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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3-07-12 02:27
공상에서 과학으로의 사회주의의 발전(1880년)_엥엘스
 글쓴이 : a16768654419246
조회 : 637  
공상에서 과학으로의 사회주의의 발전


(『전집』 제19권, 181〜228쪽/ 영어판 서문, 같은 책, 524〜544쪽)
프랑스 어판(1880년) 서문 / 칼 마르크스
독일어 초판(1882년) 서문 / 프리드리히 엥겔스
공상에서 과학으로의 사회주의의 발전 / 프리드리히 엥겔스
영어판(1892년) 서문 / 프리드리히 엥겔스


출전 : 제4판, 개정판, 베를린, 1891.
1880년 1월에서 3월 중순 사이에 쓰인 것으로 처음에는 1880년 3월 20일, 4월 20일과 5월 5일에 월간지 『사회주의 평론』 제3 • 4 • 5호에 프랑스 어로 실렸다. 또 같은 해에 『공상적 사회주의와 과학적 사회주의』라는 제목의 소책자로 출판. 독일어 초판은 1882년 호팅엔-취리히에서 출판되었다.

 『공상에서 과학으로의 사회주의의 발전』(Die Entwicklung des Sozialismus von der Utopie zur Wissenschaft)은 엥겔스가 1876〜1878년에 쓴 『오이겐 뒤링 씨의 과학의 변혁』(『반(反)뒤링론』)에서 세 절을 뽑아 구성한 것이다. 폴 라파르그(Paul Lafargue)의 부탁을 받고 엥겔스는 1880년 『반뒤링론』의 세 절(서론에 해당하는 제1절과 제3장의 제1절과 제2절)을 고쳐서 따로 대중용 저작을 하나 썼는데, 이것은 처음에 프랑스의 사회주의 잡지인 『사회주의 평론』에 실렸고 같은 해에 단행본으로도 출판되었다. 프랑스 어본을 토대로 폴란드 어판과 이탈리아 어판이 나왔다. 1883년에는 엥겔스 자신이 준비한 독일어본이 출판되었다.(겉표지에는 출판 연도가 1882년으로 되어 있다.) 이 저작은 엥겔스가 살아 있는 동안에 유럽 여러 나라의 말로 번역되었다. 이 책은 노동자들 사이에 널리 보급되어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선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엥겔스의 감수를 거친 마지막 독일어판(제4판)은 1891년 베를린에서 출판되었다.(『전집』 제19권 523쪽을 보라.) 이 저작은 『반뒤링론』의 해당 절과 자료 배열에 차이가 있으며, 『반뒤링론』의 본문을 보충하거나 몇 군데 바꾸기도 했다. 이 저작과의 연관성을 유지하려고 이 책(『전집』 제19권을 가리킨다.一역자)에서는 연대 순서를 무시하고, 마르크스가 쓴 프랑스 어판 서문과 1882년에 엥겔스가 쓴 독일어 초판 서문을 맨 먼저 실었다.


프랑스 어판(1880년) 서문1)
칼 마르크스


 이 소책자는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최근 저작 『과학의 변혁』2)을 번역한 것으로, 처음에는『 사회주의 평론』3)에 세 개의 논문으로 실렸다.4)
 현대 사회주의의 가장 뛰어난 대표자 가운데 한 사람인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1844년 『국민 경제학 비판 강요』(Umrisse zu einer Kritik der Nationalökonomie)라는 글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는데, 이 글은 마르크스와 루게가 파리에서 발간하던 『독불 연보』에 최초로 실린 바 있다. 『강요』에는 이미 과학적 사회주의의 몇 가지 일반 원리들이 정식화되어 있다. 엥겔스는 당시 맨체스터에 살았으며, 거기서 그는 (독일어로) 『영국 노동자 계급의 상태』(1845년)라는 글을 썼다. 이 글은 훌륭한 것이었으며,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이를 적절히 평가한 바 있다. 처음 영국에 머무는 동안에ーー나중에 브뤼셀에 있을 때에도ーー그는 사회주의 운동의 공식 기관지인 『북극성』과 로버트 오언이 발행하던 『새로운 도덕 세계』5)의 기고가였다.
 브뤼셀에 머무는 동안, 그는 마르크스와 함께 플랑드르와 월룬 지방의 노동자 서클을 한데 묶어 독일 공산주의 노동자 협회6)를 세웠다. 그리고 두 사람은 보른슈테트1*와 함께 『독일-브뤼셀 신문』을 발간했다. (런던에서) 의인 동맹의 독일 위원회에 초대되자, 그들은 이 동맹의 협력자가 되었다. 이 동맹은 칼 샤퍼2*가 1839년 블랑키3*의 폭동 음모에 연루되어 프랑스에서 도피한 뒤에 세운 것이었다. 비밀 결사의 통상적인 조직 형태를 청산한 뒤에 이 동맹은 국제적인 공산주의자 동맹으로 탈바꿈했다. 그러나 그러자마자 동맹은 당시의 상황 때문에 정부의 눈을 피해서 보안을 지켜야만 했다. 1847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런던에서 열린 동맹의 국제 대회에서 『공산당 선언』을 작성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이 선언은 2월 혁명 직전에 발간되었으며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 말로 번역되었다.7)같은 해에 두 사람은 브뤼셀 민주주의자 협회를 창설하는 데 협력했다. 이 협회는 공개적이고 국제적인 연합체로서 부르주아 급진주의 대표자들과 사회주의적인 노동자들이 함께 참여한 것이었다.
 2월 혁명 뒤에 엥겔스는 『신(新)라인 신문』 편집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 이 신문은 1848년 마르크스에 의해 쾰른에서 창간되었으며, 1849년 5월 프러시아의 쿠데타로 폐간되었다. 엘버펠트의 봉기에 가담한 엥겔스는 당시 의용병 대대의 지휘관이던 빌리히4*의 부관으로 (1849년 6〜7월) 프러시아에 대항하는 바덴 봉기에 참가했다.
 1850년 런던에서 그는 마르크스가 편집을 맡고 함부르크에서 발간되던 『신라인 신문. 정치 경제 평론』의 기고가로 활동했다. 엥겔스는 『독일 농민 전쟁』(Der deutsche Bauernkrieg)을 이 신문에 처음으로 발표했는데, 이 저작은 19년 뒤에 라이프치히에서 소책자로 발간되어 제3판까지 나왔다.
 독일에서 사회주의 운동이 다시 일어나자 엥겔스는 『인민 국가』5*와 『전진』6*에 아주 중요한 글들을 많이 발표했다. 그 대부분은 팸플릿 형태로 다시 출판되었으며, 그 가운데는 『러시아 사회 상태』, 『독일 제국 의회에서의 프러시아 제 브랜디』, 『주택 문제에 관하여』, 『바쿠닌 주의자들의 활동』 등이 있다.
 1870년 맨체스터에서 런던으로 이사한 뒤에, 엥겔스는 인터내셔널 총평의회 의원이 되었으며, 거기서 그는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의 통신원으로 위촉되었다.
 엥겔스는 최근 『오이겐 뒤링 씨의 과학의 변혁』이라는 역설적 제목 (오이겐 뒤링 씨가 말하는 과학 일반, 그리고 특히 사회주의에 대한 새 이론을 반박하는 의미에서)이 붙은 일련의 논문들을 『전진』에 투고했다. 이 논문들은 한 권으로 묶여 독일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 큰 호평을 받았다. 우리는 이 책의 이론적인 부분들 가운데 가장 시의 적절한 골자만을 뽑아 이 소책자에 실었으며, 따라서 이 소책자는 말하자면 과학적 사회주의의 입문서인 셈이다.


독일어 초판(1882년) 서문
프리드리히 엥겔스


 이 글은 나의 책 『오이겐 뒤링 씨의 과학의 변혁』(라이프치히, 1878년)에서 세 절을 뽑아 구성한 것이다. 나는 내 친구 라파르그7*가 번역할 수 있도록 그것을 정리했으며, 약간의 보충 설명을 덧붙였다. 내가 검토한 프랑스 어 번역은 처음 『사회주의 평론』에 실렸으며, 이어 1880년 파리에서 『공상적 사회주의와 과학적 사회주의』(Socialisme utopique et socialisme scientifique)라는 제목으로 따로 출판되었다. 프랑스 어 번역이 나온 뒤 곧 『공상적 사회주의와 과학적 사회주의』(Socyjalizm utopijny a naukowy, Imprimerie de l’Aurore, Genève, 1882)라는 제목으로 제네바에서 폴란드 어 번역본이 출판되었다.
 라파르그의 번역본이 프랑스 어 사용 국가, 특히 프랑스 본국에서 놀랄 만한 호평을 받자, 나는 이 세 개의 논문을 별도의 독일어본으로 낼 필요가 있지 않나 생각하게 되었다. 그때 취리히에서 발행되던 『사회 민주주의자』8)의 편집진이 나에게 독일 사회 민주당 안에서 새로운 선전용 소책자에 대한 출판 요구가 매우 높아졌다고 알려 주면서, 이 세 개의 논문을 그 용도에 쓰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문의해왔다. 나는 전적으로 동의하고 그렇게 하도록 허락해 주었다.
 그러나 이 글은 본래 직접적인 대중 선전용으로 쓰인 것이 결코 아니었다. 우선 순수한 학문적 저작이 어떻게 그런 쓰임새에 적합할 수 있겠는가? 내용과 형식을 어떻게 바꿔야 할 것인가?
 형식으로 말하자면 단지 수많은 외국어 단어만이 신중하게 생각해 볼 문제였다. 그러나 이미 라살레는 자신의 강연이나 선전용 책자에서 외국어 단어들을 거리낌없이 사용했으며, 내가 아는 한 아무도 그 점을 못마땅해하지 않았다. 그 뒤로 우리 노동자들은 훨씬 더 많이, 또 규칙적으로 신문을 읽어 왔으며, 그럼으로써 그만큼 외국어 단어에 친숙해졌다. 그래서 나는 필요 없는 외국어 단어들을 모두 빼 버리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피할 수 없는 경우에도 이른바 설명용 번역을 덧붙이지 않았다. 피할 수 없는 외국어 단어——대개 공인된 과학 기술 용어——를 번역할 수 있다면 그것은 정말로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번역은 뜻을 왜곡하고, 설명을 해 주기보다는 오히려 헷갈리게 만든다. 그럴 때는 말로 전달하는 편이 훨씬 더 도움이 된다.
 반면에 내용은 독일 노동자들에게 별로 어렵지 않다고 장담할 수 있다. 어렵다면 제Ⅲ절이 약간 어려운데, 그것도 노동자들의 일반적인 생활 조건을 요약해 놓은 것이기 때문에 노동자들보다는 오히려 교양 있는 부르주아들에게 더 어려울 것이다. 내가 이 글에 덧붙여 놓은 수많은 설명용 주석들은 사실 노동자들보다 교양 있는 독자들, 즉 아이너른8*과 같은 의회 의원 나으리나 하인리히 폰 지벨9*이나 트라이 치케10* 같은 추밀원 고문관 나으리들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끔찍스러운 무지와, 거기서 비롯된 사회주의에 대한 엄청난 오해를 거듭 글로써 표현해야 할 절박한 필요를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돈키호테가 풍차를 향해 창을 겨눈다면, 그것은 그의 본분이고 또 그의 역할에 속하는 일이지만, 산초 판사에게 그런 일을 하도록 허락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한 독자들은 사회주의의 발전사를 개략적으로 서술한 데서 칸트一라플라스의 우주론, 현대 자연 과학과 다윈, 독일 고전 철학과 헤겔을 만나고는 놀라게 될 것이다. 그러나 과학적 사회주의는 본질적으로 독일산(産)임이 분명하며, 그 나라의 고전 철학이 의식적인 변증법의 전통을 생생하게 보존하고 있는 나라, 즉 독일에서만❦ 생겨날 수 있었다. 유물론적인 역사관을 가지고 그것을 현대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 사이의 계급 투쟁에 특수하게 적용하는 것은 변증법을 통해서만 할 수 있다. 독일 부르주아지의 교사들이 위대한 독일 철학자들과 그들이 지니고 있던 변증법에 대한 기억을 황폐한 늪 속에 빠뜨렸기 때문에, 우리는 하는 수 없이 현실 속에서 변증법을 입증해 주는 증인으로서 현대 자연 과학에 호소할 수밖에 없다. 우리 독일의 사회주의자들은 생 시몽, 푸리에와 오언뿐만 아니라, 칸트, 피히테와 헤겔의 후손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1882년 9월 21일 런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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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일에서'(In Deutschland)라는 말은 잘못 쓴 것이다. 원래는 '독일인들의 경우에는'(bei Deutschen)이라고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한편으로는 독일의 변증법이 과학적 사회주의가 생겨나는 데 꼭 필요한 것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영국과 프랑스의 발전한 정치 • 경제적 상황도 꼭 필요했기 때문이다. 40여 년 전 원래 지금보다도 훨씬 더 뒤쳐져 있던 독일의 정치 • 경제적 발전 단계로는 기껏해야 사회주의적인 희화(戲畫)를 그려 낼 수 있을 뿐이었다.(『공산당 선언』 제 Ⅲ장 제1절 「독일 사회주의 또는 '참된' 사회주의」를 참조하라. 이 책 79쪽) 영국과 프랑스에서 생성된 정치 • 경제적 상황에 독일의 변증법적인 비판이 가해지고 난 뒤에야 비로소, 실속 있는 결과가 나올 수 있었다. 따라서 이제부터는 과학적 사회주의가 전적으로 독일산(産)이 아니라 국제적인 산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주는 엥겔스가 1883년의 독일어판 제3판에 끼워 넣은 것이다.一편집자) ❦


공상에서 과학으로의 사회주의의 발전
프리드리히 엥겔스


I

 현대 사회주의는 그 내용 면에서 무엇보다도 먼저, 한편으로는 현대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유산자와 무산자, 자본가와 임금 노동자 사이의 계급 대립과 다른 한편으로는 생산을 지배하고 있는 무정부 상태를 관찰한 결과다. 그러나 현대 사회주의는 그 이론의 형식 면에서 처음에는 18세기 프랑스의 위대한 계몽 사상가들이 제기한 원칙들을 더 철저하게 발전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새로운 이론과 마찬가지로 사회주의도, 비록 그 뿌리가 물질적 토대와 깊이 연결되어 있었다 할지라도 우선은 과거에 쌓여 온 사상의 재료로부터 출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프랑스에서 다가오는 혁명을 위해 사람들의 머리를 깨우쳐 주던 위대한 인물들은, 그들 스스로 아주 혁명적으로 행동했다. 그들은 종류가 어떻든간에 외적 권위는 모두 승인하지 않았다. 종교, 자연관, 사회, 국가 제도 등 그 모든 것들을 가장 무자비하게 비판했다. 모든 것이 이성의 심판 앞에서 자기 존재를 정당화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단념하든가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사유하는 오성이 존재하는 모든 것의 단 하나뿐인 척도가 되었다. 헤겔의 표현에 의하면 그것은 세계가 머리로(거꾸로一역자) 서게 된 시대였다.❦ 처음에는 인간의 두뇌와 두뇌의 사유를 통해 발전한 명제가 모든 인간 행위와 사회 관계의 기초로 승인되기를 요구하고 나섰다는 의미에서 그랬으나, 나중에는 이 명제들에 모순되는 현실이 위에서부터 밑에까지 사실상 뒤집어엎어졌다는 더 넓은 의미에서 그랬다. 과거의 모든 사회 형태와 국가 형태, 온갖 전통적 관념은 불합리한 것으로 인정되어 헌 쓰레기처럼 버려졌다. 세계는 지금까지 한갖 편견에 근거를 두어 왔으며, 과거의 모든 것들은 동정받고 멸시당할 만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제야 비로소 해가 솟았고, 이성의 왕국이 닥쳐왔다. 이제부터 미신, 부정, 특권, 압박은 영원한 진리, 영원한 정의, 자연 자체에서 나오는 평등, 박탈할 수 없는 인권에 자리를 내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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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음은 프랑스 혁명에 관한 구절이다. “정의(법)의 사상, 즉 개념이 갑자기 대두했고 불의(不義)의 낡은 발판은 그것에 저항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이제 정의의 사상을 바탕으로 헌법이 만들어졌으며, 그 뒤 모든 것은 이를 토대로 삼아야만 했다. 태양이 창공에 자리잡고 혹성이 그 주위를 돌고 있는 동안, 인간이 머리로 서서, 즉 사상을 토대로 그것에 근거를 두고 현실을 만들어 나가게 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직 없었다. 아낙사고라스는 이성(Nus)이 세계를 지배한다고 맨 처음으로 주장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인간은 사상이 정신적 현실을 지배해야 한다는 것을 이제야 비로소 인식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장엄한 해돋이였다. 사유하는 모든 존재(즉 모든 사람)는 너나없이 이 시대를 찬미했다. 마치 이제야 비로소 신성함이 속세와 화해하게 된 것처럼 숭고한 감격이 그 시대를 지배했고, 정신의 열광이 세계 구석구석을 뒤흔들어 놓았다.”(헤겔, 『역사 철학』, 1840, 535쪽.) 이제 사회주의자 탄압법이 고(故) 헤겔 교수의 이처럼 불온한 혁명 사상에 대해서도 마땅히 적용되어야 할 때가 아니겠는가? ❦


 우리는 이제, 그 이성의 왕국이란 부르주아 왕국의 이상화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영원한 정의는 부르주아 법질서로 실현되었다는 것, 평등이란 결국 법률 앞에서의 부르주아적 평등이었고, 가장 본질적인 인권의 하나로 선언된 것은 부르주아적 소유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성 국가——루소의 사회 계약론9)——는 부르주아 민주 공화국으로 실현될 수밖에 없었다. 18세기의 위대한 사상가들도 모든 선행자들과 마찬가지로 시대가 그들에게 설정한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봉건 귀족과 나머지 사회 전체의 대표자로 등장한 부르주아지 사이의 대립과 아울러, 착취자와 피착취자, 게으른 부자와 일하는 가난뱅이 사이의 일반적 대립이 있었다. 바로 이런 사정으로 부르주아 출신자가 어떤 개별 계급의 대표자로서가 아니라 고통받고 있는 모든 인류의 대표자로 나설 수 있게 되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부르주아지는 생겨날 때부터 그 자체의 대립물을 내포하고 있었다. 즉 자본가는 임금 노동자 없이 존재할 수 없다. 중세 동업 조합의 장인이 현대의 부르주아로 발전함에 따라, 동업 조합 직인과 조합 외의 날품팔이 노동자는 프롤레타리아로 발전했다. 대체로 부르주아지가 귀족과 투쟁하는 데서는 당시의 갖가지 근로 계급의 대표자로 자처할 권리가 어느정도 있었으나, 대규모의 부르주아 운동이 있을 때마다 그 발전 정도야 어찌 됐든 현대 프롤레타리아트의 선구자 격인 계급의 독자적인 운동이 함께 일어나곤 했다. 독일의 종교 개혁과 농민 전쟁 당시의 재세례파와 토머스 뮌처11*의 운동, 영국 대혁명 당시의 수평파10)의 운동, 프랑스 대혁명 당시의 바뵈프12*의 운동이 그러했다. 미숙한 계급의 이러한 혁명적 무장 봉기에는 이에 상응하는 이론적 진출이 뒤따랐다. 즉 16세기와 17세기에는 이상적 사회 제도를 공상적으로 서술하는 글들이 나타났고11), 18세기에는 벌써 직접적인 공산주의 이론(모렐리, 마블리)이 나타났다. 평등에 대한 요구는 벌써 정치적 권리의 영역뿐만 아니라 개인의 사회적 지위에까지 넓어져 나갔다. 계급적 특권뿐만 아니라 계급적 차별 자체까지도 폐지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새로운 학설은 맨 처음에는 모든 향락을 금하는 금욕적인 스파르타식 공산주의 형태로 나타났다. 다음으로 생 시몽, 푸리에, 오언이라는 3대 공상가가 나타났다. 생시몽은 프롤레타리아적 경향과 함께 부르주아적 경향에 아직 의의를 어느 정도 부여하고 있었으며, 오언은 자본주의적 생산이 가장 발전한 나라에서, 그리고 그러한 생산으로 생겨난 대립들의 자극을 받아 계급 차별 철폐안을 프랑스 유물론과 직접 연결해 체계화했다.13*
 이 세 사람에게 공통된 점은, 그들이 그 무렵에 역사적으로 발생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이익을 대변하는 자로 나서지 않았다는 점이다. 계몽 사상가들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우선 어떤 특정한 사회 계급을 해방하려 하지 않고 단번에 모든 인류를 해방하려 했다. 계몽 사상가들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이성의 왕국과 영원한 정의의 왕국을 세우려 했다. 그러나 그들의 왕국은 프랑스의 계몽 사상가들이 주장하던 이성의 왕국과는 천양지차가 있었다. 계몽 사상가들의 원칙에 따라 이루어진 부르주아 세계 또한 봉건제나 과거의 모든 사회 제도와 마찬가지로 불합리하고 불공정한 것이었으며, 따라서 이것 또한 쓰레기통에 내버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참된 이성과 참된 정의가 지금까지 세계를 지배하지 못한 이유는 오직 그것이 정확하게 파악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지금은 천재가 나타나서 진리를 인식하게 되었지만 전에는 그럴 만한 천재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천재가 지금 나타나, 바로 지금 진리를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 이것은 결코 역사 발전 과정에서 반드시 생길 수밖에 없는 결과나 피할 수 없는 사건이 아니며 순전한 요행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천재는 500년 전에도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었을 것이며, 그렇게 되었더라면 그는 500년에 걸친 인류의 오류와 투쟁, 고통을 덜어 줄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이미 본 바와 같이 혁명을 준비하고 있던 18세기 철학자들은 현존하는 모든 것에 대한 유일한 심판자로서 이성에 호소했다. 그들은 이성 국가, 이성 사회를 세울 것을 요구했으며, 영원한 이성에 모순되는 모든 것을 무자비하게 없애길 요구했다. 우리가 이미 본 바와 같이, 이 영원한 이성이란 실은 바로 당시 부르주아로 발전하고 있던 중산 시민의 이상화된 오성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프랑스 혁명으로 그 이성 사회와 이성 국가가 이룩되었을 때, 이 새 제도는 이전까지의 제도에 비해 매우 합리적(rationell)이기는 했으나 절대 이성적인(vernünftig) 것은 아니었다.14* 이성 국가는 완전히 파산하고 말았다. 루소의 사회 계약론은 공포 정치 시대에 실현되었는데, 오히려 자기 자신의 정치적 능력을 믿지 못하게 된 부르주아지는 처음에는 집정 정부12)를 매수하는 데서, 그리고 나중에는 나폴레옹 전제 정치에 비호를 청하는 데서 피난처를 구했다. 약속되었던 영원한 평화는 끊임없는 침략 전쟁으로 대치되었다. 이성의 사회도 그리 잘되어 가는 편이 아니었다. 빈부 대립은 전반적 번영으로 해결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첨예해졌다. 즉 이 대립을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하던 동업 조합 등의 특권이 폐지되었고, 이 대립을 얼마간 누그러뜨리던 교회의 자선 시설이 폐지되었다. 이제 봉건적 질곡으로부터 '소유의 자유'가 이루어졌지만, 이 자유는 소부르주아나 소농민의 경우에 대자본과 대토지 소유자 사이의 세찬 경쟁에 압도되어 자신의 자그마한 소유를 바로 이 대부호들에게 팔아넘기는 자유를 뜻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 '자유'는 소부르주아나 소농민의 경우에는 소유를 잃는 자유가 되고 말았다. 자본주의적 기초 위에서 진행되는 공업의 급속한 발전으로 근로 대중의 가난과 궁핍이 사회 존립의 필수 조건이 되었다. 칼라일15*의 말에 의하면, 현금이 더욱더 이 사회를 연결하는 유일한 요소가 되어 갔다. 범죄 건수가 해마다 늘어났다. 멀건 대낮에 파렴치하게 저질러지던 이전의 봉건적 죄악이 뿌리뽑히지 않은 채 밀려나기는 했지만, 그 대신 과거에는 오직 비밀스럽게 일어나던 부르주아적 죄악 이 그만큼 더 성행하게 되었다. 상업은 더욱더 사기가 되어 갔다. '박애'라는 혁명적 표어13)는 경쟁에서의 사기와 질투로 실현되었다. 폭력적 억압 대신에 매수가 나타났고, 칼 대신에 돈이 사회 권력의 가장 주된 지렛대가 되었다. 초야권(初夜權)은 봉건 영주에게서 부르주아 공장주에게로 넘어갔다. 매음이 유례없는 규모로 늘어났다. 결혼 자체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법적으로 승인된 매음 형태였고 매음의 공식적 가면이었으며, 무수한 간통으로 보충되었다. 한마디로 '이성의 승리'로 세워진 사회 • 정치 제도는 계몽 사상가들의 눈부신 약속에 비하면 쓰라린 환멸을 자아내는 하나의 희화였다. 다만 이 환멸을 확인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직 없었을 뿐이었다. 그런 사람들은 새로운 세기에 들어서면서 나타나게 되었다. 1802년에 생 시몽의 『제네바 편지』가 나왔고, 1808년에 푸리에의 처녀작——그의 이론의 기초는 이미 1799년에 세워졌지만——이 나왔으며, 1800년 1월 1일에 로버트 오언이 뉴라나크의 관리를 담당했다.14)
 그러나 당시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이나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대립은 아직 발달하지 못한 상태였다. 대공업은 영국에서 겨우 생겨났을 뿐이며 프랑스에는 아직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러나 오직 대공업만이, 한편으로는 생산 양식의 변혁, 즉 생산 양식의 자본주의적 성격을 없애라고 절박하게 요구하는 충돌——대공업에 의해 형성된 계급들 사이의 충돌뿐만 아니라 대공업에 의해 나타난 생산력과 교환 형태 사이의 충돌——을 발전시키며, 다른 한편으로는 바로 이 거대한 생산력의 발전 속에서 그와 같은 충돌을 해결할 수단도 제공한다. 따라서 1800년에는 새 사회 제도에서 발생하는 충돌들이 아직 겨우 일어나기 시작했던 만큼, 이러한 충돌을 해결할 수단의 발전 또한 아주 미미했다. 비록 공포 정치 시대에 파리의 무산 대중이 한때 권력을 빼앗아 부르주아지 자체를 반대하는 부르주아 혁명을 승리로 이끌기도 했으나, 결과적으로 무산 대중은 당시의 정세에서 자기들이 오랫동안 지배할 수는 도저히 없다는 것을 증명했을 뿐이다. 계급의 맹아로서 이제 겨우 일반 무산 대중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아직은 독자적인 정치 행동을 전혀 할 수 없었던 프롤레타리아트는 억압과 고통을 받는 계층에 지나지 않았다. 이 계층은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능력이 없었으므로 기껏해야 외부나 위로부터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정세가 사회주의 창시자들의 관점을 규정했다. 미숙한 자본주의적 생산 상태, 미숙한 계급 관계에 상응하여 미숙한 이론이 나왔다. 발달하지 못한 경제 관계 속에 아직 가려져 있던 사회적 과제의 해결책을 머리 속에서 꾸며 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사회 제도는 오직 결함만을 나타냈을 뿐이다. 이러한 결함을 없애는 것이 사유하는 이성의 과제였다. 더 완전한 사회 기구의 새로운 체계를 발명하고, 선전을 통해서 할 수 있다면 모범적인 실천 사례를 보여 줌으로써 이를 외부로부터 현존 사회에 강요해야 했다. 따라서 이러한 새 사회 제도는 처음부터 공상에 그칠 운명을 지니고 있었으며, 세밀하게 작성되면 될수록 더욱더 순수한 환상에 빠져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이상의 사실을 알게 된 이상, 이제는 지나간 일이 된 이 같은 측면들에 대해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말자. 이제 와서는 웃음거리밖에 안 되는 이 환상을 잘난 듯이 들춰내, 이러한 '환상'에 비해 자기 자신의 사고 방식이 건전하다고 뽐내는 따위는 문필가 나부랭이들에게나 맡겨 두자. 우리는 오히려 환상의 껍질을 뚫고 곳곳에서 솟아 나오는 것이기에 속물들로서는 볼 수 없는 그 천재적인 관념의 맹아와 천재적 사상을 반기는 바다.
 생 시몽은 프랑스 대혁명의 아들로, 혁명이 일어났을 때 아직 30세도 되지 않았다. 혁명은 이제까지의 특권적인 유한 신분 一一승려와 귀족一一에 대한 제3신분, 즉 생산과 생업에 종사하는 대다수 국민 대중의 승리였다. 그러나 제3신분의 승리는 이 신분 가운데 일부분의 승리에 지나지 않으며, 제3신분 가운데 사회의 특권층인 유산 부르주아지가 정권을 탈취했다는 것이 곧 드러났다. 뿐만 아니라 이 부르주아지는, 일단 몰수되었다가 다음에는 매각된 귀족과 교회의 소유지를 가지고 투기하고 군수품 조달자로 국민을 속여 혁명 과정에서 급속히 발전했다. 집정 정부 시기에 바로 이 투기꾼들이 지배함으로써 프랑스와 혁명을 파멸에 이르게 했으며, 마침내 나폴레옹에게 쿠데타의 구실을 주었다. 그래서 생 시몽의 머리 속에는 제3계급과 특권 계급 사이의 대립이 '근로 계층'과 '유한 계층' 사이의 대립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유한 계층이란 이전까지의 특권 계급의 대표자들뿐만 아니라 생산이나 상업에 참가하지 않고 금리로 생활하는 모든 사람을 두고 말하는 것이었다. 또 '근로 계층'이란 임금 노동자뿐만 아니라 공장주, 상인, 은행가들도 다같이 일컫는 말이었다. 유한 계층이 정신적으로 지도하고 정치적으로 지배할 능력을 잃었다는 것은 혁명을 통해 의심할 여지 없는 사실로 확증되었다. 또 생 시몽이 보기에는 무산자 또한 이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 공포 정치 시대의 경험으로 증명되었다. 그러면 이러한 경우에 누가 지도하며 지배해야 할 것인가? 생 시몽의 견해에 의하면 그것은 새로운 종교적 유대로 결합된 과학적 산업이었는데, 이 종교적 유대란 종교 개혁 이래 혼란된 종교 사상을 통일할 사명을 지닌, 필연적으로 신비적이며 엄격히 신분적인 '신(新)기독교'였다. 그리고 과학이란 곧 학자였으며, 산업이란 무엇보다도 먼저 적극적인 부르주아 • 공장주 • 상인 • 은행가였다. 물론 이러한 부르주아는 일종의 공무원, 즉 사회 전체의 신임을 받는 자라야 했으나, 노동자에 비하면 그들은 명령권과 경제적 특권인 있는 지위를 누려야 하는 것이었다. 은행가로 말하면, 바로 그들이야말로 신용을 조절함으로써 사회적 생산 전체를 조절할 사명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견해는 프랑스에서 대공업이, 따라서 동시에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대립이 아직 생겨나는 과정에 있던 시기에 전적으로 상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생 시몽은 특히 강조해 말하기를, 자기는 언제 어디서나 '가장 다수이며 가장 가난한 계급'의 운명에 우선 관심을 가진다고 했다.
 생 시몽은 이미 『제네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은 명제를 제기하고 있다.

