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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3-07-11 22:18
국제 노동자 협회 창립 선언과 잠정 규약(1864년 11월)_맑스
 글쓴이 : a16768654419246
조회 : 1,328  
국제 노동자 협회 창립 선언과 잠정 규약


(『전집』 제16권, 5〜16쪽)
국제 노동자 협회 창립 선언 / 칼 마르크스
국제 노동자 협회 잠정 규약 / 칼 마르크스


 1864년 9월 28일에 런던의 성마틴 회관(St. Martin's Hall)에서 대규모 국제 노동자 회의가 열렸다. 회의를 준비한 것은 영국의 노동 조합과 프루동주의자인 파리의 한 노동자 집단의 지도자들이었다. 여기에는 영국과 프랑스의 노동자들 외에도 당시 런던에 살고 있던 독일과 이탈리아와 다른 나라 노동자의 대표들, 그리고 유럽의 소부르주아적이고 혁명적 민주주의적인 망명 집단의 지도급 인사들이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 국제 노동자 협회(뒤에 제1인터내셔널로 불리게 된다.)의 창설이 결의 되었으며, 임시 위원회가 선출되었다. 칼 마르크스는 독일 노동자의 대표로서 위원에 선출되었고, 이어서 10월 5일 열린 위원회의 제1차 모임에서 협회의 강령적 문건을 작성할 소위원회 위원으로도 선출되었다. 마르크스가 참석하지 못한 채 열린 제1차 소위원회 모임에서 하나의 문건인 작성되었는데, 이것은 오언의 추종자인 웨스턴(Weston)이 제안하여 프랑스의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인 르 뤼베(Le Lubez)의 수정을 거친 도입 부분의 선언문과 마치니(Mazzini)가 작성했던 이탈리아 노동자 연맹의 규약을 이탈리아인 루이지 볼프(Luigi Wolff)가 영어로 번역한 것으로 이루어졌다.(이에 대해 더 상세한 것은 『전집』 제16권, 512〜513쪽과 519쪽을 보라.) 10월 18일에 열린 소위원회에서 처음으로 이 문건의 내용을 알게 된 마르크스는 이에 대해 근본적으로 비판했다. 따라서 문건 작성의 마무리 작업은 다시 소위원회에 넘겨졌으며, 마르크스는 10월 20일 소위원회로부터 이 과업을 위임받았다. 10월 27일, 소위원회는 마르크스가 완전히 새로 쓴 두 개의 문건을 통과시켰는데, 그 하나는 '국제 노동자 협회 창립 선언'(Inauguraladresse der Internationalen Arbeiter-Assoziation)으로 불리는 선언문이고, 다른 하나는 협회의 '잠정 규약'이다. 이 두 문건은 1864년 11월 1일 협회의 지도부를 이루고 있던 임시 위원회에서 만장 일치로 채택되었다. 뒤에 이 지도부는 인터내셔널의 총평의회로 역사 무대에 등장했으며, 1866년 말까지는 중앙 위원회로 통칭되었다.
 '창립 선언'은 1864년 11월 5일 『벌집 신문』(Bee-hive Newspaper) 제160호에 처음으로 실렸으며, 또 같은 달 '규약'과 함께 『국제 노동자 협회 창립 선언과 잠정 규약, 1864년 9월 28일 런던 롱에이커의 성마틴 회관에서 열린 공개 회의에서 창립』(Adress and provisional rules of the Working Men 's International Association)이라는 소책자로 출판되었다. 마르크스는 이를 1864년 11월 상반기중에 독일어로 번역했으며, 이 독일어본은 1864년 12월 21일과 23일, 『사회 민주주의자』(Social-Demokrat) 제2호와 제3호에 실렸다. 이 선언은 1866년 프랑스 어로도 번역되었다. 1868년에는 아이히호프(Wilhelm Eichhoff)가 『국제 노동자 협회』라는 소책자 속에 자신이 번역 한 선언의 독일어본을 넣어 출판했는데, 이것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동의를 얻은 것이었다. 최초의 러시아 어 번역본은 1871년 제네바에서 나왔다. 현재 남아 있는 '선언'의 필사본은 두 개인데, 하나는 마르크스의 아내 예니 마르크스(Jenny Marx)가 작성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딸 예니가 작성한 것이다.



국제 노동자 협회 창립 선언
칼 마르크스


 노동자 여러분!
