 부권의 확립 아래 처음에는 용인된 세습적 권력으로,다음에는 요구된 그리고 마침내는 횡탈된 세습적 권력으로 이행한다. 세습적 왕권과 세습적 귀족의 기초가 다듬어진다. 이렇게 해서 씨족제도의 기관들은 인민 속의,즉 씨족•부족•종족 속의 자기의 뿌리와 점차 유리되며,전체 씨족제도가 자기의 대립물로 전화한다. 즉 전체 씨족제도는 자기 자신의 일을 자유롭게 처리하기 위한 종족의 기관으로부터 이웃 사람들을 약탈하고 압박하기 위한 기관으로 전화하며,이에 따라서 그 기관은 인민의 의사를 대변해주는 도구였던 것이 자기의 인민을 지배하고 압박하기 위한 독립적인 기관으로 전화한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만일 재부에 대한 탐욕이 씨족 성원들을 부자와 빈자로 분열시키지 않았던들,만일 “동일한 씨족 내부에서의 재산상 차이가 이해관계의 통일성을 씨족 성원들 간의 적대 관계로 전화시키지 않았던들”(맑스), 또 만일 노예제가 보급된 결과 이미 자신의 노동에 의한 생존수단 획득을 노예만이 해야 할 일로 생각하지 않았던들,또 그것을 약탈보다 더 수치스러운 일로 생각하지 않았던들 결코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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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우리는 이제 문명의 문턱께 도달했다. 문명은 분업에서 새로이 한걸음 내딛음으로써 시작된다. 미개의 낮은 단계에서 인간은 오로지 직접 자신의 수요를 위해서만 생산하고 있었다. 간혹 일어난 교환행위는 개별적이었으며, 단지 우연히 생기는 잉여와 관계가 있었다. 미개의 중간 단계에 이르러 우리는, 목축민들의 경우에 가축군이 일정한 규모가 되어 자신의 수요를 초과하고 약간의 잉여를 규칙적으로 제공함으로써 가축이 재산으로 됨을 보게 된다. 동시에 목축민과 가축군을 가지고 있지 않는 후진 종족 간의 분업, 따라서 서로 병존하는 상이한 두 생산수준의 존재,또 규칙적 교환에 필요한 조건들도 보게 된다. 미개의 높은 단계에서는 분업이 한층 더 전진해 농업과 수공업 간에 일어나며,그와 함께 같은 생산물 중에서 직접적 교환을 위한 부분의 생산이 더욱 늘어나게 된다. 이에 따라서 개별적 생산자들 간의 교환이 사회를 위한 필수 불가결한 것으로 된다. 문명은 이 모든 종류의 분업을,특히 도시와 농촌 간의 대립(그런데 고대에서처럼 도시가 농촌을 경제적으로 지배할 수도 있고 중세에서처럼 농촌이 도시를 경제적으로 지배할 수도 있다)의 첨예화를 통해서 확고히 하고 강화하며,더 나아가서 문명시기에서만 결정적 의미를 가지는 제3의 분업을 낳는다. 즉 문명은 생산에도 종사하지 않고 생산물의 교환에만 종사하는 계급인 ‘상인’(Kaufleute)을 낳는다. 종래에는 계급 형성의 모든 원인이 거의 전적으로 생산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로 말미암아 생산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지도받는 부류와 대•소규모 생산자 부류로 나누어졌다. 그런데 이제 비로소 한 계급이 나타나는데,그 계급은 생산에는 전혀 참가하지 않고서도 생산에 대한 지도권을 총체적으로 장악하여 생산자들을 경제적으로 자기에게 예속시키고,어떤 두 생산자들 간의 필수불가결한 중개자로서 양자를 착취한다. 생산자들에게 교환과 관련된 노력과 위험을 덜어 주고 또 그 생산물의 판로를 원거리 시장에까지 확대시켜줌으로써 주민 중 가장 유익한 계급이라는 구실 하에 ‘진짜 사회적 식객’(echten gesellschaftlichen Schmarotzertieren)인 하나의 기생계급(eine Klasse von Parasiten)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이 계급은 실제로는 극히 보잘 것 없는 노력의 보수로서 국내 및 국외 생산으로부터 고량진미를 짜내고 있으며,방대한 재부와,이에 상응하는 사회적 세력을 급속히 획득한다. 또 바로 그렇기 때문에 문명기를 통해 더욱 명예로운 지위를 쟁취하며,생산을 더욱더 자기에게 예속시킴으로써 마침내 그 자신 역시 주기적 상업 공황이라는 독특한 산물을 배태하는 데까지 이른다.