 모든 사람은 노동해야 한다.

 그는 이미 그 책에서, 프랑스에서 나타난 공포 정치의 지배가 무산 대중의 지배였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무산 대중에게 이렇게 호소하고 있다.

 보라, 당신들의 동지들이 프랑스를 지배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들은 굶주림을 빚어 냈던 것이다.

 프랑스 혁명을 하나의 계급 투쟁, 그것도 단지 귀족과 부르주아지 사이의 투쟁으로서만이 아니라, 귀족과 부르주아지와 무산자 사이의 투쟁으로 이해한 것은 1802년으로서는 아주 천재적인 발견이었다.

1816년에 생 시몽은 정치학을 생산의 과학이라고 선언했으며, 정치학이 경제학에 완전히 흡수될 것이라고 예언했다.15) 여기서는 경제 상태가 정치 제도의 기초라는 견해가 아직 맹아적 형태로밖에는 표현되어 있지 않지만, 인간에 대한 정치적 지배가 물건에 대한 관리와 생산 과정에 대한 지도로 바뀌어야 한다는 사상, 즉 최근에 그렇게도 많이 거론된 '국가 폐지'에 관한 사상이 벌써 명백하게 표명되고 있다. 또 생 시몽은 동시대인을 능가하는 선견지명을 가지고 연합군의 파리 입성 직후인 1814년과 백일 천하 시기인 1815년에 프랑스와 영국의 동맹, 나아가 이 두 나라와 독일의 동맹이 유럽이 평화적으로 발전하고 번영하기 위한 유일한 담보라고 선언하고 있다.16) 1815년에 프랑스 사람들에게 워털루17)의 승자인 영국과 동맹을 맺어야 한다고 말한 데는 실로 크나큰 용기와 역사적 선견지명이 필요했다.
 생 시몽의 경우에 그 식견이 천재적인 해박함을 지니고 있어서 그의 견해가 후대 사회주의자들의 엄밀한 경제 사상을 빼고는16* 거의 모든 사상을 맹아적으로 내포하고 있었다면, 푸리에에게서 우리는 현존 사회 제도에 대한, 진짜 프랑스적인 기지와 심각한 분석이 결합된 비판을 접하게 된다. 푸리에는 부르주아지, 혁명 전 그들에게 열광하던 예언자들, 그리고 혁명 뒤 그들에게 매수된 아첨꾼들의 본질을 잡아낸다. 그는 부르주아 세계의 모든 물질 • 정신적 빈곤을 용서없이 폭로하고, 이것을 이성만이 지배하는 사회라느니 모든 이에게 행복을 줄 문명의 수립이라느니 하는 과거 계몽 사상가들의 휘황 찬란한 약속, 또 인간의 끝없는 완성 능력이니 뭐니 하는 그들의 선언과 대립하면서 당대 부르주아 사상가들의 허황된 주장의 허구성을 폭로했다. 그리하여 그들의 요란스러운 공치사에 비해 현실이 얼마나 비참한가를 지적하고 이러한 공치사가 완전히 파탄한 데 대해 신랄하게 비웃었다. 푸리에는 비평가일뿐만 아니라, 언제나 낙천적인 성격으로 말미암아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풍자가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혁명이 쇠퇴하면서 성행하던 투기적 사기뿐만 아니라 당시 프랑스 상업 활동에 나타난 일반적인 소상인 근성을 비웃는 문구로 탁월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는 한층 더 훌륭한 솜씨로 남녀 관계의 부르주아적 형태와 부르주아 사회의 여성의 처지를 비판한다. 어느 사회에서나 여성 해방의 정도는 곧 일반적 해방의 자연적 척도라는 사상은 그가 처음으로 내놓은 것이다.18) 그러나 푸리에의 위대한 면은 사회사에 관한 그의 견해에서 가장 명확히 나타나고 있다. 그는 지금까지의 사회사의 모든 과정을 야만, 가부장제, 미개, 문명이라는 네 발전 단계로 나누고 있다. 그가 말하는 문명이란 오늘날의 이른바 부르주아 사회, 따라서 16세기부터 발전하고 있는 사회 질서와 일치하는 것인데, 그는 이를 다음과 같이 논증하고 있다.

 문명 제도는 모든 시대에 단순한 형태로 감행되던 갖가지 죄악에다 복잡하고 애매하고 양면적이고 위선적인 존재 형태를 부여한다.

 또 문명은 '악순환'과 모순에 의해 움직이며, 문명은 이 모순을 늘 재생산하며 그것을 극복할 수 없기 때문에 진심으로건 또는 가식으로건 이루려고 하는 것과는 반대되는 결과에 이른다는 사실을 논증하고 있다.19) 그래서 예컨대, “문명 시대에 빈곤은 부 그 자체에서 생겨난다.”20)는 것이다.
 푸리에도 동시대인인 헤겔과 마찬가지로 능란하게 변증법을 파악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인류의 끝없는 완성 능력이라는 공론(空論)을 반대하여, 역시 변증법적으로 역사 단계에는 상승선과 함께 하강선도 있다는 것을 주장하고21), 이러한 견해를 인류 전체의 장래에 대해서도 적용하고 있다. 칸트가 자연 과학에 지구가 앞으로 멸망한다는 사상을 끌어들인 것과 같이, 푸리에는 역사관에 인류의 장래 멸망이라는 사상을 끌어들이고 있다.
 혁명의 폭풍이 프랑스 전국을 휩쓸고 있을 때, 영국에서는 조용했으나 그에 못지않은 거대한 변혁이 일어나고 있었다. 증기와 새로운 작업기는 매뉴팩처를 현대식 대공업으로 바꾸었으며, 그리하여 부르주아 사회의 모든 기초를 변혁했다. 매뉴팩처 시대의 더딘 발전 과정은 생산에서 그야말로 질풍 노도의 시대로 급변했다. 사회가 대자본가와 무산 프롤레타리아로 더욱 급속히 분열했다. 그리고 둘 사이에서는 구시대의 안정된 중간 계급 대신에 몹시 불안정한 수공업자와 소상인 등의 불안한 대중, 즉 주민 가운데 가장 유동적인 부분이 동요하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새로운 생산 방식은 아직 그 상승 발전의 첫 단계에 들어섰을 뿐이다. 그것은 아직 정상적인, 정당한, 당시의 조건에서 있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생산 방식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당시에 벌써 무서운 사회적 재해를 낳고 있었다. 즉 대도시 빈민굴로 부랑민들이 밀집하고, 출신 성분과 가부장적 풍습과 가족 관계 등에서 온갖 전통이 파괴되고, 특히 부녀와 아동의 노동 시간이 무지막지하게 늘어나며, 완전히 새로운 환경 속으로——즉 농촌으로부터 도시로, 농업으로부터 공업으로, 안정된 생활 조건으로부터 날마다 달라지는 불안한 생활 조건으로——갑자기 들어가게 된 근로 계급이 대량으로 타락하는 것 등이 그것이다. 이때 29세의 한 공장주가 개혁가로서 등장했다. 그는 어린애처럼 순진하고도 고상한 품성을 지녔으며 보기 드물게 타고난 지도자였다. 로버트 오언은 인간의 성격이 타고난 체질의 산물인 동시에 인간의 일생, 특히 그의 발육기의 여러 환경 조건의 산물이라고 하는 유물론적 계몽주의의 학설을 채택했다. 오언과 같은 사회적 지위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산업 혁명을, 단지 흐린 물에서 고기 잡기 좋듯 졸부가 되기에 알맞은 무질서와 혼돈으로밖에는 보지 않았다. 그러나 오언은 산업 혁명을 자신이 동경하는 사상을 실현하여 이 혼돈 속에 질서를 세우기에 좋은 기회로 보았다. 맨체스터에서 이미 그는 500명이 넘는 노동자가 일하는 공장의 지배인으로서 이 사상을 적용하여 성과를 거두었다. 1800년부터 1829년까지, 그는 지배인인 동시에 동업자의 한 사람으로서 스코틀랜드 뉴라나크의 커다란 방직 공장을 관리하는 데서도 똑같은 노선을 취했다. 이번에는 훨씬 더 자유롭게 활동하여 오래지 않아 그의 이름이 전유럽에 알려질 만큼 큰 성과를 거두었다. 뉴라나크의 주민은 점점 늘어나 2500명에 이르렀고, 처음에는 아주 잡다하고 대부분 몹시 타락한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오언은 이를 완전히 모범적인 주민 집단으로 변화시켰다. 여기서는 폭음, 경찰, 형사 재판, 소송 사건, 빈민 구제와 자선 사업 등등이 전혀 필요 없게 되었다. 그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람들을 좀더 인간에 알맞은 환경에 두고 특히 자라나는 세대를 잘 교육하도록 배려했기 때문이다. 오언이 창안한 유치원이 뉴라나크에 처음으로 설치되었다. 거기서는 2세 이상의 어린이들을 받았는데, 어린이들은 이 유치원에서 어찌나 잘 지냈던지 부모들이 그 애들을 집으로 데려가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오언의 경쟁자들은 자기 노동자들에게 매일 13시간 또는 14시간 작업할 것을 강요했는데, 뉴라나크에서는 노동 시간이 10시간 반밖에 되지 않았다. 면화 공황으로 하는 수 없이 4개월간 휴업하게 되었을 때에도 휴업 노동자들에게 임금의 전액을 계속 지불했다. 그런데도 공장의 가치는 2배 넘게 늘어났고 끝까지 소유자에게 많은 이득을 보장했다.
 그러나 오언은 결코 만족하지 않았다. 그가 자기 노동자들을 위해 만들어 준 생활 조건도 그의 눈에는 아직 인간에 알맞은 것이 아니었다.

 그 사람들은 나의 노예였다.

 그가 말한 것은, 자신이 뉴라나크 노동자들에게 만들어 준 비교적 좋은 조건이란, 자유로운 생산 활동은 제쳐놓고라도 그들의 성격과 지능을 올바르고도 전면적으로 발전시키는 데 아직 대단히 불충분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2500명의 노동 부대는 사회를 위해, 불과 반세기 전에는 60만 명을 가지고서야 겨우 생산할 수 있었던 대량의 현실적 부를 만들어 냈다. 나는 나 자신에게 물었다. 2500명이 소비하는 부와 60만 명이 소비했을 부의 차액은 어디로 갔느냐고.

 대답은 명백했다. 그 차액은 기업에 투하된 자본에 대한 5%의 이자와, 그 밖에도 30만 파운드가 넘는 이득을 얻은 공장 소유주들의 주머니에 들어갔다. 이 사실은 뉴라나크에서보다 훨씬 더 크게 영국의 다른 모든 공장들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기계에 의해 만들어진 이 새로운 부가 없었다면, 나폴레옹을 타도하고 귀족적 사회 제도의 원칙을 보존하기 위한 전쟁을 진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새로운 힘은 노동자 계급의 창조물이었다.❦

 따라서 그 성과도 반드시 노동자 계급에게 돌아가야 할 것이었다. 지금까지 다만 개인의 부유와 대중의 예속화에 봉사해 온 데 지나지 않은 이 새로운 강대한 생산력이 오언에게는 사회 개조의 기초로 생각되었으며, 따라서 그것은 반드시 모든 이의 공동 재산으로서 모든 이의 공동 복리를 위해서만 쓰여야 할 것이었다.
 이러한 순전히 실무적인 원칙 위에서, 말하자면 상인적 계산의 결과로서 오언의 공산주의가 생겨났다. 그는 자기의 이러한 실천적 성격을 언제 어디서나 지니고 있었다. 예컨대 1823년에 오언은 공산주의 이민지를 창설하여 아일랜드의 빈궁을 없앨 안을 작성하고, 거기에 필요한 투자액, 매년 지출과 수입 예상액에 관한 상세한 계산서를 덧붙였.22) 오언은 미래의 제도에 대한 자기의 마지막 계획23)에서 평면도와 정면도, 조감도에 이르기까지 모든 기술적 세목을 작성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깊은 전문적 지식을 바탕으로 수행되었기 때문에, 일단 그의 사회 개조 방법이 채용된다면 심지어 전문가의 입장에서도 그 세목에 대해 반박할 수 없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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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신과 실천에서의 혁명』(The Revolution in Mind and Practice)에서 인용한 것. 이것은 ‘유럽의 모든 적색(赤色) 공화주의자,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에게 호소하는 의견서로서, 1848년 프랑스 임시 정부에 보내졌으며, '빅토리아 여왕과 그녀의 책임 있는 조언자들'에게도 보내졌다. ❦


 공산주의로 옮아 간 것은 오언의 생애에서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그가 단순히 박애주의에 머물렀던 동안, 그는 오직 부와 칭송과 존경과 명예를 거두었을 뿐이다. 그는 유럽에서 가장 명성 높은 사람이었다. 그와 비슷한 사회적 처지에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정치가들과 군주들까지도 그의 말에는 호의를 가지고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공산주의 이론을 들고 나타나자 사태는 급변했다. 그의 의견에 의하면 사회 변혁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세 개의 큰 장애물, 즉 사적 소유, 종교, 현존 결혼 제도였다. 이러한 장애물과 투쟁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는 자기가 공적인 사회에서 배척당하고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잃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오언은 이 점을 고려해서 그 장애물에 대한 자신의 가차없는 공격을 멈출 수는 없었다. 그리고 바로 그가 예견했던 그대로 되었다. 공적인 사회에서는 내쫓기고 신문에서는 묵살되었으며, 자신의 모든 재산을 희생하여 미국에서 실시해 본 공산주의적 실험에 실패한 결과 가난해진 오언은 직접 노동자 계급에 의거하여 그들 속에서 30년 동안이나 활동을 계속했다. 노동자 계급의 이익을 위해 영국에서 진행된 모든 사회 운동과 이 사회 운동의 모든 실제 성과는 오언의 이름과 연결되어 있다. 예컨대 1819년에는, 5년간에 걸쳐 그가 애쓴 덕택에 공장에서의 여성과 아동 노동을 제한하는 최초의 법안이 통과되었다.24) 그는 영국의 모든 노동 조합이 하나의 노동 총동맹으로 결집한 제1차 대회의 의장이었다.25) 또 그는 완전히 공산주의적인 사회 조직으로 넘어가기 위한 과도적 방책으로, 한편으로는 협동 단체(소비 조합과 생산 조합)를 조직했다. 이것은 그 뒤 적어도 상인이나 공장주들이 사회적으로 전혀 필요 없다는 것을 실천적으로 증명했다. 또 다른 한편으로 그는 노동자 시장26)을 조직했는데 여기서는 노동 시간 한 시간을 단위로 하는 노동 증권으로 노동 생산물이 교환되었다. 이 시장은 어쩔 수 없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훨씬 뒤에 나타난 프루동17*의 교환 은행27)의 선구자였으며, 그 차이점은 전자가 모든 사회악에 대한 만능약으로서 나타난 것이 아니라 단지 사회 전체를 훨씬 더 급진적으로 개혁해 나갈 하나의 첫 조치로 제시되었을 따름이라는 점이다.
 이 공상가들의 사고 방식은 19세기 사회주의 사상을 오랫동안 지배했으며 또 부분적으로는 지금까지도 지배하고 있다. 최근에 이르기까지 프랑스와 영국의 사회주의자들, 그리고 바이틀링18*을 포함한 이전의 독일 공산주의는 이 사고 방식을 따르고 있었다. 그들 모두에게 사회주의는 절대적 진리 • 이성 • 정의의 표현으로서, 발견되기만 하면 그 자체의 힘으로 전세계를 정복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절대적 진리는 시간과 공간과 인류 역사 발전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 그것이 발견될 것인가는 실로 순전히 하나의 우연으로 여겨졌다. 동시에 절대적 진리와 이성과 정의도 각 학파의 창시자에 따라 서로 다르며, 각 학파 창시자의 절대적 진리 • 이성 • 정의의 특수한 형태는 그 학파 창시자의 주관적인 오성 • 생활 조건 • 인식의 넓이와 사고의 발전 정도에 따라 제약되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와 같은 절대적 진리들간에 충돌이 있을 때 이 충돌은 그 서로간의 차이를 마멸시킴으로써만(즉 절충과 타협으로만) 해결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한 사고 방식에서는, 오늘날까지도 프랑스와 영국의 대다수 사회주의 노동자들의 머리를 사실상 지배하고 있는 특수한 종류의 절충적이고 평균적인 사회주의 이외에 아무것도 나올 수 없었다. 이 절충적 사회주의는 갖가지 분파 창시자들의 더 온건한 비판적 논평, 경제학적 명제와 미래 사회관이 마구 뒤섞인, 갖가지 색채로 가득 찬 혼합물이었다. 이 혼합물은 그 각 구성 부분이 논쟁의 물결 속에서 마치 시내의 조약돌처럼 그 날카로움을 잃으면 잃을수록 더욱 쉽게 얻어진다.
 사회주의를 과학으로 만들려면 우선 그것을 현실의 토대 위에 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데 18세기의 프랑스 철학과 나란히, 또 그것에 뒤이어 헤겔에게서 완결되는 근대 독일 철학이 발전했다. 이 근대 독일 철학의 가장 위대한 공적은 사유의 최고 형식인 변증법을 되살린 것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모두 타고난 변증법 논자들이었다. 그 가운데서 가장 박식한 학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19*는 이미 변증법적 사유의 가장 본질적인 형식들을 연구했다. 반대로 근세 철학은 그 가운데 변증법의 탁월한 대표자들(예를 들면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이 있기는 했으나, 특히 영국 철학의 영향을 받아 이른바 형이상학적 사고 방식으로 점점 빠져 들어갔다. 18세기의 프랑스인들 또한 적어도 그들의 특수한 철학적 노작들20*에서는 거의 전적으로 이 형이상학적 사고 방식에 지배되고 있었다. 그러나 고유한 의미의 철학 밖에서는 그들도 변증법의 걸작을 내놓을 수 있었다. 디드로의 『라모의 조카』28)와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상기하면 된다. 여기서는 간단히 이 두 사고 방식의 본질을 논해 보기로 하자.
 우리가 자연이나 인류 역사 또는 우리들 자신의 정신 활동을 가만히 고찰해 볼 때, 우리 앞에 우선 나타나는 것은 연관과 상호 작용의 끝없이 복잡한 화폭이다. 거기에서는 움직이지 않고 변하지 않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으며, 모든 것이 운동하고 변화하며 발생하고 소멸한다. 따라서 우리는 우선 전체를 보게 되며 부분은 잠시 뒤로 미루어 둔다. 우리는 바로 무엇이 운동하고 이행하며 연관 속에 있는가에 대해서보다도 운동과 연관 자체에 더 많은 주의를 돌리게 된다. 원시적이고 소박하기는 하나 본질상 정확한 이 세계관은 고대 그리스 철학에 고유한 것으로, 그것을 비로소 명백하게 표현한 사람이 헤라클레이토스21* 다. 그는 모든 것은 존재하며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데, 그것은 모든 것이 유전(流轉)하며 끊임없이 변화하고 끊임없이 발생과 소멸의 과정에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 견해가 현상들의 화폭 전체의 일반적 성격을 올바르게 파악하고 있기는 하나, 이 화폭을 이루고 있는 부분들을 설명하기에는 역시 충분하지 못하다. 그런데 우리가 이 부분들을 알지 못하는 한, 우리에게는 화폭 전체도 명료하지 않다. 이 부분들을 인식하자면 그것을 자연적 또는 역사적 연관에서 떼어 내어 속성에 따라, 특수한 원인과 결과 등등에 따라 하나하나 개별적으로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연 과학과 역사 연구의 임무는 무엇보다도 이 점에 있다. 그런데 이 과학 부문들은 고대 그리스 인들에게서는 부차적인 위치밖에 차지하지 못했으며, 그 이유는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왜냐하면 그리스 인들은 우선 연구에 필요한 자료를 쌓아야 했기 때문이다. 자연 과학적 또는 역사적 자료가 어느 정도 수집된 뒤에야 비로소 비판적 취사 선택, 비교, 또 이에 따른 강(綱), 목(目), 종(種)으로의 구분에 착수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정밀한 자연 연구의 실마리는 처음에는 오직 알렉산드리아 시대29)의 그리스 인들에게서, 다음에는 중세기의 아라비아인에게서나 발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참된 자연 과학은 15세기 후반에야 비로소 시작되었으며, 그때부터 그것은 점점 가속적으로 끊임없이 성과를 거두었다. 자연을 개별 부분으로 분해하는 것, 각종 자연 과정과 자연 사물을 일정한 부류로 분류하는 것, 유기체의 내부 구조를 다양한 해부학적 형태에 따라 연구하는 것, 이 모든 것은 최근 400년간에 자연 과학의 발전이 거둔 거대한 성과의 기본 조건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 방법은 동시에, 자연 사물과 자연 과정을 커다란 총체적 연관 밖에서 고립적으로, 따라서 운동이 아니라 정지 상태에서, 본질적으로 변화하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영원히 변화하지 않는 것으로서, 산 것으로서가 아니라 죽은 것으로 고찰하는 습관을 우리에게 남겨 놓았다. 베이컨(Bacon)과 로크22*가 자연 과학으로부터 철학에 도입한 이러한 인식 방법은 최근 수세기의 특별한 편협성, 즉 형이상학적 사고 방식을 만들어 냈다.
 형이상학자가 보기에 사물과 그것이 사유 속에 반영된 영상, 즉 개념은 하나하나씩 또 따로따로 연구되어야 할 개별적이며 변하지 않고 고정된, 한번 주어지면 그만인 대상이다. 형이상학자는 절대적인 대립 가운데서 사고한다. 그의 말은 “옳은 것은 옳다 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 말하라. 무엇이든지 이를 벗어난 것은 악에서 나오느니라.”(마태 복음 제5장 제37절)이다. 형이상학자가 보기에 사물은 존재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거나 어느 한 가지다. 마찬가지로 또 사물은 그 자체인 동시에 다른 것일 수는 없다. 긍정과 부정은 절대적으로 서로 배제하며, 원인과 결과 또한 서로 고정된 대립 속에 있다. 이와 같은 사고 방식은 이른바 상식적인 사고 방식이므로, 언뜻 보기에는 아주 명백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인간 상식은 벽으로 둘러싸인 가정 생활에서는 대단히 존경할 만한 동반자일 것이나, 넓은 영역에 나서 보면 아주 놀라운 모험을 하게 된다. 형이상학적 인식 방법은 대상의 성격에 따라, 넓든 좁든 어떤 영역 안에서는 정당하고 또 필요하기조차 할 것이나, 얼마 안 있어 반드시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이 한계를 넘으면 그것은 일면적이고 국한되고 추상적인 것이 되며 해결할 수 없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왜냐하면 이 인식 방법은, 개별 사물 때문에 그것들의 상호 연관을 보지 못하고, 그것들의 존재 때문에 발생과 소멸을 보지 못하며, 그것들의 정지 상태 때문에 운동을 잊어버리고, 나무만 보지 숲은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리는, 일상생활에서는 어떤 동물이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으나, 좀더 정밀하게 연구할 때는, 태아 살해가 살인으로 인정될 수 있는 합리적인 한계를 발견코자 헛되이 애써 온 법률가들이 매우 잘 알고 있는 것처럼, 그것이 대단히 복잡한 문제라는 것을 종종 깨닫게 된다. 생리학은 죽음이 돌발적이고 순간적인 현상이 아니라 대단히 긴 과정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만큼, 죽음의 순간 또한 규정할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모든 생물체는 각 순간마다 같은 것이며, 또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각 순간마다 외부에서 섭취한 물질을 동화(同化)하고 자체로부터 다른 물질을 배설하며, 또 각 순간마다 유기체의 어떤 세포들은 죽고 새 세포들이 형성된다. 그리하여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난 뒤에는 이 유기체의 물질은 완전히 갱신되어 다른 원자로 바꾸어진다. 그러므로 모든 생물체는 언제나 같은 것이면서도 같은 것이 아니다. 좀더 면밀히 연구해 볼 때 우리는 또한, 어떤 대립물의 양극——긍정과 부정——은 서로 대립하면서 동시에 서로 나누어질 수 없다는 것, 그것들은 그 둘 사이의 모든 대립에도 불구하고 서로 침투한다는 것을 보게 된다. 또 원인과 결과는 오직 주어진 개별적인 경우에 적용될 때에만 원인과 결과로서 의의를 갖는 개념이라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개별적인 경우를 세계 전체와의 일반적 연관에서 고찰하자마자, 원인과 결과는 계속 그 위치를 바꾸는 보편적 상호 작용 가운데서 서로 겹치고 얽히게 된다. 즉 여기서 또는 지금은 원인인 것이, 거기서 또는 그때에는 결과가 되며, 또는 이와 반대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과정과 이러한 사고 방법은 모두 형이상학적 사유의 틀에는 맞지 않는다. 이와 반대로 사물과 그것의 개념적 반영을 주로 상호 연관에서, 연쇄에서, 운동에서, 발생과 소멸에서 파악하는 것을 본질로 하는 변증법으로 보면,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은 과정은 변증법 자체의 고유한 연구 방법을 확증하고 있을 따름이다. 자연은 변증법을 검증하는 시금석이다. 분명히 말해 두어야 할 점은, 현대 자연 과학은 이러한 검증을 위해 아주 풍부하고 나날이 늘어나는 재료를 제공했으며, 그리하여 자연계에서는 결국 모든 것이 형이상학적으로가 아니라 변증법적으로 진행된다는 것, 자연계는 영원히 똑같고 늘 되풀이되는 순환 가운데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역사를 거친다는 것을 증명했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는 누구보다도 먼저 다윈을 들어야겠다. 그는 현재의 모든 유기체, 즉 식물과 동물, 따라서 인간 또한 수백만 년 계속된 발전 과정의 산물이라는 것을 증명 함으로써 형이상학적 자연관에 강력한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변증법적으로 사유할 줄 아는 자연 과학자는 손꼽을 만큼 적기 때문에 이룩한 성과와 인습적인 사고 방식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현재 이론적 자연 과학을 지배하고 있는 끝없는 혼란, 교사나 학생, 필자나 독자를 다같이 절망에 빠뜨리는 끝없는 혼란은 모두 이런 충돌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주와 그 발전에 관한, 인류 발전에 관한, 따라서 또 이 발전이 인간 두뇌에 반영되는 것에 관한 정확한 관념은 오직 변증법적 방법으로써만, 발전과 소멸, 즉 전진적 변화와 퇴행적 변화 사이의 일반적 상호 작용을 계속 고찰함으로써만 획득될 수 있다. 근대 독일 철학은 처음부터 바로 이러한 정신을 가지고 나타났던 것이다. 칸트는 뉴턴의——이른바 맨 처음의 충격이 한번 가해진 뒤에는——태양계를 하나의 역사적 과정으로, 즉 선회하는 성운(星雲)에서 태양과 모든 유성들이 생겨나는 과정으로 바꿈으로써 자신의 과학적 활동을 개시했다. 이때 그는 벌써 태양계의 발생이 장래의 필연적 멸망을 전제로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의 견해는 반세기 뒤에 라플라스에 의해 수학적으로 입증되었으며, 또 반세기 뒤에는 작열하는 가스 덩어리가 밀도를 각각 달리해 우주 공간에 존재한다는 것이 분광기에 의해 증명되었다.30)
 이 근대 독일 철학은 헤겔의 체계에서 완성되었다. 헤겔의 위대한 공적은, 그가 처음으로 자연 • 역사 • 정신적 세계 전체를 한 과정으로, 즉 끊임없는 운동 • 변화 • 전화 • 발전으로 보았으며 또 이 운동과 발전의 내적 연관을 해명하려고 시도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본다면 이제 인류의 역사가 오늘의 성숙한 철학적 이성의 심판 앞에서 그저 일률적으로 단죄되고, 될수록 빨리 잊혀야 할 무의미한 폭력의 조잡한 혼돈으로 보이지는 않게 되었다. 반대로 인류 역사는 인류 자체의 발전 과정으로서 나타났다. 그리하여 이제 이 과정의 모든 미로 속에서 그 연속된 단계들을 추적하며, 겉으로 드러나는 모든 우연성 속에서 이 과정의 내적 합법칙성을 증명하는 것이 사유의 과제가 되었다.
 우리는 헤겔의 체계가 스스로 내세운 이 과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크게 괘념치 않아도 좋다고 본다. 이 체계의 역사적 공적은 이 과제를 제기한 점에 있다. 이런 과제를 혼자서 해결할 수는 도저히 없는 것이다. 헤겔은 생 시몽과 함께 당시 가장 해박한 사람이었으나, 어쨌든 그는 첫째로 자기 자신의 지식이 지닌 피할 수 없는 한계로 말미암아, 둘째로 범위와 깊이에서 또한 국한되어 있는 그 시대의 지식과 견해로 말미암아 제약을 받고 있었다. 이 밖에 또 세 번째 사정이 있었다. 헤겔은 관념론자였다. 즉 그가 보기에는 우리 두뇌의 관념이 많든 적든 현실의 사물과 과정의 추상적인 반영이 아니라, 오히려 사물과 그것의 발전이란 다만 이미 세계가 생겨나기 전에 어딘가 존재하고 있던 ‘이념’이라는 것이 현실화하여 반영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머리로(거꾸로) 세워졌고, 세계 현상의 현실적 연관이 헤겔에 의해 아무리 정확하게 또 천재적으로 파악되었 다 해도 그의 체계의 세세한 부분에서는, 앞에서 말한 이유 때문에 마찬가지로 아전 인수 격이고 인공적이며 허구적인 것으로, 한마디로 말하면 왜곡된 것으로 될 수밖에 없는 점이 많이 있었다. 헤겔의 체계 자체는 하나의 거대한 유산(流産)이었으나, 그 대신 그러한 체계로서는 마지막의 것이기도 했다. 즉 그것은 아직 구원할 수 없는 내적 모순으로 앓고 있었다. 왜냐하면, 한편으로는 인류 역사를 하나의 발전 과정으로 보는 견해, 즉 이른바 절대적 진리의 발견을 통해서 지적 완결에 이르렀다고 보지 않는 견해가 이 체계의 본질적인 전제로 되어 있었는데,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체계가 바로 이 절대적 진리의 완결이라고 자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과 역사에 관한, 전체를 포괄하며 마침내 완결된 인식 체계라는 것은 변증법적 사유의 기본 법칙과 모순된다. 변증법적 사유의 기본 법칙은 외부 세계 전체에 대한 체계적 인식이 세대가 바뀜에 따라 거대하게 진보할 수 있다는 것을 결코 배제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그것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독일 관념론이 완전히 잘못된 것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유물론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물론 단순히 18세기의 형이상학적인, 따라서 전적으로 기계적인 유물론에 이른 것은 아니었다는 점을 지적해야 하겠다. 과거의 모든 역사를 소박한 혁명적 태도로 간단히 배척해 버리는 것과는 반대로, 현대 유물론은 역사를 인류의 발전 과정으로 보고 이 과정의 운동 법칙을 발견하는 것을 자기 과업으로 삼는다. 18세기의 프랑스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아직 헤겔의 경우에도 자연이란 뉴턴이 가르친 영원한 천체들과 린네23*가 가르친 변하지 않는 유기체의 종(種)들로 이루어진, 똑같고도 제한된 원 안에서 운동하는 늘 변하지 않는 하나의 총체라고 보는 자연관이 지배하고 있었다. 이러한 자연관과는 반대로 현대 유물론은 자연 과학의 최신 성과를 개괄한다. 이에 따르면 자연도 또한 시간상의 자기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천체 또한 환경이 적합하여 거기에 살고 있는 모든 종류의 유기체들과 마찬가지로 생겨나며 또 소멸한다. 그리고 순환은——그것이 일어날 수 있는 한——끝없이 더 거대한 규모로 된다. 이 둘 가운데 어느 경우에도 현대 유물론은 본질상 변증법적이어서 다른 과학 위에 군림하는 철학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모든 사물과 사물에 관한 지식 사이의 일반적 연관 속에서 자신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밝힐 필요가 모든 개별 과학 앞에 제기됨에 따라, 이 일반적 연관에 관한 과학이 따로 필요하지는 않게 된다. 그래서 종래의 온갖 철학 가운데서 아직 독자적인 의의를 지니는 것은 사유와 사유 법칙에 관한 학문, 즉 형식 논리학과 변증법이다. 그 밖의 모든 것은 자연과 역사에 관한 실증 과학 속에 동화되고 만다.
 그러나 앞에서 서술한 자연관의 변혁은 필요한 실증적 인식 재료가 연구에 의해 제공됨에 따라서만 일어날 수 있었으나, 역사관에 결정적 변혁을 일으키게 한 역사적 사건들은 이미 훨씬 전에 일어났다. 1831년 리용에서 노동자 폭동이 처음으로 일어났고 1838〜1842년에는 최초의 전국적 노동 운동인 영국 차티스트들의 운동이 절정에 이르렀다. 한편으로는 대공업이, 다른 한편으로는 얼마 전에 쟁취된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지배가 발전함에 따라,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 사이의 계급 투쟁이 유럽 선진 국가들에서 역사의 전면에 나타났다.
 여러 사실들은 자본의 이해 관계와 노동의 이해 관계가 같다느니, 자유 경쟁의 결과로 반드시 전반적 조화와 민중의 전반적 복지가 찾아 온다느니 하는 부르주아 경제 학설의 모든 허구성을 더욱더 명료하게 폭로했다. 이러한 사실들은 이미 무시할 수 없게 되었으며, 또 비록 아주 불완전하기는 하나 이러한 사실들을 이론적으로 표현한 프랑스와 영국의 사회주의도 마찬가지로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 청산되지 않은 낡은 관념론적 역사관은, 물질적 이해 관계에 기초를 둔 계급 투쟁을 알지 못했으며, 대체로 어떤 물질적 이해 관계도 알지 못했다. 생산과 모든 경제 관계는 '문화사'의 부차적인 요소로서 단지 부차적으로만 언급되었을 뿐이다.
 새로운 사실들로 인해 종래의 모든 역사를 새로 연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원시 상태를 뺀 과거의 모든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였다는 것, 서로 투쟁하는 사회 계급들은 해당 시기의 생산 관계와 교환 관계, 한마디로 말하면 그 시대의 경제 관계의 산물이라는 것, 따라서 해당 시기의 사회 경제적 구조가 실재적 토대를 이루며, 어떤 역사적 시기의 법률 • 정치적 제도와 종교 • 철학적 및 그 밖의 견해의 상부 구조 전체는 결국 이 토대를 바탕으로 설명된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헤겔은 역사관을 형이상학에서 해방해 변증법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의 역사관은 본질적으로 관념론이었다. 이제 관념론은 그 마지막 피난처인 역사관에서조차 내쫓기고 유물 사관이 수립되었으며, 이전과 같이 인간의 존재를 그의 의식에서 설명하는 대신에 인간의 의식을 그의 존재에서 설명하는 방법이 발견되었다.
 그러므로 이제는 사회주의를 이러저러한 천재적 두뇌의 우연한 발견으로서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생겨난 두 계급,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의 투쟁이 낳은 필연적 결과로 보게 되었다. 사회주의의 임무는 되도록 완전한 사회 제도를 구상해 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계급들과 그들 사이에 투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게 하는 역사 • 경제적 과정을 연구하는 데 있으며, 그 과정에 의해 조성된 경제적 상태에서 충돌을 해결할 수단을 발견하는 데 있다. 그러나 이전까지 사회주의는, 프랑스 유물론자들의 자연관이 변증법이나 최신 자연 과학과 양립할 수 없었던 것처럼, 마찬가지로 이 유물 사관과는 양립할 수 없었다. 이전의 사회주의는 비록 현존하는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과 그 결과를 비판하기는 했으나 그것을 설명할 수 없었고, 따라서 그것을 끝장낼 수도 없었다. 그것은 다만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을 나쁜 것이라고 비난할 수 있었을 뿐이다. 이전의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에서는 피할 수 없는 노동자 계급에 대한 착취에 격분하면 할수록, 이 착취가 어떤 것이며 또 그것이 어떻게 생겨나는가를 명확하게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과제는 한편으로는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의 발생이 그 역사적 연관에서 피할 수 없으며 따라서 어떤 역사적 시기에는 필연적이라는 것, 따라서 그 몰락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아직 밝혀지지 않은 이 생산 양식의 내적 성격을 폭로하는 것이다. 이것은 잉여 가치의 발견으로 이루어졌다. 대가가 지불되지 않는 노동의 점유가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과 이 생산 양식으로 실현되는 노동자 착취의 기본 형태라는 것, 자본가는 노동력이 상품으로서 상품 시장에서 갖는 가치를 그대로 다 지불하고 사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이 노동력에 지불한 것보다 더 많은 가치를 거기서 짜 낸다는 것, 그리고 이 잉여 가치가 결국은 유산 계급에 의한 축적을 통해 계속 늘어나는 자본량의 원천이 되는 가치액이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리하여 자본주의적 생산은 어떻게 수행되며 또 자본은 어떻게 생산되는가가 설명되었다.
 이 두 가지의 위대한 발견——유물 사관과 잉여 가치로 자본주의적 생산이 지니는 비밀을 폭로한 것——은 마르크스의 공적이다. 이 발견으로 사회주의는 하나의 과학이 되었다. 이제는 무엇보다도 이 과학을 모든 세세한 부분에 걸쳐서 또 모든 상호 연관 속에서 앞으로 더욱 완성해 나가는 것이 문제다.