 1848년부터 1864년에 이르는 동안 노동자 대중의 빈곤이 줄어들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도 이 기간은 공업과 상업의 진보라는 면에서 보면 역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기간이었다. 1850년, 정통한 소식통임을 자랑하는 영국 중간 계급의 한 중도파 기관지는, 만일 영국의 수출입이 50% 늘어난다면 영국의 빈곤은 없어질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러나 웬걸! 1864년 4월 7일 재무 대신1*은, 영국의 수출입 총액이 1863년도에 “4억 4395만 5000파운드에 이르렀다! 이 놀랄 만한 액수는 비교적 최근이라고 할 수 있는 1843년도의 무역액에 비해 거의 3배나 된다.”고 발표하여 의회의 청중들을 기쁘게 했다. 그런데도 대신은 '빈곤'에 대해 웅변을 토했다. 그는 이렇게 외쳤다. “생각해 보라, 빈곤의 경계선에 놓여 있는 자들을”, “여전히 낮은……임금을”, “열이면 아홉은 생존 투쟁에 지나지 않는……인간 생활을!”1) 그러나 그는 아일랜드 인민이 북부 지방에서는 기계 때문에, 남부 지방에서는 양떼 때문에 차츰 쫓겨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불행한 나라에서는 그 양조차도, 인간만큼 빠른 속도로 줄어드는 것은 아니지만 차츰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다. 또 그는 상류층 1만 명의 최고 대표자들이 최근 겁에 질려서 폭로했던 사실을 되풀이하지도 않았다. 살인마들이 일으킨 대혼란2)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상원은 유형과 징역의 조건을 조사해 그 결과를 보고서 형식으로 공표하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1863년에 발간된 두터운 청서3)(青書)에서 그 진상이 폭로되었으며, 결국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나쁜 형사범들, 즉 죄수들까지도 잉글랜드나 스코틀랜드의 농업 노동자들보다는 훨씬 적게 노동하며, 훨씬 더 잘 먹고 있다는 사실이 공식 보고서와 수치로 증명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미국에서 내란(남북 전쟁)이 일어난 결과로 랭커셔(Lan-cashire)와 체셔(Cheshire)의 노동자들이 거리로 쫓겨났을 때, 상원은 이번에는 한 의사를 공업 지대로 파견해 그에게 가장 싼 가격으로 또 가장 간단한 형태로 공급되면서도 평균 잡아 ‘굶주림으로 인한 질병을 겨우 막아 줄 만한’ 최소량의 탄소와 질소를 조사하도록 맡겼다. 이렇게 모든 권한을 넘겨받은 스미스 의사는, 탄소 2만 8000그레인(1그레인 =0.0648g)과 질소 1330그레인이 보통 성인의 생명을 1주일간 유지시킬 수 있는 최소량으로서…… 굶주림으로 인한 질병에 겨우 걸리지 않게 할 정도라는 것을 확인하고, 나아가 이 양은 극도의 빈곤에 시달리던 면직 공장 노동자들이 실제로 섭취할 수밖에 없었던 그 보잘것없는 영양분과 거의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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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과 몇 가지 무기물을 제외하면 탄소와 질소가 인간이 먹는 음식물을 이루는 원료라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상기시킬 필요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신체 조직에 영양분을 주려면 그처럼 단순한 화학적 구성 요소들이 식물성 또는 동물성 식품의 형태로 공급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감자에는 주로 탄소가 들어 있는 반면에, 밀에는 탄소 화합물과 질소 화합물이 적당한 비율로 함께 들어 있다.(1864년의 영어판에 붙인 마르크스의 주—편집자) ❦

 
 그러나 더 들어 보라! 이 박식한 의사는 얼마 뒤 다시 추밀원 의무관의 지시로 노동자 계급 가운데서 가장 가난한 층의 음식물을 조사하려고 파견되었다. 그의 조사 결과는 금년 회기 동안에 의회의 지시로 발간된 『공중 보건에 관한 제6차 보고서』(Sixth Report on Public Health)에 실려 있다.4) 그런데 이 의사는 도대체 무엇을 발견했던가? 견직공 • 재봉공 • 장갑 제조공 • 양말 제조공 등에 대한 급식량은 평균 잡아 면직 공업 실업자들의 급식량보다도 더 형편없으며, 그들은 '굶주림으로 인한 질병을 겨우 막아 줄 만한 양의 탄소와 질소조차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그뿐만 아니라 농업에 종사하는 주민들의 가구 조사 과정에서 알게 된 바와 같이, 이 가구들 가운데 1/5 이상은 꼭 필요한 최소량의 탄소 함유 음식물을 공급받지 못하고 있으며, 1/3 이상은 꼭 필요한 질소 함유 음식물을 공급받지 못하고 있다. 또 3개 주(버크셔, 옥스퍼드셔, 서머싯)에서는 식사 때 질소 함유 음식물이 부족한 경우가 보통이다. 이어서 그 공식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이 덧붙어 있다. 음식물의 결핍은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가장 나쁜 상태를 뜻한다는 것, 그리고 음식물의 뚜렷한 부족은 대체로 다른 생활 용품들의 결핍 사태가 있은 뒤에야 비로소 나타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깨끗함을 유지하는 것조차도 돈이 들기 때문에 어려운 일이다. 비록 자존심 때문에 깨끗함을 유지하려고 애쓴다 해도 그 같은 시도는 모두 굶주림의 고통을 더 키울 것이다. 특히 우리가 말하고 있는 이 가난이 결코 게으름으로 인한 당연한 벌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것은 정말 가슴 아픈 일이다. 어쨌든 그것은 근로 인구의 가난인 것이다. 사실 노동자들이 그 보잘것없는 음식물을 얻으려고 하는 노동은 대부분 지나치게 연장되고 있다.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놀랍고도 예기치 못했던 사실이 인용되어 있다. '대영 제국의 4개 지역', 즉 잉글랜드 • 웨일즈 • 스코틀랜드 • 아일랜드 가운데서 가장 잘사는 지방인 '잉글랜드 농업 인구의 영양 상태도 아주 형편없지만', 그러나 버크셔 • 옥스퍼드셔 • 서머싯의 농업 노동자들까지도 런던 동부에 있는 가내 공장의 수많은 숙련된 가내 공업 노동자들에 비하면 영양 상태가 좋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이 자유 무역의 황금 시대인 1864년에 의회의 지시로 발표된 공식 자료인데, 당시 재무 대신은 하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대영 제국 노동자들의 평균 조건은 어떤 국가, 어떤 시대에서도 일찍이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크게 개선되었다.

 이 공식 찬사는 공중 보건에 관한 공식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이 솔직하게 지적된 바와는 정면으로 어긋난다.

 한 나라의 공중 보건이라는 것은 그 주민 대중의 건강을 뜻한다. 그런데 만일 대중의 최하층에 이르기까지 복지가 어느 정도나마 보장되어 있지 않으면 과연 그 대중이 건강할 수 있겠는가?

 자신의 눈앞에서 춤추는 '국가의 진보'에 관한 통계 숫자2*에 현혹된 재무 대신은 미친 듯이 열광하면서 다음과 같이 외치고 있다.

