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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3-06-18 15:55
고타 강령 비판(1875년 5월)_맑스
 글쓴이 : webmaster
조회 : 1,154  
고타 강령 비판


(『전집』 제19권, 11〜32쪽. 엥겔스의 서문, 같은 책, 521〜522쪽) 
칼 마르크스의 고타 강령 비판 서문/ 프리드리히 엥겔스 
빌헬름 브라케에게 보내는 편지/ 칼 마르크스 
독일 노동자당 강령에 대한 논평/ 칼 마르크스


출전 : 마르크스의 수고.(1875년 4월에서 5월 초 사이에 쓰였다.)

 「고타 강령 비판」(마르크스가 쓴 「독일 노동자당 강령에 대한 논평」을 가리킨다.)은 과학적 공산주의의 기본 문제들의 발전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문건 가운데 하나다. 이 글은 기회주의에 대한 비타협적 투쟁을 보여 주는 하나의 모범이다. 엥겔스가 베벨에게 보낸 편지(『전집』 제19권, 3〜9쪽)에서와 마찬가지로, 마르크스는 자신의 「논평」에서 뒷날 통합된 독일 사회 민주 노동당의 강령 초안에 대해 원칙적이고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마르크스의 「고타 강령 비판」은 1891년에 엥겔스에 의해 처음으로 출판되었는데, 그때에도 기회주의적인 당 간부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출판이 이루어졌다. 「고타 강령 비판」과 그에 덧붙여 브라케에게 보낸 편지는 독일 사회 민주당의 주간지인 『새 시대』 제18호(1890〜1891년분 제1권 제9분책, 슈투트가르트)에 실렸으며, 엥겔스가 서문을 썼다. 그러나 엥겔스가 1891년 2월 23일 카우츠키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특히 신랄한 논평 부분을 몇 군데 부드럽게 바꾸는 데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 실린 글은 마르크스의 원래 원고를 따른 것이다. 수고의 원본은 1960년 가을에 마르크스의 증손자인 마르셀 샤를르 롱게(Marcel Charles Longuet)가 소비에트연방 중앙 위원회 부설 마르크스 레닌주의 연구소에 기증했다.
 1891년판과 내용에서 차이나는 점은 편집자 주에 달아 놓았다.(이 책에서는 이를 대부분 생략했다.一역자) 1891년판에서 삭제되고 그 대신에 점선으로 표시된 구절들은 〈 〉로 표시했다.


칼 마르크스의 고타 강령 비판 서문1*
프리드리히 엥겔스


 여기에 실린 이 글——강령 초안 비판과 그에 덧붙여 브라케2*에게 보낸 편지——은 1875년의 고타(Gotha) 통합 대회3* 직전에 마르크스가 브라케에게 보낸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 원고를 가이프4*, 아우어5*, 베벨6*, 리프크네히트7*에게 보인 뒤 자신에게 되돌려 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마침 할레(Halle) 당 대회8*가 고타 강령에 대한 토론을 안건으로 올렸기 때문에, 나는 그 토론에 알맞은 이 중요한——아마도 가장 중요한——문건을 공개하지 않고 계속 붙들고 있는 은 죄를 짓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글은 또 다른, 더 중대한 의의를 갖고 있다. 마르크스는 여기서 처음으로, 라살레9*가 선동 활동을 시작할 때부터 취해 온 노선에 대해서,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의 경제학적 원리나 전술에 대해 자신의 태도를 분명하고도 확고하게 밝혔던 것이다.
 이 글에서 강령 초안은 무자비할 만큼 날카롭게 해부되고 있으며, 그렇게 하여 얻어진 결과 또한 사정없이 폭로되어 초안의 결점들이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15년이나 지난 오늘날 이 모든 것들은 더 이상 아무에게도 해(害)가 되지 않는다. 이제는 유별난 라살레주의자들이 고립된 패잔병 신세로 다른 나라에만 더러 남아있을 뿐이며, 할레에서는 고타 강령을 작성한 사람들까지 그것이 완전히 엉터리였다고 내팽개치기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나는 중요하지 않은 곳에서는 개인에 대한 몇 가지 신랄한 표현과 평가를 삭제하고, 그 대신 이를 점선(생략 부호一역자)으로 바꿔 놓았다. 만일 마르크스 자신이 오늘날 이 원고를 출판한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했을 것이다. 이 글에서 군데군데 눈에 띄는 신랄한 말투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첫째로, 마르크스와 나는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독일의 운동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었던 만큼, 이 강령에서 표명된 결정적인 퇴보에 우리는 특히 격분할 수밖에 없었다. 둘째로, 인터내셔널 헤이그(Haag) 대회10*가 열린 지 겨우 2년이 될까 말까 한 당시에 우리는 바쿠닌11*과 그를 따르는 무정부주의자들과 아주 격렬하게 투쟁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독일 노동 운동에서 일어난 모든 일의 책임을 우리에게 덮어씌우고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이 강령을 만든 숨은 장본인으로 생각하리라는 것을 예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은 이런 염려가 사라졌으며, 이와 함께 문제의 구절들도 필요 없게 되었다.
 또 출판법 때문에 다시 몇몇 구절이 점선으로 바뀌었다. 좀더 부드러운 표현을 택해야만 했던 곳에서는, 그것을 〈 〉안에 넣었다. 그 밖에는 모두 원문 그대로다.


 1891년 1월 6일, 런던에서


 빌헬름 브라케에게 보내는 편지 


 친애하는 브라케,
 합동 강령에 대한 다음의 비판적 논평을 읽은 뒤 가이프와 아우어, 베벨과 리프크네히트에게 전해 주면 좋겠소. 나는 매우 바빠서 의사가 정해준 시간보다 훨씬 더 많이 일하지 않을 수 없구료. 따라서 이런 장황한 글을 쓰는 것이 그리 ‘즐거운’ 것은 결코 아니었소. 그러나 이 논평을 받아보게 될 당내의 친구들이 나중에 내가 취하게 될 조치들을 오해하지 않도록 하려면 그렇게 할 필요가 있었소.
 〈그 조치란 통합대회 뒤에 엥겔스와 내가 발표하게 될 간단한 성명이오. 우리는 이 원칙적 강령에 우리가 전혀 관여하지 않았으며, 또 우리는 그것과 아무 상관도 없다는 것을 해명할 생각이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오. 왜냐하면 외국에서는 우리 당의 적들이 아주 용의주도하게 퍼뜨린 견해——완전히 그른 견해이지만——가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인데, 그것에 따르면 우리가 이른바 아이제나흐(Eisenach) 당의 운동을 여기서 은밀히 지도하고 있다는 것이오. 더구나 바쿠닌은 얼마 전에 러시아어로 간행된 자신의 저서1)에서 예컨대 아이제나흐 당의 강령 전체 등등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리프크네히트가 인민당2)과 손잡은 이래 취해 온 조치 하나하나에 대해서까지도〉 나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우고 있소.
 그것은 딴 문제로 치더라도, 전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하며 당을 타락시킬 것이 확실한 강령에 대해 나로서는 외교적 침묵을 통한 승인12*일지라도 책임상 도저히 승인할 수는 없소.
 현실 운동의 한걸음 한걸음이 한 무더기의 강령보다 더 중요하오. 따라서 만일 아이제나흐 강령3)을 넘어설 수 없었다면,——사실 여러 사정이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지만——단순히 공동의 적에 대항하는 행동에 관한 협정이나 맺었어야 했을 것이오. 그러나 (한층 더 장기간의 공동 활동을 거쳐 준비될 때까지 그것을 미루어 두지 않고) 원칙적 강령을 작성한다면, 그것은 당의 운동 수준을 가늠하는 이정표를 전세계 앞에 세워 놓는 것이오
 라살레 파의 우두머리들13)이 우리에게로 온 것은 여러 사정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오. 만일 원칙을 가지고 흥정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처음부터 그들에게 분명히 밝혔더라면, 그들도 행동강령이나 공동행동을 위한 조직안(案)에 만족했을 것이오. 그런데 그렇게 하는 대신에 그들이 당당히 대표권을 가지고 출석하도록 허용하고 있으며, 또 이 편에서도 이 대표권을 유효한 것으로 인정하고 있소. 그리하여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오히려 무조건 항복을 하는 꼴이오. 더구나 한술 더 떠서 라살레파는 타협 대회 전에 또 한 번 대회를 소집하고 있는데, 우리 당은 징 치고 막 내린 뒤에야14* 자신들의 대회를 소집하고 있소. 〈이것은 분명히 모든 비판을 막아버리고 우리 당으로 하여금 곰곰이 생각해 볼 여유를 주지 않으려는 속셈이오.〉 통합이라는 사실 자체는 노동자들에게 만족스러운 일임을 누구나 알고 있소. 그러나 눈앞의 성과를 위한 대가가 너무 비싸다는 점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잘못이오.
 이 강령이 라살레 파의 신조를 신성하게 만들고 있다는 점은 제쳐놓더라도, 어쨌든 이 강령은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것이오.
 〈가까운 시일 안에 『자본론』 프랑스어판4)의 마지막 분책들을 보내주겠소. 프랑스 정부의 금지령 때문에 인쇄가 오랫동안 늦추어졌소. 이번 주일 아니면 다음 주 초쯤 책이 완성될 것이오. 앞부분의 여섯 분책은 받았는지? 베른하르트 베커15*의 주소도 알려 주기 바라오, 그에게도 마지막 분책들을 보내야 하니까.〉
 『인민 국가』(Volksstaat) 출판사16*는 묘한 버릇을 갖고 있소. 예컨대 「쾰른 공산주의자 재판」5)(Kölner Kommunistenprozeß)의 인쇄본을 내게는 아직껏 단 한 부도 안 보내 주는구료.