 유물 사관은 생산, 그리고 생산에 뒤따르는 생산물의 교환이 온갖 사회 제도의 기초를 이룬다는 명제에서 출발하며 역사상의 모든 사회에서 생산물의 분배라든가, 또 이와 함께 계급이나 신분으로 사회가 분열되는 것 등은 무엇이 어떻게 생산되며 그 생산물이 어떻게 교환되는가에 의해 결정된다는 명제에서 출발한다. 그러므로 모든 사회 변동과 정치 변혁의 궁극 원인은 인간의 두뇌 속에서, 즉 영원한 진리와 정의에 대한 인간의 늘어가는 이해 속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생산 양식과 교환 방식의 변화에서 찾아야 하며, 철학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경제에서 찾아야 한다.24* 현존 사회 제도들이 합리적이지 않고 공정하지 않다든가 또는 “이성은 의미 없게 되고 행복은 고통이 되었다.”든가 하는 견해가 퍼져 가고 있다는 것은, 생산 양식과 교환 방식에 어느덧 변동이 일어나서 지난 시기의 경제 조건에 적합하던 사회 제도가 이제는 이미 이 변동에 적응하지 못하게 되었음을 말해 주는 징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타난 그 재앙을 없애기 위한 수단도 또한 이 변화된 생산 관계 자체에——많건 적건 발전한 형태로——틀림없이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이러한 수단을 두뇌 속에서 생각해 낼 것이 아니라, 두뇌의 힘을 빌려 현존하는 생산의 물질적 사실들 속에서 발견해 내야 한다.
 그러면 현대 사회주의는 이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지금은 거의 모두가 인정하는 바와 같이, 현존 사회 제도는 오늘날의 지배 계급인 부르주아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마르크스 이래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이라고 불려 오는 부르주아지의 고유한 생산 양식은 봉건 제도 안의 지방 • 신분적 특권이나 사람들 서로간의 인격 • 예속적 관계와는 양립할 수 없었다. 부르주아지는 봉건 제도를 파괴하고 그 폐허 위에 부르주아적 사회 제도, 즉 자유 경쟁, 이주의 자유, 상품 소유자의 평등권 등 요컨대 부르주아적 행복의 나라를 수립했다. 이제는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이 자유로이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 증기와 새로운 작업기가 낡은 매뉴팩처를 대공업으로 변화시킨 이래 부르주아지의 관리로 조성된 생산력은 유례없는 속도와 미증유의 규모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찍이 매뉴팩처와 그 영향을 받으며 발전한 수공업이 동업 조합이라는 봉건적 질곡과 충돌하게 된 것처럼, 대공업도 더 높은 발전 단계에 이르러서는 자기를 틀어박 아 두고 있는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이라는 좁은 틀과 충돌하게 된다. 새로운 생산력은 이미 그것의 부르주아적 이용 형식을 벗어날 만큼 성장했다. 그리고 생산력과 생산 양식 사이의 이 충돌은 결코 인간의 원죄와 신의 공정성 사이의 충돌처럼 한갖 사람들의 머리 속에서만 생겨난 충돌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즉 우리 밖에서, 이 충돌을 담당하고 수행하는 그 사람들 자신의 의사나 행동으로부터 독립해 현실적으로 존재한다. 현대 사회주의는 이 사실상의 충돌이 사유에 반영된 것에 지나지 않으며, 무엇보다도 먼저 이 충돌 때문에 직접 고통받는 계급인 노동자 계급의 머리 속에 반영된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면 이 충돌이란 어떤 것인가?
 자본주의적 생산이 출현하기 전, 즉 중세에는 생산자가 자기의 생산 수단을 사적으로 소유하는 데 기초를 둔 소생산이 곳곳에 존재했다. 즉 농촌에는 자유롭든 예속적이든간에 소농(小農)의 경영이 있었고 도시에는 수공업이 있었다. 노동 수단——토지, 농기구, 작업장, 손도구——은 개인의 노동 수단으로서 오직 혼자 쓰는 것만을 고려한 것이었으며, 따라서 당연히 작고 빈약하고 제한된 것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런 이유로 노동 수단은 일반적으로 생산자 자신의 것이었다. 이 분산된 소규모의 생산 수단을 모으고 통합하여 그것을 생산의 현대적 인 강력한 지렛대로 바꾸는 것,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과 그 담당자인 부르주아지의 역사적 역할이었다. 부르주아지가 15세기 이래 단순 협업, 매뉴팩처, 대공업 등 세 가지의 서로 다른 생산 단계에 걸쳐 이 역할을 역사적으로 수행해 온 정형을 마르크스는 『자본론』 제4편에서 상세히 묘사했다. 그러나 부르주아지는——마르크스가 같은 책에서 입증한 바와 같이——생산 수단을 각 개인이 사용하는 생산 수단으로부터 사람들의 집단이 공동으로 쓸 수 있는 즉 사회적 생산 수단으로 바꾸지 않고서는, 그 제한된 생산 수단을 강력한 생산력으로 바꿀 수 없었다. 물레 • 베틀 • 조잡한 망치 대신에 방적기 • 방직기 • 증기 망치가 나타났으며, 개인 작업장 대신에 수백 수천 노동자의 공동 노동이 필요한 공장이 나타났다. 생산 수단과 마찬가지로 생산 자체도, 일련의 분산적 행동에서 일련의 사회적 행동으로 바뀌었으며, 생산물도 각 개인의 생산물에서 사회적 생산물로 바뀌었다. 현재 공장에서 나오는 실 • 옷감 • 금속 제품은 많은 노동자들의 공동 노동의 산물로서, 그것이 마침내 완제품이 되어 나오기까지는 많은 노동자들의 손을 차례로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느 누구도 이러한 물품들에 대해서 “이것은 내가 만들었다. 이것은 내 생산물이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회 안에서 아무런 계획 없이 점점 생겨난 분업이 생산의 기본 형태인 곳에서는, 분업은 반드시 생산물에다 상품의 형태를 부여한다. 이 상품의 상호 교환, 즉 구매와 판매를 통해 개별 생산자들은 자신의 갖가지 욕망을 채울 수 있다. 중세의 형편이 바로 그러했다. 예컨대 농민은 농산물을 수공업자에게 팔고 그에게서 수공업 제품을 사다 썼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개별 생산자들, 즉 상품 생산자들의 사회에 새로운 생산 양식이 끼어들게 되었다. 이 생산 양식은 사회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자연 발생적이고 무계획적인 분업의 한가운데다가 개별 공장 안에 조직된 계획적 분업을 확립했다. 개인적 생산과 나란히 사회적 생산이 나타났다. 이 둘의 생산물은 같은 시장에서 판매되었고 따라서 가격은 대체로 거의 같았다. 그러나 계획적 조직은 자연 발생적 분업보다 강력했다. 사회적 노동을 적용하는 공장은 분산된 소생산자들보다 생산물을 더 싸게 생산했다. 개별 생산자들의 생산은 한 부문 한 부문씩 연달아 패배당하고, 사회적 생산이 모든 낡은 생산 방식을 변혁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회적 생산의 이러한 혁명적 성격은 거의 의식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상품 생산을 강화하고 확대하려는 수단이 되었다. 사회적 생산은 이미 이전부터 존재해 오던 상품 생산과 상품 교환의 일정한 공간, 즉 상인 자본, 수공업, 임금 노동과의 직접적 연관에서 생겨났다. 사회적 생산 그 자체가 상품 생산의 새로운 형태로서 나타났기 때문에, 상품 생산에 고유한 점유 형태는 이 생산에서도 마찬가지로 그대로 보존되었다.
 중세에 발전한 바와 같은 소상품 생산 형태에서는, 노동 생산물이 누구의 것이 되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전혀 제기되지 않았다. 각 생산자들은 자신이 소유한 원료, 때로는 자신이 생산한 원료로 자신의 노동 수단과 자신의 손 또는 자기 가족의 손을 사용하여 생산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산자에게는 자신의 생산물을 점유한다는 것이 의미가 없었다. 생산물은 자연히 그의 것이 되었다. 따라서 생산물의 소유권은 자기 자신의 노동에 기초를 둔 것이었다. 심지어 다른 사람의 노력이 이용되는 경우에도 그것은 보통 부차적 역할을 하는 데 지나지 않았으며, 또 번번이 임금 이외의 다른 방도로도 보상되었다. 동업 조합의 도제와 직인은 생계를 꾸리고 보수를 얻기 위해서보다는 독립적인 장인 자격을 얻으려고, 즉 자기 자신의 수련과 준비를 위해 일했던 것이다. 그런데 생산 수단이 대규모 작업장과 매뉴팩처에 집중되어 사실상 사회적 생산 수단이 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사회적 생산 수단과 생산물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각 개인의 생산 수단과 생산물처럼 취급되었다. 과거에 노동 수단의 소유자가 생산물을 점유했던 것은, 그것이 일반적으로 자신의 생산물이고 다른 사람의 보조적 노동은 예외였기 때문이지만, 지금에 와서는 생산물이 이미 자신의 생산물이 아니라 순전히 다른 사람의 노동의 생산물인데도 노동 수단의 소유자가 그것을 계속 점유했다. 그리하여 생산 수단을 실제로 가동한 사람, 실제로 이 생산물을 생산한 사람들이 아니라 자본가가 사회적 노동의 생산물을 점유하게 되었다. 생산 수단과 생산은 본질에서 사회적인 것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개별 생산자의 사적(私的) 생산을 전제로 하며, 따라서 각자가 자기 생산물의 소유자로서 그것을 시장으로 가지고 나오는 그러한 점유 형태에 종속되어 있었다. 생산 양식은 이러한 점유 형태의 전제를 폐기하고 있는데도 아직 그러한 점유 형태에 종속되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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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점유(취득) 형태는 그대로 남아 있다 하더라도, 점유의 성격은 위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생산에 못지않게 변혁된다는 것을 여기서 설명할 필요는 없다. 내가 나 자신의 생산물을 점유(취득)하는가, 아니면 다른 사람의 생산물을 점유(취득)하는가 하는 것은 물론 매우 다른 두 종류의 점유 형태다. 게다가 임금 노동 속에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 전체가 맹아로서 포함되어 있지만, 이 임금 노동은 매우 오래 전부터 존재한 것이다. 이것은 여러 세기 동안, 노예 제도와 더불어 우연적이고 고립적인 형태로 존재했다. 그렇지만 이 맹아는 역사적인 여러 조건이 성숙한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


새로운 생산 양식으로 하여금 자본주의적 성격을 띠게하는 바로 이 모순에 현대의 모든 충돌의 맹아가 이미 포함되어 있다. 결정적인 모든 생산 부문과 경제적으로 지배적인 모든 나라들에서 새로운 생산 양식의 지배가 더욱 우세해 가면 갈수록, 따라서 개별 생산자들의 생산을 몰아내 버릴수록, 사회적 생산과 자본주의적 점유와의 상호 모순 또한 더욱 날카롭게 나타나지 않을 수 없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자본가들이 맨 처음 나타났을 때 임금 노동이라는 형태가 이미 존재했다. 그러나 임금 노동은 단지 예외로서 부업 • 보조 • 과도적인 상태로 존재하는 데 지나지 않았다. 이따금 일용 노동에 고용되는 농업 노동자도 아주 빈약하나마 근근이 살아갈 수 있는 자신의 경작지를 가지고 있었다. 동업 조합의 규약은 오늘의 직인도 미래에는 장인이 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생산 수단이 사회적인 것이 되고 자본가의 손안에 집중되자 사태는 급변했다. 개별 소생산자의 생산 수단과 생산물은 더욱더 가치가 떨어졌으며, 개별 생산자는 자본가에게 고용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이전에는 예외로 또는 부업으로 존재하던 임금 노동이 생산 전체에 걸쳐 지배적인 것이 되었으며 기본 형태가 되었다. 이전에는 부업이던 것이 지금은 생산자의 유일한 직업이 되었다. 간혹 고용되던 노동자가 이제는 종신 고용 노동자가 되었다. 게다가 종신 고용 노동자의 숫자도, 이와 함께 진행된 봉건 질서의 붕괴, 봉건 영주에 예속되어 있던 사람들의 이산, 농토에서 농민을 추방하는 운동 등등으로 엄청나게 늘어났다. 한편으로는 자본가들의 손안에 집중된 생산 수단과,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노동력 이외에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생산자로 완전히 분리되었다. 사회적 생산과 자본주의적 점유 사이의 모순은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 사이의 대립으로 나타났다.
 이미 본 바와 같이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이 상품 생산자들, 즉 개별 생산자들로 이루어진 사회에 끼어들었는데, 그들 사이의 사회적 연계는 그들의 생산물의 교환으로 실현되고 있었다. 그러나 상품 생산에 기초를 둔 사회의 고유한 본질은 생산자들이 자신의 사회적 관계에 대한 지배력을 잃는다는 점이다. 각자는 자신이 우연히 가지게 된 생산 수단으로, 교환에 대한 자신의 개인적인 욕망을 채우려고 제각기 생산한다. 그 누구도 자신이 생산하는 생산물이 얼마나 시장에 나타날지, 그 생산물에 대한 수요자가 얼마나 될지 알지 못하며, 또 그 누구도 자신이 생산한 생산물이 실제로 요구되는지, 그 생산물의 생산비가 보상될지, 그리고 도대체 그것이 팔리게 될지 알지 못한다. 사회적 생산을 지배하는 것은 무정부성이다. 그러나 다른 모든 생산 형태에도 그러하거니와 상품 생산에도, 내적으로 고유하며 그것으로부터 분리할 수 없는 자체의 특수한 법칙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법칙은 무정부성을 박차고 바로 이 무정부 상태 속에서, 이 무정부 상태를 거쳐 관철 되어 간다. 이 법칙은 사회적 연관의 유일한 형태인 교환에서 나타나며, 개별 생산자들에게는 하나의 강제적인 경쟁 법칙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이 법칙은 처음에는 심지어 생산자들 자신도 모르며, 오직 오랜 경험을 통해 차츰 알아내는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 법칙은 생산자들을 무시하고 생산자들에 맞서서, 그들의 생산 형태에 맹목적으로 작용하는 자연 법칙으로서 관철되어 간다. 생산물이 생산자 자신을 지배한다.
 중세 사회, 특히 그 처음 몇 세기 동안은 생산이 주로 자체 수요를 위한 것이었다. 그것은 주로 생산자 자신과 그 가족의 수요만을 충족시켰다. 농촌에서와 같이 신분적 종속 관계가 존재하던 곳에서는 생산이 봉건 영주의 수요도 충족시켰다. 그러므로 거기서는 어떤 교환도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따라서 생산물은 상품의 성격을 띨 수 없었다. 농민의 가족은 먹고 입고 쓰는 도구를 포함한 거의 모든 것을 생산했다. 그들이 팔려고 생산하기 시작한 것은, 그들이 자체 수요와 봉건 영주에게 바치는 공물 이상의 잉여물을 겨우 생산하게 된 뒤부터였으며, 이러한 잉여물이 판매용으로 사회적 교환에 투입되면서 상품이 되었다. 물론 도시의 수공업자들은 처음부터 교환을 위해 생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그들도 자체 수요에 필요한 물건을 대부분 자기 자신이 만들었다. 즉 그들은 채소밭과 조그마한 밭을 가지고 있었으며 공유림에서 가축을 방목했다. 그 밖에 이 공유림은 그들에게 건축 재료와 연료를 공급해 주었다. 여자들은 아마, 양모 등으로 실을 뽑았다. 교환을 목적으로 하는 생산, 즉 상품 생산은 이제 겨우 생겨나기 시작했을 뿐이다. 그래서 교환과 시장은 제한되어 있었고, 생산 방식은 정체되어 있었으며, 지방은 외부에 대해 봉쇄되어 있었고, 지방 단위의 범위 안에서 결합되어 있었다. 농촌에는 마르크 공동체, 도시에는 동업 조합이 있었다.
 그런데 상품 생산이 확대되고 특히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이 나타나면서, 이전에는 잠자고 있던 상품 생산의 법칙이 더 공공연하게, 또 더 강력하게 작용하기 시작했다. 낡은 연계는 흔들리고 묵은 장벽은 부수어졌으며, 생산자들은 더욱더 분산되고 독립적인 상품 생산자로 바뀌어 갔다. 사회적 생산의 무정부성은 명백히 드러났으며 더욱더 첨예한 성격을 띠게 되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사회적 생산의 무정부성을 강화하는 데 쓴 중요한 도구는 무정부성의 정반대물이었다. 그것은 모든 개별 생산 작업장에서 생산을 날이 갈수록 더욱더 사회적 생산으로 조직해 나가는 것이었다. 이러한 것을 토대로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은 지난날의 평온함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것은 갖가지 생산 부문에 침투하여 그 부문에서 지난날의 생산 방법을 몰아냈다. 수공업에 침투해서는 지난날의 수공업을 쓸어 없앴다. 일터는 전쟁터가 되었다. 지리상의 대발견과 이에 뒤이어 이루어진 식민지 쟁탈로 판로는 몇 배로 넓어졌고 수공업의 매뉴팩처화가 촉진되었다. 투쟁은 이미 각 지방의 개별 생산자들 사이에만 벌어진 것이 아니었다. 지방 단위의 싸움은 또 전국적 투쟁으로까지, 17세기와 18세기의 상업 전쟁31)으로까지 발전했다. 마침내 대공업과 세계 시장의 발생은 이 투쟁을 보편화하는 동시에 유례없이 격렬하게 만들었다. 개별 자본가들 사이의 관계에서나 모든 생산 부문들, 또는 모든 국가들 사이의 관계에서나 다 마찬가지로, 존망의 문제는 그것들이 자연적으로든 인위적으로든 유리하게 작용하는 생산 조건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진 자는 용서 없이 없앤다. 이것은 자연에서 사회로——수십 배나 더 난폭하게——옮아 온 다윈의 개체 생존 투쟁이다. 동물의 자연적 상태가 인류 발전의 절정으로서 나타나게 된다.25* 사회적 생산과 자본주의적 점유 사이의 모순은 개별 공장들의 생산의 조직화와 전사회의 생산의 무정부성 사이의 대립으로 재생산된다.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은 본래부터 거기에 내재하는 모순의 이러한 두 가지 현상 형태에서 벗어날 길 없이 '악순환'하면서 운동한다. 푸리에가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에서 발견한 것은 바로 이 '악순환'이다. 그러나 당시의 푸리에로서는 물론 이 순환의 둘레가 점점 좁아진다는 것, 생산의 운동은 오히려 나선형으로 진행되어 유성의 운동처럼 반드시 중심과 충돌하는 것으로 끝나리라는 것을 아직 볼 수 없었다. 생산의 무정부성이라는 이 원동력은 인류의 대다수를 차츰 프롤레타리아로 바꾸는데, 이번에는 이 프롤레타리아 대중이 결국은 생산의 무정부성을 끝장내고야 만다. 생산의 사회적 무정부성이라는 이 원동력은, 대공업에서 사용하는 기계를 끝없이 개선할 가능성을 개별 산업 자본가에 대한 하나의 강제 법칙, 즉 멸망하고 싶지 않거든 자신의 기계를 끊임없이 개선하라고 명령하는 하나의 강제 법칙이 되게 한다. 그러나 기계의 개선으로 인간 노동의 일정한 양은 필요 없게 된다. 기계의 적용과 보급이 몇몇 기계 노동자가 수백만 손노동자를 내쫓는 것을 뜻한다면, 기계의 개선은 더욱더 많은 기계 노동자들 자신이 내쫓김을 뜻하며, 결국은 노동자의 공급이 노동에 대한 자본의 평균 수요를 뛰어넘게 됨을 뜻한다. 유휴 노동자 대중은 내가 이미 1845년에 이름 붙인 바와 같이 진짜 산업 예비군을 형성한다.❦ 이 산업 예비군은 생산이 전속력으로 돌아갈 때는 생산에 이용되다가도, 그 다음에 반드시 뒤따라오는 공황 때에는 길거리로 쫓겨난다. 노동자 계급과 자본 사이의 생존 투쟁에서 항상 족쇄처럼 노동자 계급의 발에 매달리는 이 산업 예비군은, 임금을 늘 자본의 요구에 맞는 수준으로 유지하는 임금 조절기 역할을 한다. 그리하여 마르크스의 말을 빌리면, 기계는 노동자 계급을 반대하는 자본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고, 노동 수단은 늘 노동자의 손안에서 생활 수단을 빼앗게 되며, 노동자의 생산물은 자신들을 노예로 만드는 도구가 된다.26* 그 결과, 노동 수단의 경제적 이용은 동시에 애초부터 노동력의 가장 무자비한 낭비가 되며, 노동의 정상적인 기능 조건을 강제로 빼앗는 것이 된다.27* 또 노동 시간을 줄이는 데 강력한 수단인 기계는 노동자와 그의 가족 모두의 생명을 자본의 가치 증식을 위한 잠재적 노동 시간으로 만드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 계급의 한 부문의 과도한 노동은 이 계급의 다른 부문이 완전한 실업에 빠지는 조건이 되며, 한편 소비자를 찾아 전세계를 헤매는 대공업은 자기 나라 안에서는 노동자 대중의 소비를 기아 상태의 최저 한도에 국한시켜 놓음으로써 자기 나라 안의 시장을 파괴한다. “상대적 과잉 잉구, 즉 산업 예비군을 늘 자본 축적의 규모 및 활력과 균형을 이루도록 유지하는 법칙은 헤파이스토스의 망치가 프로메테우스를 바윗돌에 못박아 놓은 것보다28* 더 튼튼하게 노동자를 자본에 묶어 놓는다. 이 법칙은 자본의 축적에 상응하는 빈곤의 축적을 낳는다. 따라서 한쪽 극에서 부가 쌓이는 것은 동시에 반대쪽 극, 즉 자기 자신의 생산물을 자본으로 생산하는 계급 측에서 빈곤, 노동의 고통, 예속, 무지, 야수화, 도덕적 타락이 쌓이는 것이다.”(마르크스, 『자본론』, 671쪽)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에서 이와 다른 생산물의 분배 방식을 기대하는 것은, 전지와 연결된 전극이 물을 분해하지 않고 양극에는 산소, 음극에는 수소가 생겨나지 않기를 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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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국 노동자 계급의 상태』, 109쪽.(『전집』 제2권, 314쪽) ❦