 1842년부터 1852년까지 나라의 조세 수입은 6% 늘어났다. 1853년부터 1861년까지의 8년 동안에는 1853년의 수입을 기준으로 할 때 20%나 늘어났다! 이 사실은 거의 믿을 수 없을 만큼 경이적이다!…… 부와 힘이 이처럼 놀랄 만큼 늘어난 것은 전적으로 유산 계급에게만 국한된 것이다!

 만일 당신들이, '전적으로 유산 계급에게만 국한된 부와 힘의 이 놀랄만한 증대'를 이루려고 노동자 계급이 얼마만큼 건강을 잃고 도덕적으로 퇴폐하며 정신적으로 타락하면서 일해 왔으며 또 일하고 있는가를 알려거든 최근의 『공중 보건에 관한 보고서』에 나타나 있는 남녀 재봉사의 직장과 인쇄소에 대한 서술을 읽어 보라! 또 1863년에 출판된 『아동 노동 조건 조사 위원회의 보고서』(Report of the Children's Employment Commission)를 참조하라. 그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도공(陶工)들은 남자건 여자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매우 퇴화한 집단……허약한 아이는 자기 차례가 되면 그대로 허약한 부모가 되어, 종족이 차츰 열등하게 될 수밖에 없다. 또 스태퍼드셔 주민의 퇴화는, 만일 인접 지역에서 주민이 끊임없이 흘러 들어오지 않고 더 건강한 주민 집단과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한층 더 심했을 것이다.

 트리멘히어3* 씨의 ‘제빵공의 호소’에 관한 청서5)를 읽어 보라! 공식적인 출생 사망 기록부로도 확인된, 공장 감독관들의 다음과 같은 역설적인 설명을 들어 보자. “랭커셔 노동자들은 배를 주릴 정도로 적은 양의 급식을 받고 있었지만, 면화 흉작 때문에 면직 공장에서 잠시 쫓겨나자 오히려 건강 상태가 더 좋아졌으며, 이 기간에 어머니들이 아이들에게 아편 혼합제 대신에 마침내 자기 젖을 먹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유아 사망률은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이 역설적 설명을 보고 그 누가 치를 떨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문제의 다른 측면을 살펴보자! 1864년 7월 20일 하원에 제출된 소득세와 재산세에 관한 보고서를 보면, 세금 징수원의 평가를 기준으로 연간 5만 파운드가 넘는 수입을 올리는 사람의 수가 1862년 4월 5일부터 1863년 4월 5일까지 13명이 더 늘어났다는 것, 다시 말하면 이러한 사람의 수가 이 한 해 동안 67명에서 80명으로 늘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그 보고서에서는 약 3000명 가량이 해마다 2500만 파운드의 수입, 즉 해마다 잉글랜드와 웨일즈의 농업 노동자 대중 모두에게 돌아가는 수입을 약간 넘는 금액을 자기들끼리 나누어 갖는다는 사실이 폭로되고 있다. 1861년도 국세 조사서를 보라. 그러면 당신들은 잉글랜드와 웨일즈의 남자 토지 소유자 수가 1851년 1만 6934명에서 1861년에는 1만 5066명으로 줄어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은 토지 집중이 10년 동안 11%나 늘어났다는 것을 뜻한다. 만일 잉글랜드에서 토지 소유가 이런 속도로 계속 몇몇의 손에 집중한다면 토지 문제는, 아프리카 지역의 절반이 6명의 토지 소유자에게 속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네로가 심술궂게 웃음짓던 때의 로마 제국처럼 아주 단순해질 것이다.
 우리가 '거의 믿을 수 없을 만큼 놀라운 이러한 사실들'을 이렇듯 상세히 논하는 것은 영국의 상업과 공업이 유럽에서 으뜸이기 때문이다. 몇 달 전에 루이 필립4*의 망명한 아들 가운데 한 사람이, 그래도 영국 농업 노동자들의 운명은 혈색이 더 나쁜 해협 저편의 그들 동료들에 비하면 더 나은 편이라고 공공연히 그들을 축하했다는 사실을 상기해 보라. 사실 약간씩 다른 지방적 조건들에서, 또 조금 작은 규모이기는 하지만, 영국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사실들이 대륙의 모든 선진 공업국들에서도 되풀이되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나라들에서 1848년부터 공업이 전례 없이 발전했으며,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수출입이 늘어났다. 이 모든 나라들에서 '전적으로 유산 계급에게만 국한된 부와 힘의 증대'는 실로 '놀랄 만한' 것이었다. 이 모든 나라들에서도 영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실질 임금은 소수의 노동자 계급의 경우에만 약간 인상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는 화폐 임금(화폐 가격으로 표시되는 명목 임금一역자)의 인상이 복지가 실지로 늘어남을 뜻하지는 않았다. 이것은, 예컨대 런던의 빈민 구제원이나 고아원 수용인들의 생활 필수품에 드는 비용이 1852년에 7파운드 7실링 4페니에서 1861년에는 9파운드 15실링 8페니가 되었어도 그들에게는 아무런 이익도 되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다. 노동자 계급의 대다수 대중은 어디서나 그들보다 위에 있는 계급들이 사회적 사다리를 올라가는 것과 적어도 같은 정도로 내려갔던 것이다. 유럽의 어느 나라에서나 기계의 개량이나 화학적 발견도, 생산에 과학을 응용하는 것도, 교통 수단의 개선도, 새 식민지도, 이민도, 시장의 확장도, 자유 무역도, 또 이 모든 것을 합친 것으로도 근로 대중의 빈곤을 없애지는 못한다는 것, 현재와 같은 잘못된 토대 위에서는 노동 생산력의 온갖 새로운 발전이 사회적 대립을 심화시키고 사회적 적대감을 격화하는 경향을 띨 수밖에 없다는 것, 이것은 오늘날 편견 없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명백한 진리가 되었다. 헛된 희망으로 다른 사람들의 의식을 마비시키는 데 관심이 있는 사람들만이 이러한 진리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 경제적 진보의 '놀랄 만한 시대'에 굶어 죽는 것이 대영 제국의 수도에서는 거의 제도화되었다. 세계사 연감에 기록된 이 시기의 특징은 산업 • 상업 공황이라고 불리는 사회적 흑사병이 더 자주 되풀이되고, 더욱 규모가 커지고 또 더 파멸적인 결과를 낳았다는 사실이다.