1875년 5월 5일, 런던에서
충심으로 인사를 드리며
당신의 칼 마르크스


독일 노동자당 강령에 대한 논평 
칼 마르크스


I

 1. 노동은 모든 부와 모든 문화의 원천이다. 그런데 유익한 노동은 오직 사회속에서만, 또 사회를 통해서만 있을 수 있으므로, 노동 소득은 온전히(unverkürzt), 동등한 권리에 따라 사회의 모든 성원에게 속한다.

 이 문단의 첫번째 부분 “노동은 모든 부와 모든 문화의 원천이다.”
 노동은 모든 부의 원천이 아니다. 자연도 노동과 마찬가지로 사용 가치의 원천이다. (그리고 물질적 부는 바로 이 사용 가치로 이루어진다!) 노동 자체는 자연력의 하나인 인간 노동력의 발현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같은 문구는 아동용 초등 교과서에도 나오며, 노동이 그것에 속하는 대상과 도구와 더불어 수행된다는 점을 고려하는 한, 문구는 옳다. 그리고 사회주의적 강령은 이러한 조건들을 묵살하는 부르주아적 말투를 허용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 조건들만이 강령에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모든 노동 수단과 노동 대상의 첫번째 원천인 자연에 대해 처음부터 그 소유자로서 관계를 맺는 한에서만, 즉 자연을 인간의 소유물로 취급하는 한에서만 인간의 노동은 사용 가치의 원천이 되며, 따라서 부의 원천도 된다. 부르주아들이 노동에 초자연적인 창조력을 부여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노동이 자연적인 제약을 받는다는 바로 그 점으로부터, 자신의 노동력 외에는 다른 재산을 갖고 있지 못한 사람은 어떤 사회 상태나 문화 상태에서도 상대적(물질적—역자) 노동 조건들을 소유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노예가 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는 오직 그런 사람들의 허락이 있어야만 노동할 수 있으며, 따라서 그들의 허락이 있어야만 살 수 있는 셈이다.
 지금 당장은 이 문장을 있는 그대로, 아니 불완전한 채로 그냥 놓아두자. 그러면 여기서 어떤 결론이 나올 것인가? 그것은 분명 다음과 같은 것이다.
 “노동은 모든 부의 원천이므로, 사회 속의 그 어느 누구도 노동 생산물을 통하지 않고서는 부를 얻을 수가 없다. 따라서 스스로 노동하지 않는 사람은 남의 노동에 의해 사는 것이며, 그의 문화 또한 남의 노동의 대가로 얻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결론 대신에 “그런데……으므로”라는 말을 붙여 가지고, 첫째 문장이 아니라 둘째 문장에서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 문단의 두 번째 부분 “유익한 노동은 오직 사회 속에서만, 또 사회를 통해서만 있을 수 있다.”
 첫번째 문장에 따르면 노동은 모든 부와 모든 문화의 원천이었던 만큼, 어떤 사회도 노동 없이는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거꾸로 어떤 '유익한' 노동도 사회 없이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보게 된다.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쓸모없는, 또는 심지어 해롭기까지 한 노동이 오직 사회 속에서만 하나의 산업 분야가 될 수 있다든가, 사람은 오직 사회 속에서만 무위 도식할 수 있다 등등, 한마디로 영락없는 루소(Rousseau) 식의 이야기를 그대로 베껴 놓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유익한' 노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기껏해야 목표로 했던 바의 유익한 결과를 낳는 노동일 것이다. 돌로 동물을 잡든가 열매를 모으든가 하는 야만인——인간이 원숭이를 벗어난 뒤에는 야만인이다.——도 '유익한' 노동을 한다.
 세 번째 결론 “그런데 유익한 노동은 오직 사회 속에서만, 또 사회를 통해서만 있을 수 있으므로, 노동 소득은 온전히, 동등한 권리에 따라 사회의 모든 성원에게 속한다.”
 멋진 결론이다! 유익한 노동은 오직 사회 속에서만, 또 사회를 통해서만 있을 수 있다면, 노동 소득은 사회에 속하고 노동자 개개인에게는 그 가운데서 다만 노동의 '조건'인 사회를 유지하는 데 필요하지 않은 부분만이 돌아가게 된다.
 사실 이 명제는 어느 시대에나 당시의 사회 상태를 옹호하던 사람들이 주장해 온 것이기도 하다. 우선 정부와 거기에 딸린 모든 것들의 요구가 있다. 왜냐하면 정부는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사회 기관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는 각종 사유 재산 소유자들의 요구가 있다. 왜냐하면 이들은 사회의 토대이기 때문이다 등등. 보다시피 이처럼 공허한 문구는 제멋대로 이리저리 갖다 붙일 수 있는 것이다.
 이 문단의 첫번째 부분과 두 번째 부분은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야 조금이나마 조리 있게 연결될 수 있다.
 '노동은 오직 사회적 노동으로서만', 또는 같은 말이지만 “사회 속에서, 또 사회를 통해서만 부와 문화의 원천이 된다.”
 이 명제는 두말할 것도 없이 옳다. 왜냐하면 고립된 노동(그 물질적 조건들은 전제로 하고)은 설사 사용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하더라도 부나 문화를 만들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또다른 명제도 두말할 것 없이 옳다.
 “노동이 사회적으로 발전하고 또 그리하여 부와 문화의 원천이 됨에 따라 노동자 쪽에서는 가난과 황폐함이, 노동하지 않는 사람 쪽에서는 부와 문화가 발전한다.”
 이것이 지금까지의 모든 역사의 법칙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노동'이니 '사회'니 하는 일반적인 상투어를 늘어놓는 대신에, 노동자들로 하여금 이 역사적17* 재난을 타파할 수 있게 하며 또 타파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물질적 조건과 그 밖의 조건들이 어떻게 하여 결국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만들어졌는가를 명백히 보여주어야 했다.
 하지만 문체로 보나 내용으로 보나 형편없는 이 문단 전체는 사실상 '온전한 노동 소득'이라는 라살레의 표어를 제1의 슬로건으로서 당의 깃발에 써 넣으려고만 존재할 뿐이다. '노동 소득', '동등한 권리' 등등이 약간 다른 형태로 뒤에서도 되풀이되기 때문에, 나는 그때에 가서 그것들을 다시 논하려 한다.

 2. 현대 사회에서는 노동 수단이 자본가 계급의 독점물이다. 여기서 비롯된 노동자 계급의 예속이 모든 형태의 곤궁과 노예 상태를 낳는 원인이다.

 인터내셔널 규약6)에서 따온 명제가 이 '개정'판에서는18* 잘못되어 있다.
 현대 사회에서 노동 수단은 토지 소유자(토지 소유의 독점은 자본 독점의 토대이기까지 하다.)와 자본가의 독점물이다. 인터내셔널 규약의 해당 부분은 전자에 대해서나 후자에 대해서나 독점자 계급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있다. 거기서는 단지 '모든 수단, 즉 생활 원천의 독점'이라고만 되어 있다. 뒤에 덧붙은 '생활 원천'이라는 말은 노동 수단에 토지도 포함된다는 것을 보여 주기에 충분하다.
 라살레가 지금은 널리 알려진 이유로 단지 자본가들만 공격하고 토지 소유자는 공격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틈을 타서 이런 수정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영국에서는 대체로 자본가가 심지어 자기 공장부지의 소유자조차 아닌 경우가 많다.

 3. 노동 해방을 위해서는 노동 수단을 사회의 공유 재산으로 높이는 것과, 노동 전체를 집단적으로 규제하고 노동 소득을 공정하게 분배하는 것이 필요하다.