그러나 우리가 고찰하는 발전단계에서 젊은 상인층은 아직 앞으로 닥쳐올 그 위대성에 대해서 꿈조차 꾸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성장하면서 없어서는 안될 존재로 되며,그것으로서 충분했다. 그런데 상인층과 함께 금속화폐(Metallgeld),즉 주화가 출현하며,이와 더불어 비생산자가 생산자와 그의 생산물을 지배하는 새로운 수단이 나타난다. 다른 모든 상품을 은폐된 형태로 내포하고 있는 상품 중의 상품,즉 마음만 내키면 어떠한 물건으로도 바꿔놓을 수 있는 요술수단이 발견된 것이다. 그것을 소유한 자가 생산의 세계를 지배했다. 그런데 누가 먼저 그것을 소유했는가? 상인이다. 그에게는 확실히 화폐숭배가 있었다. 그는 모든 상품, 따라서 또 모든 상품생산자들이 화폐 앞에서는 굽실거려야 한다는 것을 세상이 다 알 수 있도록 신경을 썼다. 그는 이 재부의 화신에 비하면 다른 모든 형태의 재부는 가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실천을 통해 증명해주었다. 화폐의 권력이 이 청년기에서처럼 그렇게 원시적 조야성과 폭력성을 가지고 나타난 일은 결코 없었다. 화폐를 주고 상품을 구매한 뒤부터 화폐대부가 나타났고,이와 함께 이자와 고리대금업이 나타났다. 그리고 후세의 어떠한 입법도 고대의 아테네나 로마의 입법처럼 그렇게 무자비하고 철저하게 채무자를 채권자인 고리대금업자의 유린에 내맡긴 적은 없었다. 그런데 이 두 입법은 그 어느 것이나 오직 경제적 강요에 의해서만 관습법으로서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이다.
상품 및 노예의 재부와 함께,또 화폐의 재부와 함께 이제는 토지의 재부가 다시 나타났다. 분할지에 대한 개인들의 점유권은 본래 씨족 또는 종족에 의해 부여된 것이었는데,이제는 그것이 강화되어 세습소유권으로서 그들에게 속하게 되었다. 이 개인들이 마지막 시기에 가장 애쓴 것은 바로 그들의 질곡으로 된,분할지에 대한 씨족공동체의 간섭권으로부터 분할지를 해방시키는 것이었다. 이 질곡은 곧 소멸했다. 그런데 곧 이어 새로운 토지소유도 역시 소멸했다. 완전하고도 자유로운 토지소유는 비단 토지를 아무런 장애도 없이 무제한으로 점유할 가능성을 의미했을 뿐만 아니라,토지를 양도할 가능성도 의미했다. 토지가 씨족의 소유였을 때는 이러한 가능성이 없었다. 그러나 새로운 토지소유자가 씨족 및 종족의 우선적 소유권의 질곡을 종국적으로 벗어 버렸을 때, 그는 지금까지 자기와 토지를 굳게 연결시키고 있던 유대도 역시 끊어 버렸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토지사유와 동시에 발명된 화폐가 그에게 밝혀 주었다. 이제는 토지가 판매될 수 있으며 저당 잡힐 수 있는 상품으로 되었다. 토지소유제 (Grundeigentum)가 확립되자마자 벌써 저당(Hypothek)이 발명되었다(아테네를 보라). 난혼과 매음제도(Prostitution)가 일부일처제의 뒤꼬리를 따라다니는 것처럼,이제부터는 저당권이 토지소유의 뒤꼬리를 집요하게 따라 다니게 된다. 너는 완전하고 자유로운, 양도할 수 있는 토지소유권을 원하였다. 자 어서 받아라一“네가 갖고 싶어 하던 것이다. 죠르쥬 당탱 !”(tul’as voulu, Georges Dandin!)
이렇듯 상업의 확대와 함께,또 화폐 및 고리대금업, 토지소유 및 저당권과 함께 소수 계급의 수중으로 재부의 집적과 집중이 급속히 이루어졌다. 이와 더불어 대중의 궁핍화가 증대했으며 빈민 대중이 날로 늘어만 갔다. 신흥부자 귀족은 그가 본래 구씨족적 귀족이 아니었던 한에서는 후자를 궁극적으로 압도해 버렸다(아테네에서,로마에서,게르만인들 사이에서). 그리고 재산에 따른 자유민의 이러한 계급분화와 함께,특히 그리스와 같은 곳에서는 노예들의 수가 상당히 증가되었으며,그들의 강제노동은 전체 사회의 상부 구조의 바탕을 이루었다.