 1848년의 혁명들이 실패한 뒤 대륙에서는 노동자 계급의 모든 당 조직과 당 기관지들이 권력의 철권을 맞아 파괴되었고, 노동자 계급의 가장 선진적인 아들들은 절망 상태에서 대서양 건너편의 공화국으로 피신했으며, 길지 못했던 해방의 꿈은 산업적 열광, 도덕적 타락과 정치적 반동이 찾아오면서 사라져 버렸다. 대륙 노동자 계급의 실패는 부분적으로는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당시 페테르부르크 내각과 우호 동맹을 맺고 있던 영국 정부의 외교에 의해 촉진되었는데, 이 실패는 얼마 안 가서 해협 이쪽에도 그 전염병적인 영향을 퍼뜨렸다. 대륙의 계급 형제들이 실패한 것은 영국 노동자 계급의 사기를 떨어뜨렸으며 자신들의 대의에 대한 그들의 신념을 꺾어 버린 반면에, 대토지 소유자와 대자본가에게는 다소 흔들렸던 자신감을 되찾아 주었다. 그들은 파렴치하게도 이미 공포된 양보 조처를 철회했다. 새로운 금(金) 산지가 발견되어 이민이 크게 늘어났으며, 그 결과로 영국 프롤레타리아트는 돌이킬 수 없는 손해를 입게 되었다. 예전에는 적극적이었던 그들의 대표들 가운데 일부는 일자리와 임금이 일시적으로 늘어나자 거기에 현혹되어 '정치적인 파업 파괴자'가 되고 말았다. 차티스트 운동을 유지하고 다시 조직하려는 모든 시도는 완전히 실패했다. 노동자 계급의 기관지들은 대중의 무관심 속에서 차례차례 하나씩 사라져 버렸다. 사실 영국 노동자 계급이 이렇게까지 정치적으로 무력한 상태에 만족하고 있던 적은 아마도 일찍이 없었을 것이다. 영국의 노동자 계급과 대륙의 노동자 계급이 비록 행동으로 연대하지는 않았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어쨌든 실패했다는 점에서 연대성을 볼 수 있게 된 셈이다.
 그러나 1848년의 혁명들 이후의 시기에 밝은 면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여기서는 두 가지의 큰 사실만을 지적하기로 하자.
 영국 노동자 계급은 놀랄 만큼 완강하게 30년 동안이나 투쟁을 계속한 뒤, 토지 귀족과 화폐 귀족 사이의 일시적 분열을 이용해 10시간 노동법을 통과시키는 데 성공했다.6) 육체 • 도덕적, 그리고 정신적인 면에서 이 법령이 공장 노동자들에게 준 막대한 이익——이것은 반년마다 공장 감독관들이 내는 보고서에 기록되고 있다.——은 오늘날 모든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있다. 대다수의 유럽 정부들은 영국의 공장법을 조금 바꾸어 채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영국 의회 자체도 이 법령의 적용 범위를 해마다 넓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을 위한 이 대책은 그 실천적 의의 외에도, 이 대책의 놀랄 만한 성공을 촉진한 그 무엇을 또한 갖고 있었다. 중간 계급은 유어 박사5*나 시니어 교수6* 그 밖에 이와 비슷한 종류의 현자들, 즉 자신들의 가장 악명 높은 학자들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은 예언을 하고 또 직성이 풀릴 때까지 이를 입증했다. 즉 노동 시간의 법적 제한은 어느 것이든간에 영국의 공업에 조종을 울리고야 만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공업은 흡혈귀처럼 피를 빨아먹음으로써만, 그것도 어린애의 피까지 빨아먹음으로써만 존속할 수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아동의 살해는 몰로크(Moloch) 종교7*의 신비한 의식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아주 엄숙한 의식의 경우에만 실행된 것으로서 아마 1년에 한 번 넘게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몰로크 신이 특히 가난한 사람의 자식들만을 즐겨 찾은 것은 아니었다. 노동 시간의 법적 제한을 둘러싼 투쟁이 더 치열해진 이유는, 그것이 이윤 추구를 위협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젖혀놓더라도, 이 문제가 부르주아 정치 경제학의 기초인 수요 • 공급 법칙의 맹목적 지배와 노동자 계급의 정치 경제학의 기초인 사회적 예견에 의해 관리되는 사회적 생산 사이의 일대 논쟁과 관련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10시간 노동법은 실천에서 거둔 중요한 성공이었을 뿐만 아니라 원칙이 이긴 것이기도 했다. 처음으로 부르주아지의 정치 경제학이 노동자 계급의 정치 경제학 앞에서 공개적으로 항복했던 것이다.