 '노동 수단을 사회의 공유 재산으로 높이는 것'이라구! 이 말은 노동 수단을 사회의 '공유 재산으로 바꾸는 것'을 뜻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대수롭지 않은 문제다.
 '노동 소득'이란 무엇인가? 노동 생산물인가, 아니면 그 가치인가? 또 후자의 경우라면 생산물의 총가치를 말하는가, 아니면 소비된 생산 수단의 가치에 노동이 새로 더한 가치 부분만을 말하는가?
 '노동 소득'이란 라살레가 명확한 경제학적 개념 대신에 사용한 쓸모없는 관념이다.
 '공정한' 분배란 무엇인가?
 부르주아들은 오늘날의 분배가 '공정하다'고 주장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또 실제로 오늘날과 같은 생산 양식의 토대 위에서는 그것이 유일하게 '공정하지' 않은가? 경제 관계가 법적인 개념에 의해 규제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법적인 관계가 경제 관계로부터 생겨나는 것이 아닌가? 또 사회주의 내의 종파 분자들도 '공정한' 분배에 관해 각양각색의 관념들을 갖고 있지 않은가?
 이런 경우에 '공정한 분배'라는 말을 보고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하는가를 알려면, 첫번째 문단과 이 문단을 비교해 보지 않으면 안 된다. 후자는 “노동 수단이 사회의 공유 재산이며 노동 전체가 집단적으로 규제되는” 사회를 염두에 두고 있는데, 첫번째 문단에서는 “노동 소득은 온전히, 동등한 권리에 따라 사회의 모든 성원에게 속한다.”라고 되어 있다.
 '사회의 모든 성원에게'? 노동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그렇다면 '온전한 노동 소득'은 어떻게 되는가? 노동하는 사회 성원에게만 속하는가? 또 그렇다면 모든 사회 성원의 '동등한 권리'는 어떻게 되는가?
 그러나 ‘사회의 모든 성원’이니 ‘동등한 권리’니 하는 것은 분명히 빈말에 지나지 않는다. 핵심은 이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노동자들이 라살레가 말하는 ‘온전한 노동 소득’을 받아야 한다는 데에 있다.
 만일 우리가 '노동 소득'이라는 말을 우선 노동 생산물이라는 뜻으로 해석한다면, 집단적19* 노동 소득은 사회의 총생산물이 될 것이다.
 이제 그 가운데에서 다음과 같은 것들이 공제되어야 한다. 
 첫째, 소비된 생산 수단을 보충하는 데 필요한 부분.
 둘째, 생산을 늘리기 위해 더해질 부분.
 셋째, 불의의 사고나 자연 재해 등등에 대비한 예비금 또는 보험금.
 '온전한 노동 소득' 가운데서 이런 부분을 공제하는 것은 경제적으로 꼭 필요한 일이며, 그 크기는 현존하는 수단과 역량에 따라, 부분적으로는 확률 계산에 따라 결정될 것이지 결코 공정성에 따라 산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총생산물의 나머지 부분은 소비재로 쓰인다.
 그것이 각 개인에게 분배되기 전에 다음의 것들이 다시 공제된다.
 첫째, 생산과는 직접 관계없는 일반 관리비.
 이 부분은 요즘 사회와 비교하면 곧바로 아주 뚜렷하게 한정될 것이며, 새로운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더욱더 줄어들 것이다.
 둘째, 학교나 보건 시설 등등과 같은, 수요를 공동으로 채우는 데 쓰이는 부분.
 이 부분은 요즘 사회와 비교하면 곧바로 뚜렷하게 늘어날 것이며, 새로운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더욱더 늘어날 것이다.
 셋째, 노동 능력이 없는 사람 등등을 위한 기금, 요컨대 오늘날의 이른바 공공 빈민 구호에 해당하는 기금.
 우리는 이제야 비로소 (개인들을 위한一역자) '분배'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라살레의 영향 때문에 강령은 편협하게도 이 분배에만, 다시 말해서 집단 안의 생산자 개개인에게 분배되는 소비재 부분에만 신경을 쓰고 있다.
 '온전한 노동 소득'은 어느 틈엔가 벌써 '온전치 못한' 것으로 바뀌어 버렸다. 비록 사사로운 개인 자격으로서의 생산자로부터 공제되는 것이 결국 사회 성원 자격으로서의 그에게 직접 또는 간접으로 도움이 되더라도 말이다.
 '온전한 노동 소득'이라는 문구가 사라졌듯이, 이제 '노동 소득'이라는 문구 자체도 사라진다.
 생산 수단의 공동 소유에 기초를 둔 집단주의 사회에서는 생산자들이 자신의 생산물을 교환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여기서는 생산물을 생산하는 데 지출된 노동이 이 생산물의 가치로서, 즉 그 생산물에 붙어 있는 어떤 물적 속성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회와는 달리 여기서는 벌써 개인적 노동이 더 이상 간접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노동 전체의 구성 부분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에도 그 애매 모호함 때문에 비난받아 마땅한 '노동 소득'이라는 말은 (그때가 되면一역자) 아무 뜻도 없게 된다.
 우리가 여기서 문제삼는 것은 자체의 토대 위에서 발전한 공산주의 사회가 아니라, 거꾸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방금 생겨난 공산주의 사회다. 따라서 이 공산주의 사회는 모든 면에서, 즉 경제 • 도덕 • 정신적인 면에서 그 모체였던 낡은 사회의 흔적을 아직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생산자 개개인은 정확히 자신이 사회에 주는 만큼——공제할 것을 공제한 뒤에——사회로부터 돌려 받게 된다. 그가 사회에 준 것은 그의 개인적 노동량이다. 예컨대 사회적 노동일은 개인적 노동 시간의 총계이며, 각 생산자의 개인적 노동 시간은 사회적 노동일 가운데 자신이 제공한 부분, 즉 사회적 노동일 가운데 자신의 몫이다. 각 생산자는 (사회 기금을 위해서 자신의 노동을 공제한 뒤에) 자신이 사회에 이러이러한 만큼의 노동량을 제공하고 있다는 증서를 받고 이 증서에 따라 소비재의 사회적 저장분 가운데서 같은 양의 노동이 드는 만큼만 돌려 받는다. 그는 자신이 어떤 형태로 사회에 준 만큼의 노동량을 다른 형태로 돌려 받는 것이다.
 상품 교환이 등가 교환인 한, 여기서는 분명히 상품 교환을 규제하는 것과 똑같은 원칙이 지배한다. 그러나 내용과 형식이 달라졌다. 왜냐하면 이제 사정이 달라져서 어느 누구도 자신의 노동 이외에는 줄 수 없기 때문이며, 또 한편 개인적 소비재 이외에는 어느 것도 개인의 소유물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개의 생산자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소비재의 분배에 관한 한, 상품 등가물의 교환에서와 똑같은 원칙이 지배한다. 즉 어떤 형태의 일정한 양의 노동이 다른 형태의 똑같은 양의 노동과 교환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동등한 권리는——원칙상——여전히 부르주아적인 권리다. 비록 상품 교환에서의 등가물 교환은 평균적으로만 존재하고 개별적인 경우에는 들어맞지 않는 반면에, 여기서는 원칙과 실제가 더 이상 서로 충돌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위와 같은 진보에도 불구하고 동등한 권리는 여전히 부르주아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생산자들의 권리는 자신이 제공하는 노동에 비례한다. 평등은 똑같은 척도, 즉 노동으로 측정된다는 데에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육체적 또는 정신적으로 뛰어나서, 같은 시간 안에 더 많은 노동을 제공하거나 아니면 더 오랫동안 노동할 수 있다. 그런데 노동이 척도 노릇을 하려면 그 길이와 강도가 한결같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척도가 될 수 없다. 이 동등한 권리가, 불평등한 노동에 대해서는 불평등한 권리인 것이다. 이 권리는 어떠한 계급적 차이도 인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두가 다 같이 노동자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암암리에 불평등한 개인적 소질을, 따라서 노동자들의 불평등한 노동 능력을 자연적 특권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모든 권리가 다 그렇듯이 그 내용상 불평등한 권리인 것이다. 권리라는 것은 본래 똑같은 척도를 적용하는 경우에만 성립할 수 있다. 그런데 불평등한 개인들(만일 그들이 불평등하지 않다면 서로 다른 개인들이 아닐 것이다.)이 똑같은 척도로 측정될 수 있다면, 그것은 그들을 똑같은 관점에서 보는 경우, 즉 어떤 특정한 측면에서만 파악하는 경우에 한해서다. 예컨대 여기서는 그들이 단지 노동자로만 여겨지고 그 이상의 것은 무시되며, 다른 모든 측면은 모두 도외시되는 것이다. 더구나 어떤 노동자는 결혼했는데 다른 노동자는 결혼하지 않았고, 어떤 노동자에게는 아이가 많은데 다른 노동자에게는 적다든가 하는 일. 똑같은 노동을 하고 따라서 사회적인 소비기금에서 똑같은 몫을 갖고 있는데도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실제로 더 많이 받으며 다른 사람보다 더 풍족하게 된다든가 하는 일. 이 모든 폐단을 피하자면 권리가 동등하지 않고 오히려 불평등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오랜 산고(産苦) 끝에 자본주의 사회로부터 방금 생겨난 공산주의 사회의 첫 단계에서는 이러한 폐단은 피할 수 없다. 권리가 사회의 경제 제도와 그 제도가 제약하는 문화 발전보다 더 높을 수는 결코 없다.
 공산주의 사회의 더 높은 단계가 되면, 즉 개인이 노예처럼 분업에 예속하는 상태가 사라지고 이와 함께 정신 노동과 육체 노동 사이의 대립도 사라지고 나면, 노동이 생활을 위한 수단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삶의 일차적인 욕구가 되고 나면, 개인들의 전면적 발전과 더불어 생산력도 성장하여 집단적인 부의 모든 원천이 흘러 넘치고 나면, 그때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부르주아적 권리의 좁은 한계가 완전히 극복되고 사회는 자신의 깃발에다 다음과 같이 쓸 수 있게 된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를!20*
 나는 한편으로는 '온전한 노동 소득'에 대해, 다른 한편으로는 '동등한 권리'와 '공정한 분배'에 대해 좀 장황하게 논한 셈인데, 그렇게 한 이유는 두 가지다. 즉 한편으로는, 한때 어떤 의미를 갖고 있었으나 지금에 와서는 케케묵은 잡소리가 되어 버린 관념들을 또다시 교리로 삼으라고 우리 당에 강요하는 것이 얼마나 큰 범죄인가를 보여 주기 위해서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천신 만고 끝에 당내에 뿌리를 내린 현실주의적 견해를 이데올로기적인 권리설이나 민주주의자와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의 아주 상투적인 속임수로 또다시 왜곡하려는 것이 얼마나 큰 범죄인가를 보여 주기 위해서였다.
 지금까지 설명한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른바 분배를 중시하고 거기에 중점을 두는 것은 대체로 잘못이었다.
 소비재의 분배는 언제나 생산 조건 자체의 분배 결과일 뿐이다. 그런데 그 생산 조건의 분배는 바로 생산 양식 자체의 특성이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은, 생산의 물질적 조건은 자본 소유와 토지 소유의 형태로 노동하지 않는 자들의 손안에 있는 반면에 대중은 생산의 인적 조건, 즉 노동력만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초를 두고 있다. 생산 요소들이 이렇게 분배되면, 결국 오늘날과 같이 소비재가 저절로 분배된다. 그러나 만일 생산의 물질적 조건들을 노동자들 자신이 집단적으로 소유한다면, 소비재의 분배 또한 오늘날과는 달라질 것이다. 속류 사회주의(와 그들 가운데서도 일부 민주주의자들)는 부르주아 경제학을 본받아 분배를 생산 양식과는 독립한 것으로 보고 또 그렇게 다루고 있으며, 따라서 사회주의는 주로 분배 문제에 중점을 두는 것처럼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참된 관계가 이미 오래 전에 해명 되었는데 무엇 때문에 뒤로 되돌아간다는 말인가?