 극도로 높아진 현대 기계의 생산 능력이 어떻게 하여 개별 산업 자본가들로 하여금 사회 안에서 생산의 무정부성 때문에 자신의 기계를 계속 개선하여 생산력을 계속 높이지 않을 수 없게 하는 하나의 강제 법칙이 되는가를 우리는 보았다. 자본가에게는 자기의 생산 규모를 늘릴 수 있는 단순한 가능성 또한 마찬가지로 강제 법칙이 되는 것이다. 대공업의 거대한 팽창 능력——여기에 비하면 가스의 팽창력 같은 것은 어린애 장난감이다.——은 이제 공업을 질 • 양적으로 확장하려는 욕망, 어떤 반작용도 고려하지 않는 욕망으로 나타난다. 이 반작용을 형성하는 것은 대공업 생산물에 대한 소비, 판로, 시장이다. 그런데 이 시장의 팽창력은 밖으로나 안으로나 훨씬 작은 힘으로 작용하는 완전히 다른 법칙에 의해서 결정된다. 시장의 확장은 생산의 확대에 보조를 맞출 수 없다. 충돌은 피할 수 없게 되며, 이 충돌은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을 곧바로 파괴하지 않는 한 해결될 수 없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된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새로운 '악순환'을 낳는다.
 사실 맨 처음 전반적 공황이 일어났던 1825년부터 공업계 전체와 상업계, 모든 문명 국가들과 또한 그들에 종속되어 있는 어느 정도 미개한 나라들에서 이루어지는 생산과 교환은 대략 10년에 한 번씩 탈선하고 있다. 산업은 정체하고, 시장에는 판로를 발견하지 못하는 생산물 더미가 넘쳐나고, 현금은 유통에서 자취를 감추고, 신용은 끊기고, 공장은 멈추고, 노동자들은 자기가 생활 수단을 너무 많이 생산한 탓으로 온갖 생활 수단을 잃고, 파산에 파산이 잇따르며, 경매가 연달아 일어난다. 침체가 여러 해 동안 계속되어 생산력과 생산물이 많이 낭비되고 파괴되다가 마침내 가격이 어느 정도 폭락해 쌓여 있던 많은 상품이 팔리게 되면서부터 차츰 생산과 교환의 운동이 다시 시작된다. 이 운동은 차츰 빨라져서 평보가 속보가 되고, 공업의 속보는 구보로 넘어가며 이 구보는 또 발광적인 질주가 되어, 공업 • 상업 • 신용 및 투기를 휩쓰는 하나의 완전한 장애물 경주가 된다. 이러다가 결국은 목숨을 건 몇 차례의 도약 끝에 다시금 공황의 깊은 구렁텅이에 떨어진다. 그리고 이 과정이 또다시 되풀이된다. 1825년 이래 우리는 이러한 순환을 이미 다섯 번이나 겪었으며, 현재(1877년) 그것을 여섯 번째로 겪고 있다. 이러한 공황의 성격은 아주 선명하게 나타났으므로 푸리에가 최초의 이러한 공황을 과잉에서 오는 공황, 즉 ‘과잉 공황’(crise pléthorique)이라 한 것은 이 공황 전체의 본질을 찌른 표현이었다.32)
 공황 때에는 사회적 생산과 자본주의적 점유 사이의 모순이 폭력적으로 폭발하기에 이른다. 상품의 유통은 한동안 멈추고, 유통 수단一一화폐一一은 유통의 장애물이 되고, 상품 생산과 상품 유통의 모든 법칙은 거꾸로 작용한다. 경제적 충돌은 절정에 이른다. 생산 방식이 교환 방식에 반항해 일어선다.
 공장 안에서 이루어지는 생산의 사회적 조직이 마침내 이 조직과 나란히, 또 그 위에 존재하는 사회 안에서의 생산의 무정부성과 상응할 수 없는 발전 단계에까지 이르렀다는 사실, 이 사실은 공황 때에 많은 대자본가들과 더 많은 소자본가들을 파멸시킴으로써 이루어지는 자본의 폭력적 집중으로 말미암아 자본가들 자신에게도 명백하게 된다.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의 모든 기구는 그 자체가 만들어 낸 생산력의 중압을 받아 멈추게 된다. 그것은 이미 생산 수단이 모조리 자본으로 바뀔 수 없게 되며, 생산 수단들이 사용되지 않은 채 남아 있게 되는 한편, 노동자의 예비군도 어쩔 수 없이 이로 인해 놀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생산 수단, 생활 수단, 자본의 처분 밑에 있는 노동자들, 즉 생산과 일반적 부(富)의 모든 요소가 남아돌아 가게 된다. “과잉이 빈궁과 결핍의 원천이 된다.”(푸리에)는 것은 바로 과잉 자체가 생산 수단과 생활 수단의 자본화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생산 수단이 우선 자본으로, 즉 인간 노동력의 착취 도구로 되지 않고서는 작용을 시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을 한편으로 하고, 생산과 생활 수단을 다른 한편으로 하는 둘 사이에는 후자를 자본으로 바꾸어야 할 필연성이 마치 유령처럼 서있다. 바로 이 필연성만이 생산의 물질적 공간과 인적 공간이 결합하는 것을 방해하며, 바로 이 필연성만이 생산 수단의 작용을, 즉 노동자가 노동하고 생활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다.29* 따라서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은 한편으로는 더 이상 생산력을 관리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폭로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생산력 자체가 이러한 모순을 청산하고 자본으로서의 모든 속성에서 해방되어 사회적 생산력으로서의 성격을 실제로 승인받으려고 더욱 힘차게 돌진하고 있는 것이다.
 힘차게 자라나는 생산력이 자본주의적 성격에 반항하게 되고 그 사회의 본성을 승인해야 할 필연성이 커지면서, 자본가 계급 자체가 어쩔 수 없이 자본주의적 관계 안에서 될 수 있는 대로 더욱 자주 생산력을 사회적 생산력으로서 다루게 된다. 신용의 끝없는 팽창을 수반하는 산업 호경기나 자본주의적 대기업을 파괴하는 공황 자체나 모두 우리가 보는 바와 같이, 갖가지 주식 회사 형태로 많은 생산 수단의 사회화를 가져온다. 이러한 생산 수단과 교통 수단 가운데 어떤 것들, 예컨대 철도와 같은 것은 원래 어떠한 자본주의적 착취 형태도 배제할 만큼 아주 방대하다. 그러나 어떤 발전 단계에 이르면 이 형태도 충분하지 않게 된다. 어떤 한 나라의 같은 산업 부문의 모든 대생산자들은 생산을 통제할 목적으로 트러스트라는 하나의 연합체로 통합된다. 그들은 생산되어야 할 총액을 정하고 그것을 서로간에 할당하며, 또 미리 결정된 판매 가격을 적용하도록 강요한다. 그러나 이러한 트러스트는 일단 부진한 상태에 빠지기만 하면 대부분 허물어지기 때문에 그것들은 더욱더 집중화된 사회화를 가져온다. 즉 한 산업 부문 전체가 하나의 완전한 통일성을 갖춘 대주식 회사로 되어, 국내 전쟁은 이 한 회사의 국내 독점에 자리를 내주게 된다. 예컨대 1890년에 영국 알칼리 생산의 경우가 그러했는데, 이 생산은 48개의 대공장 모두를 합동한 뒤 단일한 중앙이 지도하는 자본금 1억 2000만 마르크의 단 한 회사의 손안으로 넘어갔다.
 트러스트에서는 자유 경쟁이 독점으로 돌아서고, 자본주의 사회의 무계획적 생산은 닥쳐올 사회주의 사회의 계획적 생산 앞에 굴복한다. 물론 처음에는 다만 자본가들의 이익과 편의를 위해서다. 그러나 착취가 이러한 형태를 취하게 되면 그것은 너무나 노골적인 것이 되어 무너지고야 만다. 얼마 안 되는 금리 생활자 무리들이 사회 전체를 공공연히 착취하는 이러한 트러스트들이 지배하는 생산을 오랫동안 감수할 인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트러스트가 있건 없건간에 결국 자본주의 사회의 공식 대표자인 국가는 생산에 대한 지도를 떠맡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러한 국유화의 필요성은 우편, 전신, 철도와 같은 대규모 교통 수단에서 우선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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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다(muβ)고 말한다. 그것은 생산 수단 또는 교통 수단이 사실상 주식 회사로서는 관리해 나갈 수 없을 만큼 성장하여, 국유화가 경제적으로 피할 수 없게 되는 경우, 이러한 경우에만 국유화는 오늘날의 국가가 이것을 실시하더라도 하나의 경제적 진보, 즉 사회가 모든 생산력을 장악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하나의 새로운 단계에 이르렀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비스마르크가 국유화에 열중한 이래로, 모든 국유화, 심지어는 비스마르크 식의 국유화까지도 서슴없이 사회주의적이라고 선언하는 일종의 사이비 사회주의가 나타나 때로는 아부로까지 변질되고 있는 실정이다. 만일 국가가 담배를 전매하는 것이 사회주의라고 하면, 나폴레옹이나 메테르니히도 사회주의의 창시자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벨기에 정부가 가장 평범한 정치 • 재정적 이유에서 주요 철도를 스스로 건설했던 것도, 비스마르크가 경제적 필요성은 없었지만 전쟁에 대비해 철도망을 더 잘 조직하고 철도 종업원들을 정부에 순종하는 투표자들로 만들려고, 또 주로 의회의 결의에 의존하지 않는 새로운 재정 원천을 획득하려고 프러시아의 기간 철도를 국유화한 것도,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결코 사회주의적인 조치는 아니었다. 이것들이 사회주의라면, 왕립 해외 무역 회사33)나 왕립 도자기 제조소 또는 육군의 중대 피복 제조소도, 그뿐만 아니라,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치하의 1830년대에 어느 머리 좋은 친구가 제안했던 매음굴의 국유화까지도 사회주의적인 시설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 ❦


 공황이 부르주아지가 현대 생산력을 더 이상 관리해 나갈 능력이 없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면, 대규모 생산 기업이라든가 교통 수단이 주식 회사나 트러스트의 손안으로 넘어가거나 또는 국가 소유로 넘어간 것은 생산력 관리에 부르주아지가 필요치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셈이다. 자본가가 하던 모든 사회적 기능을 지금은 고용 사무원들이 하고 있다. 자본가 자신에게는 수입 긁어모으기, 이권 따내기, 그리고 또 각종 자본가들이 서로 자본을 쟁탈하는 증권 거래소 놀음밖에는 다른 아무런 사회적 활동도 남지 않게 되었다. 전에는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이 노동자들을 내쫓았는데 지금은 바로 자본가 자신을 내쫓고 있다. 물론 내쫓긴 그들은 아직 산업 예비군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과잉 인구를 형성할 뿐이다.
 그러나 주식 회사라든가 트러스트의 손안으로 옮아 가는 것도, 국유화도 생산력의 자본주의적 성격을 없애지는 못한다. 이 점은 주식 회사나 트러스트의 경우 아주 명백하다. 한편 현대 국가도 또한 부르주아 사회 자체가 창설한 것으로, 노동자나 개별 자본가들의 침해를 받지 않도록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의 일반적 외부 조건을 보호하려고 만든 조직에 지나지 않는다. 현대 국가는 그 형태가 어떻든 본질은 자본주의적 기관이고 자본가들의 국가이며 이념상의 총자본가다. 그것이 생산력을 더 많이 자기 소유로 장악하면 할수록 더욱더 완전한 총자본가가 될 것이며, 더욱 많은 국민을 착취하게 될 것이다. 노동자는 여전히 노동자로 프롤레타리아로 남아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적 관계는 뿌리뽑히기는커녕 오히려 극단에 이르고 절정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절정에 이르자 변혁이 일어난다. 생산력의 국가 소유는 충돌을 해결하지는 못하나, 그것을 해결할 형식적 수단과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오직 현대 생산력의 사회적 본질이 사실상 승인되고 따라서 생산, 점유 및 교환 방식이 생산 수단의 사회적 성격에 적응하게 될 때에만 해결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사회가 사회적 관리를 뺀 다른 어떤 관리 방법으로도 관리할 수 없을 만큼 성장한 생산력을 공공연히, 그리고 직접 장악함으로써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리하여 지금은 생산자 자신을 거역하며, 맹목적으로 작용하는 자연 법칙으로서 생산 방식과 교환 방식을 주기적으로 뒤흔들어 놓으면서 폭력적으로 또 파괴적으로만 관철되고 있는 생산 수단과 생산물의 사회적 성격이 그때에는 생산자에 의해 완전히 의식적으로 이용되어 혼란과 주기적 파탄의 원인이 아니라 생산 자체의 가장 강력한 지렛대가 될 것이다.
 사회적으로 작용하는 힘도 자연의 힘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고려하지 않는 한 맹목적으로, 폭력적으로, 파괴적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일단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고 그 작용 • 방향 • 영향을 파악한다면, 그것을 더욱 우리의 의사에 복종시키고 그것을 이용해 우리의 목적을 이루는 것은 오직 우리들 자신에 좌우된다. 오늘날의 강력한 생산력으로 말하자면 특히 그렇다. 우리가 이 생산력의 본질과 성격을 이해하기를 거부하는 한——자본주의적 생산 양식과 그 옹호자들이 이를 방해하고 있다.——생산력은 우리를 거역하고 우리를 반대해 작용하며, 이미 상세히 서술된 바와 같이, 그 동안 그것은 우리를 지배한다. 그러나 일단 그 본질이 파악되자마자 그것은 연합된 생산자들에게 장악되어 악마 같은 명령자에서 온순한 하인으로 바뀔 수 있다. 둘 사이의 차이는 벼락이 칠 때 번개불에 담긴 전기의 파괴력과 전신이나 아크등의 길들인 전기 사이의 차이와 마찬가지며, 화재의 불과 사람에게 유익한 불 사이의 차이와 마찬가지다. 오늘날의 생산력이 마침내 인식된 그 본질에 알맞게 다루어질 때에는, 생산의 사회적 무정부성은 없어지고 사회 전체와 그 개별 성원의 수요를 충족시킬 것을 목적으로 생산이 사회적이고 계획적으로 조절될 것이다. 그때에는 생산물이 우선 생산자를 노예화하고 다음에는 점유자까지도 노예화하는 자본주의적 점유 방식은 없어지고, 현대적 생산 수단의 본질 자체에 기초를 둔 새로운 점유 방식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즉 한편으로는 생산을 유지하고 늘리는 수단인 생산물을 사회가 직접 점유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생활과 향락의 수단인 생산물을 개인이 직접 점유하는 새로운 점유 방식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은 국민의 대다수를 더욱더 프롤레타리아로 바꿈으로써, 자멸하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이 그것을 변혁하지 않을 수 없는 하나의 세력을 만들어 낸다. 사회화한 대생산 수단을 더욱더 국유화하지 않을 수 없게 하면서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 자체가 그것을 변혁할 길을 제시한다. 프롤레타리아트는 국가 권력을 장악하고 우선 생산 수단을 국유화한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트는 프롤레타리아트로서의 자기 자신을 끝장내며 그와 함께 모든 계급 차별과 계급 대립, 따라서 국가로서의 국가30*도 끝장낸다. 지금까지 계급 대립 속에서 운동해 왔고 또 하고 있는 사회에는 국가가 필요했다. 즉 착취 계급의 외적 생산 조건을 유지하기 위한 조직체가 필요했으며, 따라서 특히 해당 시기의 생산 양식에 의해 규정되는 억압 조건(노예제, 농노제 또는 봉건적 예속제, 임금 노동제)에 피착취 계급을 폭력적으로 얽매어 두기 위한 조직체가 필요했다. 국가는 사회 전체의 공식 대표자였고, 사회 전체가 눈에 보이는 하나의 단체로 집약된 것이었다. 그러나 국가가 그러했던 것은 오직, 국가가 해당 시기에 스스로 사회 전체를 대표했던 계 급의 국가인 한에서만 그러했다. 즉 고대에는 노예 소유자인 자유민들의 국가였으며, 중세에는 봉건 귀족의 국가였으며, 현대에 와서는 부르주아지의 국가인 것이다. 국가가 마침내 사회 전체의 대표자가 되면, 그 자체가 쓸모 없게 된다. 억압해야 할 모든 사회 계급은 없어지고, 계급 지배와 함께 오늘날의 생산의 무정부성에서 비롯된 개체 생존 투쟁과 이러한 투쟁에서 일어나는 충돌과 폭력도 없어지게 되면 그때에는 억압해야 할 아무것도 남지 않으며 억압하기 위한 특별한 힘으로서의 국가도 필요 없게 될 것이다. 국가가 참으로 사회 전체의 대표자로 등장하는 최초의 행위——사회의 이름으로 생산 수단을 장악하는 것——는 동시에 국가로서의 마지막 독자적인 행위다. 그때에는 사회 관계에 대한 국가 권력의 간섭은 한 분야 한 분야씩 점점 필요 없게 되어 가다가 자기 스스로 잠들고 만다. 인간에 대한 관리 대신에 물건에 대한 관리와 생산 과정에 대한 지도가 나타난다. 국가는 '폐지되는' 것이 아니라 사멸하는 것이다.31* 자유로운 인민 국가34)라는 문구, 한동안 선동 수단으로서 존재할 수는 있었으나 결국 과학과 양립할 수 없는 이 문구32*는 바로 이를 근거로 하여 평가되지 않으면 안 된다. 국가는 하루아침에 폐지되어야 한다는 이른바 무정부주의자들의 요구도 또한 이를 근거로 하여 평가되지 않으면 안 된다.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이 역사 무대에 등장한 이래, 개인이나 어떤 학파를 막론하고 사회가 모든 생산 수단을 장악하는 것을 미래의 막연한 이상으로 생각해 왔다. 그러나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실제 조건이 갖추어질 때에야 비로소 그것을 장악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는 역사적 필연성이 되었다. 다른 온갖 사회 진보와 마찬가지로 이것도 계급들의 존재가 정의니 평등이니 하는 것과는 모순이라는 의식이나 또는 계급을 없애려는 단순한 의욕에 의해서가 아니라, 어떤 새로운 경제적 조건에 의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사회가 계급들로, 즉 착취 계급과 피착취 계급,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으로 분열된 것은 종래의 충분하지 못한 생산 발전이 낳은 피할 수 없는 결과였다. 사회적 총노동으로 생산되는 생산물의 총량이 모든 이의 필수적인 생활 수단 총량을 겨우 뛰어넘는 정도인 동안, 따라서 노동이 대다수 사회 성원의 모든, 또는 거의 모든 시간을 빼앗는 동안, 그 사회는 어쩔 수 없이 계급들로 분열된다. 전적으로 강제 노동에 종사하는 이 방대한 다수와 함께, 직접적인 생산 노동에서 해방되어 노동 관리 • 국가 사무 • 재판 • 과학 • 예술 등과 같은 사회의 공동 사무를 맡아보는 계급이 형성된다. 따라서 분업의 법칙이 바로 계급 분열의 기초를 이루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결코 계급들이 형성될 때 폭력 • 약탈 • 강제 • 기만이 적용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며, 또 권력을 빼앗은 지배 계급이 근로 계급을 희생시켜 자기의 지위를 다지며 사회에 대한 지도를 대중에 대한 강화된 착취로 바꾸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처럼 계급 분열에는 역사적 정당성이 어느 정도 있기는 했지만 단지 특정 시기, 특정 사회적 조건에서만 그러했던 것이다. 그것은 생산이 충분하지 못한 데서 일어난 것인 만큼 현대의 생산력이 충분히 발전하면 없어질 것이다. 그리고 사실 사회 계급의 소멸은 비단 이러저러한 지배 계급의 존재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온갖 지배 계급의 존재, 따라서 계급 분열 자체도 하나의 시대 착오로 만들고 하나의 폐물로 만드는 역사 발전 단계를 전제로 한다. 따라서 계급의 소멸은, 특정한 사회 계급이 생산 수단과 생산물을 점유하며 그와 함께 정치 지배권도 점유하고 교육과 정신적 지도를 독점하는 것이 필요 없게 될 뿐만 아니라 경제 • 정치적 그리고 정신적 발전에 장애가 되는 그러한 높은 생산 발전 단계를 전제로 한다. 그리고 지금 그러한 단계에 이르렀다. 부르주아지의 정치 • 정신적 파산은 그들 자신에게까지도 거의 비밀이 아니며, 그들의 경제적 파산도 10년마다 규칙적으로 되풀이되고 있다. 공황이 닥칠 때마다 사회는 자기가 이용할 수 없는 생산력과 생산물의 중압 때문에 허덕이며, 또 소비자가 부족한 탓에 생산자는 아무것도 소비할 수 없다는 불합리한 모순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현대 생산 수단의 고유한 팽창력은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이 채워 놓은 질곡을 타파한다. 생산 수단에서 이 질곡을 벗겨 버리는 것이야말로 곧 생산력으로 하여금 계속 또 언제나 급속히 발전하게 하며 따라서 또 생산 자체를 실제로 끝없이 성장시키는 단 하나의 전제 조건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생산 수단의 사회적 소유화는 비단 생산에 대한 현존하는 인위적 장애물을 없앨 뿐만 아니라, 오늘날 피할 수 없는 생산의 동반자로서 공황 때에 절정에 이르곤 하는 생산력과 생산물의 대대적인 낭비와 파괴 또한 없애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현재 지배 계급과 그 정치 대표자들의 터무니없는 사치와 낭비를 없앰으로써, 전체를 위해 많은 생산 수단과 생산물을 절약하게 한다. 사회적 생산에 의해 사회의 모든 성원에게 충분하고도 나날이 개선되는 물질적 생활 조건뿐만 아니라 그들의 육체 • 정신적 능력을 전면적이고도 자유롭게 발전시키고 활용하게 해 줄 가능성, 지금 비로소 그러한 가능성이 달성되었다. 그것은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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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근대적 생산 수단의 팽창력이 자본주의의 억압 밑에서도 얼마나 거대한가를 두세 가지 숫자만 보아도 대략 짐작할 수 있다. 최근 기펜의 계산35)에 의하면, 대브리튼과 아일랜드의 부의 총합은 대략 다음과 같다.
 1814년 : 22억 파운드 스털링=440억 마르크
 1865년 : 61억 파운드 스털링=1220억 마르크
 1875년 : 85억 파운드 스털링=1700억 마르크
 공황 때의 생산 수단과 생산물의 파괴에 대해 말한다면, 1876년 2월 21일에 베를린에서 열린 제2차 독일 공업가 대회에서 밝혀진 대로 최근의 공황으로 독일 철 공업이 입은 손실 총액만 무려 4억 5500만 마르크에 이르고 있다. ❦


 사회가 일단 생산 수단을 장악하게 되면 상품 생산이 없어지고 따라서 생산자에 대한 생산물의 지배도 없어질 것이다. 사회적 생산의 무정부성은 계획적이고 의식적인 조직으로 대체된다. 개체 생존 투쟁은 끝난다. 그리하여 인간은 비로소——어떤 의미에서는 궁극적으로 ——동물계를 벗어나며, 야수적인 생존 조건에서 참으로 인간적인 생존 조건으로 넘어간다. 인간을 둘러싸고 지금껏 그들을 지배해 온 생활 조건을 이제는 인간이 지배하고 통제하게 되어, 인간은 처음으로 자연에 대한 현실적이며 의식적인 지배자가 된다.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 사회적 결합의 주인이 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인간을 지배하는 외적인 자연 법칙으로서 인간에 대립해 오던 인간 자신의 사회적 행동 법칙이, 이제는 인간에 의해 아주 능숙하게 적용될 것이며 따라서 인간의 지배에 복종하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는 자연과 역사에 의해 위로부터 강요된 것으로서 인간에게 대립해 오던 인간의 사회적 결합이 이제는 인간 자신의 자유로운 일이 된다. 지금까지 역사를 지배해 오던 객관적이며 외적인 힘이 인간 자신의 통제를 받게 된다. 바로 이 순간부터 비로소 인간은 완전히 의식적으로 자기 자신의 역사를 창조하기 시작할 것이며, 이 순간부터 비로소 인간에 의해 움직이게 되는 사회적 원인들은 인간이 바라는 결과를 더욱더 훌륭히 가져오게 할 것이다. 이것은 필연의 왕국으로부터 자유의 왕국으로 인류가 비약하는 것이다.
 결론으로서 우리가 논술한 발전 과정을 간단히 종합하자.
 1. 중세 사회 소규모의 개인 생산. 생산 수단은 개인용으로 마련된 것이어서 원시적이며 불편하고 조악하며 비효율적이었다. 생산자 자신이나 그의 봉건 영주가 생산물을 직접 소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생산. 직접 소비를 초과하는 잉여물 생산이 있는 경우에만 이 잉여물이 판매되어 교환되게 된다. 따라서 상품 생산은 겨우 발생 과정에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미 이 시기에도 상품 생산은 사회적 생산의 무정부성을 맹아로 내포하고 있다.
 2. 자본주의 혁명 우선 단순 협업과 매뉴팩처에 의해서 수행된 공업의 변혁. 종래 흩어져 있던 생산 수단이 대작업장으로 집중된다. 따라서 또 개인적 생산 수단이 사회적 생산 수단으로 바뀌나 그것은 대체로 교환 방식에까지는 미치지 않는 선에서 이루어진다. 종래의 점유 형태는 여전히 작용한다. 자본가가 등장한다. 그는 생산 수단의 소유자로서 생산물도 점유하여 그것을 상품으로 바꾼다. 생산은 사회적 행위가 되나, 교환과 그와 동시에 생산물의 점유는 여전히 개인적 행위, 개개인의 행위로 남는다. 사회적 노동의 생산물이 개별 자본가에 의해 점유된다. 바로 이것이 기본 모순이며, 여기로부터 현대 사회를 움직이고 있는 그 모든 모순이 흘러나온다. 이 모순들은 대규모 공업에서 특히 선명하게 나타난다.
 (ㄱ) 생산자와 생산 수단의 분리, 노동자들은 평생토록 임금 노동을 해야 할 운명에 놓인다.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 사이의 대립.
 (ㄴ)상품 생산을 지배하는 법칙이 대대적으로 발현되고 그 작용이 강화된다. 걷잡을 수 없는 경쟁. 각 개별 공장 안의 사회적 조직과 생산 전체의 사회적 무정부성 사이의 모순.
 (ㄷ) 한편으로는 기계의 개선. 이것은 경쟁으로 말미암아 각 공장주에 대해 하나의 강제 법칙이 되며, 동시에 또한 공장으로부터 노동자의 축출이 끊임없이 격화하는 것을 뜻한다. 즉 산업 예비군이 생겨난다. 다른 한편으로는 생산의 끝없는 확장. 이것 또한 각 공장주에 대해 하나의 강제적인 경쟁 법칙이 되었다. 이 둘로부터는 생산력의 유례없는 발전, 수요에 대한 공급의 초과, 과잉 생산, 시장의 범람, 10년마다 되풀이되는 공황, 악순환. 즉 한편에서는 생산 수단과 생산물의 과잉을 보게 되고, 다른 한편에서는 일자리와 생활 수단을 잃은 노동자의 과잉을 보게 된다. 그러면서도 생산과 사회 복지라는 두 축은 결합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적 생산 형태는, 생산력과 생산물이 미리 자본으로 바뀌는 조건에서가 아니면 생산력이 작용하는 것도 생산물이 유통되는 것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산력과 생산물의 과잉이 바로 그 자본화를 방해한다. 이 모순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커진다.
즉 생산 양식이 교환 방식에 반역한다. 그리하여 부르주아지는 자신의 사회적 생산력을 더 이상 관리해 나갈 능력이 없다는 것이 명백해진다.
 (ㄹ) 생산력의 사회적 성격의 부분적 승인, 자본가 자신의 어쩔 수 없는 승인. 생산과 교통의 거대 기구가 처음에는 주식 회사 소유로, 다음에는 트러스트 소유로, 그 다음에는 국가 소유로 된다. 부르주아지는 필요 없는 계급이 되고 그들의 사회적 기능은 모두 고용 사무원들이 수행한다.
 3. 프롤레타리아 혁명, 모순의 해결 프롤레타리아트는 사회적 권력을 장악하고, 이 권력의 힘으로 부르주아지의 손안에서 벗어나고 있는 사회적 생산 수단을 사회 전체의 소유로 만든다. 이러한 행위로써 프롤레타리아트는 생산 수단을 자본이라는 종래의 속성에서 해방하며 그것의 사회적 본질이 완전히 자유롭게 발전할 수 있도록 한다. 이제부터는 예정된 계획에 의한 사회적 생산을 할 수 있게 된다. 생산의 발전으로 각종 사회 계급이 더 이상 계속 존재하는 것이 하나의 시대착오가 된다. 사회적 생산의 무정부성이 사라짐에 따라 국가의 정치적 권위도 시들어 버린다. 드디어 자기 자신의 사회적 존재의 주인이 된 인간은 그 결과로 자연의 주인,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된다. 즉 자유롭게 된다.
 이러한 세계 해방의 위업을 수행하는 것, 이것이 현대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 사명이다. 이 변혁의 역사적 조건, 따라서 또 그 본성 자체를 연구하여 이 위업을 수행할 사명을 지닌 오늘의 피억압 계급에게 그들 자신의 위업의 조건과 본질을 깨우쳐 주는 것, 이것이 프롤레타리아 운동을 이론적으로 표현하는 과학적 사회주의의 임무다.