그러면 이제는 이러한 사회적 변혁 속에서 씨족제도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씨족제도는 자기와 관계없이 발전한 새로운 요소 앞에 무력했다. 씨족제도의 전제조건은 한 씨족 또는 종족의 성원들이 한 지역에서 자기들끼리만 공동으로 모여 사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일은 이미 오래 전에 없어지고 말았다. 어디에서나 씨족 및 종족들은 서로 뒤섞여있었으며,노예,피보호민,외국인들도 자유민과 뒤섞여 살았다. 미개의 중간 단계의 말경에 이르러 비로소 이루어진 정착생활은 상업활동,직업의 변경,토지소유권의 이동 등으로 인해 거주지가 빈번하게 바꾸어지고 불안정해짐으로써 줄곧 파괴되었다. 씨족집단의 성원들은 이미 자기 자신의 공동 관심사를 토의하기 위하여 모일 수 없었으며,예컨대 종교적 제전과 같은 그리 중요치 않은 일이나 겨우 토의하는 데 지나지 않았다. 씨족집단이 보장할 사명을 지녔고,또 보장할 수 있는 그런 이해관계 및 욕구와 병행하여,그리고 생산 제 조건에서의 변혁과 이에 따르는 사회구조상 변혁의 결과로 옛 씨족제도와는 전혀 인연이 없을 뿐만 아니라,어느 면에서나 그것과 대립되는 새로운 욕구와 이해관계가 발생했다. 분업으로 인해 발생한 수공업자 집단의 이해관계 그리고 농촌과 대립되는 도시의 특수한 욕구는 새로운 기관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이 집단은 또 각각 서로 다른 씨족,부족 및 종족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심지어는 외국인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 새로운 기관들은 씨족제도 밖에서,그것과 병렬해, 따라서 그것과 대립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어느 씨족집단 내에서도 이러한 이해관계의 갈등(Konflikt der Interessen)을 보게 되었는데,이 갈등은 부자와 빈자,고리대금업자와 채무자가 동일한 씨족 내에 같이 있게 되면서 극도에 달했다. 더구나 씨족공동체와는 전혀 인연이 없던 새로운 주민 대중이 로마에서처럼 하나의 세력으로 될 수 있었는데, 그들은 혈연적 씨족 및 종족에 점차적으로 받아들이기에는 그 수가 너무 많았다. 이 대중에 대해서 씨족공동체는 폐쇄적이며 특권적인 단체로서 대립하고 있었다. 자연발생적인 원시적 민주주의는 가증스러운 귀족주의로 전락했다. 마지막으로,씨족제도는 하등의 내부적 대립도 모르는 사회로부터 성장한 것이었으며, 또 그러한 사회에서만 적합한 것이었다. 거기에는 여론 이외의 다른 아무런 강제수단도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발생한 사회는 자기의 경제생활의 온갖 조건들도 말미암아 자유민과 노예, 착취하는 부자와 착취당하는 빈자로 분열될 수밖에 없었으며,이 사회는 이 대립을 다시는 조화시킬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더욱 첨예화시켰다. 이러한 사회의 존립은 오직 이 계급들 상호 간의 끊임없는 공개적 투쟁 속에서만, 그렇자 않으면 외견상으로는 서로 싸우는 계급들을 지켜보면서 그들의 공개적 충돌을 진압하고 기껏해야 계급투쟁을 오로지 경제적 영역, 즉 합법적 형태 속에서만 허용하는 제3세력의 지배 하에서 가능했다. 씨족제도는 끝나게 되었다. 그것은 분업과 그 산물인 계급으로의 사회분열에 의해서 파멸되었다. 결국 그것은 국가에 의해서 대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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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우리는 씨족제도의 폐허 위에 국가가 발흥하는 세 개의 주요 형태를 각기 상세하게 고찰했다. 아테네는 가장 순수하고 가장 전형적인 형태를 보여 준다. 즉 거기에서는 국가가 씨족사회 자체 내부에서 발전한 계급대립으로부터 직접,또 주로 발생했다. 로마의 경우에 씨족사회는 이 사회 밖에 있으면서 권리는 없으나 의무를 지고 있는 수적으로 우세한 평민들(plebs)의 한가운데서 폐쇄적인 귀족주의로 전락한다. 평민의 승리로 많은 씨족제도는 파괴되고,그 폐허 위에 국가가 건립된다. 이 국가 내에서 얼마 후 씨족적 귀족과 평민이 완전히 용해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로마제국의 정복자인 게르만인들의 경우에 국가는 광활한 남의 영토—씨족제도는 이런 영토의 지배수단을 도저히 제공하지 못한다—를 정복하게 된 직접적인 결과로서 발생한다. 그러나 이 정복은 구주민과의 본격적인 투쟁이나,보다 진보적인 분업 양자에 결부되어 있지 않았다. 또 피정복자와 정복자의 경제적 발전수준이 거의 비슷하기 때문에 사회의 경제적 토대는 이전과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씨족제도는 마르크제도(Markverfassung)로 바뀐 지역적 형태를 띠면서 여러 세기 동안 더 존속할 수 있다. 또 조금 약한 형태이기는 하지만,후세의 귀족적 씨족과 파트리키우스적 씨족(Patriziergeschlechtern)으로서,그리고 예컨대 디트마르쉔 지방(Ditmarschen)에서처럼 농민 씨족(Bauerngeschlechtern)으로까지 한동안 다시 살아난다.