 4. 노동 해방은 노동자 계급의 사업이어야 한다. 노동자 계급과 맞서고 있는 다른 모든 계급들은 하나의 반동의 무리일 뿐이다.

 첫 문장은 인터내셔널 규약의 머리말에서 따온 것인데 '고쳐져' 있다. 규약에는 “노동자 계급의 해방은 노동자들 자신의 사업이어야 한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서는 반대로 '노동자 계급'이 해방해야 한다고 되어 있다. 무엇을? ‘노동’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이해해 보라.
 반면에 부족한 점을 메우려고 최고급의 라살레식 인용문이 대구를 이루고 있다. “이(노동자 계급)와 맞서는 다른 모든 계급들은 하나의 반동의 무리일 뿐이다.”
 『공산당 선언』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오늘날 부르주아지와 대립하고 있는 모든 계급 가운데 오직 프롤레타리아트만이 참으로 혁명적인 계급이다. 다른 모든 계급은 대공업이 발전하면서 몰락하여 멸망하지만, 프롤레타리아트는 대공업 자체의 산물이다.”7)
 여기서는 모든 사회적 지위, 즉 낡아 버린 생산 양식의 산물을 유지하려고 하는 봉건 영주들과 중간 계급들에 비해 부르주아지가一一대공업의 담당자로서一一혁명적인 계급으로 파악되고 있다. 따라서 봉건 영주들과 중간 계급들이 부르주아지와 함께 하나의 반동의 무리를 이루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른 한편,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지에 비해서 혁명적인 것은, 대공업의 기반 위에서 성장한 그 자신이 부르주아지가 영구화하려는 자본주의적 성격을 생산에서 박탈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산당 선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덧붙어 있다. “중간 계급들은……그들이 머지않아 프롤레타리아트로 넘어가게 될 것을 고려하는 한에서만” 혁명적이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중간 계급들이 '부르주아지와 함께', 더구나 봉건 영주들과 함께 노동자 계급과 맞서는 ‘하나의 반동의 무리를 이루고 있을 뿐’이라는 것 또한 터무니없는 이야기다.
 최근의 선거에서 사람들이 수공업자, 소기업가나 농민들에게 '당신들은 부르주아지와 봉건 영주들과 함께 우리에 맞서는 하나의 반동의 무리일 뿐'이라고 외쳤다는 말인가?
 라살레의 신봉자들이 그가 쓴 성스러운 글들을 외고 있듯이, 그는 『공산당 선언』을 외고 있었다. 따라서 라살레가 『공산당 선언』을 그토록 무지막지하게 왜곡한 것은, 그 자신이 부르주아지에 맞서 절대주의적이고 봉건적인 적들과 동맹한 사실을 미화하는 짓일 뿐이다.
 그뿐만 아니라 위의 문단에서는 그의 금언이, 인터내셔널 규약에서 따온 개악된 인용문과 아무런 연관도 없이 억지로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이것은 그야말로 뻔뻔스러운 짓이다. 더구나 이것은 비스마르크 씨에게도 결코 기분 나쁜 일이 아니며, 베를린의 마라8)가 하고 있는 그 값싸고 버릇 없는 행동 가운데 하나다. .

 5. 모든 계급은 자신의 해방을 위하여 우선 오늘날의 민족 국가의 테두리 안에서 활동하며, 모든 문명 국가 노동자들에게 공통된 그들 노력의 필연적 결과는 인민들간의 국제적인 우애가 된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다.

 『공산당 선언』이나 예전의 모든 사회주의와는 반대로, 라살레는 노동 운동을 가장 편협한 민족적 관점에서 파악했다. 이런 태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도 인터내셔널의 활동이 시작된 뒤에 말이다!
 일반적으로 노동자 계급이 투쟁할 수 있으려면 자기 나라에서 계급으로서 조직되어야 하며, 그 투쟁의 직접적인 현장이 국내라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그러한 점에서 그들의 계급 투쟁은 『공산당 선언』에 쓰여 있듯이 내용상으로가 아니라 '형식상으로' 민족적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민족 국가의 테두리', 예를 들면 독일 제국의 테두리는 그 자체가 또한 경제적으로 '세계 시장의 테두리 안에' 있으며, 정치적으로는 '국가 체제의 테두리 안에' 있다. 일류급의 최고 상인이라면 누구나 독일의 상업이 동시에 대외 무역이기도 하며, 비스마르크 씨의 위대함은 바로 일종의 국제 정책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독일 노동자당은 자신의 국제주의를 무엇으로 환원하고 있는가? 자신들 노력의 결과가 ‘인민들간의 국제적인 우애가 된다’는 의식으로 환원하고 있다. 부르주아적인 평화와 자유 연맹9)에서 따 온 이 문구가 지배 계급들과 그들의 정부에 대항하는 공동 투쟁에서 노동자 계급들의 국제적 우애를 대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독일 노동자 계급의 국제적 임무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 그리고 이것을 가지고 독일의 노동자 계급에게, 그들에 맞서 이미 다른 모든 나라의 부르주아지와 친교를 맺고 있는 자기 나라 부르주아지와 비스마르크 씨의 국제적 음모 정책에 대항하라는 것이다.
 사실 이 강령의 국제주의는 자유 무역당(Freihandelspartei)의 국제주의보다도 훨씬 더 낮은 수준에 있다. 자유 무역당도 자신들 노력의 결과가 '국제적인 우애'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상업을 국제화하려고 뭔가를 하고 있으며, 결코 의식——모든 인민이 각자 자기 나라에서 상업에 종사한다는 의식——에 만족하지는 않는다.
 각국 노동자 계급의 국제적 활동은 결코 '국제 노동자 협회'(제1인터내셔널)의 존재 여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이 협회는 다만 그 활동을 위한 중앙 기관을 창설하려는 첫 시도에 지나지 않았다. 이 시도는 그것이 가져다 준 자극 때문에 뚜렷한 성과를 남겨 놓기는 했으나, 파리 코뮌이 실패하고 나자 더 이상 그 최초의 역사적 형태대로 남아 있을 수 없었다.21*
 비스마르크의 『북부 독일』은 독일 노동자당이 자신의 새 강령에서 국제주의를 저버렸다고 보도하여 그 주인을 만족시켰는데, 이는 전적으로 옳았다.10)


II


 이러한 원리에서 출발한 독일 노동자당은 모든 합법적 수단을 동원하여 자유로운 국가——및——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고, 철(鐵)의 임금 법칙과 함께 임금 제도——및——모든 형태의 착취를 폐지하며, 모든 사회 · 정치적 불평등을 없애려고 애쓴다.