영어판(1892년) 서문36)
프리드리히 엥겔스


 원래 이 소책자는 더 큰 책의 한 부분이었다. 1875년경에 베를린 대학 강사 오이겐 뒤링 박사33*는 갑자기, 그리고 대단히 요란스럽게 자기가 사회주의로 전향했다는 것을 발표하고, 독일 인민에게 상세히 작성된 사회주의 이론뿐만 아니라 빈틈없는 실제적 사회 개혁안까지 제출했다. 여기서 그가 선행자들을 공격하고 나선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공격의 예봉은 마르크스에게 돌려졌고, 그는 자기의 분노를 있는대로 마르크스에게 퍼부었다.
 이것은 독일 사회주의당 안의 두 분파——아이제나흐 파와 라살레 파——가 마침 합동하여 당이 엄청나게 강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더욱 중요하게는 공동의 적을 반대해 자기의 모든 역량을 기울일 수 있는 능력 또한 갖게 되었을 때 생겨난 일이었다. 독일 사회주의당은 급속하게 하나의 세력으로 성장하고 있었다.34* 그러나 당을 하나의 세력으로 뭉치게 하자면, 이제 막 쟁취해 낸 통일을 위태롭게 하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했다. 그런데 뒤링 박사는 공공연하게 자기 주위에다 종파를, 즉 장래의 독자적인 당에 대비해 그 핵심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우리에 대한 도전에 응하며 싸움을 시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확실히 시끄러운 일이었다.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우리 독일 사람에게는 본래 놀랄 만큼 지독한 철저함——이를 철저한 심오함이라고 하건 심오한 철저함이라고 하건 아무래도 좋다.——이 있다. 어떤 사람이든 자기가 새로운 학설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서술하기 시작할 때에는, 우선 그것을 하나의 전체를 포괄하는 체계로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요컨대 그는, 이 논리학의 제일 원리나 우주의 기본 법칙들이 결국은 바로 그와 같은 새로이 발견된, 모든 것을 완결 짓는 이론에 이르기 위해서만 태고 때부터 존재해 왔다는 것을 증명해야만 한다. 이 점에서 뒤링 박사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민족적 풍모의 표본을 보여 주었다. 바로 완전한 '철학 체계.——정신 철학, 도덕 철학, 자연 철학, 역사 철학.——, 완전한 ‘정치 경제학 체계와 사회주의 체계’, 그리고 마지막으로 '비판적 정치 경제학사', 그 무게와 내용에서 다같이 묵직한 사륙 배판의 두터운 세 권, 일반적으로 종래의 철학자들과 경제학자들, 특수하게는 마르크스를 반대하는 논증에 동원된 세 군단, 이는 실로 가장 완전한 '과학의 변혁'을 수행하려는 시도이며, 바로 이것이 내가 상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나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에서부터 복수 본위제에 이르기까지, 물질과 운동의 영원성에서부터 도덕적 관념들의 과도적 성질에 이르기까지, 다윈의 자연 도태에서부터 미래 사회의 청년 교양에 이르기까지, 가능한 모든 대상을 다루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어쨌든 나의 논쟁 상대가 제시한 전체를 포괄하는 체계는, 논쟁 과정에서 이 모든 각종 대상에 대한 마르크스와 나의 견해를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훨씬 더 일관된 형태로 전개할 기회를 나에게 주었다. 바로 이것이 나로 하여금 별로 달갑지 않은 이 과업에 착수케 한 주된 이유였다.
 나의 답변은, 처음에는 라이프치히에서 발행되는 사회주의당 중앙 기관지 『전진』에 연재 논문 형식으로 발표되었다가, 그 뒤 『오이겐 뒤링 씨의 과학의 변혁』(『반뒤링론』)이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 제2판은 1886년에 취리히에서 발행되었다.
 현재 프랑스 하원의 릴 선거구 대의원인 나의 친구, 폴 라파르그의 간청으로, 나는 이 책의 세 절을 정리해 하나의 소책자로 편집했다. 그는 이것을 번역하여 1880년 『공상적 사회주의와 과학적 사회주의』라는 표제로 출판했다. 이 프랑스 어 원본이 네덜란드 어판과 스페인 어판의 대본이 되었다. 1888년에 나의 독일 친구들이 집필 당시의 언어로 이 소책자를 출판했다. 그 뒤 이 독일어판을 대본으로 해서 이탈리아 어, 러시아 어, 덴마크 어, 네덜란드 어 루마니아 어 등으로 번역되었다. 그리하여 이 영문판까지 합하면, 이 소책자는 10개 나라 말로 보급된 셈이다. 1848년에 처음으로 출판된 우리들의 『공산당 선언』과 마르크스의 『자본론』까지 포함하여, 어느 사회주의 서적도 그처럼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된 적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독일에서 이 소책자는 4판을 거듭하여 발행 총부수가 약 2만 부에 이르게 되었다.
 부록 「마르크 공동체」(Mark)는 독일 토지 소유의 발생과 발전사에 관한 약간의 초보적인 지식을 독일 사회주의당 안에 보급할 목적으로 집필한 것이다. 당시 이것은 독일 사회주의당에 의한 도시 노동자의 통일이 이미 완성될 전망이 보이고, 또 농업 노동자와 농민에게 주의를 돌리는 것이 당의 과업으로 제기되었던 만큼 더욱 필요했다. 이 부록을 이 판에 넣은 것은, 모든 게르만 종족들에 공통된 원시적 토지 소유 형태와 그 붕괴의 역사가 영국에서는 독일에서보다 훨씬 덜 알려져 있다는 점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나는 최근 막심 코발레프스키35*가 내놓은 가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원문을 본래 형태대로 두었다. 이 가설에 의하면, 마르크 공동체 성원들 사이에서 경지와 목초지가 분배되기 전에는 몇 세대에 걸쳐 가부장적 대가족 공동체(아직도 존재하는 남슬라브의 대가족제가 그 실례가 될 수 있다.)에 의한 토지의 공동 경작이 진행되었는데, 그 뒤 공동체가 커져서 공동 경영을 하기에는 너무 불편할 정도가 된 뒤에야 비로소 공동체 토지가 분배되었다고 한다. 코발레프스키의 가설은 완전히 옳은 것 같지만, 아직 논의중에 있다.
 이 소책자에서 사용한 경제학 용어는 그것이 새로운 것인 한 마르크스의 『자본론』 영문판의 용어와 일치한다. '상품 생산'이라는 것을 우리는 상품이 생산자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또 교환의 목적으로도, 즉 사용 가치로서가 아니라 상품으로서 생산되는 경제 발전 단계로 이해한다. 이 단계는 교환을 위한 생산이 시작된 때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존속하고 있다. 그것은 자본주의적 생산 밑에서야 비로소, 다시 말하면 생산 수단의 소유자인 자본가가 노동자들——자기 자신의 노동력 이외에는 모든 생산 수단을 빼앗긴 사람들——을 고용하고, 생산물의 판매 가격에서 비용을 초과하는 부분을 자기 주머니에 넣는 조건에서야 비로소 완전히 발전하기에 이른다. 중세로부터 시작하는 공업의 역사를 우리는 다음과 같이 세 시기로 구분한다. (1) 수공업 : 소수의 수공업적 장인과 많지 않은 직인과 도제들. 여기서는 각 노동자마다 완제품을 생산한다. (2) 매뉴팩처 : 여기서는 더 많은 수의 노동자들이 널따란 하나의 작업장에 모여서 분업이라는 방법으로 완제품을 생산한다. 즉 각 노동자마다 어느 한 가지 부분 작업만을 하며, 따라서 생산물은 그들 모두의 손을 차례로 거친 뒤에야 완성된다. (3) 현대 공업 : 여기에서는 생산물이 어떤 동력으로 운전되는 기계에 의해서 생산되고, 노동자의 역할은 기계의 작용에 대한 감독과 조절에 국한된다.
 나는 이 소책자의 내용이 대부분의 영국 독자들의 노여움을 사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만일 대륙에 사는 우리들이 영국 사람들의 '점잔 빼는' 습성, 다시 말해 영국 사람들의 속물 근성을 조금이라도 고려했더라면 오히려 더 좋지 못했을 것이다. 이 소책자는 우리의 이른바 '사적 유물론'을 옹호하려고 쓴 것이다. 그런데 유물론이란 말은 대다수 영국 독자들의 귀에 거슬리는 말이다. '불가지론'36*은 그래도 괜찮지만 유물론은 절대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17세기 이래로 모든 근대 유물론의 본고향은 바로 영국이다. “유물론은 본래 영국이 낳은 아들이다.” 이미 영국의 스콜라 철학자37* 둔스 스코투스38*는 “물질은 과연 사유할 수 없는가?”라고 물은 바 있다.
 그는 이러한 기적이 있을 수 있게 하려고 신의 전능에 호소했다. 즉 그는 신학 자체로 하여금 유물론을 설교하게 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유명론자였다. 유명론39*은 영국 유물론자들에게는 주요 요소 가운데 하나이며, 또 일반적으로 유물론이 맨 처음으로 표현된 것이다.
 영국 유물론과 현대의 모든 실험 과학의 진짜 원조는 베이컨이다. 그에게는 자연 과학이야말로 참된 과학이며, 감성적 경험에 의거하는 물리학이 자연 과학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베이컨은 아낙사고라스40*와 그의 동질소41*(同質素), 데모크리토스42*와 그의 원자(atom)를 권위 있는 것으로 자주 인용한다. 그의 학설에 의하면, 감각은 틀림없는 것이며 모든 지식의 원천이다. 과학은 곧 경험 과학으로서 이성적 방법을 감성적 소재에 적용하는 것이다. 귀납, 분석, 비교, 관찰, 실험은 이성적 방법의 주요한 조건들이다. 물질의 고유한 속성 가운데서 가장 중요하고 첫째가는 속성은 운동, 비단 역학 • 수학적 운동뿐만 아니라 그보다도 오히려 물질의 충동 • 생명력 • 긴장, 또는 야콥 뵈메43*의 표현을 빌린다면 물질의 고뇌❦(Qual)로서의 운동이다. 물질의 본원적 형태는 물질에 내적으로 고유한, (물질을) 개별화하고 특수한 차이를 낳는 살아 있는 본질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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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뇌'라는 말은 철학적인 말장난이다. 이 말은 원래 어떤 행동을 강요하는 고통(또는 고문)을 뜻한다. 그뿐만 아니라 신비주의자 뵈메는 이 독일어 낱말에 라틴어의 '본질적 속성'(qualitas)이라는 뜻까지도 집어 넣었다. 외부에서 가해진 고통과는 달리 그의 '고뇌'는 능동적인 원리, 즉 사물——이 고뇌를 겪고 있는 관계나 사람——의 자발적인 발전에서 나오며, 또 거꾸로 그 발전을 촉진하는 역할을 한다. ❦


 유물론은 그 최초의 창시자인 베이컨에서는 아직 전면적 발전의 맹아를 소박한 형태로만 내포하고 있다. 물질은 자기의 시적(詩的)인 감성적 섬광으로 모든 인간에게 미소를 던지고 있다. 그러나 경구 형식으로 서술되어 있는 베이컨의 학설 자체는, 이와 반대로 아직 신학적인 불철저함으로 가득 차 있다.
 유물론은 그 뒤의 발전에서 일면적인 것이 된다. 홉스는 베이컨의 유물론을 체계화한 사람이다. 감성은 그 환한 빛을 잃고 기하학자의 추상적인 감성으로 바뀐다. 물리적 운동은 역학적 운동 또는 수학적 운동의 희생물이 되고, 기하학이 주요 과학으로 선포된다. 유물론은 인간에 적대하는 것이 된다. 인간에 적대적인, 육체 없는 정신을 그 자체의 영역에서 극복하려고 유물론은 스스로 자기의 육체를 죽이고 금욕주의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유물론은 하나의 오성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대신에 그것은 오성의 무자비한 철저함을 발전시키고 있다.44*
 만일 우리의 감성이 우리의 모든 지식의 원천이라면, 하고 홉스는 베이컨으로부터 출발하여 논증하고 있다. 관념 • 사상 • 표상 등등, 이 모든 것은 많건 적건 그 감성적 형태를 벗어난 물질계의 환영(幻影)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과학은 이 환영에다 다만 이름을 부여할 수 있을 따름이다. 같은 이름이 여러 환영에 적용될 수 있다. 심지어 이름의 이름이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감성적 세계를 모든 관념의 원천으로 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말이 말 이상의 것이라고 주장하거나 또는 우리에게 표상되는 언제나 개별적인 존재물 이외에 또 어떤 보편적인 존재물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모순일 것이다. 물체가 아닌 실체란 물체가 아닌 물체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순이다. 물체, 존재, 실체는 모두 같은 실재적 관념이다. 사유를, 사유하는 물질로부터 분리할 수 없다. 물질은 모든 변화의 주체다. 끝없다는 말은 어떤 주어진 크기에다 끝없이 덧붙여 나갈 수 있는 우리의 정신 능력을 뜻하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다. 오직 물질적 인 것만이 지각되며 인식될 수 있기 때문에, 신의 존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오직 나 자신의 존재만이 확실하다. 온갖 인간적 정열은 끝 또는 시작을 갖는 역학적 운동이다. 충동의 대상, 바로 이것이 우리가 선(善)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인간과 자연은 같은 법칙에 지배된다. 힘과 자유는 똑같다.
 홉스는 베이컨을 체계화했다. 그러나 그는 지식과 사상이 감성의 세계로부터 비롯된다는 베이컨의 근본 원리를 더 이상 상세히 논증하지는 못했다.
 로크는 베이컨과 홉스의 원리를 인간 이성의 기원에 관한 자신의 저작45*에서 논증하고 있다.
 홉스가 베이컨의 유물론이 갖고 있던 유신론적 편견을 없앤 것처럼 콜린스(Collins), 도드웰(Dodwell), 코워드(Coward), 하틀리(Hartley), 프리스틀리(Priestley) 등등은 로크의 감각론이 갖고 있던 마지막 신학적 한계를 없앴다. 이신론46*은 적어도 유물론자에게는 종교에서 벗어나는 간편한 방법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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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르크스 • 엥겔스, 『신성 가족』, 『전집』 제2권, 135〜136쪽. ❦