요컨대 국가라는 것은 결코 외부로부터 사회에 강요된 권력이 아니다. 국가는 헤겔이 주장하는 것처럼 ‘윤리적 이념의 현실태’(die Wirklichkeit der Sittlichen Idee)나 ‘이성의 형상 및 현실태’(das Bildund die Wirklichkeit der Vernunft)가 아니다. 국가는 일정한 발전단계에 있는 사회의 산물이다. 국가는 사회가 해결할 수 없는 자기 모순에 빠졌으며,자기의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불상용적인 대립으로 분열했다는 것을 고백한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이 대립,즉 경제적으로 서로 모순되는 이해관계를 가진 계급들이 무익한 투쟁에서 자신과 사회를 파멸시키지 못하도록 하려면 외관상 사회 위에 서 있는 권력,즉 충돌을 완화시켜 사회를 ‘질서’(Ordnung)의 한계 내에 유지시킬 권력이 필요하게 되었다. 사회로부터 발생했으나,그 위에 올라서서 사회와는 더욱더 멀어져 가는 권력이 바로 국가이다.
구씨족적 조직과 비교해볼 때,국가의 첫번째 특징은 국민을 그 지역에 따라 구분하는 것이다. 혈연적 유대를 통해서 발생했으며 또 유지되고 있던 종래의 씨족적 결합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불충분한 것이 되어버렸다. 그것은 대부분 씨족적 결합의 전제,즉 씨족성원의 일정한 지역과의 유대가 오래 전에 소멸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역적 구분이 출발점으로 되었고,시민들(Bürger)은 씨족 및 종족과는 관계없이 자기가 거주하는 곳에서 자기의 공적권리를 행사하며 의무를 이행하도록 허용되었다. 거주지에 의한 공민의 이러한 조직은 어느 국가에나 공통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조직은 우리들에게 자연스럽게 보인다. 그러나 이미 본 바와 같이 그것이 아테네와 로마에서 씨족적인 구조직과 대체되기까지는 참으로 집요하고도 기나긴 투쟁이 필요했던 것이다.
두번째 특징은 자기 자신을 무장력으로서 조직하는 주민과는 이미 직접 부합되지 않는 공권력의 창설이다. 이 특수한 공권력이 필요한 것은 계급으로의 사회적 분열 이후 주민의 자주적인 무장조직이 불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노예도 역시 주민의 한 성원이다. 9만의 아테네 시민은 36만 5천의 노예에 대해서 특권계급일 따름이다. 아테네 민주국가의 시민군대는 귀족의 공권력으로서 노예를 복종시켰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시민을 복종시키는 데에도 역시 헌병대가 필요했다. 이러한 공권력은 어느 국가에나 존재한다. 그 구성에는 단지 무장한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물적 부속물,즉 감옥과 온갖 종류의 강제기관—씨족적 사회기구는 아러한 것들을 몰랐다—들도 있다. 공권력은 계급적 대립이 아직 제대로 발전되지 않은 사회에서나,멀리 떨어진 외딴 지방에서는 극히 미미하고, 거의 있으나마나 한 것일 수 있다. 이런 것은 아메리카 합중국의 어떤 곳에서 때때로 보게 되는 것이다. 공권력은 국가 내부에서 계급적 모순이 첨예화됨에 따라서 강화된다. 오늘날의 유럽만을 가지고 보더라도,계급투쟁과 정복 전쟁으로 말미암아 공권력은 전체 사회를,아니 국가까지도 집어삼킬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러한 공권력을 유지하자면 시민의 납부금,즉 조세(Steuern)가 필요하다. 씨족 사회는 이런 것을 전혀 몰랐다. 그러나 이제 와서는 그것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문명의 발전과 더불어 조세조차 불충분하게 된다. 국가는 나중에 지불하기로 하고 채권을 발행해 채무를 진다. 즉 국채(Staatsschulden)를 발행한다. 이에 관해서는 노쇠한 유럽이 적지 않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관리들은 공권력과 조세 징수권을 가짐으로써 사회의 기관으로서 사회 위에(über) 선다. 가령 그들의 씨족 사회의 기관들이 받던 그런 자유로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존경을 획득하는 경우가 있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사회와는 멀어진 권력의 담당자인 그들은 자기들을 특히 신성불가침한 존재로 만드는 예외적인 법률로써 특권을 획득하는 것이 필요하다. 