 '자유로운' 국가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자.
 이처럼 독일 노동자당은 앞으로 라살레의 '철의 임금 법칙'을 믿어야만 한다! 이 철칙을 빼놓지 않으려고 철의 '임금 법칙과 함께 임금 제도(임금 노동 제도라고 해야겠지만) 폐지'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다. 만일 내가 임금 노동을 폐지한다면 나는 당연히 그 법칙도, 그것이 '철의' 법칙이건 해파리 같은 법칙이건간에 폐지하게 된다. 그러나 임금 노동을 반대하는 라살레의 투쟁은 거의 전적으로 이 법칙이라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따라서 라살레 파가 승리했음을 입증하려면, '임금 제도가 철의 임금 법칙과 함께' 폐지되어야 하며 임금 법칙 없이 임금 제도만 폐지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철의 임금 법칙'에서 라살레에게 속하는 것은 괴테 (Goethe)의 '영원한 철의 대법칙'(ewige, eherne, große Gesetze)에서 따 온 '철의'라는 말뿐이다. 철의라는 말은 정통파 신자들이 서로를 알아보기 위한 기호인 셈이다. 그러나 만일 내가 이 법칙을 라살레의 도장이 찍힌 대로, 따라서 라살레적인 의미대로 받아들인다면, 나는 그의 논거도 함께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러면 그 논거는 무엇인가? 라살레가 죽은 얼마 뒤에 이미 랑게22*가 지적했듯이 그것은 (랑게 자신도 설교한 바 있는) 맬더스의 인구론이다.11) 그러나 이것이 옳다면, 설사 내가 임금 노동을 수백 번 폐지한다 하더라도 나는 그 법칙을 도저히 폐지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법칙이 옳은 경우에 그것은 임금 노동 제도뿐만 아니라 모든 사회 제도를 지배할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이론에 근거를 두고 경제학자들은 지난 50여 년 동안이나 사회주의가 자연 자체에서 비롯된 빈곤을 폐지할 수는 없고, 다만 그것을 보편화하여 사회의 모든 표면에 똑같이 분배할 수 있을 뿐이라는 점을 증명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이 법칙을 라살레가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은 제쳐놓고라도, 진짜 괘씸한 퇴보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라살레가 죽은 뒤 우리 당내에서는 임금이란 겉으로 그렇게 보이는 노동의 가치 또는 가격이 아니라 노동력의 가치 또는 가격을 나타내는 가장된 형태일 뿐이라는 과학적 통찰이 자리잡게 되었다. 이와 함께 임금에 대한 지금까지의 부르주아적 견해와 이 견해에 대한 지금까지의 모든 비판이 결정적으로 허물어지고 다음과 같은 사실이 분명해졌다. 즉 임금 노동자는 일정 시간 동안 자본가를 위해(따라서 자본가와 함께 잉여 가치를 나누어 먹는 다른 자들을 위해서도) 노동하는 한에서만 자기 자신의 삶을 위해서 노동하는 것, 다시 말해서 사는 것을 허락받는다는 사실, 자본주의적 생산 체계 전체는 노동일의 연장이나 노동 생산성의 발전, 노동력의 더욱 큰 긴장 등등에 의해 이 무상 노동을 더욱더 늘리는 일에 중점을 둔다는 사실, 따라서 임금 노동 제도는 하나의 노예 제도이며, 좀더 정확히 말하면 노동자가 받는 임금이 많건 적건간에 노동의 사회적 생산력이 발전할수록 더욱더 가혹해지는 노예 제도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통찰이 우리 당내에서 점점 더 자리를 잡은 뒤로, 라살레가 임금이 뭔지도 모르는 채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을 졸졸 따라가면서 사물의 겉모습을 본질이라고 보았다는 것을 이제는 다 알았을 터인데도 다시 라살레의 교리로 되돌아가고 있다.
 이것은 마치 노예 제도의 비밀을 드디어 알아내고 반란을 일으킨 노예들 가운데서 케케묵은 관념에 사로잡힌 한 노예가 반란의 강령에 다음과 같이 써 넣은 꼴이나 마찬가지다. 노예 제도 밑에서는 노예를 먹여 살리는 비용이 정해진 최저 수준을 넘을 수 없기 때문에 노예 제도를 폐지해야만 한다!
 우리 당의 대표자들이 당원 대중들 속에 보급되어 있는 통찰에 대해 그처럼 끔찍한 암살 행위를 저지를 수 있었다는 단순한 사실 그것만으로도 그들이 얼마나 〈오만 불손하고〉 경솔한 태도로, 〈또 비양심적으로〉 타협 강령 작성에 착수했는가를 알 수 있지 않은가!
 이 문단의 애매 모호한 결론 문구인 '모든 사회 • 정치적 불평등을 없애'는 대신에, 계급 차별의 폐지와 더불어 거기서 비롯되는 온갖 사회 • 정치적 불평등이 저절로 사라진다고 해야만 했다.


III


 독일 노동자당은 사회 문제를 해결할 길을 모색하려고 근로 인민의 민주주의적인 통제 밑에 국가의 협조를 받는 생산협동체(Produktivgenossen-schäft)를 건설할 것을 요구한다. 생산 협동체들이 공업과 농업에서 대규모로 가동되어, 그것들 가운데서 노동 전체의 사회주의적인 조직이 생겨나도록 해야 한다.

 라살레의 '철의 임금 법칙'에 뒤이어 그 예언자의 구원책이 제시되고 있다. 그 길이 훌륭하게 '모색되고' 있는 것이다. 현존하는 계급 투쟁 대신에 신문 기자투의 문구——'해결'의 길이 '모색되고' 있는 '사회문제'——가 나타난다. '노동 전체의 사회주의적 조직'은 혁명적인 사회 변혁 과정에서가 아니라 생산 협동체들에게 베풀어지는 '국가의 협조'에서 '생겨나며', 이 생산 협동체들을 '가동하는' 것은 노동자가 아니라 국가다. 이것은 그야말로 라살레다운 상상으로, 새 철도처럼 새 사회도 국채를 가지고 건설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래도 얼마쯤은〉 부끄러웠던지 '국가의 협조'를——'근로 인민의 민주주의적인 통제 밑에' 두고 있다.
 첫째, 독일에서는 '근로 인민'의 대다수가 농민이지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니다.
 둘째, '민주주의적'이란 말은 독일어로 번역하면 '인민이 지배하는'(volksherrschaftlich)이라는 뜻이다. 그러면 '근로 인민의 인민이 지배하는 통제'란 도대체 무슨 말인가? 더구나 국가에게 이러한 요구를 제기함으로써, 자신들이 지배 권력을 틀어쥐고 있지도 않고 또 그럴 만큼 성숙하지도 못했다는 것을 충분히 자각하고 있다고 실토하는 근로 인민(독일 인민을 비꼬는 말一역자)의 경우에!
 루이 필립23* 시대에 부셰24*가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에 맞서 작성한 처방, 또 『공장』12)파의 반동적 노동자들이 채택한 그 처방을 놓고 여기서 상세하게 논할 필요는 없다. 우리를 자극하는 주 요인은 그들이 이 특제 묘약을 강령에 써넣었다는 점이 아니라, 그들이 대체로 계급 운동의 입장에서 종파 운동의 입장으로 되돌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노동자들이 사회적인 규모로, 또 우선 자기 나라에서, 따라서 민족적인 규모로 집단적으로 생산하기 위한 조건을 조성하려는 것은 그들이 현재의 생산 조건을 변혁하려고 투쟁한다는 뜻일 뿐이며, 국가의 협조에 의한 협동 조합 건설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 그리고 요즘의 협동 조합에 관해서 말하자면, 그것은 노동자들 자신의 독자적인 창조물로서 정부나 부르주아들로부터 어떠한 보호도 받지 않을 때에만 가치가 있다.


IV


 이제 민주주의에 관한 절로 넘어가 보자.