 영국에서 근대 유물론이 생겨난 데 대해,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오늘날 영국인들이 자기 선조들에 대한 이 같은 찬양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베이컨, 홉스, 로크가 프랑스 유물론자들47*의 빛나는 선조였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다. 이 학파는, 독일인과 영국인이 프랑스인에 대해 육지에서 또 바다에서 거둔 모든 승리에도 불구하고, 18세기를 주로 프랑스의 세기가 되게 했다. 그것도 18세기 말엽을 찬란하게 장식한 프랑스 혁명——우리들은 영국에서도 독일에서도 아직까지 이 혁명의 결과를 받아들이려고 애쓰고 있다.——보다 훨씬 이전의 일이다.
 이것은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금세기 중엽에 교양 있는 외국인이 영국에 이주했을 때, 무엇보다도 그를 놀라게 한 것은——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지만——영국의 '점잔 빼는' 중간 계급의 종교적 위선과 어리석음이다. 우리들은 당시 모두 유물론자, 또는 적어도 매우 급진적인 자유 사상가48*였으며, 그런 만큼 영국의 교양 있는 인사들의 거의 모두가 가지 각색의 엉터리 기적을 믿고 있다든가, 버클랜드(Buckland)나 맨텔(Mantell) 같은 지질학자들조차 자기 과학의 자료를 왜곡하면서까지 세계 창조에 관한 모세의 신화에 그다지 큰 타격을 주지 않으려 한다는 것은, 우리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또 교양 없는 대중, 당시의 표현대로 하면 '불결한 군중', 즉 노동자들, 특히 오언의 뒤를 따르는 사회주의자들한테나 가야, 그래도 종교 문제에 관해 자기 자신의 이성에 바탕을 두는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사실 또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 뒤 영국은 '개화되었다.’ 1851년의 박람회는 영국의 섬나라 폐쇄성에 조종(吊鍾)을 울렸다. 영국은 음식과 풍습과 관념에서 점점 국제화해 갔다. 그 결과, 나로서는 대륙의 일부 풍습이 영국에 전반적으로 보급된 것처럼, 영국의 일부 풍습도 대륙에서 그렇게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더욱 간절해지는 데까지 이르렀다. 의심할 바 없는 한 가지 사실은 올리브유(1851년까지는 귀족에게만 알려져 있던 것이다.)가 보급되면서 종교 문제에 관한 대륙의 회의론이 어쩔 수 없이 보급된 것이다. 그 결과, 불가지론은 아직 영국의 국교처럼 숭상되지는 않았으나 존경을 받는 점에서는 침례교49*와 거의 같은 지위에 서게 되었으며, 어쨌든 구세군50*보다는 한 칸 높은 지위에 서게 되었다. 여기서 나는 다음과 같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즉 이러한 무신앙이 늘어 가는 것을 진심으로 슬퍼하고 저주하는 많은 사람들조차도, 이 새로 생긴 관념이 외국산이 아니며, 다른 수많은 일용품과 마찬가지로 독일제 상표가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 오히려 그것은 옛 영국산이라는 점, 그러한 관념을 창시한 영국인들은 200년도 더 전에 현재의 후손들보다 더 앞서 있었다는 점을 알게 된다면 위안을 받게 되리라고.
 사실 불가지론은 랭커셔 주(州) 식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수줍은(shamefaced) 유물론이 아닌가? 불가지론자의 자연관은 철저히 유물론적이다. 자연계 전체는 법칙에 지배되며 외부에서 오는 어떠한 작용도 절대로 배제한다. 그러나——하고 불가지론자는 조심스럽게 덧붙인다.——우리는 우리가 아는 세계 밖에 어떤 최고의 실재가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하는 것은 증명할 수 없다. 이러한 유보 조건은 당시에는 어느 정도 가치가 있을 수 있었다. 그것은 나폴레옹이 라플라스에게 왜 이 대천문학자의 『천체 역학』(Mècanique cèleste)에는 우주 창조주의 이름이 언급조차 안 되어 있느냐고 한 질문에 대해서, 그는 ‘나에게는 그러한 가설이 필요 없었다’고 당당히 대답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주 발전에 관한 우리의 관념은 조물주나 전능자의 존재를 전혀 용납하지 않는다. 그런데 현존하는 우주 전체에서 배제된 그 어떤 최고의 실재를 용인하려 한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서 모순일 뿐 아니라, 나의 생각으로는 종교적인 사람들에게 본의 아닌 모욕을 주는 셈이 될 것이다.
또 우리 불가지론자는 우리의 모든 지식이 우리의 감각 기관을 통해서 받는 재료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데 동의한다. 그러나——하고 그는 덧붙여 말한다.——우리의 감각 기관이 지각되는 사물의 정확한 모상을 우리에게 준다는 것을 우리는 무엇으로 아는가? 또 계속해 불가지론자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즉 그가 사물 또는 사물의 속성에 대해 말할 때 그가 실제 염두에 두는 것은, 확실하게는 전혀 알 수 없는 그러한 사물 자체 또는 사물의 속성 자체가 아니고, 다만 그것들이 그의 감각 기관에 일으키는 인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논증의 방법만 가지고 논박하기는 곤란한 견해라는 사실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인간은 논증하기 전에 행동하고 있었다. “태초에 행동이 있었다.”51* 인간의 행동은 인간의 지혜가 이러한 곤란을 알아차리기 훨씬 전부터 그것을 해결하고 있었다. 푸딩이 좋은지 나쁜지는 먹어 봐야 안다. 우리가 어떤 사물을 우리에게 지각되는 속성에 따라 우리들 자신을 위해 이용하는 순간, 바로 이 순간에 우리는 우리의 감성적 지각의 진위를 정확히 시험해 보는 것이다. 만일 그 지각이 틀린 것이었다면 그 사물을 이용하려던 우리의 판단 또한 틀린 것이 될 것이며, 그러한 사물을 이용하려는 온갖 시도는 실패하고 말 것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의 목적을 이룬다면, 만일 그. 사물이 그것에 대한 우리의 표상에 상응하며 또 그 사물의 사용에서 기대했던 결과를 준다는 것을 우리가 안다면, 우리는 그 범위 안에서 사물과 그 속성에 대한 우리의 지각이 우리 밖에 존재하는 현실과 일치하고 있다는 긍정적 증거를 갖게 된다. 이와 반대로 오류를 범했다는 것이 밝혀진 경우에는 우리는 대개 얼마 가지 않아서 이 오류의 원인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즉 우리는 우리 시험의 기초가 된 지각이, 그 자체가 불완전하고 피상적이었든가, 그렇지 않으면 방법이 실정에 맞지 않아 엉뚱한 것을 지각하게 되었든가——이것을 우리는 그릇된 추리라고 한다.——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감각을 제대로 발전시키고 이용하는 한, 또 정확히 획득되고 이용된 지각에 의해 설정되는 한계 안에서 우리의 활동을 유지하는 한, 우리는 언제나 우리 행동의 긍정적인 결과로서 우리의 지각과 지각되는 사물의 대상적 본성이 서로 일치한다는 것을 확증하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한에서는, 과학적으로 검토된 감성적 지각이 우리의 뇌수에 외계에 관해 그 본질상 현실과 어긋나는 표상을 발생시킨다든가, 외계와 외계에 관한 우리의 감성적 지각 사이에 선천적인 불일치가 존재한다든가 하는 결론을 내려야만 했던 경우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여기에 신칸트주의적52* 불가지론자가 나타나서 말하기를, “물론 우리가 사물의 속성은 아마 정확히 지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물 자체는 감각과 사유의 어떤 과정을 통해서도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사물 자체는 우리 인식의 피안에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헤겔이 이미 오래 전에 대답한 바 있다. 즉, 만약 당신들이 사물의 속성을 모두 알아냈다면 당신들은 사물 자체도 알고 있는 셈이다. 여기서 남는 것은 다만 그 사물이 우리 밖에 존재한다는 사실 뿐이며, 당신들의 감각 기관이 이 사실까지 확인하게 되면 당신들은 그 사물을 남김없이 모두 파악한 셈이 되는 것이다. 즉 칸트의 저 유명한 인식할 수 없는 물자체를 파악하게 된 것이다라고. 오늘날 우리가 여기에 덧붙여 말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칸트의 시대에는 자연 사물에 대한 인식이 아직까지 단편적이었기 때문에, 모든 자연 사물의 배후에 아직 어떤 신비스러운 물자체의 존재를 용인할 수 있었다는 점뿐이다. 그러나 그 뒤, 이 파악할 수 없었던 사물은 차츰 과학이 거대하게 진보한 결과 이미 파악되고 분석되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재생산되기까지에 이르렀다. 따라서 우리가 직접 만들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인식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금세기 전반기의 화학에서는 유기 물질이 그와 같이 신비스러운 것이었다. 지금 우리는 그것을 화학적 원소를 가지고 유기적 과정의 도움 없이 만들어 내는 데 차츰 성공하고 있다. 현대 화학은, 어떤 물체이건 그 물체의 화학적 구성만 안다면 그 원소로써 그 물체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우리의 지식이 아직 최고의 유기 물질, 이른바 단백질의 구성을 정확히 알기까지에는 매우 거리가 멀다. 그러나 우리가 수세기가 지난 뒤에 이 지식에 이르러서 인조 단백질을 만들 수 없으리라고 생각할 근거는 하나도 없다. 만일 우리가 여기에까지 이른다면 우리는 유기적 생명도 재생산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생명이란 가장 낮은 형태로부터 가장 높은 형태에 이르기까지, 모든 단백질의 정상적 존재 형태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불가지론자는 그 형식적인 유보 조건을 말한 다음에는 자기의 본성으로 돌아가, 벌써 철저한 유물론자로서 말하고 또 행동한다. 그는 반드시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즉 우리가 아는 한에서는 물질이나 운동, 또는 현대 언어로 표현하자면 에너지는 창조할 수도 없고 소멸할 수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둘 모두 우리가 모르는 어느 순간에 창조된 것이 아니라고 할 어떠한 논거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당신들이 어떤 기회에 물질이나 운동에 관한 이러한 승인을 이용해 그를 반대하려고 들면, 그는 즉시 당신에게 침묵을 강요할 것이다. 그는 유심론53*의 가능성을 추상적으로 인정하나 구체적으로는 이 가능성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당신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즉 우리가 알고 또 알 수 있는 한에서는 우리의 창조자나 지배자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아는 한에서는 물질이나 에너지 또한 창조할 수도 소멸할 수도 없다. 우리에게 사유란 에너지의 한 형태, 뇌수의 한 작용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예컨대 물질 세계는 불변의 법칙에 지배되고 있다는 데 귀착된다 등등. 이와 같이 불가지론자는 그가 과학을 하는 사람인 한에는, 즉 그가 무엇을 알고 있는 한에서는 유물론자다. 그러나 그는 과학 밖에서는, 그가 알지 못하는 영역에서 그는 자기의 무식을 그리스 어로 번역하여 불가지론이라고 하는 것이다.54*
 어쨌든 한 가지만은 의심할 수 없다. 즉 내가 설혹 불가지론자라 하더라도 나는 이 소책자에 서술되어 있는 역사관을 역사적 불가지론이라고 부를 수는 없으리라는 사실이다. 종교적인 사람들은 나를 비웃을 것이요, 불가지론자들은 분개해서 당신은 우리를 놀리는가라고 물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다른 여러 나라 말로도 그러했던 것처럼, 영어로도 '사적 유물론'이란 표현을 써서 세계사 과정에 대한 다음과 같은 견해, 즉 모든 중요한 역사적 사건의 궁극적 원인과 결정적 동력을 사회의 경제적 발전에서, 생산 방식과 교환 방식의 변화에서, 또 이 변화로 생기는 서로 다른 계급으로의 사회의 분열과 이들 계급 서로간의 투쟁에서 찾는 견해를 표시하려 한다. 그렇다고 하여 영국의 점잔 빼는 신사들, 독일어로는 속물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과히 격분하지 말았으면 한다.
 만일 내가 사적 유물론이 점잔 빼는 영국 속물들에게도 이로운 것일 수 있다는 점을 명백히한다면, 아마 사람들은 나에게 좀더 너그럽게 대해 줄 것이다. 앞에서 나는 약 40〜50년 전에 영국에 이주한 교양 있는 외국인이라면 누구나, 영국의 점잔 빼는 중간 계급의 종교적 위선 또는 편협성에 지나지 않는 태도 때문에 몹시 불쾌해했다는 사실을 지적한 바 있다. 나는 이제 당시의 점잔 빼는 영국 중간 계급이 결코 외국 인텔리의 눈에 비친 것만큼 그렇게 어리석지는 않았다는 것을 밝혀 보려 한다. 이 계급의 종교적 경향에는 그 이유가 있다.
 유럽이 중세를 벗어났을 때에는 도시의 신흥 부르주아지55*가 그 혁명적 요소였다. 그들이 중세의 봉건 체제 안에서 쟁취한 지위는, 그들의 팽창력으로 보아 이미 너무 왜소한 것이 되었다. 부르주아지의 자유로운 발전은 봉건 제도와는 벌써 양립할 수 없게 되었으며, 낡은 봉건 제도는 붕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봉건 제도의 국제적 중심은 로마 카톨릭 교회였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그 모든 내부 전쟁에도 불구하고 봉건적인 서유럽 전체를 정치적인 전일체로 통일해, 한편으로는 분리된 그리스 정교의 세계와 다른 한편으로는 이슬람교의 세계와도 대립해 있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봉건 체제를 신의 은총이라는 후광으로 감싸 주었다. 로마 교회는 봉건제를 본따 그 자체의 위계 질서를 세웠다. 그리하여 마침내 로마 교회는 최대의 봉건 영주가 되었다. 왜냐하면 이 로마 교회는 카톨릭 교회의 모든 소유지 가운데 적어도 1/3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각 나라에서 속세의 봉건제와 투쟁하자면, 우선 로마 교회와 같은 봉건제의 신성한 중앙 조직을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게다가 부르주아지의 번영과 함께 서서히 과학의 거대한 성장이 이루어졌다. 천문학, 화학, 물리학, 해부학, 생리학이 다시 연구되었다. 부르주아지에게는 공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물체의 속성과 자연력의 발현 형태를 연구하는 과학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까지 과학은 교회의 온순한 종이었으며, 따라서 신앙에 의해 규정된 한계를 스스로는 벗어날 수가 없었다. 요컨대 그것은 사실상 모든 것이 되었으나 단지 (참된 의미의一역자) 과학이 아니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제 과학은 교회를 반대해 일어났다. 부르주아지는 과학이 필요했으므로 이 봉기에 참가했다.
 이상에서 나는 성장하는 부르주아지가 현존 교회와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던 두 가지 점을 언급한 데 지나지 않지만, 그러나 이것만으로도 다음과 같은 사실을 증명하는 데는 충분할 것이다. 즉 첫째로 카톨릭 교회의 권위를 반대하는 투쟁에 가장 많이 참가한 것은 바로 이 계급, 즉 부르주아지였다는 것, 둘째로 봉건제를 반대하는 온갖 투쟁이 당시에는 종교적인 분칠을 하고 우선 교회를 겨냥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투의 첫 함성을 올린 것은 대학이나 도시 상인들이었지만, 그 강력한 반향은 어쩔 수 없이 농촌 주민 대중인 농민들——이들은 이미 곳곳에서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종교적이고 세속적인 봉건 영주들과 격렬한 투쟁을 벌였다.——속에서 울려 나올 수밖에 없었다.
 봉건제를 반대하는 유럽 부르주아지의 투쟁은 3대 결전에서 그 절정에 이르렀다.
 첫째 결전은 이른바 독일의 종교 개혁이었다. 반(反)교회 폭동을 부르짖는 루터(Luther)의 호소에 호응해 두 개의 정치 봉기가 일어났다. 하나는 1523년 프란츠 폰 지킹엔56* 영도로 일어난 하층 귀족의 봉기였고, 다른 하나는 1525년의 대농민 전쟁이었다. 이 두 봉기는 모두 다 주요 참가 당파였던 도시 부르주아지의 우유 부단함 때문에 진압되었는데, 이 우유 부단함의 원인에 대해서는 여기서 상세히 논하지 않겠다. 그 뒤 투쟁은 각 제후들과 황제의 중앙 권력 사이의 분쟁으로 후퇴했으며, 그리하여 독일은 그 뒤 200년 동안 정치적으로 적극적인 유럽 국민의 명단에서 제외되어 왔다. 루터의 종교 개혁은 어쨌든 독일에 하나의 새로운 종교를, 바로 현대 군주제에 필요한 종교를 수립했다. 동북부 독일의 농민들은 루터 파로 개종하자마자 자유민에서 농노 상태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루터가 실패 한 곳에서 칼뱅(Calvin)이 승리했다. 그의 교리는 당시 가장 과감한 부르주아지의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었다. 그의 예정설57*은, 상업과 경쟁의 세계에서는 성공과 파산이 개인의 활동이나 수완이 어떠한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에게 의존하지 않는 사정 여하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종교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어떤 개인의 의사나 행동이 아니라' 강력한, 그러나 알 수 없는 경제력의 '자비심이 결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종래의 모든 상업 통로와 상업 중심이 새로운 것에 의해 밀려나고, 아메리카와 인도가 발견되고, 예로부터 숭상되어 온 경제상의 신조——금 • 은의 가치——까지도 흔들리고 무너지는 경제 변혁의 시대에 특히 그러했던 것이다. 게다가 칼뱅의 교회 제도는 철두철미 민주주의적이었으며 공화주의적이었다. 이미 신의 왕국도 공화주의화했는데 지상의 왕국이 왕 • 주교 • 봉건 영주 등의 충실한 시민으로 남아 있을 수 있겠는가? 독일의 루터 파가 독일 군소 제후의 손안에 있는 유순한 도구가 된 반면, 칼뱅 파는 네덜란드에 공화국을, 영국 특히 스코틀랜드에 위력 있는 공화파 들을 창건했다.
 부르주아지의 두 번째 대봉기는, 캘뱅주의를 자기의 완성된 전투적 이론으로 보았다. 이 봉기는 영국에서 일어났다. 도시 부르주아지가 봉기의 첫 봉화를 올렸고 농촌 지방의 중농(요먼)이 그것을 승리로 이끌었다. 기묘한 현상이지만 3대 부르주아 혁명에서 전투 부대는 언제나 농민이었다. 그리고 승리를 쟁취한 뒤 그 승리의 경제적 성과 때문에 틀림없이 몰락하고 마는 계급도 바로 농민이다. 크롬웰58* 이후 100년이 지나자 영국의 요먼은 완전히 없어지다시피 했다. 그러나 어쨌든 이 요먼과 도시 평민들이 참가함으로써 비로소 투쟁은 끝까지 철저히 수행되었던 것이며, 그리하여 찰스 1세가 단두대에 오르게까지 되었다. 당시 이미 충분하게 무르익은 승리의 열매만이라도 거둬 들일 수 있으려면, 부르주아지가 이 목적보다도 훨씬 더 멀리 혁명을 이끌고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1793년 프랑스에서도, 1848년 독일에서도 그러했다. 사실 이러한 것이 부르주아 사회의 발전 법칙의 하나인 것 같다.
 이렇듯 아주 왕성하게 진행된 혁명적 활동의 뒤를 이어 불가피하게 반동이 닥쳐왔는데, 이 반동은 또 그것대로 또한 자기의 목적보다 더 멀리 나아갔다. 몇 차례의 동요가 있은 뒤 마침내 새로운 중심이 확립되고 그것이 그 뒤 발전의 출발점이 되었다. 속물들이 '대반란'이라고 이름붙인 영국 역사상의 저 위대한 시기와, 이 시기에 뒤이어 일어난 여러 전투는 자유주의적 역사 서술에서 '명예 혁명'이라고 부르는 1689년의 비교적 사소한 사건으로 끝났다.
 이 새로운 출발점이란 곧, 신흥 부르주아지와 종전의 봉건적 대토지 소유자들 사이의 타협이었다. 후자는 오늘과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귀족으로 인정되고 있었으나, 이미 오래 전부터 국내에서 최초로 부르주아화하는 과정에 있었던 것이다. 프랑스의 루이 필립의 경우에는 오랜 시일이 지나서야 비로소 그러한 길을 걸었다. 영국을 위해서는 다행하게도, 구봉건 귀족들은 장미 전쟁59*에서 서로를 살륙했다. 그 후계자들 또한 대부분이 그 옛 가문의 후손들이기는 하나, 혈통은 매우 먼 방계였기 때문에 아주 새로운 집단을 형성했다. 그들의 관습과 경향은 봉건적이라기보다 오히려 훨씬 더 부르주아적이었다. 그들은 화폐의 가치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곧 지대를 올리는 데 착수하여, 수백의 소작농을 토지에서 몰아내고 그들을 양(羊)과 바꾸어 놓았다. 헨리 8세(1509〜1547년)는 교회 소유지를 나눠 주거나 헐값으로 마구 판매함으로써, 새로운 부르주아 출신 지주를 많이 만들어 냈다.
 17세기 말까지 끊임없이 계속되어 온 대소유지 몰수도, 그것이 뒤에 졸부와 반졸부들에게 나눠 주어지자 또한 마찬가지 결과를 가져왔다. 그렇기 때문에 영국 '귀족'은 헨리 7세(1485〜 1509년) 시대 이래, 산업 발전에 저항하지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거기서 이익을 보려고 했다. 마찬가지로 대토지 소유자들 가운데서도 정치 • 경제적 동기에서, 금융 부르주아지나 산업 부르주아지의 지도자들과 협력하는 데 동의하는 층들이 늘 있었다. 그리하여 1689년의 타협은 쉽게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정치적 전리품, 즉 관직 • 한직 • 고액의 봉급 등이 어떤 조건에서 명문 토지 귀족의 몫으로 제공되었다. 그 조건이란 금융계, 산업계와 상업계의 각 중간 계급의 경제적 이해 관계를 충분히 고려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경제적 이해 관계는 이미 당시 충분히 강력한 것이었고, 결국 바로 이것이 그 나라의 일반적 정책을 결정하고 있었다. 물론 몇몇 개별 문제에서 알력도 있었으나, 귀족적 과두 정치는 자기들의 경제적 번영이 산업 또는 상업 부르주아지의 번영과 뗄레야 뗄 수 없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때부터 부르주아지는 평범하지만 공인된 영국 지배 계급의 일원이 되었다. 다른 모든 지배 계급과 더불어 부르주아지도 방대한 근로 인민 대중을 억압하는 데 이해를 같이했다. 상인이나 공장주는 자기의 점원, 자기의 노동자, 자기의 하인들에 대해 주인의 지위, 또는 얼마 전까지도 아직 영국에서 불리고 있던 바와 같이 '타고난 상전'의 지위를 자처하게 되었다. 이 상전은 하인들에게서 되도록 질이 좋은 노동을 되도록 많이 짜낼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목적에서 상전은 그들에게 적당한 복종심을 길러 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상전은 그 자신이 종교적이었다. 그의 종교는 그에게 깃발——전에는 이 깃발을 들고 그가 왕과 영주들을 깨부수었다.——을 제공했다. 얼마 안 가서 그는 이 종교가 자기의 타고난 하인들의 의식을 변화시켜, 헤아릴 수 없는 신의(神意)를 가지고 그들 위에 군림하는 주인의 명령에 순종케 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았다. 간단히 말하면 영국 부르주아지는 이때부터 ‘하층 계급’, 방대한 생산 인민 대중을 억압하는 데 가담하게 되었는데, 이 억압에 적용된 수단의 하나가 곧 종교의 감화력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부르주아지의 종교적 경향을 강화시킨 사정이 또 하나 있었다. 그것은 영국에서 개화한 유물론이었다. 이 무신론적인 새 학설은 비단 경건한 중간 계급만을 공포에 빠뜨린 것이 아니다. 그것은 더군다나, 부르주아지도 포함한 교양 없는 대중에게 충분한 만족을 주었던 종교와는 반대로, 학자나 교양 있는 사람들에게만 적합한 철학이라고 스스로 표명하고 나섰다. 홉스와 함께 이 학설은 왕의 전능을 옹호하고 나섰으며, 절대 군주제더러 튼튼하기는 하나 심술궂은 녀석인 저 인민을 억압하도록 호소했다. 홉스의 후계자들一一볼링브로우크 60*, 샤프츠베리(Shaftesbury) 등등一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새로운 이신론적 형태의 유물론은 여전히 귀족적인 비전(秘傳)의 학설이었다. 따라서 유물론은 종교적 이단성뿐만 아니라 그 반(反)부르주아지적인 정치적 연계 때문에 부르주아지로부터 미움을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귀족적인 유물론과 이신론에 대립하여, 한때 반(反)스튜어트 왕조 투쟁의 깃발과 전사(戰士)를 배출시켰던 바로 그 신교파들이 이번에도 진보적 중간 계급의 주요 전투력을 제공했던 것이며, 또 현재까지도 아직 자유당61*의 기본 골격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러는 동안 유물론은 영국에서 프랑스로 건너가, 데카르트 철학에서 파생한 또 하나의 유물론 철학의 학파62*와 합류했다. 프랑스에서도 또한 유물론은, 맨 처음에는 순전히 귀족적인 학설이었다. 그러나 그 혁명적 성격은 곧 나타났다. 프랑스 유물론자들은 자신들의 비판을 종교 영역에 국한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 시대의 모든 과학적 전통과 정치 제도를 비판했다. 그들은 자기들 이론의 보편 타당성을 증명하려고 가장 빠른 길을 택했다. 즉 그들은 그들에게 백과 전서파라는 이름을 붙여 준 방대한 저작 『백과 전서』(Encyclopèdie)에서, 지식의 모든 대상에다 대담하게 자기들의 이론을 적용했다. 바로 이와 같이 하여 유물론은, 이러저러한 형태로——공공연한 유물론으로서 또는 이신론으로서——교양 있는 모든 프랑스 청년들의 세계관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영국 왕당파63*에 의해 세상에 나타나게 된 이 학설이 대혁명 당시에는 프랑스의 공화파와 과격파에게 이론적 토대와 함께 '인권 선언'의 대본을 제공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프랑스 대 혁명은 부르주아지의 세 번째 봉기였다. 그러나 그것은 종교적 의상을 완전히 벗어 던지고 공개적인 정치 무대에서 투쟁을 해 나간 최초의 봉기였다. 그것은 또한 교전한 한 쪽, 즉 귀족의 완전한 멸망과 다른 쪽, 즉 부르주아지의 완전한 승리가 참으로 끝까지 진행된 맨 처음 봉기이기도 했다. 영국에서는 혁명 전의 제도와 혁명 뒤의 제도 사이의 계승적 연계 또는 대토지 소유자와 자본가 사이의 타협이, 재판의 판례가 계승되고 봉건적 법률 형태가 정중히 보존된 데서 잘 표현되었다. 이와 반대로 프랑스에서는 혁명이 과거의 전통을 철저히 깨부수고, 봉건제의 마지막 흔적마저 싹 쓸어 버렸으며, 민법전에서 구(舊)로마법——이것은 마르크스가 '상품 생산'이라고 부르는 경제적 발전 단계에서 나오는 법률적 관계들을 거의 완전하게 표현한 것이다.——을 근대 자본주의적 관계에다 교묘하게 적용했다. 이 혁명적인 프랑스 법전64*은 지금도, 아직 다른 모든 나라들——영국도 예외가 아니다.——에서 소유권을 개혁할 때 모범으로 삼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나 여기서 잊어서는 안 될 것이 하나 있다. 영국의 법률은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 관계를 여전히 야만적이고 봉건적인 언어로 표현하고 있으며, 이 언어와 이 언어가 표현하는 사물의 관계가 마치 영어 철자법과 영어 발음의 관계——한 프랑스 인의 말에 의하면 런던이라 쓰고 콘스탄티노플이라 발음한다는 것이다.——와 같이 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 대신에 이 영국의 법률이야말로, 대륙에서는 절대 군주제의 지배 밑에서 완전히 소멸하여 아직까지 아무데서도 완전히 다시 쟁취되지 못한 개인의 자유, 지방 자치, 재판에 의하지 않는 모든 외부 간섭으로부터의 완전한 자유, 한마디로 말해서 고대 게르만적 자유의 좋은 요소들을 여러 세기 동안 순수한 형태로 보존해 왔으며, 그것을 아메리카와 식민지들에 이식한 유일한 법률이라는 사실이다.
 이제 우리의 영국 부르주아로 돌아가자. 프랑스 혁명은 그들에게, 대륙 왕국들의 도움을 받아 프랑스의 해상 무역을 파괴하고 그 식민지를 빼앗으며, 해상 경쟁자인 프랑스 인의 마지막 야망까지도 말살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주었다. 이것이 영국 부르주아가 혁명과 싸우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둘째 이유는, 이 혁명의 방법 이 그들에게는 도무지 비위에 맞지 않았다는 점이다. ’저주받아 마땅한' 테러(공포 정치)뿐만 아니라 부르주아지의 지배를 극단으로까지 추진하려는 시도 자체가 벌써 그러했다. 실로 영국 부르주아는 귀족 없이는 전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귀족은 부르주아에게 예의 범절(그것은 그들에게 알맞은 것이기도 했다.)을 가르쳐 주었고, 그들을 위해 유행도 고안해 주었으며, 또 국내의 질서 유지자인 군대와 새 식민지와 새 시장의 정복자인 함대에 장교를 공급해 주었던 것이다. 하긴 부르주아 가운데도 또한 진보적 소수파가 있었다. 그들은 타협에서 별로 이익을 보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비교적 부유하지 못한 부르주아지로 이루어져 있던 이 소수파는 혁명에 대해 동정적 태도를 보이고는 있었으나 의회에서는 무력했다.
 그리하여 유물론이 프랑스 혁명의 신조가 되면 될수록 미신적 영국 부르주아는 더욱 굳게 자기 종교를 고수했다. 파리의 공포 정치 시대는, 인민이 종교를 잃었을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가를 보여 주지 않았던가? 유물론이 프랑스에서 주변으로 전파되어 비슷한 이론적 흐름들, 특히 독일 철학으로 뒷받침되면 될수록65*, 또 유물론과 일반적인 자유 사상이 실제로 대륙에서 교양 있는 사람의 필수적 표지가 되면 될수록, 영국의 중간 계급은 자기들의 잡다한 종교적 신앙을 더욱더 완강히 고수하게 되었다. 이들의 신조가 아무리 눈에 띄게 서로 다르다 할지라도 그것은 모두 명백히 종교적이고 기독교적인 신조들이었다.
 프랑스에서 혁명으로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승리가 확립되었을 때, 영국에서는 와트(Watt), 아크라이트(Arkwright), 카트라이트(Cartwright) 등등에 의해 경제력의 중심을 완전히 옮겨 놓은 산업 혁명이 개시되었다. 부르주아지의 부는 이제는 토지 귀족의 부에 비할 바 없이 더 급속히 늘어갔다. 부르주아지 자체 안에서도 금융 귀족이라든가 은행가들은 공장주들에 비해 점점 뒤로 물러나게 되었다. 1689년의 타협은 그 뒤 점점 부르주아지에게 유리하게 발전해 갔으나, 그래도 역시 그것은 이미 더 이상 당사자들의 역학 관계에 맞지 않게 되었다. 이 당사자들의 성격 또한 변했다. 1830년의 부르주아지는 지난 세기의 부르주아지와는 아주 달랐던 것이다. 아직 귀족이 틀어쥐고 있던 정치 권력, 귀족들이 새로운 산업 부르주아지의 요구에 대항해 행사해 오던 이 정치 권력은 더 이상 새로운 경제적 이해 관계와 양립할 수 없게 되었다. 귀족에 대한 투쟁을 또다시 벌일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이 투쟁은 새 경제력이 승리함으로써만 끝날 수 있었다. 1830년에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모든 저항에도 불구하고 선거법이 처음으로 개정되었다. 그 결과, 부르주아지는 의회에서 공인된 유력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다음에는 곡물법이 폐지되어66* 부르주아지, 특히 가장 활동적인 부분인 공장주들이 토지 귀족에 비해 뚜렷이 우세하게 되었다. 그것은 부르주아지 최대의 승리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부르주아지가 오로지 자기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거둔 마지막 승리이기도 했다. 그들은 그 뒤에 거둔 모든 승리를 새로운 사회 세력, 처음에는 그들과 동맹해서 행동했으나 나중에는 그들의 경쟁자로 나타난 새로운 세력과 나누어 갖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산업 혁명은 공장주라는 대자본가 계급을 만들어 냈지만, 동시에 훨씬 수가 많은 공장 노동자 계급도 만들어 냈다. 이 계급은 산업 혁명이 생산 부분을 하나씩 차츰 포괄해 감에 따라 수적으로 계속 늘어갔다. 그 수가 늘어나면서 그 힘 또한 커져, 이미 1848년에는 그렇게도 버텨 오던 의회도 그 힘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결사 금지법을 폐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선거법 개정 운동 때 노동자들은 개혁파의 급진적 일익을 이루고 있었다. 1832년 법령으로 그들이 선거권을 빼앗겼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요구를 '인민 헌장'(People's Charter)에 써넣어 가지고, 부르주아지의 강력한 반(反)곡물법 동맹에 맞서 차티스트 당을 독자적으로 조직했다. 그것은 우리 시대 최초의 노동자당이었다.
 그 뒤 1848년 2월과 3월에는 대륙에서 혁명이 일어났는데, 이 혁명에서 노동자들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적어도 파리에서는 자본주의 사회의 견지에서는 도저히 허용될 수 없는 요구들을 들고 나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에 뒤이어 전반적 반동이 닥쳐왔다. 맨 처음에는 1848년 4월 10일의 차티스트의 패배, 다음에는 같은 해 6월의 파리 노동자 봉기의 진압, 또 이탈리아 • 헝가리 • 남부 독일에서의 1849년의 실패, 끝으로 1851년 12월 2일 루이 보나파르트의 파리 정복 등이 있었다. 그리하여 잠시나마 노동자들의 요구라는 도깨비를 물리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나 비싼 대가를 치렀던가! 영국 부르주아는 오래 전부터 평민들에게는 종교적 굴레를 씌워 둘 필요가 있다고 확신한 바 있었는데, 이러한 모든 일을 겪고 난 뒤에는 그 필요성이 얼마나 간절히 느껴졌겠는가! 그리하여 그들은 대륙 형제들의 비웃음을 조금도 돌아보지 않고, 해마다 하층 계급들에 대한 복음 전도비로 수천 수만금을 계속 지출했던 것이다. 자기 자신의 종교 기관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던 그들은, 당시 종교적 투기업의 가장 큰 조직자인 미국 형제들에게 호소하여 미국에서 신앙 부흥 운동67*, 즉 무디(Moody)나 생키(Sankey) 같은 선교사 등등을 수입했다. 나중에 그들은 '구세군'의 위험한 도움을 받아들이는 데까지 나아갔다. 구세군은 원시 기독교의 선전 수법을 되살리고, 빈민을 신의 선민으로 보며, 종교적 방법으로 자본주의와 투쟁하며, 그리하여 지금 이 사업에 현금을 지출하고 있는 부자들에게는 앞으로 아주 치명적이 될 수 있는 원시 기독교적 계급 투쟁의 몇몇 측면들을 발전시키고 있는 교파다.
 유럽 어느 나라에서도 부르주아지가 정치 권력을——봉건 귀족이 중세기를 통해서 장악하고 있었던 것처럼——적어도 오랜 기간에 걸쳐서 독점적으로 장악할 수는 없다는 것을 역사 발전 법칙의 하나로 인정해도 좋을 듯하다. 봉건제가 완전히 끝장난 프랑스에서조차, 부르주아지가 독자적으로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던 것은 아주 짧은 기간밖에 안 된다. 1830년부터 1848년에 이르는 루이 필립 시대에는, 부르주아지의 일부가 지배하고 있었음에 지나지 않는다. 훨씬 더 많은 부르주아지가 심한 자격 제한으로 선거권을 빼앗기고 있었던 것이다. 제2공화국 당시, 즉 1848〜1851년에는 부르주아지 전체가 지배했으나, 그것도 겨우 3년간에 지나지 않았다. 부르주아지의 무능력은 제2 제정으로 가는 길을 열어 주었다. 오늘 제3공화국 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부르주아지는 한 계급 전체로서 20년간 국정을 장악해 왔을 뿐이다.68* 그러나 지금 이미 그것은 명백한 몰락의 징조를 나타내고 있다. 지금까지 부르주아지는, 다만 미국처럼 봉건 제도가 존재한 적이 없고 사회가 처음부터 부르주아적 기초 위에 세워진 나라들에서만 오랫동안 지배할 수 있었다. 그런데 프랑스나 미국에서조차 부르주아지의 후계자인 노동자들은 벌써 요란하게 문을 두드리고 있다.
 영국에서는 부르주아지가 흘로 권력을 장악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심지어 1832년에 부르주아지가 승리했을 때에도 정부의 모든 요직은 거의 귀족이 독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부유한 중간 계급이 그것을 묵인하는 이 온순성은, 그 뒤 언젠가 자유주의적인 대공장주 포스터69*가 브래드포드(Bradford)의 청년들에게 연설을 하기 전까지,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연설에서 청년들에게,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는 역시 프랑스 어를 배워야 한다고 간곡히 타일렀던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자기가 장관이 되어 프랑스 어가 적어도 영어만큼 필요한 사회에 갑자기 들어서게 되었을 때 자기 자신이 얼마나 무식하게 보였던가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사실 당시의 영국 부르주아는 일반적으로 전혀 교양 없는 엉터리 출세자들이었다. 따라서 실무적 민첩함이 가미된 섬나라 식의 편협함이나 자부심과는 다른 자질을 요구하는 정부의 고급 관직은, 싫든 좋든 모두 귀족에게 맡겨 버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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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심지어 실무적인 일에서까지 민족적 국수주의라는 거만함이 형편없는 충고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 아주 최근까지만 해도 평범한 영국의 공장주는 영국인이 외국어를 쓰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겼으며 외국의 '가난한 악마들'이 영국에 정착하여 영국인들의 수고를 덜어 주는 점, 또 외국에서 자신의 생산물이 팔리는 점을 꽤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그는 대개 독일인인 이 외국인들이, 그렇게 함으로써 영국 대외 교역의 큰 부분——수출 못지않게 수입에서도——을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영국의 직접적인 외국 무역이 점점 식민지, 중국, 미국 및 남미에 국한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한 번도 눈을 돌리지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이 독일인들이 외국에서 다른 독일인들과 교역하면서 전세계적으로 완벽한 교역 식민지망을 짜 놓았다는 사실도 외면하고 있다. 그러나 약 40년 전 독일이 수출을 위해서 열심히 각종 상품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을 때, 독일은 교역 식민지에서 독일에 놀랄 만한 도움이 되는 도구들을 찾아냈으며, 그 결과 독일은 그렇게 짧은 기간 안에 곡물 수출국에서 선진 공업국의 대열로 끼어들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약 10년 전부터 영국의 공장주들은 불안해하기 시작했고, 자기 나라의 공사나 영사들에게 어떻게 해서 자신들의 고객들이 떨어져 나가게 되었는가를 문의하기에 이르렀다. 그 대답은 하나같이 다음과 같았다. ① 당신들은 그 나라 말을 배우려 들지 않고 그 나라 사람들에게 영어를 배우라고 요구한다. ② 당신들은 고객들의 욕구, 관습 및 취향을 충족시켜 주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그들에게 영국 식대로 따르라고 요구한다. ❦