문명국가의 아무리 하찮은 경찰관도 씨족 사회의 전체 기관을 합친 것보다 더 큰 ‘권위’를 가진다. 그러나 문명시대의 아무리 유력한 왕이나 위대한 정치가, 또는 사령관일지라도 그야말로 평범한 씨족 우두머리가 받던 비강제적이고 문제의 여지가 없는 존경을 마땅히 부러워해야 할 것이다. 씨족 우두머리는 사회의 한복판에 서있지만 전자는 사회 밖에 또 사회 위에 서있는 어떤 것으로 나타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국가는 계급 간의 대립을 억제할 필요로부터 발생했기 때문에, 동시에 그것은 이 계급들의 충돌 그 자체 가운데서 발생했기 때문에 통상적으로 가장 강력하고 경제적으로 지배하는 계급의 국가이다. 이 계급은 국가의 힘을 빌어 정치적으로도 지배하는 계급이 된다. 그리하여 피압박계급을 압박하고 착취하기 위한 새로운 수단을 획득한다. 따라서 고대 국가는 무엇보다도 먼저 노예소유자들이 노예를 압박하기 위한 국가였으며,봉건 국가는 농노와 예농을 압박하기 위한 귀족들의 기관이었다. 그리고 현대의 대의제 국가는 자본이 임금노동을 착취하기 위한 도구이다. 그러나 예외적인 현상이자만,투쟁하는 계급들 간의 세력이 균형에 도달하여 국가권력이 외견상 두 계급의 조정자로서 어느 정도의 독립성을 한동안 획득하게 되는 시기가 있다. 귀족 세력과 부르주아지 세력이 서로 비슷했던 17세기와 18세기의 절대 군주제의 경우가 그러하다. 또한 부르주아지에 대해서는 프롤레타리아트를,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해서는 부르주아지를 싸움붙인 프랑스의 제 1제국,특히 제2제국의 보나파르티즘도 마찬가지이다.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모두 희극적으로 나타나는 이 국면에서의 최근 걸작은 비스마르크식 국민의 신독일 제국이다. 즉 여기서는 자본가와 노동자가 서로 비슷하여 몰락한 프러시아의 촌뜨기 융커들(Kraujunker)의 이익을 위해 다같이 기만당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역사에서 알려진 대부분의 국가들에서는 시민들에게 부여하는 권리는 그들의 재산 상태에 상응한다. 이것은 국가가 무산계급에 대해 유산계급을 옹호하기 위한 조직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이것은 일찍이 시민의 권리를 재산에 따라 몇 개의 부류로 구분한 아테네와 로마에서 그런 경우가 있었다. 그것은 토지소유의 규모에 따라 정치권력상 지위가 규정되었던 중세기 봉건 국가에서도 나타난다. 그러나 재산상 차이의 이러한 정치적 승인은 결코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거꾸로 그것은 국가 발전의 낮은 단계를 특징짓는 것이다. 최고의 국가 형태인 민주주의 공화국은 현대 사회의 여러 조건 하에서 날이 갈수록 필연적인 것으로 되어 간다. 또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 간의 최후의 결전을 철저히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유일한 국가 형태인 이러한 민주주의 공화국은 이미 공식적으로는 재산에 따른 차별을 문제삼지 않는다. 거기에서 재부는 자기의 권력을 간접적으로 행사한다. 그러나 그 대신 한층 더 확실하게 행사한다. 즉 한편으로는 관리를 직접 매수하는 형식으로(가장 전형적인 표본은 미국이다),다른 한편으로는 정부와 주식거래소(Börse)와의 동맹 형식으로 행사한다. 이 동맹은 국채가 증가하면 할수록,또 주식회사가 운송뿐만 아니라 생산 자체까지도 자기 수중에 집중시키고 증권거래소를 자기의 활동중심으로 삼으면 삼을수록 쉽사리 실현된다. 미국 이외에도 최근의 프랑스 공화국이 그 좋은 실례이며 또 훌륭한 스위스도 역시 이 방면에 공헌한 바가 있다. 그러나 정부와 주식 거래소가 이러한 친선 동맹을 맺는 데에는 반드시 민주주의 공화국만이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영국 외에도 신독일제국이 증명해준다. 여기에서는 보통 선거권에 의해 비스마르크나 블라이히뢰더(Bleichröder) 은행 중 누구의 지위가 더 높아졌는지는 말할 수가 없다. 끝으로 유산계급은 일반 선거권을 통해 직접 지배한다. 피압박계급,이 경우에 프롤레타리아트가 아직 자기를 해방시킬 만큼 성숙하기 전에는 그들의 대부분이 현존 사회질서를 유일하게 가능한 것으로 인정할 것이다. 