 그러나 소유7)의 정치 경제학에 대해 노동의 정치 경제학이 거둘 더 위대한 승리가 닥쳐오고 있었다. 우리는 협동 조합 운동, 특히 아무런 도움도 없는 상태에서 몇 사람의 대담한 '손들'이 창설한 협동 조합 공장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이 위대한 사회적 실험의 의의는 이루 다 평가할 수 없을 정도다. 노동자들은 대규모 생산, 게다가 현대 과학의 여러 요구에 맞는 생산이 일꾼 계급을 고용하는 주인 계급 없이도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또 그들은 생산을 효과적으로 진행하려면 노동 도구가 노동자를 지배하며 그들을 강탈하는 도구로서 독점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 고용 노동8*은 노예 노동이나 농노 노동과 마찬가지로 과도적이고 낮은 형태일 뿐이며 의욕적인 손, 자발적인 정신, 즐거운 마음으로 수행하는 연합된 노동 앞에서 사라져야 할 운명에 놓여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영국에서 협동 조합 제도의 씨를 뿌린 사람은 로버트 오언이었다. 대륙에서 시도된 노동자들의 실험은 사실, 1848년에 발명되지는 않았지만 소리 높이 선포되었던 그 이론에서 나온 실천적 귀결인 것이다.
 동시에 1848〜1864년의 경험은 협동 조합식 노동이 아무리 원칙에서 우월하고 실천에서 도움이 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몇몇 개별 노동자들의 우연적인 노력이라는 좁은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한, 기하 급수적으로 자라나는 독점의 성장을 결코 억제할 수도 없고 대중을 해방할 수도 없으며 심지어 그들의 빈곤이라는 짐을 눈에 띄게 덜어 줄 수조차도 없다는 것을 의심할 여지 없이 증명했다. 선량한 귀족들, 한담을 일삼는 부르주아 박애가들, 심지어 신랄한 정치 경제학자들까지도 그들이 그 맹아 상태에서부터 질식시키려고 헛되이 애써 왔으며, 공상가의 공상이라고 비웃거나 사회주의자들의 신성 모독이라고까지 낙인 찍어 오던 바로 그 협동 조합식 노동 체계에 대해 갑자기 구역질 나는 찬사를 늘어놓게 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근로 대중을 해방하자면 협동 조합식 노동이 전국민적 규모에서, 따라서 전국민적 수단에 의해 전개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대지주들과 대자본가들은 자신들의 경제적 독점을 지키고 영구화하려고 언제나 자신들의 정치 특권을 이용할 것이다. 그들은 노동 해방의 위업에 협력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길에다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장애물을 쌓아 놓을 것이다. 파머스턴 경9*이 지난번 의회에서 아일랜드 소작권 법안의 옹호자들에게 던졌던 비웃음을 기억하라. 그는 이렇게 외쳤다. “하원은 지주들의 의원이다.”8) 따라서 정치 권력을 장악하는 것은 노동자 계급의 커다란 의무가 되었다. 노동자들도 이것을 이해했는지 영국,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에서는 노동 운동이 일제히 활기를 띠기 시작했고 노동자당을 정치적으로 다시 조직하려는 조치들이 일제히 취해졌다.
 성공의 한 요소——머릿수——는 이미 그들에게 있다. 그러나 숫자는 대중이 조직에 의해 통일되고 지식에 의해 지도될 때에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과거의 경험은, 각국 노동자들 사이에 마땅히 있어야 할 동맹, 해방을 위한 모든 투쟁에서 그들이 서로를 튼튼하게 지지하도록 고무해 줄 형제적 유대가 소홀히 여겨지는 경우에 노동자들의 분산적 노력이 어떻게 전반적 패배라는 벌을 받고 마는가를 보여 주었다. 이러한 사상에 고무되어 1864년 9월 28일, 성마틴 회관에서 열린 공개 회의에 모인 여러 나라의 노동자들은 국제 노동자 협회를 창립 했다.
 또 하나의 신념이 이 집회를 좌우했다.
 노동자 계급의 해방은 그들 사이의 형제적 협력을 요구하고 있다. 민족 편견을 이용해 약탈 전쟁에서 인민의 피와 재산을 낭비하게 하는 범죄적 의도를 지닌 대외 정책이 실시되고 있는데, 어떻게 노동자들이 그 위대한 과업을 수행할 수 있겠는가? 대서양 건너편의 노예 제도를 영속시키고 전파하기 위한 치욕적인 십자군 원정에 무턱대고 뛰어들지 못하도록 서유럽을 구해 낸 것은 지배 계급의 현명함이 아니라 그들의 범죄 행위에 대한 영국 노동자 계급의 영웅적 저항이었다.9) 파렴치한 동조, 위선적인 동정, 천치 같은 무관심 등의 태도로 유럽의 상류 계급들이 러시아가 코카서스 산악 지대의 성채들을 점령하고 영웅적인 폴란드를 살해하는 광경을 그냥 보고만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머리는 페테르부르크에 있고 손은 유럽의 모든 내각에 있는 이 야만적인 강국이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대규모의 약탈을 했다는 사실은 노동자 계급에게 그들 자신이 국제 정책의 비밀을 파악하고, 자기 나라 정부의 외교 활동을 감시하며, 필요한 경우에는 자기 손안에 있는 모든 수단을 다 써서 이에 대항하고, 또 이를 막을 수 없는 경우에는 단결된 힘으로 그것을 즉각 비난하며, 개개인의 상호 관계에서 지침이 되어야 할 도덕과 정의의 단순한 법칙들이 민족들의 상호 관계에서도 최고 법칙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 이것이 그들의 의무임을 가르쳐 주었다.
 이와 같은 대외 정책을 위한 투쟁은 노동자 계급의 해방을 위한 일반적 투쟁의 한 부분을 이룬다.
 전세계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국제 노동자 협회 잠정 규약10)
칼 마르크스


 노동자 계급의 해방은 노동자 계급 자신이 쟁취해야 한다. 노동자 계급을 해방하기 위한 투쟁은 계급적 특권과 독점을 위한 투쟁이 아니라 권리와 의무상의 평등, 모든 계급 지배의 폐지를 위한 투쟁을 뜻한다.