 오늘날까지도 신문 지상에 ‘중간 계급의 교육’에 대한 논쟁이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 영국 부르주아지가 아직도 최상의 교육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좀더 자신들의 분에 맞는 어떤 얕은 것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곡물법이 폐지된 뒤에도 승리를 획득할 수 있는 사람, 즉 콥든(Cobden), 브라이트(Bright), 포스터 같은 사람들70*이 정부의 온갖 공직에서 제외되었다가, 20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개혁에 관한 새 법령에 의해 그들에게 내각의 문이 열렸다는 사실조차 아주 당연한 일로 생각되었다. 아니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영국 부르주아지는 자신들이 사회적으로 열등한 지위에 있다는 감정에 몹시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그들 자신과 인민의 돈으로 장식용의 건달 계급(귀족一역자)을 키워 두었다가, 공식적인 의식이 있을 경우에는 모두 이들로 하여금 국민을 그럴듯하게 대표하도록 한다. 그리고 부르주아지 가운데서 누군가가 결국은 자기들 자신이 만들어 낸 것에 지나지 않는 이 좁은 집단에 가입할 자격이 있다고 인정받을 때에는, 스스로 다시 없는 영광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상공업에 종사하는 중간 계급이 아직 토지 귀족을 정치권력에서 결정적으로 몰아내기도 전에 역사 무대에는 새로운 경쟁자, 즉 노동자 계급이 등장했던 것이다. 차티스트 운동과 대륙 혁명 뒤에 닥쳐온 반동, 게다가 1848년부터 1866년에 걸친 영국 공업의 유례없는 번영(이 번영은 보통 자유 하나만으로 설명되고 있으나 훨씬 더 큰 원인은 철도, 기선 등 일반적으로 교통 기관의 거대한 발전에 있는 것이다.)으로 노동자들은 또다시 자유당에 종속되게 되었다. 여기서도 그들은 차티스트 운동 전처럼, 이 자유당의 급진적인 일익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차츰 선거권에 대한 노동자 측의 요구는 꺾을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자유주의자들을 지도하고 있던 휘그 당이 아직도 겁을 집어먹고 있을 때, 디즈레일리71*는 탁월한 솜씨를 발휘했다. 토리 당에 유리한 기회를 포착하여, 그는 도시 선거구에 독립 주택을 갖고 있는 개인의 선거권(세대주 선거권)에 관한 법령을 실시하는 동시에 선거구를 다시 정했다. 그 뒤 얼마 안 가서 비밀 투표제가 확립되고, 나아가 1884년에는 세대주 선거권이 모든 구에 확장되고 군에도 실시되게 되었으며, 또 선거구가 다시 할당되어 어느 정도 서로 균형이 잡히게 되었다. 이러한 모든 것으로 말미암아 선거에서 노동자 계급의 세력이 상당히 커져, 지금 노동자들은 150개에서 200개의 선거구에서 유권자의 다수를 이루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나 전통에 대한 존경을 가르치는 학교로서는 의회 제도보다 더 좋은 학교는 없다! 중간 계급은 맬더스 경이 농담으로 '우리의 오랜 귀족'이라고 부른 집단을 숭배와 공경의 마음으로 우러러보았는데, 당시 노동자들 또한 이른바 ‘더 나은 계급’인 부르주아지를 존중하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보고 있었다. 또 사실 15년 전의 영국 노동자들은 모범적인 노동자들이었다. 따라서 고용주의 지위에 대한 그들의 극히 존경하는 태도라든가 자신들의 권리를 요구할 때의 자제와 겸손이라든가 하는 것들이, 우리 독일의 강단 사회주의자들이 자기 동포인 독일 노동자들의 고칠 수 없는 공산주의적이고 혁명적인 경향 때문에 받았던 상처를 어루만져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영국 부르주아는 우수한 실업가들로서, 독일 교수들보다는 앞을 내다볼 줄 알았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노동자들과 권력을 나누었을 따름이다. 차티스트 운동 당시 그들은, 튼튼하기는 하나 심술궂은 녀석들인 인민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부르주아지는 인민 헌장의 요구 가운데 대부분을 어쩔 수 없이 용납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그것은 국법이 되었다. 이제는 인민을 도덕적 수단으로 얽매어 두는 것이 어느 때보다도 중요했다. 그런데 대중에게 영향을 주는 첫째가는 가장 중요한 수단은 역시 종교였다. 그렇기 때문에 학교 관리에서 성직자가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부르주아지는 교회 의식에서 구세군에 이르기까지의 갖가지 종교 선동에 더욱더 많은 비용을 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대륙 부르주아들의 자유 사상과 종교적 무관심에 대한 점잖은 영국 속물들의 승리가 닥쳐왔다. 프랑스와 독일의 노동자들은 이미 반란 세력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전반적으로 사회주의에 물들어 있을 뿐만 아니라, 또 아주 확고한 이유에서였지만, 권력 탈취 수단을 선택하는 데서 준법성이라는 것에 구애받는 법이 전혀 없었다. 이 튼튼한 녀석들은 참으로 그 문제에 관한 한 나날이 심술궂게 되어 갔다. 프랑스나 독일의 부르주아들은 마지막 수단으로, 자기의 자유 사상을 슬그머니 내버리는 수밖에 딴 도리가 없었다. 마치 배멀미가 점점 더 심해지는 것을 느끼게 된 불량 소년이 그때까지 갑판 위에서 자랑스럽게 피워대던 불붙은 담배를 남몰래 내던져 버리듯이, 종교를 냉소해 오던 자들이 한 사람씩 겉으로 경건한 체하면서 교회와 교리와 의식에 대해서 존경하는 태도로 말하게 되었으며, 또 피치 못할 경우에는 스스로 그것들을 믿게까지 되었다. 프랑스 부르주아는 금요일마다 고기를 금했고, 독일 부르주아는 일요일마다 장황한 신교 목사의 설교를 듣느라 교회 의자에 지루하게 앉아 있었다. 부르주아들은 그들의 유물론 때문에 궁지에 빠졌다. “종교는 인민을 위해 유지되어야 한다.” 이것이 사회를 완전한 파멸에서 구원하는 마지막이자 단 하나의 수단이다. 불행하게도 그들은, 종교를 영원히 파괴하려고 그들로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한 뒤에야 비로소 이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영국 부르주아가 비웃으면서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외칠 수 있는 시기가 왔다. “바보들 같으니라구, 그런 것쯤은 우리는 이미 200년 전에 알고 있었는 걸!”
 그러나 나는 영국 부르주아의 종교적 고루함도, 대륙 부르주아의 늦게 시작된 개종(改宗)도, 더욱 높아 가는 프롤레타리아의 분출을 결코 억누르지 못하리라고 생각한다. 전통, 그것은 커다란 장애물이며 역사의 억지력이다. 그러나 그것은 수동적인 것일 뿐이며 따라서 사라지지 않을 수 없다. 종교 또한 언제까지나 자본주의의 방벽이 될 수는 없다. 우리의 법률 • 철학 • 종교적 관념이란 특정 사회의 지배적인 경제 관계의 직접적인 또는 간접적인 관념의 파생물 가운데 하나이므로, 이러한 관념들은 경제 관계가 근본적으로 바뀐 뒤에는 오랫동안 유지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초자연적인 계시를 믿든가, 그렇지 않으면 어떠한 종교적 설교도 멸망해 가는 사회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승인하든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실제로 영국에서도 노동자들은 또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론 그들은 여러 가지 전통에 젖어 있다. 무엇보다도 우선 부르주아적 전통, 예컨대 당은 보수당과 자유당 두 당만이 있을 수 있다느니 노동자 계급은 강대한 자유당에 의해 해방을 획득해야 한다느니 하는 식의 널리 보급된 편견에 젖어 있다. 다음으로는 노동자들의 전통에 젖어 있다. 이것은 노동자 계급이 독자적인 진출을 모색하기 시작하던 시기의 시초부터 이어져 내려온 것이다. 이에 따라 지난날의 많은 노동 조합들에서는 정식으로 견습 기간을 마치지 않은 노동자들은 모두 조합에서 배제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러한 노동 조합이 모두 자체 안에 파업 파괴자들을 키우고 있다는 것밖에 뜻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영국 노동자 계급은 전진하고 있다. 이 점은 교수 브렌타노72* 씨까지도 그의 강단 사회주의자 동료들에게 유감의 뜻을 표시하면서 보고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노동자 계급은——영국에서 모든 것이 그러한 바와 같이——때로는 동요하며 때로는 암중 모색적인, 거의 성과 없는 시도를 하면서도 천천히 정연하게 움직이고 있다. 노동자 계급은 어떤 데서는 사회주의란 말에 극도의 불신을 품으면서도, 그러나 점점 그 본질을 받아들이면서 움직이고 있다. 노동자 계급은 움직이고 있으며 그 운동은 더욱 넓어져 여러 노동자층을 하나하나씩 휩쓸고 있다. 지금의 운동은 런던 동부 빈민가의 미숙련 노동자들을 혼수 상태에서 각성시켰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새로운 힘이 노동자 계급에게 얼마나 커다란 자극을 주었는가를 보았다. 비록 이 운동의 진행이 성급한 비평가들의 조급한 요구에는 미처 따라가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 비평가들은 노동자 계급이야말로 영국 국민성의 가장 우수한 면들을 지니고 있으며, 또 영국에서는 어느 하나의 진보라도 일단 쟁취된 다음에는 결코 잃어버리는 일이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옛 차티스트의 아들들은 앞에서 말한 원인들에 의해 기대에 어그러지는 바가 있다 할지라도, 그 손자들은 아마도 그들의 할아버지들에 비해 손색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유럽 노동자 계급의 승리가 한갖 영국에만 달려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적어도 영국, 프랑스, 독일의 공동 노력에 의해서만 보장될 수 있다. 프랑스와 독일 두 나라에서는 노동 운동이 영국보다 훨씬 앞서 있다. 독일에서는 이미 그 승리가 닥쳐올 시기를 확정할 수 있을 정도에 이르고 있다. 최근 25년 동안에 독일 노동 운동이 이룩한 성과는 유례없는 것이다. 그것은 갈수록 빠른 속도로 전진하고 있다. 독일 부르주아지가 자신의 정치적 능력 • 훈련 • 견고함 • 정력이 가련할 정도로 부족하며 결핍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면, 독일 노동자 계급은 그러한 모든 성격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약 400년 전에 독일은 유럽 부르주아지의 첫번째 대봉기의 출발 지점이었다. 오늘날의 정세에 비추어 볼 때 독일이 또다시 유럽 프롤레타리아트가 맨 처음으로 큰 승리를 거두는 무대가 되는 것이 과연 불가능한 일이겠는가?