또 정치적으로는 자본가계급에 따르면서 그의 극좌익을 형성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성숙해 자기자신을 해방시키려고 함에 따라서,그들은 자신의 정당을 조직해 자본가들의 대표가 아니라 자신의 대표를 선출할 것이다. 일반 선거권은 노동계급의 성숙 정도를 보여주는 지표이다. 그것은 오늘날 국가에서 그 이상의 것으로는 될 수 없으며,또 앞으로도 결코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보통 선거권(allgemeinen Stimmrechts)이라는 온도계가 노동자들의 비등점을 가리킬 바로 그때,노동자들과 자본가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요컨대 국가는 아득한 옛날부터 존재했던 것이 아니다. 국가 없이도 존재했으며,국가와 국가권력에 관한 개념이 없었던 사회도 있었다. 계급으로의 사회적 분열과 필연적으로 연결된 경제적 발전의 일정한 단계에서 국가는 이 분열로 말미암아 필연적인 것으로 된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러한 계급의 존재가 필연적인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생산의 직접적인 장애물로 되는 그러한 생산의 발전단계로 급속히 접근하고 있다. 계급의 소멸은 과거에 그 발생이 불가피했던 것처럼 불가피하다. 계급의 소멸과 함께 국가도 불가피하게 소멸할 것이다. 생산자들의 자유롭고 평등한 결합에 기초하여 생산을 새로이 조직하는 사회에서는 전체 국가기구를 그것이 응당 가야할 곳으로,즉 고대 박물관으로 보내져 물레나 청동도끼와 나란히 진열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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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술한 바에 따르면,결국 문명이란 분업과 이 분업에 기인하는 개인들 간의 교환,그리고 이 두 과정을 결합시키는 상품생산이 전면적으로 발전해 종전의 사회 전체에 변혁을 일으키게 되는 사회 발전단계이다.
종전의 모든 사회 발전단계들에서 생산은 본질상 집단적(einegemeinsame)이었다. 그리고 소비도 역시 크거나 작은 공산주의적 공동체 내부에서 생산물의 직접적인 분배 하에서 진행되었다. 생산의 이 집단적 성격은 그 범위가 극히 좁았다. 그러나 그것은 생산과정 및 그 생산물에 대한 생산자들의 지배를 수반했다. 그들은 생산물이 어떻게 되는가를 잘 알고 있다. 즉 생산물은 그들 자신이 소비하고 그들의 손을 떠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러한 기초 위에서 진행되는 한,생산은 문명기에서 항상, 또 불가피하게 보게 되겠지만,생산자들이 감당하기 곤란한 것으로는 될 수 없으며,생산자들에게 적대적인 유령같은 힘을 낳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산과정에 분업이 서서히 침투해 들어온다. 분업은 생산과 점유의 집단적 성격을 파괴하고,개인에 의한 점유를 지배적인 규칙으로 만들며, 따라서 개인들 간의 교환을 낳는다. 어떻게 해서 그와 같이 되는가는 이미 위에서 연구했다. 상품생산이 점차 지배적인 형태로 된다.
상품생산,즉 자신의 소비를 위한 것이 아니라 교환을 위한 생산의 조건 하에서,상품은 필연적으로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에게로 넘어간다. 교환을 할 때 생산자는 자신의 생산물을 양도한다. 이제는 그것이 어떻게 되는지 그는 모른다. 그런데 생산자들 간의 중개자(Vemittler)로서 화폐가 나타나고,또 화폐와 함께 상인이 나타나자 교환과정은 더욱 복잡해지며, 생산물의 최후 운명은 더욱더 알 수 없게 된다. 상인들은 다수이며 그들 중 아무도 다른 사람이 무엇을 하는지 모른다. 상품은 이제 이미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에게로 넘어갈 뿐만 아니라,시장에서 시장으로도 이동한다. 생산자들은 자기 자신의 생활영역에서 생산 자체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했다. 그러나 이 지배권이 상인의 손에 넘어간 것도 아니다. 생산물과 생산은 우연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된다.