 A. 국가의 자유로운 토대

 우선 제II절에서 본 바를 따르면 독일 노동자당은 '자유로운 국가'를 건설하려고 노력한다.
 자유로운 국가라니, 이게 뭔가?
 국가를 '자유롭게' 만든다는 것은 편협한 노예 근성에서 벗어난 노동자들의 목적이 결코 아니다. 독일 제국에서 '국가'는 러시아에서와 거의 마찬가지로 '자유롭다'. 자유는 국가를 사회 위에 군림하는 기관에서 사회에 완전히 종속하는 기관으로 바꿔 놓는 데에 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국가 형태가 자유로운가 자유롭지 못한가는 그것이 '국가의 자유'를 제한하는 정도에 달려 있다.
 독일 노동자당은——적어도 이 강령을 당의 강령으로 채택한다면——자신이 사회주의 이념의 맛도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왜냐하면 독일 노동자당은 현존 사회(미래의 모든 사회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지만)를 현존 국가의 토대로 보지 않고(또는 미래 사회를 미래 국가의 토대로 보지 않고) 오히려 국가를 그 자체가 '정신적이고 윤리적이며 자유로운 토대'를 갖는 하나의 자립적인 존재로 보기 때문이다.
 더구나 강령에서는 오늘날의 국가니 오늘날의 사회'니 하는 말들이 마구 쓰이고 있으며, 강령의 요구 상대인 국가에 대해서는 더욱더 무지 막지한 오해가 생겨나고 있다.
 '오늘날의 사회'란 자본주의 사회다. 이 사회는 모든 문명 국가들에 존재하고 있으며 중세적인 혼합물로부터 많건 적건 해방되어 있고, 또 각 나라의 특수한 역사적 발전을 통해 조금씩 차이를 보이면서 발전하고 있다. 반면에 '오늘날의 국가'는 국경과 함께 변화한다. 그것은 프러시아-독일 제국에서는 스위스에서와 다르며, 영국에서는 미국에서와 다르다. 따라서 '오늘날의 국가'25*란 하나의 허구다.
 그러나 서로 다른 문명 국가들의 서로 다른 국가들은 그 잡다한 형태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많건 적건 오직 자본주의적으로만 발전한 현대 부르주아 사회의 기반 위에 서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국가들은 공통된 본질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오늘날의 국가 제도'를 그 뿌리인 부르주아 사회가 소멸한 뒤인 미래와 대비하여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면 다음과 같은 물음이 제기된다.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국가 제도가 어떤 변화를 겪을 것인가? 다시 말하면 거기서는 오늘날의 국가 기능과 비슷한 사회 기능 가운데서 어떤 것이 남게 될까? 이 물음에는 과학적으로만 대답할 수 있으며, 인민이라는 말과 국가라는 말을 수천 번 결합해 봐야 문제 해결에는 털끝만큼도 도움을 주지 못한다.
 자본주의 사회와 공산주의 사회 사이에는 전자에서 후자로 가는 혁명적 변혁의 시기가 놓여 있다. 이에 상응하여 또한 정치적 과도기가 있는데, 그때의 국가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독재 이외의 다른 것일 수가 없다.
 그런데 이 강령은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독재와도, 공산주의 사회의 장래의 국가 제도와도 아무 상관이 없다.
 강령의 정치적 요구에는 보통 선거, 직접적인 입법, 민권, 인민 무장 등 온 세상이 다 아는 진부한 이야기 외에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다. 이러한 것들은 부르주아적인 인민당이나 평화와 자유 연맹의 메아리일 뿐이다. 환상적인 관념 속에서 과장되지 않는 한, 이 요구들은 이미 실현된 것들이다. 다만 이를 포용하는 국가가 독일 제국의 경계 안에 있지 않고 스위스나 미국 등등에 있을 뿐이다. 이런 종류의 '미래 국가'는 비록 독일 제국의 '테두리' 밖에 있다고 하더라도 오늘날의 국가인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한 가지 사실을 잊고 있다. 독일 노동자당은 '오늘날의 민족 국가‘, 따라서 자신들의 국가인 프러시아-독일 제국 안에서 활동한다고 분명히 선언하고 있으므로——그렇지 않다면 그들의 요구는 정말이지 대부분 무의미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아직 갖고 있지 못한 것만을 요구하는 법이기 때문에——당은 요점을 잊지 말아야 했다. 즉 이 모든 훌륭한 치장들은 이른바 인민 주권에 기초를 둔다는 사실, 따라서 그것들은 민주주의 공화국에서만 제 자리를 찾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루이 필립 시대와 루이 나폴레옹26* 시대에 프랑스 노동자들의 강령이 그랬듯이 민주주의 공화국을 요구할 용기가 없는 이상13)——상황 때문에 신중해야 하므로 그것이 현명하기는 하지만——〈’정직하지도' 않고 마땅하지도 않은〉 술을 써서 도피하지는 말아야 했다. 그런데 그 술책이란 의회라는 형식으로 겉치장을 하고 봉건적인 잔재가 뒤섞여 있는 국가, 또 이미 부르주아지의 영향 밑에서 관료 조직을 갖추고 경찰력으로 보호받는 군사 독재에 지나지 않는 국가에게 민주주의 공화국에서만 의미 있는 일들을 요구하는 것이다. 〈더욱이 이러한 국가에서 그 요구들을 '합법적인 수단으로' 강요할 수 있다고 착각하고서 그것을 국가 앞에서 맹세하다니!〉
 속류 민주주의는 민주주의 공화국을 천년 왕국의 실현으로 보고 있고, 또 그 민주주의는 바로 부르주아 사회의 이 마지막 국가 형태에 서 계급 투쟁이 궁극적인 결말을 보아야 한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지만, 그 속류 민주주의조차도 경찰에 의해서는 허용되고 논리적으로는 허용되지 않는 그러한 범위 안에 머물러 있는 그 따위 민주주의보다는 훨씬 더 수준 높은 것이다.
 사람들이 '국가'를 사실 정부 기관으로 이해하거나 분업에 의해 사회에서 분리된 하나의 독자적인 유기체라고만 이해한다는 것은 이미 다음과 같은 말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독일 노동자당은 국가의 경제적 토대로서 단일한 누진 소득세를 요구한다 등등.” 세금은 정부 기관의 경제적 토대일 뿐 그 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스위스에 현존하는 미래 국가에서는 이 요구가 거의 실현되었다. 소득세는 다양한 사회 계급들의 다양한 소득원을 전제로 하며,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를 전제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리버풀(Liverpool)의 금융 개혁론자들——글래드스턴의 동생27*을 우두머리로 하는 부르주아들——이 이 강령과 똑같은 요구를 내걸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놀라운 것이 아니다.

 B. 독일 노동자당은 국가의 정신 • 윤리적 토대로서 다음과 같은 것을 요구한다.
 1. 국가에 의한 전반적이고 평등한 인민 교육. 전반적 의무 교육. 무료 교육

 평등한 인민 교육? 이 말을 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오늘날의 사회 (그리고 문제가 되는 것은 오늘날의 사회뿐이다.)에서 교육이 모든 계급에게 평등할 수 있다고 믿는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으면 최저 수준의 교육——인민 학교——만이 임금 노동자뿐만 아니라 농민의 경제적 형편에도 알맞으니 상류 계급도 강제로 그 수준까지 끌어내리자고 요구하는 것인가?
 '전반적 의무 교육. 무료 교육.’ 전자는 독일에도 있으며, 후자는 인민 학교의 경우에 스위스와 미국에 존재한다. 미국의 몇몇 주에서는 '더 높은' 상급 학교도 '무료'이지만, 이것은 사실 상류 계급의 교육비를 일반 세금 수입에서 꺼내 쓰고 있다는 뜻일 뿐이다. 말이 나온 김에 말하겠는데 A의 제5항에서 요구하고 있는 '무료 소송'에 대해서도 똑같은 것이 적용된다. 형사 재판은 어디서나 무료다. 또 민사 재판은 거의 모두 재산상의 분쟁에 관한 것이므로 거의 모두 유산 계급에게만 관계된다. 인민의 주머니를 털어서 그들의 소송을 진행해야 한다는 말인가?
 학교에 관한 문단은 적어도 기술 학교(이론과 실기를 가르치는)를 인민 학교와 결부해 요구해야 했다.
 '국가에 의한 인민 교육'은 철저히 배척되어야 한다. 일반 법률로 인민 학교의 자산, 교원의 자격, 교수 과목 등등을 규정한다든가, 미국에서 하고 있는 것처럼 국가의 장학관들을 통해 이 법규를 지키는지를 감독하는 것은 국가를 인민의 교육자로 임명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일이다. 오히려 정부와 교회가 똑같이 학교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하게 되어야 한다. 게다가 프러시아-독일 제국에서는 (그런데 여기서 '미래 국가'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고 허튼 핑계를 대 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그 사정이 어떠한가는 이미 살펴보았기 때문이다.) 거꾸로 국가가 인민에 의해서 아주 엄격한 교육을 받을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귀가 따갑게 민주주의적인 온갖 잡소리를 계속 늘어놓았는데도 강령 전체가 국가에 대한 라살레 파의 노예적인 신앙에, 또는 이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는 민주주의적인 기적에 대한 신앙에 철저히 물들어 있다. 아니 그것은 오히려 사회주의와는 똑같이 거리가 먼, 기적에 대한 이 두 가지 신앙 사이의 타협이다.
 '학문의 자유'는 프러시아 헌법의 한 조항에 쓰여 있다. 그런데 왜 그것이 여기서 튀어 나오는가?
 '양심의 자유'라구? '문화 투쟁‘14) 시기인 지금 자유주의자들에게 그들의 낡은 구호를 상기시키려 했다면, 그것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각 사람은 경찰이 간섭 없이 자신의 종교 • 육체적 요구를 충족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노동자당은 이 기회에 부르주아적인 '양심의 자유'란 온갖 종류의 종교적 양심의 자유를 허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지만 노동자당은 오히려 양심을 종교적인 도깨비로부터 해방하려고 노력한다는 자각을 당연히 표명해야만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부르주아적인' 수준을 넘어서려고 하지 않는다.
 이제 끝낼 때가 되었다. 왜냐하면 그 뒤에 나오는 강령의 추가 항목은 강령의 본질적인 특징을 보여 주는 부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아주 짤막하게 언급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2. 표준 노동일

 다른 어느 나라의 노동자당도 이처럼 막연한 요구에 그치는 경우는 없으며, 늘 주어진 상황에서 표준이라고 생각되는 노동일의 길이를 확정하고 있다.

 3. 여성 노동에 대한 제한과 아동 노동 금지

 노동일의 표준화가 노동일의 길이, 휴식 시간 등등에 관한 것인 한, 그 속에는 이미 여성 노동에 대한 제한도 들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여성의 육체에 특히 해롭거나 또는 특히 여성에게 반(反)윤리적인 노동을 금한다는 것을 뜻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 점을 생각했다면 그렇게 말해야 했을 것이다.
 '아동 노동 금지'라구! 여기서는 연령 한계를 지적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전면적인 아동 노동 금지는 대공업의 존재와 양립할 수 없기 때문에 공허하고 헛된 소망이다.
 이를 실행하는 것은——설사 그것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할지라도——반동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다양한 연령층에 따라 노동 시간이 엄격히 규제되고 아동 보호를 위한 그 밖의 예방책들이 실시된다면, 생산 노동과 교육을 어린 시절부터 결합하는 것은 오늘날의 사회를 변혁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4. 공장제 공업, 수공업과 가내 공업에 대한 국가의 감독

 프러시아-독일 국가를 염두에 두었다면 근로 감독관은 재판에 의해서만 해임될 수 있다는 것, 모든 노동자가 감독관의 직무 태만을 고발할 수 있다는 것, 감독관은 의사 자격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요구해야 했다.