 노동하는 인간이 노동 수단, 즉 생활 원천을 독점한 자에게 경제적으로 예속해 있는 것은 모든 형태의 예속, 모든 사회적 빈곤과 도덕적 타락과 정치적 종속의 주된 원인이다.
 따라서 노동자 계급의 경제적 해방이야말로 중요한 궁극적 목적이며, 모든 정치 운동은 하나의 수단으로서 이 목적 밑에 놓여야 한다.
 이 목적을 이루려는 모든 노력은 지금까지 각국의 다양한 노동 부문 사이의 통일성이 부족했기 때문에, 그리고 각국 노동자 계급 사이의 형제적 유대가 없었기 때문에 실패를 거듭해 왔다.
 노동자 계급의 해방은 국지적이거나 일국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사회적인 과제다. 그것은 현대 사회 속에 있는 모든 국가를 포괄하며, 그 해결은 가장 진보적인 국가들 사이의 실천적이고 이론적인 협력에 달려 있다.
 오늘날 유럽의 공업 국가들에서 새로운 희망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노동자 계급 운동의 부활은 과거의 오류에 다시 빠져드는 것에 대한 엄숙한 경고가 되고 있으며, 여전히 고립해 있는 운동들을 신속히 결합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이상의 여러 가지 사실을 고려하면서,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1864년 9월 28일, 런던의 성마틴 회관에서 열린 공개 회의의 결의에 의해 선출된 위원회의 서명 위원들은 국제 노동자 협회를 창설 하려고 필요한 조치들을 취해 왔다.
 국제 노동자 협회와 모든 가맹 단체 및 회원들은 인종이나 신앙 • 국적에 관계없이 진리 • 정의 • 도덕을 서로에 대한, 그리고 모든 인간에 대한 행동 규범으로 삼을 것을 선언한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자기 의무를 다하는 모든 인간을 위해서도, 인간과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의무다. 의무 없이는 권리도 없으며, 권리 없이는 의무도 없다.11)
 바로 이러한 정신에 바탕을 두고 아래의 조항들을 국제 노동자 협회의 잠정 규약으로 삼는다.
 1. 이 협회는, 여러 나라에 흩어져 있으면서 노동자 계급의 보호와 진보와 완전한 해방을 추구하는 노동자 단체들 사이의 연대와 협력을 위한 중앙으로 설립되었다.
 2. 단체의 명칭은 국제 노동자 협회로 한다.
 3. 노동자 총회를 1865년 벨기에에서 연다. 총회는 그때까지 국제 노동자 협회에 가입한 모든 노동자 단체의 대표들로 이루어진다. 총회는 노동자 계급의 공통된 열망을 전유럽에 천명하고 국제 협회의 최종 규약을 확정하며, 협회를 성공적으로 운영하는 데 요구되는 수단들을 강구하고 나아가 협회의 중앙 위원회를 임명한다.12) 총회는 해마다 한 번씩 연다.
 4. 중앙 위원회는 런던에 두며, 국제 노동자 협회를 대표하는 각국 노동자들로 이루어진다. 중앙 위원회는 의장, 재정 간사, 총서기, 각국의 통신 담당 서기 등과 같이 업무 처리에 필요한 직책을 소속 위원 가운데서 선출한다.
 5. 총회는 연례 회의 때 연례 업무에 대해 중앙 위원회로부터 공식 보고를 받는다. 중앙 위원회는 해마다 총회에서 지명하며 위원회에 새로운 임원을 추가할 권한을 갖는다. 유사시에 중앙 위원회는 연례 회기 전에 총회를 소집할 수 있다.
 6. 중앙 위원회는 한 나라 노동자들이 다른 나라 노동 운동에 대한 정보를 지속적으로 전달받을 수 있도록 여러 협력 딘체들 사이에 국제 기구를 구성한다. 그래야만 유럽 각국의 사회 상태에 대한 연구가 동시에, 그리고 똑같은 지도를 받으며 진행될 수 있을 것이고 한 사회에서 논의된 공통의 관심사들이 다른 모든 사회에서도 논의될 수 있을 것이며, 또 국제 분쟁의 경우와 같이 즉각 실제적인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여러 관련 단체들이 통일적으로 행동할 수 있을 것이다. 중앙 위원회는 필요한 경우에는 언제든지 여러 국가와 지역 단체들에 대해 여러 가지 안건을 발의할 수 있다.
 7. 각국 노동자 계급 운동의 성공은 연대와 단결의 힘으로만 확보될 수 있다. 그런데 국제 중앙 위원회의 유용성 여부는 주로, 그것이 노동자 단체들의 몇몇 전국 기구들을 상대해야 하느냐 아니면 흩어져 있는 소규모 지역 단체들까지도 상대해야 하느냐에 달려 있다. 따라서 국제 노동자 협회의 회원들은 그들 각국의 흩어져 있는 노동자 단체들을 전국적인 중앙 조직으로 대표되는 전국 기구로 통일하는 데 온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조항을 적용하는 것은 각국의 특수한 사정에 따라 정도가 다르겠지만, 지역적인 장애 요인이 있다 하더라도 독자적인 지역 단체들이 런던 중앙 위원회와 직접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도 분명하다.
 8. 제1차 총회가 열릴 때까지 1864년 9월 28일에 선출된 위원회는 임시 중앙 위원회로서 활동하며, 각국 노동자 단체들을 연결하고, 총회 소집에 필요한 사전 조치를 취하며, 대회에 상정할 주요 문제들을 전국 • 지역 단체들과 토의한다.
 9. 국제 노동자 협회는 회원들이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거주지를 옮길 경우에는 해당국 관련 노동자들의 온정적인 지원을 받는다.
 10. 형제적인 협력을 통한 항구적인 유대로 단결해 있을 경우에만, 국제 노동자 협회에 가입한 노동자 단체들은 그들 조직을 온전히 보존할 수 있을 것이다.