그러나 ‘우연성’(Zufall)이라는 것은 상호의존성(Zusammenhangs)의 한 극단일 뿐이다. 그 다른 극단은 ‘필연성’(Notwendigkeit)이라고 불린다. 역시 우연성이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는 자연에서 우리는 그 어느 부문에서나 이미 오래 전에 이 우연성을 꿰뚫는 내적 필연성과 합법칙성(Gesetzmäßigkeit)을 확증했다. 그런데 자연에 타당한 것은 사회에도 타당하다. 어떤 사회적 활동, 일련의 사회적 과정이 사람들의 의식적 통제를 벗어나 억제할 수 없게 될수록,그리하여 이 활동이 순전한 우연성에 맡겨져 있는 것처럼 보일수록 그것에 특유한 내적 법칙들은 더욱더 자연적 필연성을 가지고 이 우연성을 꿰뚫고 있다. 이와 같은 법칙들이 상품생산과 상품교환의 우연성도 지배한다. 즉 이러한 법칙들은 처음에는 알 수조차 없고 면밀한 연구를 통해서만 그 본성을 구명해낼 수 있는 외부적인 힘으로서 개별적 생산자와 교환자들 앞에 나타난다. 상품생산을 지배하는 이 경제법칙들은 이런 생산형태의 상이한 발전단계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나 문명의 전체 기간은 대체로 이런 법칙들의 지배를 받는다. 지금도 역시 생산물이 그 생산자들을 지배하고 있다. 그리고 전체 사회적 생산은 공동으로 작성된 계획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연 발생적인 힘을 가지고,궁극적으로는 주기적 상업 공황의 폭풍우 속에서 작용하는 맹목적인 법칙들에 의해서 규제받고 있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비교적 초기의 생산 발전단계에서 인간의 노동력은 생산자의 생존에 필요한 것처럼 훨씬 더 많은 생산물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으며,또 이 발전단계는 기본적으로 분업 및 개인들 간의 교환이 발생하는 그 단계였다. 그런데 얼마 후 인간도 역시 상품으로 될 수 있으며, 만일 인간을 노예화한다면 인간의 힘도 교환되고 소비될 수 있다는 위대한 ‘진리’(Wahirheit)가 발견되었다. 인간은 교환을 하기 시작하자마자 그들 자신도 교환하게 되었다. 인간의 의지와 관계없이 능동적 행동은 피동적 행동으로 되었다.
문명 시기에 최고의 발전을 본 노예제의 출현과 함께 처음으로 착취계급과 피착취계급으로 사회가 크게 분열되었다. 이 분열은 문명의 전 기간 동안 존속했다. 노예제는 고대 세계에 고유한 최초의 착취형태였으며,그 뒤를 따른 것은 중세기의 농노제와 근세의 임금노동제이다. 이것은 예속의 3대 형태로서 문명의 3대 시기를 각각 특징짓는다. 공공연한,그리고 최근에는 은폐된 노예제가 문명의 영원한 동반자이다.
문명이 시작되는 상품생산 단계는 다음과 같은 경제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즉 (1)금속화폐,그와 함께 화폐자본(Geldkapitals),이자(Zinses) 및 고리 대금업(Wuchers)의 도입,(2)생산자들을 중개하는 계급으로서의 상인들의 출현, (3)토지의 사유 및 저당권의 발생,(4)지배적인 생산형태로서의 노예노동의 출현이다. 문명에 상응하여 또 문명과 함께 자기의 지배를 종국적으로 확립하는 새로운 가족형태는 여자에 대한 남자의 지배, 즉 일부일처제이며,사회의 경제적 단위로서의 개별 가족이다. 국가는 문명사회를 총괄하는 힘으로서 모든 전형적인 시기에 예외없이 지배계급의 국가이며,또 본질적으로 모든 경우에 압박받고 착취당하는 계급을 억압하는 기관이다. 문명에는 또 다음과 같은 특징들이 있다. 즉 한편으로는 온갖 사회적 분업이 기초로서의 도시와 농촌의 대립을 고착시키는 것이며,다른 한편으로는 소유주로 하여금 자기가 죽은 후에도 자기의 재산을 처분할 수 있도록 해주는 유언제를 도입(die Einführung der Testamente)한 것이다. 고대의 씨족제도와 직접 모순되는 이 제도를 아테네에서는 솔론 이전까지 모르고 있었다. 로마에서는 그것이 이미 일찍부터 도입되기는 했으나 그 시기는 명확치 않다. 게르만인 사이에서는 신앙심 깊은 게르만인 성직자들이 자기의 유산을 아무런 장애 없이 교회에 유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도입했다.