 5. 감옥 노동에 대한 규제

 일반적인 노동자 강령의 요구로서는 사소한 것이다. 어쨌든 노동자들이 경쟁심 때문에 일반 범죄자들이 개 돼지 취급받기를 바라지는 않으며, 특히 유일한 교화 수단인 생산 노동을 그들에게서 빼앗으려고 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밝혀야 했다. 그리고 이것은 사회주의자들에게 기대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이었다.

 6. 효율적인 책임법

 '효율적인‘ 책임법 이 무슨 뜻인가를 말해야 했다.
 말이 나온 김에 말하지만 표준 노동일에 관한 부분에서는 공장법 가운데 위생 대책이나 사고 방지 대책 등에 관한 것을 소홀히하고 있다. 이 규정들이 지켜지지 않을 때에야 비로소 책임법은 효력을 발생한다.
 〈요컨대 이 추가 항목도 너절하게 편집되어 있는 것이 특색이다.〉
 나는 말했다, 그리하여 나의 영혼을 구했도다. (Dixi et salvavi animammeam)


주 -----------------------------------------------------


 1) 바쿠닌의 저서 『정치와 무정부」(Gossudarstwennost i anarchija)를 가리킨다. 이 책은 1873년 스위스에서 러시아어로 출판되었는데, 출판지도 저자 이름도 밝혀져 있지 않았다. 마르크스는 바쿠닌이 터무니없이 자신을 모함하고 있다는 것을 그의 책에 대한 객관적 논평에서 입증하고 있다.(『전집』 제18권, 599〜642쪽)
 2) 인민당 1865년에 창당된 독일 인민당.(Deutsche Volkspartei) 이 당은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로 이루어졌으며, 부분적으로는 부르주아지의 대표자들——특히 남부 독일 지역의——도 가담했다. 국민 자유당원들과 달리 독일 인민당은 프러시아의 독일 지배를 반대하고 프러시아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까지 포함하는 대독일 연방을 주장했다. 반(反)프러시아적인 정책을 시행하고 일반적인 민주주의 구호를 옹호하던 이 당은 연방 분립주의적인 몇몇 독일 주들의 노력을 대변하기도 했다. 이 당은 독일 연방국의 이념을 선전하는 동시에, 하나의 중앙 집권화한 통일 민주 공화국 형태로 독일을 통일하는 것을 반대했다.
 1866년 노동자들을 핵으로 삼아 이루어진 작센(Sachsen) 주의 인민당이 독일 인민당에 가입했다. 인민당의 이 좌파는 반프러시아적인 입장을 제외하면 그 본질에서 인민당과 공통된 점을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 인민당 좌파는 여러 세력을 한데 묶어 민주적인 방법으로 나라의 국민적 통일을 이룩하려고 애썼다. 이 당의 주력은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과 결별한 뒤 1869년 8월에 사회 민주 노동당(아이제나흐 파)에 가입했다.
 3) 1869년의 아이제나흐 강령(사회 민주 노동당의 강령과 규약) 1869년 8월 7〜9일에 아이제나흐에서 열린 전독일 사회 민주주의 노동자 대회에서 채택되었다. 이 대회에는 오스트리아와 스위스에 있는 여러 독일인 노동 조합의 대표들도 참석했으며, 여기서 사회 민주주의 노동당이 창당되었다. 이로써 독일의 노동자 계급은 과학적 사회주의 원리에 기초를 둔 독자적인 혁명적 당을 갖게 되었다. 이 당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결정적인 지도를 받아 라살레의 기회주의와 대결하는 가운데 생겨났다. 그 강령은 국제 노동자 협회의 정신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그 뒤 이 당의 당원들은 아이제나흐 파라고 불리게 되었다.
 4) 편저자(마르크스)의 승인을 받은 『자본론』 제1권의 프랑스 어판이 1872~1875년에 파리에서 분책으로 간행되었다.
 5) 마르크스가 쓴 「쾰른 공산주의자 재판의 진상」(『전집』 제8권, 405〜470쪽)을 가리킨다. 이 글은 독일에서는 1874년 『인민 국가』(라이프치히에서 발행되던 사회 민주 노동당의 기관지)에 처음으로 실렸으며, 거기에 발표된 내용이 1875년 책으로 출판되었다.
 6) 인터내셔널 규약(Internationales Statut) '국제 노동자 협회의 일반 규약과 운영 세칙'을 가리킨다. 이 규약은 1866년 인터내셔널 제네바 대회에서 채택되었다. 1871년 9월 말에서 10월 사이에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새로운 규약을 준비했다. 새 규약에서는 이미 타당성을 잃은 모든 규정이 삭제되었으며, 바뀌거나 보충된 부분에 대해서는 부록에서 그 이유를 모두 설명했다. 독일어로 된 정본(正本)은 1871년 라이프치히에서 출판되었다.(『전집』 제17권, 440〜455쪽을 보라)
 7) 『전집』 제4권, 472쪽을 보라.(이 책 63쪽 참조一역자)
 8) 베를린의 마라 이것은 분명히 하셀만을 풍자한 말이다. 하셀만은 당시 베를린에서 라살레 파인 전독일 노동자 연맹의 중앙 기관지『신(新)사회 민주주의자』 (Neuer Social-Demokrat)의 주필이었으며, 리프크네히트 곁에서 강령 초안을 공동 작성했다.
 『신(新)사회 민주주의자』 라살레 파인 전독일 노동자 연맹의 중앙 기관지. 1871년부터 1876년까지 1주일에 세 번씩 베를린에서 발행되었다. 이 신문은 비스마르크 체제에 순응하고 독일의 지배 계급에게 아첨하는 라살레 파의 정책과 라살레 파 지도자들의 기회주의와 민족주의를 반영하고 있었다.
 9) 평화와 자유 연맹 (Friedens-und Freiheitsliga) 부르주아적인 평화 운동 단체. 빅토르 위고(Victor Hugo), 가리발디(Guiseppe Garibaldi) 등을 비롯한 자유주의자들과 소부르주아 및 부르주아 공화주의자들이 1867년 스위스에서 창설했다. 1867~1868년에 바쿠닌도 이 연맹의 사업에 관여했다. 연맹은 처음에 바쿠닌의 영향을 받아 인터내셔널과 노동 운동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용하려고 했다. ‘유럽 통일 국가’를 만들어 전쟁을 끝장낼 수 있다는 연맹의 선언은 대중들에게 환상을 불러일으켰고, 프롤레타리아트로 하여금 계급 투쟁을 포기하게 했다.
 10) 비스마르크의 『북부 독일』은 『북부 독일 종합 신문』(Norddeutsche Allgemeine Zeitung)을 가리킨다. 1861년부터 1918년까지 베를린에서 간행되던 일간지. 1860〜 1880년대에 비스마르크 정부의 공식 기관지였다.
 마르크스가 말하고 있는 것은 이 신문의 1875년 3월 20일자 제67호에 실린 사설인데, 이 사설은 사회 민주당의 강령 초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사회 민주당의 선동은 많은 점에서 신중해졌으며 인터내셔널을 부인하고 있다.…‥”
 11) 랑게, 『노동자 문제, 현재와 미래에 그것이 갖는 의미』(Die Arbeiterfrage in ihrer Bedeutung für Gegenwart und Zukunft), 두이스부르크, 1865.
 12) 『공장』(L’Atelier) 1840〜1850년에 파리에서 발행되던 프랑스의 월간지. 사상적으로 기독교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던 수공업자와 노동자들의 기관지였다. 이 잡지는 노동자 대표들에 의해 편집되었으며, 3개월마다 편집진이 새로 선출되었다.
 13) 엥겔스가 출판한 1891년판에는 '요구할 수 없었다면'으로 고쳐져 있다.
 14) 문화 투쟁(Kulturkampf) "……1870년대에 비스마르크가 독일 카톨릭당과 '중앙파'당(Zentrumspartei)에 맞서 경찰력으로 탄압을 가한 투쟁. 이 투쟁을 통해 비스마르크는 호전적인 카톨릭 교권주의를 단지 강화했을 뿐이며, 현실의 문화 상황에 오히려 해를 끼쳤을 뿐이다. 왜냐하면 그는 정치적인 칸막이 대신에 종교적인 칸막이를 앞에 내세워, 노동자 계급과 민주당의 일부로 하여금 혁명과 계급 투쟁이라는 급박한 과제에서 아주 피상적이고 부르주아적이며 기만적인 반(反)교권주의로 눈을 돌리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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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엥겔스의 이 서문은 1891년, 마르크스의 「고타 강령 비판」을 처음 출판했을 때 쓴 것이다. 엥겔스가 이 중요한 정치적 문건을 애써 출판한 목적은, 당시 독일 사회 민주당에서 준동하기 시작한 기회주의적 요소들을 강타하기 위해서였다. 이 출판이 특히 중요한 의의를 지닌 이유는 바로 그 무렵 열린 에르푸르트 대회에서 당은 고타 강령을 대신할 새로운 강령을 검토하고 채택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 「고타 강령 비판」을 출판할 준비를 하면서 엥겔스는 디츠(『새 시대』의 출판업자), 칼 카우츠키 (『새 시대』 편집자) 등 여러 독일 사회 민주주의 지도자의 반대에 부딪혀야 했으며 카우츠키는 이 글의 일부를 고치고 삭제할 것을 주장했다. 엥겔스는 이에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독일 사회 민주당의 하급 간부와 일반 당원들, 그리고 다른 나라에서 온 사회 민주주의자들은 이 「고타 강령 비판」을 열렬한 찬사와 함께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국제 사회주의 운동에서 매우 중요한 정책적 문건으로 채택했다. 이 「고타 강령 비판」과 함께 엥겔스는, 마르크스가 이에 덧붙여 1875년 5월 5일 브라케에게 부친 편지도 출판했다. 엥겔스의 서문을 덧붙인 이 「고타 강령 비판」은 그의 생전에는 단 1판밖에 간행되지 않았다. 「고타 강령 비판」의 원문 전체가 처음 출간된 것은 1932년 소비에트 연방에서다.