1892년 4월 20일


주 -------------------------------------------------------------

 1) 이 「프랑스 어판(1880년) 서문」은 1880년 5월 4〜5일에 마르크스에 의해 쓰였다. 그러나 책이 출판될 때는, 이 책을 프랑스 어로 번역한 라파르그가 서문에 서명을 했다. 나중에 발견된 마르크스의 친필 원고에는 끝부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덧붙어 있다. “친애하는 라파르그, 다음의 사항은 나와 엥겔스가 (지난 밤에) 상의해 결정한 것이오. 문장을 다듬어 주시오. 하지만 내용에는 손을 대지 마시오. 당신의 충실한 친구 칼 마르크스가.”
 이 판은 마르크스의 원고를 토대로 번역한 것이다. 라파르그가 프랑스 어판을 출판할 때 덧붙인 내용은 편집자 주 4)와 7)에 소개했으며, 독자들의 이해를 도우려고 몇 군데 조금씩 고친 것은 그대로 두었다.
 2) 엥겔스의 저서 『오이겐 뒤링 씨의 과학의 변혁』(Herrn Eugen Dühring’s Umwälzung der Wissenschaft)을 가리킨다. 이 책은 보통 줄여서 『반(反)뒤링론』(Anti-Dühring)이라고 부른다.
 3) 『사회주의 평론』(Revue socialiste) 프랑스의 월간지. 프랑스의 소부르주아 사회주의자이고 뒤에 가능주의자(Possibilist)가 된 말롱(Benoît Malon)에 의해 창간되었다. 처음에는 공화파 사회주의자의 기관지였으나 뒤에 생디칼리스트의 기관지가 되었다. 1880년 리용에서 창간되어, 1885〜1914년에는 파리에서 발행되었다. 1880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 잡지의 기고가였다.
 4) 라파르그가 서명하여 출판한 책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덧붙어 있다. “저자는 이 글들을 검토한 뒤에 세 부분으로 나누어지는 보론을 덧붙였다. 그 이유는 프랑스 독자들로 하여금 자본주의적 생산의 경제적 힘이 어떻게 변증법적으로 발전하는가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주기 위해서였다.”
 5) 『북극성』(The Nothern Star) 영국의 주간지, 차티스트의 주요 기관지. 1837〜1852년에 발행되었으며, 처음에는 리즈(Leeds)에서, 1844년 11월부터는 런던에서 발행되었다. 이 신문의 창간인 겸 편집자는 퍼거스 에드워드 오코너(Edward 〇'Connor) 였다. 1840년대에는 조지 줄리안 하니(George Julian Harney)가 편집을 맡았으며, 엥겔스는 1845년 9월부터 1848년 3월까지 이 신문의 기고가였다.
 『새로운 도덕 세계』(New Moral World) 1834년 로버트 오언이 창간한 공상적 사회주의자의 주간지. 1846년까지 발행되었으며, 처음에는 리즈에서, 1841년 10월 1일부터는 런던에서 발행되었다. 엥겔스는 1843년 11월부터 1845년 5월까 이 신문의 기고가였다.
 6) 독일 공산주의 노동자 협회(Die kommunistischen Deutschen Arbeiterverein) 1847년 8월 말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의해 브뤼셀에서 창립되었다. 창립 목표는 벨기에에 사는 독일 노동자들을 정치적으로 일깨우고 그들에게 과학적 공산주의 사상을 널리 알리려는 것이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 및 그들의 전우들의 지도로 협회는 벨기에의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세력이 결집한 합법적 중심으로 발전했다. 이 협회의 가장 진보적인 회원들은 공산주의자 동맹의 브뤼셀 지부에 가입했다. 그러나 1848년 프랑스에서 2월 혁명이 일어난 직후 벨기에의 경찰이 대부분의 협회 회원들을 체포하거나 국외로 내쫓음으로써, 독일 공산주의 노동자 협회는 활동을 중단했다.
 7) 라파르그가 서명하여 출판한 책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덧붙어 있다. “『공산당 선언』은 현대 사회주의의 가장 값진 문건 가운데 하나다. 그것은 오늘날까지도, 부르주아 사회의 발전과 자본주의 사회를 끝장내지 않을 수 없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형성에 대해 가장 풍부하고 명료하게 설명한 글이다. 이 글에서는 한 해 전에 출판된 그의 저작 『철학의 빈곤』에서와 마찬가지로 계급 투쟁 이론이 처음으로 분명하게 정식화되어 있다.”
 8) 『사회 민주주의자』(Der Sozialdemokrat) 독일 사회 민주당 중앙 기관지. 사회주의자 탄압법이 시행되던 1879년 9월부터 1888년 9월까지는 취리히에서, 1888년 10월부터 1890년 9월 27일까지는 런던에서 발행되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 신문의 교열을 맡았으며, 마르크스주의 노선이 관철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또 엥겔스는 이 신문에 직접 글을 쓰기도 했다.
 9) 장 자크 루소(Jean Jacque Rousseau)의 이론에 따르면 인간이 본래 자연 상태에서 살 때는 모두가 평등했다. 그런데 사유 재산이 발생하고 불평등한 소유 관계가 발전하면서 '인간은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 국가의 시민이 되었으며' 사회 계약에 기초를 둔 국가가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정치적 불평등이 깊어짐에 따라 이 사회 계약은 깨지고 새로운 자연 상태(전쟁 상태)가 생겨나게 되었다. 따라서 새로운 사회 계약에 기초를 둔 이성 국가를 세워 이 전쟁 상태를 끝장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루소의 저작 『인간 불평등 기원론』(1755년)과 『사회 계약론』(1762년)에 서술되어 있다.
 10) 여기서 말하는 수평파는 진짜 수평파 또는 급진파(Diggers)를 가리킨다. 이들은 17세기 영국 부르주아 혁명 때 수평파 안에서도 극좌 진영을 형성했으며 혁명이 진행됨에 따라 수평파에서 독자적으로 떨어져 나왔다. 빈농과 도시 빈민 계층의 이익을 대변하던 이들은 근로 대중이 공동으로 토지를 경작해야 하며 소작제는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몇몇 지역에서 이들은 독자적인 권력을 장악했으며, 놀고 있는 토지에 씨를 뿌리려고 땅을 갈기도 했다.(digger란 ‘땅을 파는 사람’이라는 뜻이며, 이 이름은 여기서 비롯되었다.) 크롬웰의 군대가 이들을 몰아냈을 때, 그들은 전혀 저항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들은 이 투쟁에서 평화적인 수단만을 사용하려고 했으며 신앙의 힘에만 의지했기 때문이다.
 11) 이것은 우선 공상적 사회주의의 대표자인 토머스 모어(Thomas More)의 저작『국가의 최선의 상태에 대하여, 그리고 새로운 섬 유토피아에 대하여』와 토머스 캄파넬라(Thomas Campanella)의 저작 『태양의 도시』(1623년에 간행된 『보편 철학』에 부록으로 실리고, 1643년에 단행본으로 간행)를 가리킨다.
 12) 공포 정치 시대 자코뱅 파의 혁명적 민주주의적 독재의 시기.(1792년 6월〜1794년 7월) 이 시기에 자코뱅 파는 지롱드 파와 왕당파의 반혁명 테러에 크게 자극을 받아서, 혁명적 테러(공포 정치)를 행사했다.
 집정 정부(Directoire) 프랑스 최고의 정부기관. 5인의 집정관으로 구성되며, 집정관은 해마다 1명씩 바뀌는 것이 원칙이었다. 집정 정부는 자코뱅 독채를 타도한 뒤에 채택된 1795년의 헌법에 의해 조직되었다. 이 정부는 보나파르트의 쿠데타(1799년 브뤼메르 18일)가 일어날 때까지 존속되었고, 민주 세력을 테러를 통해 지배하면서 대부르주아지의 이익을 대표했다.
 13) '자유! 평등! 박애!’라는 프랑스 혁명의 슬로건을 가리킨다.
 14) 생 시몽의 『제네바 편지』 이것은 1802년, 제네바에서 집필되고 1803년, 간행지와 간행 일자도 명시되지 않은 채 익명으로 파리에서 공식 출판된 생 시몽의 첫 저작 『제네바의 친구로부터 동시대인들에게 보내는 편지』(Lettres d'un habitant de Genève à ses contemporains)를 말한다. 엥겔스가 언급하고 있는 간행 연도는 그가 이용한 위바르(Nicolas Gustave Hubbard)의 저서 『생 시몽, 그의 생애와 저작』(파리, 1857년)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생 시몽의 각 저서들의 간행 연월에 대해 정확하지 않게 기술된 곳도 있다. 푸리에가 맨 처음으로 쓴 주요 저작으로는, 『4가지 운동과 일반 운명의 이론』(Théorie des quatre mouvements et des destinées générales)이 있다. 이 책은 19세기 초의 몇 년 사이에 쓰이고, 1808년 리용에서 출판되었다. 표지에는 라이프치히가 간행지로 되어 있다.
 15) 이것은 생 시몽의 저서 『정치 • 철학적 통신. 생 시몽으로부터 한 미국인에게 보내는 편지』의 제8서한을 가리킨다. 이 저서는, 1817년 『산업, 또는 유용한 독립 노동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들의 이익을 위한 정치 • 도덕 • 철학적 논의 제2권』이 라는 표제로 파리에서 발간된 논집에 실렸다. 위의 책 83〜87쪽을 참조. 위바르의 저서 『생 시몽……』에서는 155〜157쪽에서 이 견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16) 엥겔스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생 시몽과 그의 제자 티에리(Augustin Thierry, 1795〜1856년)가 함께 쓴 2개의 저작 『유럽 사회의 개조에 대하여, 또는 각 국민으로 하여금 그 민족적 독립을 보존하도록 하면서 유럽의 여러 국민을 단일한 정치 단체로 결집시킬 필요와 그 수단에 대하여』(파리, 1814년)와 『1815년의 대불 동맹에 대항하여 수립해야 할 조치에 대한 의견』(파리, 1815년)을 말한다. 위바르의 저서 『생 시몽……』에서는 149〜154쪽에 걸쳐 첫번째 저서를 발췌해 싣고 있으며, 또 68〜76쪽에 걸쳐 두 저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연합군의 파리 입성 1814년 3월 31일에 대(對) 나폴레옹 동맹의 군대가 파리에 입성했다. 제정은 무너졌으며, 나폴레옹은 권좌에서 물러나 엘바 섬으로 유배되지 않을 수 없었다.
 백일 천하 나폴레옹이 엘바 섬을 탈출해 파리로 돌아온 1815년 3월 20일부터, 그가 워털루에서 패전한 뒤 다시 퇴위한 같은 해 6월 22일까지를 말한다.
 17) 워털루 1815년 6월 18일 나폴레옹은 벨기에의 워털루에서 웰링턴(Wellington) 휘하의 영국 • 네덜란드 연합군과 블뤼허(Blücher) 휘하의 프러시아 군과 싸워 졌다. 이 전투는 1815년의 전쟁에서 결정적인 것이었고, (제7차) 대 나폴레옹 동맹 (영국, 러시아, 오스트리아, 스웨덴, 스페인 등 국가)의 종국적인 승리와 나폴 레옹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18) 푸리에는 이미 저작 『4개의 운동과……이론』에서 이 사상을 펼친 바 있다. 무엇보다도 다음의 명제가 그것이다. “사회 진보와 시대 변천은 여성이 자유를 얼마나 획득하게 되었는가에 비례하여 진행되며, 사회 질서의 퇴보는 여성의 자유가 줄어드는 것에 비례하여 진행된다.” 그래서 푸리에는 이 명제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을 이끌어 내고 있다. “……여성의 권리의 확장은 모든 사회적 진보의 일반 원리다.”(샤를르 푸리에, 『전집』 제1권, 파리, 1841, 195〜196쪽 참조)
 19) 샤를르 푸리에, 『보편적 통일론』(Théorie de l’unité universelle) 제1권과 제4권, 『전집』 제2권, 파리, 1843, 78〜79쪽과 제5권, 파리, 1841, 213〜214쪽 참조. 문명이 악순환을 거듭하며 운동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샤를르 푸리에의 『산업적, 조합적 신세계』(Le nouveau monde industriel et sociétaire), 『전집』 제6권, 파리, 1845, 27〜46쪽, 390쪽을 참조. 이 책의 초판은 1829년 파리에서 간행되었다. 또 샤를르 푸리에, 『전집』 제1권, 1841, 202쪽도 참조.
 20) 샤를르 푸리에, 『전집』 제6권, 파리, 1845, 35쪽.
 21) 샤를르 푸리에, 『전집』 제1권, 파리, 1841, 50쪽 이하.
 22) 로버트 오언, 『더블린에서 열린 몇몇 공개 집회에서의 의사 보고』(Report of the proceedings at the several public meetings), 더블린, 1823, 110쪽 이하.
 23) 로버트 오언은 자신의 저작 『새로운 도덕 세계에 관한 책』(The book of the new moral world, 런던, 1842〜1844)에서 이 미래의 계획을 펼쳤다.
 24) 1812년, 오언은 글래스고에서 열린 한 집회에서, 아이나 어른을 가릴 것 없이 면방적 공장에서 일하는 모든 노동자의 상태를 개선하기 위한 일련의 조치를 제안했다. 오언이 제창하여 1815년 6월에 제출된 이러한 취지의 법안은 1819년에 가서야 비로소, 그것도 핵심은 거의 빠진 형태로 국회에서 법률로 채택되었다. 이 법률은 비록 면방적 공장에 적용될 뿐이었지만, 특히 9살 미만의 아동의 노동을 금지하고(오언은 10살 미만의 아동에 대해 아동 노동을 금지할 것을 제시했다.) 16살 미만인 자의 노동 시간을 12시간으로 제한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오언의 제안에는, 모든 노동자들에 대해 10시간 반을 넘어서는 안 된다고 되어 있었다.
 25) 1833년 10월, 런던에서 협동 조합과 노동 조합 대회가 오언을 의장으로 하여 열렸다. 이 대회에서 전국 노동 조합 총연맹이 정식으로 설립되었다. 연맹의 강령과 규약은 1834년 2월에 채택되었다. 오언의 구상에 의하면, 이 연맹은 생산에 대한 지도를 자신이 통제하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사회를 완전히 개조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공상적인 계획은 실패하기에 이르렀다. 연맹은 부르주아 사회와 국가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혀 1834년 8월에 해산되었다.
 26) 노동 교환 시장(노동 생산물 공정 거래 시장)은 노동자 협동 조합에 의해 영국의 몇몇 도시에 세워졌다. 최초의 노동 교환 시장은 1832년 9월 오언이 런던에 세운 것으로, 1834년 중반까지 존속했다.
 27) 프루동은 1848년에서 1849년에 걸쳐 혁명이 진행되는 동안 그의 교환 시장을 실현하려고 했다. 1849년 1월 31일, 프루동은 파리에서 인민 은행(Banque du peuple)을 세웠다. 이 은행은 2개월 정도, 그것도 종이 위에서 존재했을 뿐이다. 이 은행은 “아직 확실히 궤도 위에 놓이기도 전에 붕괴했다.”(마르크스)
 28) 드니 디드로의 대화편 『라모의 조카』(Le neveu de Rameau)는 1762년경에 쓰였고 뒷날 두 차례나 다시 쓰였다. 이 책은 괴테가 독일어로 번역하여 1805년 처음으로 라이프치히에서 간행되었다. 프랑스 어 초판의 간행은 1823년 파리에서 간행된 『디드로 미간 저작집』(다만 간행 연도는 1821년으로 알려져 있다.)에 실림으로써 이루어졌다.
 29) 이집트의 항구 도시 알렉산드리아가 프롤레마이오스 왕조에 의해 통치되던 시기(기원전 323〜32년)와, 아라비아인의 침입에 이르기까지 로마가 이곳을 통치하던 시기(기원전 30년〜기원후 640년)를 가리킨다. 알렉산드리아는 당시 정신 생활의 중심지였다. 알렉산드리아 시대에는, 일련의 과학——수학(유클리드와 아르키메데스), 지리학, 천문학, 해부학, 생리학 등 학문——이 크게 발전했다.
 30) 칸트의 성운설은 1755년 쾨니히스베르크와 라이프치히에서 익명으로 출판된 그의 저서 『천체의 일반 자연사와 이론』(Allgemeine Naturgeschichte und Theorie des Himmels)에 서술되어 있다. 라플라스는 1795년부터 1796년 사이에 간행된 두 권짜리 저작 『우주 체계 해설』(Exposition du système du monde)의 마지막 장에서 태양계의 성립에 대한 가설을 펼치고 있다. 라플라스 자신이 손을 본 이 저작의 마지막 판은 그가 죽은 뒤인 1835년에야 비로소 간행되었으며 거기서는 그의 가설이 제7주해(註解)에서 설명되고 있다.
 31) 대(對) 인도 무역과 대(對) 미국 무역에서 패권과 식민지 시장의 정복을 둘러싸고 유럽의 여러 대국들이 치렀던 일련의 전쟁. 처음에 패권을 다툰 주요한 전쟁 당사국은 영국과 네덜란드였으며 (1652〜1654년, 1664〜1667년, 그리고 1672~1674년에 걸쳐서 벌어진 영국 대 네덜란드의 전쟁은 전형적인 상업 전쟁이었다.)뒤에는 영국과 프랑스였다. 영국은 이 모든 전쟁에서 승리했다. 18세기 말이 되자 영국은 차츰 세계 무역 전체를 자기 손아귀에 넣게 되었다.
 32) 샤를르 푸리에, 『산업적, 조합적 신세계』, 『전집』 제6권, 파리, 1845, 393〜394쪽을 참조.
 33) 프로이센 해외 무역 회사.(1904년에 이르기까지 이 회사의 공식 명칭은 해외 무역 회사 총본부였다.) 이 회사는 1772년 무역 금융 회사로서 창립되어 일련의 국가적 특권을 부여받고 있었으며, 사실상 정부의 은행과 중개인 역할을 했다. 1820년 이 회사는 프러시아의 금융 무역 기관이 되었고, 1904년에 개조되어 왕립 해외 무역 회사(프러시아 국립 은행)가 되었다.
 34) '자유로운 인민 국가'는 1870년대 독일 사회 민주당의 강령적 요구이고, 당시 유행한 구호'(레닌)이었다. 마르크스가 그의 저작 『독일 노동자당 강령에 관한 논평』(『고타 강령 비판』)의 제Ⅳ장에서 제기한 이 구호에 대한 비판과, 1875년 3월 18일부터 28일 사이에 쓰인, 베벨에게 보낸 엥겔스의 편지를 참조. 또 레닌의 저작 『국가와 혁명』 제1장 제4절과 제4장 제3절(레닌, 『전집』 제4판 제25권, 367〜373쪽 411〜413쪽)을 참조.
 35) 여기서 제시된 대브리튼과 아일랜드의 부의 총액에 대한 수치는 영국의 자본 축적에 대한 로버트 기펜(Robert Giffen)의 강연('영국에서의 최근의 자본 축적' Recent accumulations of capital in the United Kingdom)에 의거한 것이다. 이 강연은 1878년 1월 15일 통계학회에서 발행한 런던의 『통계학회 잡지』(1878년 3월호)에 실렸다.
 36) 엥겔스의 저작 『공상에서 과학으로의 사회주의의 발전』의 영어판은 1892년 런던에서 『공상적 사회주의와 과학적 사회주의』(Socialism utopian and scientific)라는 제목으로 에이블링(Edward Aveling)이 번역하여 출판되었다. 엥겔스는 이 영어판을 위해 이 서문을 썼다. 이 서문은 중요했기 때문에 엥겔스는 1892년 6월, 이를 독일어로 번역했고, 이 글은 『새 시대』지(1892〜1893년도분 제1권 제11책, 제1호와 제2호)에 '사적 유물론에 관하여'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편집 당시 맨 앞의 7개 문단이 빠졌는데, 그 이유는 편집자의 주석에서도 밝혀져 있듯이, 독일의 독자들이 익히 알고 있거나 독일인들에게는 별로 흥미 없는 내용이 그 부분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마르크스 • 엥겔스의 『전집』 제19권을 가리킨다.一역자)에서는 빠진 부분을 새로 번역해 실었고, 나머지는『새 시대』지에 실렸던 내용을 그대로 옮겨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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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dalbert von Bornstedt(1808〜1851년) 옛 프러시아의 장교, 언론인,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 1847〜1848년에 『독일-브뤼셀 신문』의 발행인 겸 편집자였으며, 파리에 있던 독일 민주주의자 협회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 공산주의자 동맹에 참여했으나 1848년 3월에 동맹에서 제명되었다.
 2* Karl Schapper(약 1812〜1870년) 의인 동맹과 런던에 있던 독일 노동자 교양 협회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 공산주의자 동맹 중앙국의 임원이었으며, 1848〜1849년의 혁명에도 참여. 1850년 동맹이 분열되었을 때, 빌리히와 함께 마르크스를 반대하는 분파를 지도했으나 1856년에 다시 마르크스와 가까워졌다. 1865년 국제 노동자 협회(제1인터내셔널)에 참여.
 3* Louis Auguste Blanqui(1805〜1881년) 프랑스의 혁명가, 공상적 공산주의자. 수많은 비밀 결사와 폭동을 조직했으며 1830년과 1848년의 혁명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프랑스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가장 뛰어난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일생 동안 모두 36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4* August Wilich(1810〜1878년) 옛 프러시아의 소위. 정치 신조 때문에 군에서 쫓겨났다. 공산주의자 동맹에 가담했으며, 1849년 바덴과 팔츠 지역에서 봉기가 일어나자 의용군 지도자로 참가. 1850년 공산주의자 동맹이 분열되었을 때, 샤퍼와 함께 마르크스를 반대하는 분파를 지도했다. 1853년 미국으로 이주하여 남북 전쟁에 북군의 장군으로 참전.
 5* 『인민 국가』(Volksstaat) 사회 민주주의 노동당(아이제나흐 파)의 기관지. 1869년 10월 2일에 창간되어 1876년 9월 29일까지 라이프치히에서 간행되었다. 1870년대 독일 노동 운동의 혁명적 입장을 반영했으며,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창간 때부터 이 신문의 편집과 발행을 도왔다.
 6* 『전진』(Vorwärts) 독일 사회주의 노동당 중앙 기관지. 1876년 고타 대회 뒤 라이프치히에서 창간되었으나, 1878년 사회주의자 탄압법이 발효되자 폐간되었다.
 7* Paul Lafargue(1846〜1911년) 프랑스의 사회주의자. 마르크스주의를 선전하고 보급했다. 국제 노동자 협회의 총평의회 의원이었으며 프랑스 노동자당을 창설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제자이며 전우.
 8* Ernst von Eynern(1838〜1906년) 정치가, 상인. 1879년부터 프러시아 제국 의회 의원. 사회 민주주의의 흉악한 적.
 9* Heinrich von Sybel(1817〜1895년) 역사가, 정치가, 민족주의적 자유주의자. 소(小)독일당(1848년 이후 오스트리아를 빼고 독일 연방의 새 체제를 건설하려고 했던 당파)을 지지했으며, 반동적인 프러시아 국수주의 정신으로 일관한 저서들을 썼다.
 10* Heinrich Gotthard von Treitschke(1834~1896년) 반동적인 역사가이자 언론인. 1886년부터 프러시아의 국사 편찬을 맡았다. 제국 의회 의원.(1871 〜1888년) 반동적인 프러시아 국수주의의 이데올로그이며 선전자. 독일 팽창주의를 지지했으며 반(反)유태주의자였다.
 11* Thomas Münzer(1490〜1525년) 독일 종교 개혁과 농민 전쟁 당시 농민과 평민층을 대표하던 이데올로그, 혁명가, 지도자. 신비스러운 형태로 포장된 공상적 평등 공산주의 사상을 선전했다. 농민 전쟁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이 인물은' 봉건 제후와 귀족들의 권력을 타도하기 위한 인민 혁명의 선구자로서 “당시 가능하던 한도 안에서는 가장 참된 민주주의자였다.”(엥겔스)
 12* François Noël Babeuf(Gracchus) (1760~1797년) 프랑스의 혁명가, 공상적 공산주의자. 사회 • 경제적 평등을 실현하기 위한 반란 음모를 조직했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13* 여기서 말하는 프랑스 유물론은 18세기에 『백과 전서』를 편찬하는 데 참여했던 계몽 사상가들 가운데서, 주로 디드로(Denis Diderot), 홀바흐(Baron D'Holbach), 엘베시우스(Claude Adrien Helvétius) 등의 이론을 가리킨다. 이들은 전통 형이상학을 반대하여 인간의 정신 활동이나 도덕을 유물론적으로 설명하려고 했으며, 따라서 환경(교육과 법률 제도)의 영향을 강조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프랑스 유물론의 이 같은 주장과 사회주의의 연관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 있다. “인간은 원래 선하고 동등한 지적 능력을 타고났으며 경험 • 습관 • 교육이 커다란 힘을 갖고 있으므로, 외적 환경이 인간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고 보고 산업의 중요성과 쾌락의 정당화 등을 주장하는 유물론 학설로부터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와의 필연적 연관을 통찰하는 것은 그다지 힘든 일이 아니다.”(『신성 가족』, 『전집』 제2권, 138쪽)
 14* 합리적이라는 말은 이성적이라는 말보다 훨씬 좁은 의미다. 전자는 좁은 의미의 추리 능력인 오성에 대응하는 것으로서 대상을 고립시켜 어떤 범위 안에서만 판단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태도인 반면에, 후자는 더 넓은 의미의 사유 능력인 이성에 대응하는 것으로서 대상을 전체와 맺고 있는 연관 속에서 포괄적으로 고찰하는 태도다. 따라서 이성적 사유의 경우에는 어떤 판단의 형식적인 옳고 그름만이 아니라 그 근거와 정당성도 문제가 된다. 예를 들어 기업주가 더 많은 이윤을 내기 위해 어떻게 경영을 해 나갈 것이냐 하는 문제는 '합리적인' 계산에 의해 해답이 주어지지만, 그러한 자본주의적 경영 방식 자체가 올바른 것이냐 하는 문제는 좁은 의미의 합리성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기업주의 합리적인 계산(이윤 동기)을 합리적으로 만들어 주는 토대(자본주의) 자체가 이미 전제되어 있는 것이므로, 이때의 합리성은 형식적 합리성, 제한된 합리성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에 그 토대 자체를 역사적인 발전과 변화 속에서, 즉 전체와 맺고 있는 연관 속에서 검토하고 평가하고 다시 이를 실천적인 태도와 연결하는 것은 이성의 역할이다. 헤겔은 형식적 합리성만을 추구하는 좁은 의미의 오성에 비해, 참된 이성은 변증법적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15* Thomas Carlyle(1795〜1881년) 영국의 문필가, 역사가, 관념론 철학자. 영웅 숭배의 옹호자로서 반동적인 낭만주의 관점에서 영국 부르주아지를 비판했다. 토리 당(보수당의 전신)을 지지했고 1848년부터는 노동 운동의 명백한 적이 되었다.
 16* 여기서 말하는 '엄밀한 경제 사상'이란 마르크스의 이론을 가리킨다.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하면서도 그 사회의 본질적 모순을 과학적으로 해명하지 못한 데 반해,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적인 생산 양식의 본질적 구조를 분석하여 자본과 임금 노동의 대립을 명확하게 보여 주었다. 그리고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노동자가 정상 임금을 받더라도 자신이 생산한 잉여 가치를 자본가에게 착취당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이 책 107〜139쪽 참조.
 17* Pierre Joseph Proudhon(1809~1865년) 프랑스의 언론인, 사회학자, 경제학자. 부르주아지의 입장을 대변했으며, 무정부주의 이론의 창시자 가운데 한 사람. 사회 개혁을 위해서 조직적인 통제보다는 개인의 도덕적 책임감이 더 중요하다고 보았다.
 18* Wilhelm Weitling(1808〜1871년) 재단공. 독일 초기 노동 운동에서 매우 중요한 대표자 의인 동맹(義人同盟 : Bund der Gerechten)에 가담하여 공상적인 평등 공산주의를 선전. 그의 주장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과학적 사회주의가 정립될 때까지 적극적인 역할을 했으나, 그는 1849년 미국으로 이민한 뒤에 곧 노동 운동에서 손을 뗐다. 엥겔스는 그의 이론을 가리켜 ‘독일 프롤레타리아 최초의 독자적인 이론 활동’이라고 평가했다.
 19* Aristoteles(기원전 384〜322년) 고대 그리스 최대의 철학자. 스승 플라톤의 사상을 이어받아 독자적으로 발전시켰으며, 그의 철학 체계는 그 뒤 2000년 동안 서양 철학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 플라톤이 철저한 관념론자였던 데 반해, 그의 이론은 유물론과 관념론 사이를 왔다갔다했으며, 계급적으로는 노예 소유주들의 입장을 반영했다. 여기서 엥겔스가 지적하고 있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경험 과학(특히 생물학)을 중시하여 사물의 운동과 변화를 설명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20* 프랑스 유물론의 대표자였던 디드로의 『자연에 관한 해석』(L’interpretation de la nature), 『장님에 관한 서한』(Lettre sur les aveugles), 홀바흐의 『자연의 체계』(Système de la nature), 엘베시우스의 『정신론』(De I'esprit) 등을 가리킨다. 이 저작들은 모두 기계적 유물론의 입장에서 물질과 의식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21* Herakleitos(기원전 약 540〜약 480년) 고대 그리스의 유물론 철학자 변증법 사상의 창시자 가운데 한 사람.
 22* Francis Bacon(1561〜1626년) 영국의 법관, 정치가, 철학자, 자연 과학자, 역사가. 중세의 신학적인 스콜라 철학을 반대하여, 경험적 탐구에 기초를 둔 귀납법을 학문 연구 방법으로 정립시켰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베이컨에 대해 ‘영국 유물론의 참된 시조이며 모든 근대 실험 과학의 창시자’(『신성 가족』, 『전집』 제2권, 135쪽)라고 평가했다.
 John Locke(1632〜1704년) 영국의 철학자, 경험론자, 경제학자, 정치 사상가. 오성의 선천적인 사유 능력만을 중시하던 대륙의 합리론(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의 철학)에 맞서 인간의 모든 지식은 경험에서 나온다고 주장. 정치적으로는 봉건 귀족과 하충 근로 계급을 모두 반대하여 부르주아지의 입장을 대변했으며, 사유 재산과 자유로운 상업 활동을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23* Carl von Linné(1707〜1778년) 스웨덴의 자연 과학자. 수많은 식물을 채집하고 분류하여 생물 분류법을 확립시켰다. 신학적인 입장에서 하느님에 의해 창조된 종(種)은 불변이라고 주장했으나 다윈의 진화론에 의해 논파되었다.
 24* 이 말은 철학이 경제학으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개별 과학이 발달하기까지 종래의 철학은 모든 학문의 왕으로 군림하면서 경험적인 사실들에 대한 탐구를 무시한 채 추상적인 사변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 했다. 그러나 엥겔스는 모든 학문이 구체적인 사실 탐구를 토대로 성립하며 이 점에서는 철학도 예외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다만 철학은 그 성격상 다른 개별 과학들처럼 구체적인 사실들은 직접 대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세계관이나 방법론 등을 탐구 대상으로 삼는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적인 생산 양식을 실제로 분석하는 것은 경제학의 과제이지만, 물질적 토대와 법적, 정치적 상부 구조 사이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어떻게 보고 또 구체적인 탐구에서 어떤 논리를 적용해야 할 것인가 등은 철학의 도움 없이는 해결되지 않는다. 다만 여기서도 철학은 개별 과학과 서로 밀접한 연관을 맺으면서 탐구해 나가야 한다. 엥겔스가 앞에서 기존의 철학 가운데 아직도 유효한 것은 변증법과 형식 논리학뿐이라고 말한 것도 이러한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사실, 여기서 엥겔스가 강조하고자 하는 점은 세계관적인 입장 전환(관념론에서 유물론으로)이며, 물질적 토대를 기초로 세계를 분석할 것이냐 인간의 의식이나 정신을 기초로 세계를 분석할 것이냐 하는 문제 자체가 가장 중요한 철학적 문제인 것이다.
 25* 다윈은 동물들이 적자 생존 법칙에 따라 진화한다고 주장했다. 즉 여러 개체들 가운데서 환경에 더 잘 적응한 것은 살아 남고 그렇지 못한 것은 생존 경쟁에서 밀려나 소멸해 버린다(자연 도태)는 것이다. 엥겔스는 부르주아 사회의 자본주의 경제 체제 안에서 바로, 이처럼 동물적이고 무자비한 법칙이 관철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1862년 6월 18일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헤겔이 『정신 현상학』에서 부르주아 사회를 '정신적 동물의 왕국'으로 묘사한 반면에, 다윈은 동물의 왕국을 부르주아 사회로 묘사했다.”고 썼다.
 26* 마르크스는 『자본론』 제1권 제13장 '기계와 대공업' 부분에서 이 점에 대해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 노동 수단, 즉 기계의 발달은 노동자의 전통적인 수공업적 기술을 쓸모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제 노동자들은 과거의 장인들처럼 자신의 노동 수단을 가지고 자기만의 독특한 기술을 발휘하여 물건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공장의 거대한 기계 앞에서 완전히 분업화한 기계적인 공정의 일부만을 맡게 된다. 과거의 장인들은 설 자리를 잃고 값싼 임금을 받는 노동자로 전락하여 굶주림에 허덕이게 된다. 새로운 노동 수단인 기계가 노동자들을 오히려 굶주리게 하며, 사람들은 자신의 노동 수단을 자본가에게 빼앗김으로써 생활 수단마저 빼앗기는 셈이다.(『자본론』 제1권, 459쪽 참조) 그런데 더욱더 서글픈 사실은 이 새로운 생산 수단(기계) 자체가 노동의 산물이라는 사실이다. 자본가들은 노동자의 잉여 가치를 착취하여 새로운 기계를 설치하고, 이 때문에 노동자들은 더욱더 자본의 노예가 된다.(『자본론』 제1권, 511쪽 참조)
 27* 기계가 개선될수록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게 되고, 고용 조건은 더욱 나빠진다. 특별한 기술이 필요 없는 단순 노동만으로도 공장이 돌아가기 때문에 자본가들은 더 값싼 노동, 즉 어린이나 여자를 이용하게 되고 노동 조건도 더욱 나빠진다. 그나마 일자리를 잃지 않으려고 많은 노동자가 지옥 같은 작업장에서 오랜 시간 강도 높은 중노동을 견뎌 내야 하며, 결국 얼마 못 가서 대부분 폐인이 되어 노동력을 잃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노동이 제대로 제 기능을 수행할 수 없으며, 노동자는 단순한 소모품이 되어 버리고 만다.(『자본론』 제1권, 486쪽 참조)
 28*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 신들에게서 불을 훔쳐 인간에게 준 프로메테우스는 그 벌로 대장장이의 신인 헤파이스토스에 의해 올림포스 산꼭대기에 못박혀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먹히게 된다.
 29* '자본'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개념이다. 모든 생산 수단, 모든 부가 자본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 밑에서 임금 노동자를 고용하여 잉여 가치를 착취하는 경우에만 자본이 된다. 자본과 임금 노동은 이처럼 서로 대립하면서도 어느 한 쪽이 없이는 다른 쪽도 있을 수 없는 통일체다. 공황 때에는 상품이 팔리지 않아 유통과 생산이 중단되므로, 거대한 부가 더 이상 노동자들을 고용하지 못하게 된다. 한 쪽에는 팔리지 않는 상품과 돌아가지 않는 기계가 쌓여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자리를 잃은 굶주린 사람들이 쌓여 있기 때문에, 자본(상품, 기계와 모든 부)은 더 이상 사회적 생산력으로서 기능하지 못하게 된다. 또 일반 대중은 돈이 없어서 물건을 살 수 없으므로 거대한 부는 생활 수단의 역할도 하지 못한다.
 30* 여기서 말하는 '국가로서의 국가'(Staat als Staat)란 '계급 착취 도구로서의 국가'를 뜻한다.
 31* 국가의 '폐지'(Anschaffung)와 '사멸'(Absterben)은 완전히 다르다. 국가를 폐지한다는 것은 본래적인 의미의 국가, 즉 계급 착취의 도구인 국가를 혁명을 통해 끝장낸다는 뜻이다. 따라서 계급 사회의 국가 기구는 점진적으로 사멸할 수 없으며, 오직 혁명에 의해서만 파괴될 수 있다. 반면에 국가가 사멸한다고 할 때, 그 국가는 생산 수단의 사회적 소유가 혁명에 의해 성취된 뒤의 국가를 말한다. 따라서 이 국가는 엄밀한 의미의 국가가 아니며 레닌은 이를 '프롤레타리아 국가 또는 반(半)국가'라고 불렀다. 이때의 국가는 계급 착취의 도구가 아니기 때문에 물건에 대한 관리를 뺀 모든 강제력은 서서히 없어지며, 결국 국가가 사멸하게 되는 것이다. 이 부분은 공산주의 국가 이론의 원칙을 간결하게 서술한 것으로, 뒤에 레닌은 유명한 저서 『국가와 혁명』에서 엥겔스의 이 주장을 상세히 해설한 바 있다.(레닌, 『국가와 혁명』, 『전집』 제25권, 407〜413쪽) 폐지와 사멸의 차이, 그리고 두 경우에 '국가'라는 말이 뜻하는 바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면, 계급 사회의 국가를 혁명 없이 점진적으로 개혁할 수 있다거나(개량주의), 또는 모든 국가 기구(여러 행정 조직이나 물건에 대한 관리 체계를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국가 기구)를 단숨에 폐지해야 한다(무정부주의)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
 32* '자유로운 인민 국가'라는 말은 엄밀히 따져 보면 잘못된 것이다. 국가가 본래 계급 착취의 도구이므로 종래의 국가 기구가 존속하는 한 자유도 있을 수 없고 인민이 그 국가의 주체가 될 수도 없다. 따라서 이 구호는 ‘둥근 네모’나 ‘머리 숱이 많은 대머리’처럼 논리적인 모순이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가 당장 혁명을 일으킬 수 없었던 당시 독일의 상황에서는 이 구호가 선동적인 효과를 낼 수 있었다. 한편 레닌은 프롤레타리아가 자본주의적인 계급 착취 밑에서 최고로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민주 공화국이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혁명에 의한 기존 국가 기구의 폐지를 대체할 수는 없다고 못박았다.(레닌, 『국가와 혁명』, 『전집』 제25권, 410쪽 참조)
 33* Eugen Dühring(1833〜1921년) 독일의 절충주의적인 철학자, 속류 경제학자, 반동적인 소부르주아 사회주의의 대표자. 철학적으로는 관념론과 속류 유물론, 실증주의 등을 절충한 형이상학자. 1863년부터 1877년까지 베를린 대학의 강사로 있었으며, 자연 과학과 문학에 관한 저술도 썼다.
 34* 본래 독일에서 맨 처음으로 노동자 정치 조직을 만든 사람은 라살레였다. 그는 1863년 전독일 노동자 연맹을 결성했으나 소부르주아적인 입장을 취했다. 한편 마르크스의 제자인 리프크네히트와 베벨에 의해 1869년 아이제나흐에서 사회 민주 노동당(일명 아이제나흐 파)이 결성되었다. 두 사람은 보불 전쟁 때 전시 공채 발행을 반대하고 적국인 파리의 코뮌 정부를 지지하다가 투옥되는 등 혁명적 입장을 견지했다. 그러나 이들은 1875년 고타 대회에서 라살레 파와 연합하여 수정주의적 강령을 채택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엥겔스는 뒤링의 절충주의적인 이론이 사민당 안에 침투해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 위험을 경고하는 동시에 혁명적 마르크스주의를 올바로 보급하고 선전하려고 『반뒤링론』을 썼다.
 35* Maxim Kowalewski(1851~1916년) 러시아의 사회학자, 역사가, 법률가.
 36* 不可知論(agnoticism) 객관 세계의 본질이 궁극적으로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는 입장. 관념론과 유물론 사이에서 절충적인 태도를 취하지만 결국은 관념론에 빠질 수밖에 없는 기회주의적인 이론이다. 불가지론은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오는 시기에 전통적인 기독교 교리와 독단에 대항하여 '비판적 회의'(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의심해 보아야 한다.)를 강조하는 등 진보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부르주아지가 정치 권력을 틀어쥔 뒤, 불가지론은 노동자 계급의 혁명적 의식을 흐리게 하는 데 앞장서 왔다. 날마다 노동을 통해 객관 세계를 변화시키고 이를 실천적으로 확인하는 노동자들에게 “세계의 본질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고 말한다면, 이는 엄청난 기만이다. 그러나 부르주아 철학자들은 '실천은 실천이고 이론은 이론'이라고 떠들면서 불가지론을 옹호할 뿐만 아니라, “학문에 서는 신중한 태도가 필요하다.”는 식으로 자신들의 의도를 감추려 하기 일쑤다. 반면에 철학적 유물론은 “객관 세계의 본질은 물질적이며, 우리는 실천을 통해 이를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철학적 유물론이야말로 참된 노동자 계급의 철학이다.(이 책 269〜313쪽 참조)
 37* 스콜라 철학은 중세의 유럽 철학이다. 교회와 봉건 영주(지배 계급)와 결탁하여 봉건적인 지배 질서를 합리화하는 데 앞장섰다. 철학적으로는 신을 중심에 놓는 극단적인 관념론에 빠졌으며, 복잡한 궤변과 독단을 구사하여 문화 혜택을 거의 받지 못하던 민중을 속였다.
 38* John Duns Scotus(1265~1308년) 영국의 스콜라 철학자, 유명론의 대표자. 중세에 맨 처음으로 유물론적인 입장을 표명했으며, 근대의 영국 경험론(베이컨, 홉스, 로크)에도 영향을 끼쳤다.
 39* 唯名論(nominalism) 보편자는 실재하지 않고 이름일 뿐이라고 주장. 우리가 '사람'이라든가 '기계'라는 말을 쓸 때, 여기서 사람'이나 '기계'는 어떤 특정한 사람, 또 어떤 특정한 기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과 모든 기계를 뜻하는 '보편적인 말'이다. 따라서 어떤 특정한 사람이나 기계가 아닌 '사람' 그 자체, ‘기계’ 그 자체는 개별 사물처럼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추상적인 말(개념)일 뿐이라는 것이다.
 40* Anaxagoras(기원전 약 500〜428년) 고대 그리스의 자연 철학자. 유물론적인 입장에 서서 모든 사물의 원질(原質)은 '동질소'라고 주장했다.
 41* 그리스 어로는 호모이오메레스(homoiomeres) 물질을 이루는 기본 단위로서 서로 질적인 차이가 없고 그 수는 끝없이 많은 것으로 여겨졌다.
 42* Democritos(기원전 약 460〜370년) 고대 그리스의 유물론 철학자. 원자론의 창시자 가운데 한 사람. 이 세계는 수많은 물질적인 입자(원자)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원자들의 기계적인 운동에 의해 다양한 변화가 일어난다고 주장.
 43* Jakob Böhme(1575〜1624년) 근대 초기의 독일 철학자. 제화공이었으며 신비주의적인 입장을 취했으나, 변증법 사상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
 44* 여기서 엥겔스는 유물론이 그 본래의 활력을 잃고 사물의 기계적인 운동만을 설명하는 이론으로 변질되었으며, 다시 이러한 입장이 좁은 의미의 오성(합리적인 계산 능력)과 연결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한계는 변증법적 유물론의 등장으로 극복된다.(이 책 269〜313쪽 참조)
 45* 1690년에 발표된 『인간 오성론』(Essays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가리킨다.
 46* 理神論(deism) 중세 신학에서 근대 과학과 유물론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나타난 절충주의적인 이론.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만 예전처럼 신을 인격적인 존재로 보지 않고 단지 기계적인 운동의 최초의 원인, 즉 세계 제작자로만 본다. 인간이 시계를 만들지만 일단 만들어진 시계는 그 자체의 기계적 법칙에 따라 작동하는 것처럼, 이 세계도 신에 의해 창조되었지만 신의 자의적인 간섭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의 물리적인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은 맹목적인 신앙의 대상이 아니라 합리적인 사유의 궁극적인 근거로서만 존재한다. 로크, 뉴턴 둥 근대의 많은 철학자와 자연 과학자들이 이 입장을 취했다.
 47* 디드로, 홀바흐, 엘베시우스 둥의 프랑스 유물론자들은 이신론을 거부하고 철저한 무신론을 주장했다. 이 세계가 신의 간섭을 받지 않고 그 자체의 독자적인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면, 신 같은 것을 굳이 상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들은 정치적으로도 봉건적 절대 왕정을 반대하는 부르주아지를 지지했으며, 프랑스 혁명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다.
 48* 이 말은 주로 무신론자를 뜻하는 용어다.
 49* 浸禮教(baptist) 기독교 신교의 한 교파. 유아(幼兒) 세례를 인정하지 않고 자각적인 신앙 고백에 바탕을 둔 침례(세례)를 주장. 외적인 형식이나 제도보다 영혼의 신앙의 자유를 중시. 영국 국교회(성공회)의 억압을 피해 영국에서 네덜란드로 건너갔던 사람들의 일부가 1612년 귀국하여 창시했으며, 그 뒤 미국에서 크게 발전했다.
 50* 救世軍(Salvation Army) 기독교 신교의 한 교파. 1865년 영국의 부스(William Booth)가 창시했으며, 거듭남 • 성결(聖潔) • 봉사 등을 교리로 삼아 군대식 조직으로 전도와 사회 사업을 했다.
 51* 괴테의 『파우스트』(Faust)에 나오는 말이다.
 52* 신칸트주의(Neo Kantianism) 19세기 부르주아 철학의 한 유파. 본래 칸트는 인간이 현상계를 인식할 수는 있지만 물자체를 인식할 수는 없다고 하여, 우리의 인식을 현상계에 국한했다. 칸트의 이러한 입장은 당시의 봉건적이고 신학적인 독단에 물든 전통 철학을 비판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면도 있었다. 그러나 그 뒤 사회 체제가 완전히 바뀌고 과학이 눈부시게 발달하여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는데도, 19세기 후반의 노동 운동의 발전에 놀란 부르주아 철학자들은 다시 케케묵은 칸트의 이론을 되살려 내 철학을 불가지론적인 인식론에 묶어 두려고 애썼다.
 53* 唯心論(spiritualism) 유물론에 정반대되는 철학 이론. 세계의 본질은 궁극적으로 정신적인 것이며, 물질은 부차적이고 파생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입장.
 54* 불가지론을 영어로는 agnoticism이라고 하는데, 이는 그리스 어의 'a(반대나 부정의 뜻)+gnosis(지식)'에서 온 말이다.
 55* 독어로는 Bügertum이라고 되어 있으나 영어판에는 middle class라고 되어 있다. 이후로는 모두 독어판을 따라서 '부르주아지'라고 번역했다.
 56* Franz von Sickingen(1481〜1523년) 독일의 기사.(騎士) 종교 개혁에 참여했으며 귀족의 봉기가 일어났을 때 군사적, 정치적 지도자 역할을 했다.
 57* 豫定說(Gnadenwahl) 신에 의해 구원을 받느냐 못 받느냐는 전적으로 신의 선택에 따라 예정되어 있다는 주장. 이 같은 칼뱅의 주장은 지상에서 착한 일을 많이 해야만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정통 카톨릭 교리를 뒤엎은 것으로, 상공업에 종사하던 부르주아지들이 자유롭게 부를 축적 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이데올로기였다. 따라서 이제 과거처럼 부가 죄악시되는 것(“부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 구멍을 지나가는 것만큼 어렵다.”)이 아니라 오히려 옹호되 기에 이르렀다. 왜냐하면 세속적으로 성공하고 재산을 모은 사람 또한 신의 은총과 선택을 받은 자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58* Oliver Cromwell(1599〜1658년) 영국의 정치가. 17세기의 영국 시민 혁명 때 요먼으로 이루어진 의회군을 이끌고 왕당파를 물리쳐 정권을 잡았다. 부르주아지의 지도자로서 혁명이 성공한 뒤에는 하층 귀족 세력과 연합하여 평민층을 억압. 찰스 1세가 처형된 뒤 1653년부터 1658년까지 영국의 최고 통치자인 호민관의 지위에 있으면서 독재를 실시.
 59* 1455〜1485년에 영국의 랭커스터 가(家)와 요크 가(家) 사이에 벌어진 왕위 쟁탈전. 전자는 붉은 장미, 후자는 흰 장미를 가문의 휘장으로 삼았기 때문에 장미 전쟁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전쟁은 봉건 귀족을 몰락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으며, 전쟁 직후 왕위에 오른 헨리 7세 때부터 왕권이 크게 강해졌다.
 60* Henry St. John Bolingbroke(1678〜 1751년) 이신론 철학자, 정치가. 토리 당(왕당파)의 지도자.
 61* 자유당 영국의 정당. 1689년에 명예 혁명이 일어난 뒤, 영국에서는 의회 안에 왕당파를 지지하는 토리 당과 부르주아지를 대변하는 휘그 당이 결성되었다. 그러다가 자본주의 발전이 가속된 19세기 초 휘그 당 안의 급진파가 중심이 되어 당 이름을 자유당으로 바꾸었다.
 62* 데카르트(1596〜1650년)는 철학자일 뿐만 아니라 뛰어난 과학자이기도 했다. 따라서 그는 객관 세계의 실재를 인정하고 그것의 본질적 속성이 물질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중세의 신학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기 때문에, 인간의 정신을 물질과 다른 또 하나의 실체(자립적인 존재)로 보았다. 이처럼 정신과 물질이라는 두 실체를 인정한 데카르트의 철학을 이원론이라고 하며, 이 이원론은 그 뒤 자연 과학의 발달에 의해 유물론적인 일원론으로 나아가게 된다.
 63* 여기서 왕당파란 홉스와 그 후계자들을 가리킨다.
 64* 보통 나폴레옹 법전이라고 한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뒤 나폴레옹 1세가 집권할 때 제정된 것으로 근대의 모든 법전의 모범이 되었다. 개인의 자유, 법 앞에서의 모든 이의 평등이라는 원리를 비롯하여 계약의 자유, 사유 재산의 불가침, 가족 제도의 개인주의화 등을 처음으로 체계 있게 정리했다. 따라서 이 법전, 특히 민법은 부르주아지가 지배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법질서를 잘 보여 주고 있다.
 65* 여기서 말하는 것은 헤겔이 죽은 뒤 1830년대 말부터 헤겔의 관념론을 반대하여 일어난 청년 헤겔 학파(헤겔 좌파)에서 시작되어 마르크스에까지 이어지는 움직임을 가리킨다. 청년 헤겔 파 가운데서는 특히 포이어바흐가 가장 중요하다.
 66* 이 책 221쪽의 편집자 주 5) 참조.
 67* 신앙 부흥 운동(Revivalism) 18세기 전반 영국에서 일어나 그 뒤 북미에 전파된 신교 운동. 이 운동의 추종자들은 전도 집회를 열고 새로운 신자 공동체를 조직함으로써 기독교의 영향력을 강화하고 넓히려고 했다. 무디와 생키는 미국의 선교사들로서 이 운동을 조직한 사람들이다.
 68* 보불 전쟁에서 프랑스가 져서 나폴레옹 3세가 퇴위하고, 파리의 노동자 정부(파리 코뮌)마저 독일군의 지원을 받은 정부군에 의해 무너진 뒤 수립된 공화정을 제3공화국이라 한다. 여기서 20년간이란 1871년부터 1892년까지를 말한다.
 69* William Edward Forster(1818〜1886년) 영국의 공장주, 정치가. 자유주의자이며 1880〜1882년에 아일랜드 상(相)을 지냈다. 아일랜드 인들의 민족 해방 운동을 아주 잔혹하게 탄압했다.
 70* 이들은 모두 당시 영국의 공장주들로서 자유 무역을 지지하고 곡물법 폐지 운동에 앞장섰다. 또 이들은 뒤에 의회에 진출하여 내각의 장관직을 맡기도 했다.
 71* Disraeli(1804〜1881년) 영국의 귀족, 정치가, 문필가. 보수 세력이었던 토리 당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 재무상과 수상을 지냈다.
 72* Lujo Brentano(1844〜1931년) 독일의 경제학자, 강단 사회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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