이러한 제도에 입각하는 문명은 고대의 씨족사회로서는 전혀 해낼 수 없는 일을 해냈다. 그러나 문명이 그렇게 해낸 것은 다름 아닌 인간의 가장 추악한 충동과 정욕을 발동시키고,인간의 다른 모든 소질을 희생시키면서 그것을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야비한 탐욕이 문명의 첫날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 추동력이었다. 첫째도 재부요,둘째도 재부요,셋째도 재부,그것도 사회의 재부가 아니라 탐욕적인 개개인의 재부, 이것이야말로 문명의 유일한 결정적인 목표였다. 그런데 이 사회의 태내에서 과학이 더욱더 발전하고 예술의 개화기가 반복되었다고 하더라도,그것은 근대적 재부 축적에 성과를 가져다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한 계급에 의한 다른 계급의 착취 (die Ausbeutung)가 문명의 기초인 만큼, 문명의 발전은 끊임없는 모순 가운데서 진행된다. 생산에서의 온갖 진보는 동시에 피압박계급,즉 대다수의 생활 처지가 낙후됨을 의미한다. 한 쪽을 위한 온갖 선(Wohltat)은 필연적으로 다른 쪽에게는 악(Übel) 이며,한 계급을 위한 온갖 해방(Befreiung)이 다른 계급에게는 새로운 억압(Unterdrückung)이다. 그 가장 명료한 실례가 바로 기계의 도입이다. 그 결과에 대해서는 오늘날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미개인들의 경우에는 권리와 의무간의 차이가 도저히 있을 수 없었다. 반면에 문명은 한 계급에게 거의 권리만을 주고,다른 계급에게는 거의 의무만을 부담시킴으로써 아무리 미련한 자라도 권리와 의무 간의 차이와 대립을 알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그럴 리는 없을 것이라고 하면서, 지배계급은 사회와 자기를 동일시하고,마치 지배계급에게 좋은 것은 전체 사회에도 좋은 것처럼 말한다. 그러므로 문명은 진보하면 할수록 자신이 생산한 부정적 죄악을 점점 더 사랑의 보자기에 싸서 미화하거나,그렇지 않으면 기만적으로 부인하지 않으면 안된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 이전의 사회형태에서는 물론 문명의 첫 단계에서조차 모르고 있던,즉 관례화된 위선을 부리지 않으면 안된다. 마침내 이 위선은 절정에 달하여 착취계급의 피압박계급에 대한 착취는 오로지,또 전적으로 피착취계급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처럼 된다. 따라서 피착취계급이 이런 줄을 모르고 반란까지 일으킨다면,그것은 은인,즉 착취자에 대한 그야말로 비열하고 배은망덕한 소치라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그러면 문명에 대한 모오간의 판결문을 인용함으로써 끝을 맺자.

문명의 개시 이래 재부의 증가는 방대해졌으며, 그 형태는 매우 다양하게 되었고, 그 이용은 심히 광범해졌으며, 그 관리는 소유자를 위해 매우 교묘해졌다. 그리하여 이 재부는 인민과 대립되며 극복할 수 없는 힘으로 되고 말았다. 인간의 정신은 자기 자신의 창조물 앞에서 어리둥절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이성이 고양되어 이 이성이 재부를 지배하게 되고 국가와 그가 보호하는 재산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소유자들의 권리의 한계도 규정하게 될 시기가 올 것이다. 사회의 이익은 무조건적으로 개인의 이익보다 높다. 동시에 이 양자 사이에는 공정하고 조화된 관계가 성립되어야 한다. 만일 과거와 마찬가지로 진보가 어디까지나 장래에도 법칙이라면,단순히 재부만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종국적인 사명은 아니다. 문명의 개시 이래 지나간 시간이라는 것은 인류가 이미 살아온 인간의 보잘 것 없는 한토막이며,또 인류가 앞으로 살아야 할 시간의 보잘 것 없는 한토막에 불과하다. 재부를 둘도 없는 궁극적인 목표로 삼는 그런 역사 과정의 결말로서 사회의 멸망이 우리 앞에 다가오고 있다. 왜냐하면 그런 역사 과정은 자기 자체를 해소할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통치에서의 민주주의,사회 내에서의 우애,권리와 특권의 평등,교육 보편화 등은 경험,이성 및 과학이 항상 지향하는 보다 높은 다음 단계의 사회를 창조할 것이다. 그것은 고대씨족이 지닌 자유, 평등, 우애의 보다 고양된 형태의 부활일 것이다.(모오간,『고대 사회』, p.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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