주-----------------------------------------------------------

  1) 마르크스는 재무 대신인 글래드스턴이 1864년 4월 7일에 하원에서 한 연설을 『타임』지 1864년 4월 8일자 기사에서 인용하고 있다.
  2) 대혼란(Garotte Panic) 영국, 특히 런던에서는 1860년대 초에 살인자들에 의한 노상 강도 사건이 자주 일어났으며, 심지어 의회에서까지도 이에 대한 논란이 벌어질 정도였다.
  3) 청서(Blue Book) 영국 의회와 외무성의 외교 문건을 모아 놓은 간행물을 통칭하는 말. 청서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그 표지가 푸른 색이기 때문인데, 영국에서는 17세기부터 간행되어 왔으며 이 나라의 경제사와 외교사에 관한 주요 공식 자료다. 여기서 마르크스가 말하는 것은 『유형 및 징역 관계 법령 실시를 위한 조사 위원회의 보고』(Report of the commissioners appointed to inquire into the operation of the acts relating to transportation and penal servitude 제1권, 런던, 1863) 다.
  4) 이 인용문은 마르크스가 1863년 4월 16일자 글래드스턴의 연설에서 인용한 것으로, 1870년대에 부르주아 경제학자 브렌타노(Lujo Brentano)는 이를 인용하여 마르크스를 중상 모략하는 익명의 캠페인을 벌였다. 글래드스턴의 연설 가운데서 문제가 된 문장은 1863년 4월 17일, 당시의 의회 회기에 대한 낙수(落穗) 기사 형태로 런던의 거의 모든 신문(『타임즈』(The Times), 『샛별』(The Morning Star), 『데일리 텔리그래프』(The Daily Telegraph) 등등에 실렸다. 그런데 준(準)공공 간행물이라고 할 수 있는 『핸저드의 의회 토론 자료집』(Hansard’s Parliamentary Debates)——이 책의 본문은 연설자 자신이 감수한 것이다.——에는 이 문장이 빠져 있다. 브렌타노는 이것을 가지고 마르크스에게 시비를 걸면서, 마르크스가 날조되고 과학적으로 불충분한 신문 기사를 인용했다고 비난했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중상 모략에 대해서, 1872년 5월 23일과 7월 28일 『인민 국가』의 편집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답변을 한 바 있다. (『전집』 제18권을 보라.)
 마르크스가 죽은 뒤인 1883년 11월 영국의 부르주아 경제학자 테일러(Taylor)가 똑같은 시비를 되풀이했다. 이른바 날조 인용을 했다는 이러한 견해에 대해서는 엘레아노르 마르크스(Eleanor Marx)가 1884년 2월과 3월에 『오늘』(To-Day)지에 보낸 두 통의 편지에서, 그리고 뒷날 엥겔스가 1890년 6월에 『자본론』 독일어판 제4판 서문과 1891년 『마르크스에 대한 브렌타노의……』(In Sachen
Brentano contra Marx……, 『전집』 제22권을 보라.)라는 소책자에서 반박하고 있다.
  5) Blue Book on the “Grievances complained of by the Journeymen Bakers” 『날품팔이 제빵공들의 눈물겨운 호소와 관련하여 여왕 폐하의 내무 대신에게 보내는 보고서』(트리멘히어 편, Report addressed to Her Majesty's Principal Secretary of State for the Home Department, relative to the grievances complained of by the journeymen baker, 런던, 1862)를 가리킨다.
  6) 1일 노동 시간을 10시간으로 법률로 제한하려는 투쟁은 영국에서 이미 18세기 말에 시작되었으며, 1830년대 이래 광범위한 프롤레타리아 대중이 이에 참여했다. 어린이와 여성 노동자에게만 적용되는 10시간 노동법이 1847년 6월 8일 영국 의회에서 채택되었다. 그러나 많은 공장주가 실제로는 이 법을 무시했다.
  7) 독일어판에는 '소유'(property)가 '자본'(Kapital)으로 번역되어 있다.