 2* Wilhelm Bracke(1842〜1880년) 아이제나흐 파(독일 사회 민주 노동당)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 브라운슈바이크(Braunschweig)에서 사회주의 문헌을 편집하여 출판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와 가까운 사이였고, 철저하지는 못했으나 사회 민주 노동당 안의 기회주의적인 요소와 맞서 투쟁했다.
 3* 고타 통합 대회 1875년 5월 22〜27일에 고타 대회가 열렸을 때 독일의 노동자 계급 운동 안에는 두 흐름이 있었다. 즉 아우구스트 베벨과 빌헬름 리프크네히트가 이끄는 사회 민주주의 노동당(아이제나흐 파)과, 라살레 파인 전독일 노동자 연맹(Der Allgemeine Deutsche Arbeiterverein)인데, 이 대회에서 이 둘은 통합하여 독일 사회주의 노동당을 결성했고 이로써 독일 노동자 계급 내의 분열은 마무리 지어졌다. 이 통합 당의 강령 초안——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그토록 비판하여 마지 않은——은 약간의 사소한 수정을 거친 뒤 그 대회에서 채택되었다.
 4* August Geib(1842〜1879년) 사회 민주 노동당을 창당한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 당의 재정을 담당했으며 (1872〜1878년), 제국 의회 의원(1874〜1876년)을 역임했다.
 5* Ignaz Auer(1846〜1907년) 피혁 세공업자. 사회 민주 노동당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 수정주의자. 오랫동안 제국 의회 의원이었다.
 6* August Bebel(1840〜1913년) 마르크스주의자. 독일 사회 민주당을 창당했으며, 당의 가장 중요한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친구이자 제자. 프러시아의 군국주의를 반대하여 혁명적인 방법으로 독일을 통일하고자 애썼다. 1878〜1890년에 사회 민주당을 이끌고 사회주의자 탄압법에 대항하는 비합법 투쟁을 전개.
 7* Wilhelm Liebknecht(1826〜1900년) 독일 사회 민주당의 가장 중요한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 공산주의자 동맹의 일원으로 1848〜1849년 혁명에 참가. 영국으로 옮아 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친구 겸 전우가 된 뒤, 1862년 독일로 돌아왔다. 국제 노동자 협회(제1인터내셔널)에 가담하여 마르크스주의를 선전하고 선동했다. 1869년 독일 사회 민주 노동당을 창당하는 데 관여했고, 그 기관지인 『전진』(Vorwärts)의 책임 편집자직을 맡았다. 제국 의회 의원.(1874〜1900년) 보불 전쟁 당시 프러시아의 합병 정책을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파리 코뮌을 지지. 프러시아의 군국주의를 단호히 반대했으며, 혁명적인 방법으로 독일을 통일하고자 노력.
 8* 할레 당 대회 할레에서 열린 독일 사회 민주당 대회는 1890년 10월 12〜18일에 열렸다. 사회주의자 탄압법이 폐지된 뒤 처음 열린 이 대회는 새로운 강령을 작성하기로 결의하고 그것을 다음 번의 에르푸르트 당 대회 석 달 전에 출판하도록 하여, 역사에서 처음으로 지방 당 조직에서 출판 전에 검토할 수 있도록 결정 했다.
 9* Ferdinand Lassalle(1825〜1864년) 독일의 사회주의자. 독일의 노동자 계급을 자유주의적인 부르주아지의 영향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애썼으며, 1863년 전독일 노동자 연맹을 창설.(바로 이 점에 그의 역사적인 공로가 있다.) 그러나 그는 노동자 계급에게 혁명적인 방향과 목표를 제시하지 못하고, 비스마르크와 프러시아의 융커 계급과 타협하여 그들의 통일 정책(독일을 '위로부터' 통일하려는 정책)을 지지했다. 또 그는 평화적으로 사회주의가 달성될 수 있다는 환상, 즉 '프러시아 왕국의 국가 사회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퍼뜨려, 그 결과로 라살레주의에 기초를 둔 기회주의가 생겨나게 되었다.
10* 헤이그 대회 국제 노동자 협회(제1인터내셔널) 헤이그 대회는 1872년 9월 2〜7일에 열렸다. 이 대회에는 대회 전체 작업을 지휘한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비롯하여 15개 나라의 조직에서 온 65명의 대표 위원이 참석했다. 노동자 계급 운동 안의 온갖 소부르주아 종파주의에 대해 여러 해 동안 마르크스와 엥겔스, 그리고 그 동료들이 벌여 온 투쟁은 이 대회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무정부주의자들의 종파주의적 행동이 비난받았으며 그 지도자들은 인터내셔널에서 추방되었다. 이 헤이그 대회의 결정은 여러 나라의 노동자 계급이 각각 독자적으로 정당을 결성할 수 있는 길을 터 주었다.
 11* Michail Alexandrowitsch Bakunin(1814〜1876년) 러시아의 무정부주의자, 언론인. 독일의 1848〜1849년 혁명에 참가. 대중 운동에 이데올로기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국제 노동자 협회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적이었으며, 1872년의 헤이그 대회 때 분열을 책동하다가 협회에서 내쫓겼다.
 12* 공개적이고 명시적으로 승인하는 것이 아니라 암묵적이고 간접적으로 승인한다는 뜻이다.
 13* 라살레가 창설한 전독일 노동자 연맹의 지도자들. 하젠클레버(Wilhelm Hasen-clever, 1837〜1889년)는 연맹의 의장이었으며, 하셀만(Wilhelm Hasselmann, 1844〜?)은 『신(新)사회 민주주의자』의 편집자였다. 후자는 1880년, 무정부주의자로 낙인 찍혀 사회 민주당에서 내쫓겼다.
 14* 원문은 '잔치가 끝난 뒤에'(post festum)로 되어 있다.
 15* Bernhard Becker(1826〜1882년) 언론인, 라살레주의자. 전독일 노동자 연맹의 의장.(1864〜1865년) 1872년에 국제 노동자 협회의 헤이그 대회에 대표로 파견되었다.
 16・『인민 국가』 출판사 사회 민주 노동당의 출판사. 당의 중앙 기관지인 『인민 국가』의 편집부 직속으로 라이프치히에 있었다.
 17* 1891년판에는 '사회적'으로 고쳐져 있다.
 18* '개정'(verbesserte)은 본래 더 좋게 만든다는 뜻이다. 마르크스는 여기서 강령의 내용이 인터내셔널 규약을 바꿔 놓은 것을 비꼬고 있다.
 19* 이 말은 원래 '협동적', '동지적' 또는 '공동체적'이라는 뜻이다. 여기서는 모두 집단적, 집단주의적, 또는 집단 등으로 번역했다.
 20* 독일어 원문은 “jeder nach seinen Fähigkeiten, jedem nach seinen Bedürfnissen!”이며, 직역하면 “각자는 능력에 따라, 각자에게는 필요에 따라!”라는 뜻이다.
 21* 인터내셔널은 1872년의 헤이그 대회를 치른 뒤 본부를 런던에서 뉴욕으로 옮겼다가 1876년 정식으로 해산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바쿠닌주의자들과의 내분과 파리 코뮌 뒤 강화된 각국 정부의 반동적 탄압 때문이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조직과 방법에 따라 각국에서 독자적인 당과 조합들을 효과적으로 결성하기 위해서였다.
 22* Friedrich Albert Lange(1828〜1875년) 독일의 부르주아 철학자. 신칸트주의자. 유물론과 사회주의를 반대했다.
 23* Louis Philippe(1773〜1850년) 오를레앙 공. 1830년 7월 혁명으로 부르봉 왕조가 무너지고 나서 대부르주아지의 지지를 받아 왕이 되었다. 1848년 2월 혁명으로 물러났다.
 24* Philippe Joseph Benjamin Buchez(1796〜1865년) 프랑스의 정치가, 역사가, 부르주아 공화주의자. 기독교 사회주의 이데올로그.
 25* 독일어 원문은 'Der heutige Staat'인데, 정관사 Der가 이탤릭체로 강조되어 있다. 따라서 정확한 뜻은 ‘오늘날의 국가’라는 특정한 형태, 즉 하나의 통일된 개념으로서의 국가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26* Louis Napoleon(1808〜1873년) 루이 보나파르트.(Louis Bonaparte) 나폴레옹 1세의 조카. 제2공화국의 대통령.(1848〜1852년) 이어서 프랑스의 황제(나폴레옹 3세)가 되었으나 보불 전쟁에 패하여 1870년 제위에서 물러났다.
 27* 글래드스턴의 동생 영국의 정치가이자 수상이었던 윌리엄 글래드스턴의 동생 로버트 글래드스턴(Robert Gladstone, 1811〜1872년)을 가리킨다. 상인이었으며 부르주아 박애주의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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