  8) 문제가 된 발언은 파머스턴 수상이 1863년 6월 23일 의회에서(『핸저드의 의회 토론 자료집』 제17권, 런던, 1863을 보라.) 아일랜드 소작권 법안에 관한 토론이 벌어졌을 때 한 것이다. 아일랜드 출신 의원들은 매과이어(John Francis Maguire)를 필두로, 소작인들에 대한 지주들의 자의적인 횡포를 규제하는 법령을 제정할 것을 요구했다. 소작인들은 다른 무엇보다도 소작 계약을 파기할 때 그가 그 동안 소작지를 관리하려고 들인 모든 비용을 보상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파머스턴은 연설에서 아일랜드 출신 의원들의 요구는 '공산주의적인 주장'이며 ‘사회 질서의 근본 원칙을 뒤엎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9) 영국의 노동자들은 미국의 남북 전쟁 기간인 1861년 말부터 1862년 초에 영국 정부가 노예 소유주들의 남부 연맹 편에서 전쟁에 개입하는 것을 반대했다. 노동자들의 투쟁이 특히 격해진 것은 이른바 '트렌트'(Trent) 호 사건 때문이었다. 북부의 연방 정부는 '트렌트' 호를 타고 영국으로 가던 노예 소유주들의 대표 몇 명을 체포했다. 영국의 부르주아지는 이를 구실로 북부 연방과 전쟁을 하려고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북부 연방을 열렬하게 지지하는 영국 노동자들의 대중 운동이 일어났으며, 그들은 수많은 집회를 통해 영국 부르주아지의 전쟁 준비에 항의하고 충돌을 평화적으로 해결할 것을 요구하여 결국 유럽의 간섭을 막아냈다. 영국 노동자들의 행동은 프롤레타리아의 국제적 연대라는 사상을 확고히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10) ‘국제 노동자 협회 잠정 규약’은 마르크스가 '창립 선언'과 같은 시기에 쓴 것이다.(이 책 142쪽 참조一역자) 그는 여기서, 1864년 10월 18일 임시 위원회 회의에 제출된 문건의 도입 부분을 완전히 고쳐 썼다. 그는 40개의 규약 항목을 10개로 줄이고 조직 원칙도 고쳤는데, 따라서 몇 가지 형식적인 사항들(조직의 이름, 1865년 브뤼셀에서 회의를 소집한다는 것에 대한 확인, 조직 구성원들을 위한 주소 변경 통지 등등)만이 수정되지 않았을 뿐이다. 마르크스가 작성한 '잠정 규약'의 본문은 1864년 10월 27일 소위원회에서 인준되었고, 며칠 뒤인 11월 1일 총회에서 만장 일치로 채택되었다. '규약'은 '창립 선언'과 함께 1864년 11월 런던에서 『국제 노동자 협회 창립 선언과 잠정 규약……』이라는 소책자로 편집되어 영어로 출판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1864년 11월 12일에는 『벌집 신문』 제161호에 실리기도 했다. '잠정 규약'의 프랑스 어 번역은 1864년 말에 파리의 프루동주의적인 종파가 주관해 이루어졌는데, 본문의 여러 곳을 의도적으로 왜곡했으며, 뒷날 마르크스를 반대하던 특정 분자들이 총평의회에 맞서 투쟁할 때 이용했다.(『전집』 제16권, 389〜390쪽 417~418쪽을 보라.) 더 나은 새로운 프랑스 어 번역은 마르크스가 지도하여 롱게(Charles Longuet)가 완성했다. 그것은 1866년 브뤼셀에서 '창립 선언'과 함께 『국제 노동자 협회 선언과 잠정 규약』이라는 소책자로 발간되었다. '잠정 규약'의 독일어 번역은 1865년 1월 18일, 『사회 민주주의자』에 실렸으며, 1866년 4〜5월에는 『선구자』(Der Vorbote)에도 실렸다. 제네바 대회는 1866년 9월 5일의 회의에서 '규약'('일반 규약')의 본문을 승인하고 운영 규칙을 보완했는데, 이 규칙은 9월 8일의 회의에서 채택되어 뒷날 '관리 규정'(Verwaltungs Verordnung) 이 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 책 (『전집』 제16권一역자)에 실린 것은 1864년의 영어판 소책자를 토대로 한 것이다. '잠정 규약'과 ‘일반 규약’의 자구(字句)가 일치하는 경우에는 '일반 규약'의 본문을 옮겨 놓았는데, 그 이유는 '일반 규약'의 독일어본이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교열을 거쳐 1871년 라이프치히에서 출판되었기 때문이다.(『전집』 제17권)
 『선구자』 월간지, 스위스에 있던 인터내셔널 독일 지부의 공식 기관지. 1866년부터 1871년까지 독일어로 간행되었으며, 편집 책임자는 베커(Johann Philipp Becker)였다. 이 잡지는 대체로 마르크스와 총평의회의 노선을 따랐으며, 인터내셔널의 문건들을 체계적으로 출판하고 인터내셔널 지부의 활동을 여러 나라에 알리는 역할을 했다.
 11) 설명적인 성격을 갖는 이 단락과 앞의 단락은 마르크스가 임시 위원회의 다른 위원들의 요구에 따라 집어 넣은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마르크스가 엥겔스에게 보낸 1864년 11월 4일자 편지를 보라.(독일어판의 편집자주一역자)
 12) 국제 노동자 협회의 제1차 총회는 원래 예정한 대로 1865년 브뤼셀에서 열리지 못하고 1866년 9월 3일부터 8일까지 제네바에서 열렸다. 1865년에는 국제 노동자 협회의 지부들이 이데올로기적이고 조직적인 면에서 아직 충분히 정비되지 못했던 것이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제1차 총회를 연기하려 했고, 임시 중앙 위원회는 마르크스의 제안에 따라 총회 대신에 런던 대회 이후에 비공개 예비 총회를 소집하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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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William Ewart Gladstone(1809〜1898년)을 가리킨다. 독일어판에는 그의 이름이 명시되어 있다.
 2* 독일어판에는 '국가의 부의 진보에 관한 통계'(Fortschrittsstatistik des National-reichtums)로 되어 있다.
 3* Hugh Seymour Tremenheere(1804〜1893년) 영국의 관리, 언론인. 노동자들의 노동 조건을 조사하기 위한 정부측 위원회의 위원을 여러 차례 역임했다.
 4* 이 책 259쪽 23*을 보라.
 5* Andrew Ure(1778〜1857년) 영국의 화학자, 경제학자, 자유 무역의 지지자.
 6* Nasseau William Senior(1790〜1864년) 영국의 경제학자. '부르주아지의 공식 경제 대변인'(마르크스) 가운데 한 사람. 자본주의를 변호했으며, 노동 시간을 줄이는 데 반대했다.
 7* 몰로크 종교 고대의 페니키아 인들이 숭배하던 불의 신. 이 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 산 사람을 제물로 바쳤다.
 8* 독일어판에는 '고용 노동'(hired labour)이 '임금 노동'(Lohnarbeit)으로 되어 있다.
 9* Henry John Temple, Viscount Palmerston(1784〜1865년) 영국의 정치가. 처음에는 토리 당, 1830년부터는 휘그 당 우파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 전쟁상(1809〜1828년), 외상(1830〜1834년, 1835〜1841년, 1846〜1851년), 내무상(1852〜1855년)과 수상(1855〜1858년과 1859〜1865년)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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